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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상환 종원의 3차 답사기
대종회는 2012년과 2015년에 이어 2018년 9월 11일부터 15일까지 4박 5일간 세 번째로 18명이 중국을 찾았다. 첫날(18일)은 개봉시 북송(北宋)의 유적을 관람했다. 둘째 날(19일)은 양혜왕의 묘소를 찾았다. 도로변의 안내비는 정주시인민정부가 2009년 6월 3일 「문화보호단위」로 공포했다. 묘비 앞에서는 중국의 의식으로 예식을 올리는 한편 성지화 계획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다시 버스로 2시간을 달려 신밀시 성관진노성서가촌(城關鎭老城西街村)의 태시조 위필만공의 석상을 찾았다. 한백옥좌상은 그 동안 여러 이유로 답사하지 못했던 곳이다. 오찬에 앞서 위걸(魏杰) 회장과 위회섭(魏懷習) 전회장은 “한국 종씨를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와 위자형 회장의 답사, 위두량 사무국장의 종씨 소개, 위광신(魏廣信) 비서장의 중국 종친 소개 등의 순서로 진행했다.
양측은 선물도 교환했다. 중국측은 위씨 관련 서적, 로고, 필만고량주를 전달했다. 대종회도 1999년도 장흥위씨대동보 한 질과 보정위씨요람, 종보, 소식지 그리고 화장품세트를 선물로 증정했다. 셋째 날부터는 태항산의 정상과 절벽, 구련산, 넷째 날은 동양의 그랜드캐넌이라는 대협곡을 구경하고, 정주의 64층 옥수수호텔 호수에서 선유로 마무리했다. 다음은 여행의 이모저모다.
양나라의 자취는 地下에 묻혀
개봉시는 양(梁)나라와 북송의 수도였다. 양나라는 전국7웅인 위나라 3대 혜왕 앵(罃)을 말한다. 혜왕은 즉위 후 진(秦)과 제(齊)로부터 시달림을 받자 BC 394년에 대량(大梁)으로 천도했다. 양나라는 개봉에서 5대째 왕국을 유지해오다 BC 225년 진나라 장수 왕분(王賁)이 황하를 이용한 수공(水攻)에 의해 수몰로 지상에서 사라졌다. 이후에도 전후 7번 수해를 입었다 한다.
현재의 도시는 북송(北宋)과 그 이후의 모습이다. 북송시대의 왕궁이 어딘지 모르나 충렬공(1038~1107)께서 1087년과 1090년 두 번이나 다녀간 곳이라서 감회가 깊었다. 또한 판관 포청천(包靑天)을 기리는 포공사(包公祠)에도 위씨 선조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즉, 비석에는 송나라 때 개봉시장을 역임한 위씨 3명의 휘자가 새겨있었다. 앞서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도 구경했다.
맹자와 토론한 양혜왕릉 참배
방문 이틀째를 맞아 선조의 체취가 어린 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아침 8시 30분 양혜왕 유적지가 있는 정주시 중모현(中牟縣)으로 향했다. 낮 기온은 25도로 쾌청했다. 2시간 남짓을 달려 묘소인근에 도착했다. 도로변에 비석이 보였다. 확인해보니 정주시인민정부가 2009년 6월 3일 보호문화재로 고시했다. 종친들은 들판 건너를 가르치며 저곳이 양혜왕의 묘소라고 안내했다.
양혜왕이 유명한 이유는 사서(四書)의 하나인 「맹자(孟子)」에서 비롯된다. 맹자는 왕도(王道)를 계도할 목적으로 40세에 71세의 양혜왕을 찾았다. 두 사람의 대화 가운데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 유명한 대목은 “50보, 100보론”도 있다. 그 주인공의 무덤을 사후 2337년 만에 한국의 후손들이 찾아간 것이다. 어찌 감회가 깊지 않겠는가. 기타는 양혜왕 상하편에 자세하니 일독해 보시기를…
일행은 묘비 앞에서 간단히 참배예식을 올렸다. 정주종친들이 준비한 예식절차에 따라 분향, 폭죽향연, 삼배 등의 예절을 드렸다. 이어 위회습 전회장과 위걸 회장으로부터 30만평의 위징(魏徵)공원보다 넓게 성지화할 계획임을 밝혔다. 일행은 50m 떨어진 근처의 우거진 숲속의 묘소를 둘러봤다. 정주종친들은 성지 조성을 위해 가능한 모든 역량을 경주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했다.
