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한국영화, 장르:다큐멘터리, 개봉:2017.04.26
감독:홍주연, 각본:한지원, 제작:CGNTV
주연:윤안나,안은새, 관객:115,276명(2017.06.30.현재)
“서서평”(徐舒平,1880~1934년)
“아픔과 고통을 가진 한 인간(서서평)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고 아픔을 승화시키는 과정을 생생하게 전하고자 했다”(CGNTV제작진)
“조선의 여성들은 남편의 노예입니다. 이 세상에서 조선의 여성보다 인내심 많고 할 일 많은 여성들은 없습니다”(서서평)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조선의 땅은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통치를 하고 있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조선땅에 “작은 예수”라고 불리는 파란눈의 여자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한나 쉐핑”이었다 1912년 3월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조선에 파견된 쉐핑은 광주 선교부 제중원에서 그 첫 사역을 시작한다
일제식민지 시대 조선인은 사람의 수에 포함되지 않을 정도로 인권이 열악하였다 여자는 물론 한센병을 앓고 있거나 질병에 고통받는 환자들이라면 그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이러한 세상의 중심에 자처하여 조선에 온 쉐핑의 삶도 고단하리 만큼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그녀의 가슴에는 그리스도가 있었다
서서평(徐舒平,1880~1934년)은 독일 태생의 선교사로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또는 Johanna Elisabeth Schepping)이다 즉, 서서평의 이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큰 기쁨을 얻고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신앙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1880년 9월26일 독일 헤센주의 수도 비스바덴(Wiesbaden) 프랑켄 거리(Frankenstrase) 정원막사(Gartenhause)에서 출생한 서서평은 어머니 “안나 쉐핑”(Anna Schepping)께서 미국 뉴욕으로 이민간 후로 조부모에게 맡겨지게 된다 그러나 9세 되던해에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화버”(Elisabeth Faber)를 여의고 방황하던 중 주소지 한 장을 들고 돌연 미국으로 떠난다 어머니를 찾아 떠난 서서평은 “카톨릭 미션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이어 “성 마가병원 부설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다
그후 “뉴욕시립병원”에서 실습을 하던 중 동료 간호사의 전도로 뉴욕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카톨릭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된다 간호전문학교 재학시절 서서평은 유대인 요양소와 이탈리아 이민자수용소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고 졸업후에는 “브루클리 주이시병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 외에 아무도 모르는 미국땅에서 카톨릭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서서평은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세 살때와 10대에 이어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은 서서평이었지만 그녀는 하나님이 친구로 주신 “바람과 햇살과 숲”과 함께 성장해 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1904년 “뉴욕성서교사훈련학교”(Bible Teacher Training School)의 여행사를 후원하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봉사하며, 1911년에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시기에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에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한채 방치되어 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 들은 서서평은 한국선교를 결심하였다 이듬해인 1912년 2월20일, 32세의 젊은 여청년 서서평은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지원하여 간호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S.S.Korea호”를 타고 20일만에 조선에 도착한 서서평은 “광주선교부 제중원”(우월순 원장)의 간호사로서 병원과 함께 주일학교 전도사로서 섬기기 시작하였다
서서평은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색 통치마를 입었다 검정색 남자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조선의 음식인 된장국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서서평은 온전한 조신인으로 새롭게 태어나고자 평생을 노력하고 헌신하였다 그녀는 독신을 고집했지만 “박해라, 문안식, 문천식”을 입양하여 그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서서평은 한국인으로서 미국귀향을 포기하였다 그로부터 1934년 향년 54세로 소천하기 까지 서서평은 무려 22년 일제강점기 동안 의료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광주빈민촌을 중심으로 제주도와 추자도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미혼모와 고아와 한센인과 노숙인과 가난하고 병들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서서평은 친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나환자의 어머니”로 불렀다 급여 대부분을 빈민구제와 여성들을 위해 사용하며 입양아로 키운 고아만 14명이었고, 함께 한 집에서 살게 된 과부들도 38명에 이르렀다
광주 양림동에는 여성의 자립시설인 양잠업을 세우고 이를 위해 미국선교본부에 기금을 요청하였다 제주여성자립시설 설립을 위해 고사리 채취를 하였고 임종을 맞이했을때에는 의학용으로 시신을 기증하며 복음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이일학교”(전주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학업을 할수 없는 학생들을 지도하였고, 이 학교 265명의 학생들이 서서평의 장례에 운구행렬을 이루며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루어 졌다 그녀의 장례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소복을 입고 줄을 이었고 광주시민들이 울부짖으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미국 장로교에서는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을 선정하고 이 가운데 조선에 파견한 서서평을 결정하였다 서서평은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인 “조선간호부회”를 설립하였고 “여전도회연합회”를 창설하였다 또한 그녀가 설립한 “이일학교”는 조선 최초의 여성신학교로서 “한일장신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더 나아가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호남지역에 4,000그루의 뽕나무를 심어 양잠사업을 구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