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겨울 낮 설악 울산바위를 오르다
1. 일자: 2013. 12. 21
(토)
2.
장소: 설악산
울산바위(873m)
3.
행로 및 시간
[설악동(12:15) -> 신흥사(12:30) -> 울산바위 휴게소(13:05) -> 흔들바위(13:12) -> 전망대(13:27) -> (계단) -> 울산바위 전망대() -> 울산바위(14:00) -> 설악동() -> 흔들바위(14:39) -> 신흥사(15:18) -> 설악동(15:31)]
[출처] 26. 버리미기재-늘재|작성자 파하
<
겨울 설악산 산행을 준비하며 >
“지리가 곱게 늙은 인자한 어머니라면, 설악은 콧대 높은 젊은
애인이다. 지리를 떠올리면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돌지만 설악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뛴다.” 지리와 설악은 분명 대비되는 산이다. 설악은 지리보다 남성적인
풍모와 거친 길을 품은 곳이다. 그곳에 간다. 겨울 설악
나들이는 처음이다.
산행 경험이
많아질수록 대간 걷기가 중반전에 들어서며 평소 엄두가 나지 않던 일들을 쉽게 꾸미게 된다. 금요무박
산행을 신청했다. 오색에서 출발 대청봉 찍고 천불동으로 내려 올 계획이다. (계획이 변경되었다. 14일 눈 쌓인 대간 12구간을 걷으며 겨울 산의 위력을 실감한 바, 무박 산행은 포기하고
시외버스 타고 가서 울산 바위에나 올랐다 콘도에서 하루 밤 자는 것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그리고 산행
다음날 산악회 사이트에서 보니 눈 예보로 오색도 출입금지였단다.)
< 희망사항 >
2008년 5월초 대식 강형과 함께 울산바위를 올랐다. 당시 정선에서 영어 수업을 하던 대식이를 찾아 하룻밤 자고 계방산에 올랐다가 속초로 이동해 성우 집에 들릴
계획이었으나, 산방기간에 걸려 계방산은 포기하고 설악산엘 갔다. 당시에는
산행 정보가 없어 울산바위 길을 산책 삼아 나섰는데 막상 걸어 보니 만만한 코스가 아니었다. 상당한
고도감을 느끼게 하는 철제다리에서의 후들거림과 정상에서의 바라보는 바위 풍경이 지금도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사이 해도 계절도 바뀌었고 새 길도 났다 하니 울산바위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야겠다.
겨울에도 산에는 꽃이 핀다. 이름하여 설화, 빙화, 상고대(서리꽃)다. 코발트 빛 하늘에 흰 눈이 내린 세상은 그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이요, 신선세계다. 요 며칠 눈이 많이 왔다. 비록 겨울 대청봉의 꿈은 포기했지만 울산바위를
오르며 눈 풍경에 푹 파묻혀 보고 싶다.
< 설악동 가는 길에 >
조바심은
내 성격의 장애다. 기상부터 버스를 타지 못할까 조리던 마음은 속초행 버스에 몸을 싣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처음 하는 행위에 대한 불확실성 주된 이유겠지만 천성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어차피 산을 다녀 와 남는 시간을 주체 못 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서두르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버스가 화양강 휴게소를 지난다. 성우와 통화를 했다. 영업 준비를 위해 8시부터 일하고 있다 한다. 어제도 늦게 귀가했을텐데... 열심히 사는 모습이 느껴져 안쓰러웠다.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설악동으로 들어 가는 게 낫겠다. 녹사평에서 택시로 설악동으로
들어가 산행 후 남는 시간을 홀로 콘도에서 보낼 이유가 없다. 시내버스 투어 도중에 펼쳐질 속초의 구석구석을
눈에 담아 두자. 산행회를 따라 다니면서는 이런 여유는 좀처럼 찾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대포항을 지난다. 바다다. 파도의 포말이 연이어 육지로 향한다. 설악동으로 향하는 도로, 눈을 인 설악의 연봉들이 눈에 들어온다. 설악동까지의 여정은 그리 멀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 설악동에서 울산바위 >
설악동, 인파에 섞여 길을 나선다. 중국말이 여러 곳에서 들려온다. 매표소를 지나며 권금성 왼편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인상적이다. 완벽한
삼각형에나 눈을 인 형세가 도발적이다. 거대한 청동불은 더욱
세월의 옷을 입어 멋져 간다. 다만 이마의 보석은 여전히 촌스럽다. 옥의
티다. 신흥사 옆을 지난다. 무슨 유물이 있는지 몰라도 3500원이나 받아 먹는 유물관람비가 아까워서라도 하산 길에 꼭 들려보리라.