양혜왕릉에서 일어났던 異蹟
정주종친들은 수년 전에 양혜왕릉에서 일어났던 이적을 잊지 못한다. 이적은 2017년 12월 9일(음력 10월 22일)의 일이다. 당일 정주종친들이 「양혜왕제배대전」을 위해 묘전에 모였다. 그런데 이날 오후 3시쯤 수 천 마리의 까마귀 떼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것도 한 차례가 아니라 세 번씩이나 계속했다는 것이다. 종인들은 이날의 현상을 불가사의한 이적으로 여기고 있다.
왜 까마귀 떼가 나타났을까. 그 원인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날은 중국 전역에서 위씨 종친들이 모인 자리였기 때문에 의미가 다르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으나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공교롭게도 묘지 위를 날았다는 것은 이변이 아닐 수 없다. 종친들은 새들의 군무를 카메라에 담아 놓았다. 혹시라도 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생생한 기록을 채집한 것이다.
화기 넘친 한‧중종친의 오찬
양혜왕묘를 돌아보고 다시 정개생태미식촌(鄭開生態美食村)이란 이름의 음식점에 도착했다. 1층은 식물원을 겸한 대형식당이다. 정주종친회는 교실 1칸 크기의 별실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오찬에 앞서 환영의식을 열었다. 중국측에서 위걸회장과 위회습 전 회장의 “한국 종친들을 만나서 반갑다”라는 환영사와 한국측 위자형 대종회장의 “환영해줘서 고맙다”는 답사가 있었다.
이어 준비해온 선물을 교환했다. 중국측은 하남성성씨문화연구회와 위성위원회가 발행한 「하남위씨」, 「하남위씨문화유적」, 심벌마크인 「위씨족휘(族徽)」 등 관련 서적 그리고 태시조공 휘자를 붙인 「필만고량주」를 답사단 전원에게 전달했다. 한국측에서는 「장흥위씨족보」 한질과 「보정위씨요람」, 최근 발간 「종보」 및 「위씨소식지」 등 출판물과 한국화장품 선물세트를 전달했다.
또 참석자 전원의 소개 시간도 가졌다. 이런저런 절차를 마치고 필만고량주로 건배하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정을 느끼면서 다정한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한편 여흥시간에는 한국측의 위경애(魏敬愛, 서예가) 종친이 자청해서 '아리랑목동'을 멋들어지게 불러 오찬장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오찬을 마치고 1층 식물원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다음 행선지 신밀로 향했다.
신밀시 태시조 한백옥상 탐방
일행은 태시조 위필만 한백옥상을 보려 버스에 올랐다. 정주종친회 신‧구회장의 안내에도 불구하고 찾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더구나 태시조상은 이전 2차 답사단도 여러 사정으로 방문이 좌절된 바 있다. 올해는 송담 회장의 주도면밀한 사전교섭으로 관련당국의 허가를 받아 이뤄졌다고 한다. 약 1시간 30분쯤을 달려 위필만공 한백옥상이 있는 신밀시 사당에 도착했다.
정확히 신밀시 동대가(東大街) 22호. 구체적으로 신밀시 성관진(城關鎭) 노성서가촌(老城西街村) 서가로북(西街路北)이란다. 3층 사당건물은 낡았는데 「위씨가침(家寢)」이란 현액이 붙여있었다. 가족묘지란 뜻으로 보인다. 안내한 종씨는 오래 전에 묘지였다고 설명했다. 현관을 거쳐 태시조 좌상 앞에서 간단한 참배의식으로 가졌다. 그 자리에서 송담 대종회장은 금일봉을 전달했다.