배는 고팠으나 길가 음식점의 면면을 살피다 준비한
행동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비선대 갈림을 지나며 본격 산길로 접어든다. 날씨가 푸근해서인지 눈의 흔적이 많이 지워졌다. 도로를 걸으니 일찍
찬 클램폰이 부담스럽다. 물이 마른 계곡을 따라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어차피 흔들바위까지는 비산비야의 길이 이어질 것이다.
< 멋진 돌탑 / 울산바위 전경 1 >
햇살이 따갑게 느껴질 만큼 맑은 날씨이나 웬일인지
먼 하늘은 뿌옇게 먼지가 끼어있다. 서울에 미세먼지 주의보가 발령되었다 하더니 그 여파가 먼 이곳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쉽다. 전망대에서 올려다
보는 대청봉과 서북능의 전망이
흐릿하다.
설악동 출발 50분만에
조계암에 도착했다. 석굴 옆으로 높다란 석축이 신설되어 있다. 흔들바위
앞에서 포즈를 취해본다. 흔들바위의 위용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어린
시절 각인된 이미지와 일치되지 않는다.
< 흔들바위 앞에서 / 울산바위 전경 2 >
조계암에서 울산바위까지 새 길이 만들어졌다 하여
유심히 옛 길의 흔적을 살펴보나 쉽지 않다. 계단이 시작된다. 예전
철계단이 아니라 고무판이 깔린 나무계단이다. 새 것의 흔적이 느껴진다.
다만 고도로 보아 아직 본격 울산바위 길은 한참 더 가야 한다. 우측으로 울산의 바위군이
연한 노란빛을 띄며 우람하게 손짓하고 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거대한 암릉의 장관을 목도한다. 파란 하늘과 흰빛 바위가 만들어 내는 풍경에 취해 고도를 높여간다.
< 울산바위 전경 3 / 울산바위 전경 4 >
긴 계단의 행렬이 시작된다. 분명 예전 것과 다르다. 우선 넓다. 그리고 더 길다. 그러나 허공에 만든 인공 구조물 위에 서는 행위는
예전만큼 두렵다. 새 길에서도 울산바위가 주는 고도감은
변하지 않는다. 공포감을 이기려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잘
생긴 소나무들이 난간에 서서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 울산바위 정상에서 / 정상에서 본
속초 >
길이 나뉜다. 예전
정상인 듯 한 곳 우측으로 길이 나 있다. 그리로 향한다. 고목
사이로 국기가 걸려 있다. 예전 그 모습 그대로다. 이전에도
이곳은 존재했었나 보다. 암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내려다
보는 눈에 미시령 부근 콘도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멀리 바다의 흔적도 느껴진다. 이곳에 오길 참 잘 했다. 속초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된다 하더니 속초가
내게는 새로운 존재로 다가온다.
< 울산바위 전경 5 / 조계암에서 본 울산바위 >
< 울산바위에서 설악동 >
하산
길, 커다란 카메라를 멘 이들이 많이 목격된다. 오를 땐
힘겹던 길을 순 십간에 내려왔다. 길가에 눈도 거의 다 녹아간다. 시간은
예상보다 빠르게 흘러간다. 설산 풍경을 기대하고 바위에 올랐건만 바위의 진면모만 확인하고 하산하게 된다.
< 설악도에서
본 풍경 >
다시 흔들바위를 지나고 포도를 따라 걷다 신흥사
경내로 들어간다. 표주박으로 떠 먹는 물 한 바가지로 빈 속을 채운다.
절 집은 오밀조밀 건물은 많지만 뭐 하나 특징지을 만한 것이 없다. 입장료는 시주라 생각해야겠다. 설악동으로 내려오며 트랭글을 끈다. 3시간 26분, 8.08km, 최저고도
79m, 최고고도 797m. 고도는 오차가 큰 듯하다. 좋은
날 좋은 곳을 잘 보고 왔다.
< 에필로그 >
홀로
든 텅 빈 콘도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 스르르 든 잠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어둠이 찾아 든 창 밖을 본다. 설악을 등지고 서 있는 이웃 콘도의
은은한 불 빛이 이국적이다. 이제 성우네 가게로 가야겠다. 소주
한 잔에 ‘유붕이 자원방래’한 기쁨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내일은 설악의 연봉들이 정원이 되어 준 풍경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