이곳에 태시조상이 세워진 내력이 궁금했다. 그러나 자세한 사연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마침 「위씨 세계종친회」가 2014년 11월 28일 이곳을 방문한 불로그에서 그 역사를 다음처럼 알렸다. “이곳 종씨들은 명나라 洪武연간(1370~1398) 위대공(魏大公)이 진양(晉陽)에서 정주 포전(莆田) 마가도(馬家渡)→중모현 사가장(謝家莊)→밀읍(密邑) 양산와점(暘山瓦店)에 정착했다”라고 한다.
또한 정주 위수암(魏秀岩)종인이 저술한 「하남위씨문화유적」 62면도 참조해 보자. 여기서 신밀 위씨는 명대부터 명문으로 평가 받았다고 한다. 가침은 1884년에, 문루는 1858년에 건설됐다고 전했다. 한백옥(韓白玉)이란 흰대리석을 이르는데, 조상 중 한분이 태시조를 숭앙하기 위해 좌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라서 신밀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관람이 가능하다.
태항산 관광, 공사로 혼란 초래
3일부터는 관광이다. 정주에서 오전 8시부터 나섰다. 목적지는 요즘 한국 TV에서 한창 뜨는 태항산맥 천계산(天界山)과 그 기슭의 구련산(九蓮山)이다. 중간에 그 유명한 황하를 건넜다. 가로지른 다리의 길이가 무려 15㎞에 이른다. 황하는 4대 문명발상지로 서장(西藏)동쪽에서 발원, 청해〮·감숙·영하회족자치구·내몽고·협서·산서·하남·산동성 등 5464㎞를 흘러 발해로 빠져나간다.
멀리서 봐도 기암절벽의 산세가 저절로 황홀하게 한다. 천계산은 너무 아름다워 '하늘이 만들고 인간이 찾아낸 산'이라 한다. 별명인 백리화랑(百里畫廊)이 전혀 무색하지 않다. 그래서 일까. 해발 1572m의 노절정(老節頂) 또는 북절정(北節頂)은 노자(老子)가 道를 깨달은 곳이라고 해서 더욱 유명세가 붙어 있다. 그래서 명나라는 1542년에 그곳에 현무묘(玄武廟)를 세웠다고 한다.
일행의 관광은 10시 15분부터 시작됐다. 7개 전망대 중 하나인 바위터널 등을 전동차로 가 중간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동차의 사정으로 동승할 수 없어 나눠 탔기 때문에 탈이 났다. 뒷팀은 전동차로 오르다 갑작스레 도로공사가 벌어지면서 운행을 중단시킨 것이다. 느닷없이 내려서 약속지점을 걸어오느라 6,000여보를 걸었다. 그 사이에 2명이 앞서가다가 일행과 벌어지고 말았다.
핸드폰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 갔다는 전언에 따라 정상에 가면 만나려니 예측했다. 16명은 케이블카를 탔다. 정상에 이르니 2명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경치는 황홀하고 경이로웠다. 그 사이 낙오된 일행은 혹시 본진이 잔도쪽으로 갔지 않았을까 짐작하고 그쪽으로 갔다. 본진과 해후한 것은 점심을 먹을 다드림 식당에서였다. 조금은 어색했지만 허허 웃었다.
점심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는 최근 계통된 유리잔도 관광. 88m 절벽에 만들어진 잔도는 간을 오그라들게 했다. 더구나 300m의 유리잔도는 여간한 담력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는 코스였지만 모두 무사히 통과했다. 원점으로 되돌아와 전동차 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아스팔트포장 공사로 전동차 운행을 중단시켜 걸어야 했다. 내리막길을 28,000보나 걸어 장딴지가 아팠다.
왕망령은 못가고 구련산 구경
원래는 잔도관광에 이어 태행산 왕망령(王莽嶺)을 둘러볼 차례였다. 왕망은 진(秦)나라 때 이복동생의 고모가 왕비에 오르자 권력을 잡았다. 여세로 신(新)나라를 세웠다. 왕망령은 왕망이 유수(劉秀)를 산서성 진성(晉城) 능천현(陵川縣) 40㎞ 지점 쫓았던 가장 험준한 고개를 이른다. 사람들은 태항산에 와서 왕망령을 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평할 정도로 산세가 기절할 정도란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하다니 어찌하랴. 구련산을 보러 4시 10분에 나섰다. 천계산 입구에서 약 15분 거리에 있는데 가보니 매우 아름다웠다. 9개의 산봉우리가 연꽃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유래됐다. 천호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또한 보통은 아니다. 마치 깎아지른 절벽을 마주하고 있어 잔도의 밑바닥에 있는 듯하다.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했다.
가이드는 서련사가 유명하다고 알려줬다. 우회도로로 걸어가려면 너무 멀어 시간이 부족했다. 65층 높이의 고속엘리베이터를 타고 갔다. 절은 순수한 불교사찰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대지를 점지해놓았다는 한글 안내문이 입구 벽에 붙어있기도 했다. 서련사를 답사하고는 전동차를 타고 구련산 입구에 이르니 어느덧 오후 5시 40분 가까이 됐다. 서둘러 임주(林州)로 향했다.
중국 그랜드캐넌, 대협곡의 이변
임주시 한식당에서 삼겹살로 저녁을 때우고 클라우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4일째인 14일은 행선지는 그랜드캐넌이라는 태항산맥 동쪽 해발 800~1739m 고도의 대협곡이다. 연변조선족출신 김모씨가 개발해 안내판이 한글이다.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아 투자비를 회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임대기간이 2년 앞으로 다가왔다. 기간연장을 추진하고 있으나 분위기가 부정적이라고 한다.
아침부터 보슬비가 간헐적으로 내렸다. 공원주차장에 이르니 우비를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비가 내렸다. 일행 중 11명은 전동차, 나머지 7명은 걸어서 올라 만나기로 했다. 대협곡 도화곡과 환상선의 경치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자아내게 했다. 안개가 점점 짙어갔다. 10m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 올라도 대협곡의 모습을 보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상이 가까워오자 대이변이 일어났다. 삽시간에 조금 전까지도 온 산을 뒤덮은 안개가 가신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인가. 일부 종친들은 조상님의 가호라며 손뼉을 쳤다. 환상적이라는 말은 이런 때의 표현인가. 여기저기서 연신 감탄사가 터졌다. 그래도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은나라 때 노예 신분으로 재상에 오른 부열(傅說)의 왕상암을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최근의 여름장마로 도로가 무너져 복구공사를 하기 때문이라 한다. 일행은 이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을 약 4시간의 관광을 마쳤다. 점심은 임주시의 한양식당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식사 후 관심 있는 종친들은 임주시내에서 짝퉁제품의 거래처를 안내 받아 쇼핑하기도 했다. 정주시에 도착해 64층의 옥수수호텔의 호수에서 잠깐 선유(船遊)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좌담회
일행은 국제호텔에 짐을 풀고 식당별실로 모였다. 이 자리에는 지난 12일에 참석하였던 위걸 회장과 위회습 전회장 등 정주종친들이 인사차 방문했다. 특히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위수암 종친도 늦게 참석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한권을 송담 회장에게 전달했다. 내용은 우리로 치면 「천년세고선집」과 비슷하다. 그러나 역대 한시를 집대성한 책이라 분량이 아주 방대했다.
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유적과 한〮〮‧중 종친교류에 따른 성과와 반성 그리고 개선책을 토로하는 방담시간을 가졌다. 소감을 듣고 소식지와 2019년에 발행할 「종보」에 들어갈 원고의 방향과 집필자 등을 지명하기도 했다. 15일은 일찍 체크아웃 후 8시쯤 국제공항으로 출발, 2시 20분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절차 후 회장의 인사말을 듣는 것을 끝으로 일행은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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