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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토론의 역사
제1절 Greece와 Rome
Ⅰ. Greece
1. 민회(民會)와 공공법정토론(公共法廷討論)
가. 민회(民會, ecclessia)
민회(民會)란 시민의회의 준말로 직접민주제에서의 시민집회를 말하며 과거 고대 그리스·로마·게르만·슬라브 사회에 존재했다. 시민회의를 아테네에서는 ecclesia, 스파르타에서는 apella, 델포이에서는 agora, 로마에서는 comitia, 게르만에서는 konsillium라고 하였다. BC 570~BC 338년까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였는데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국방, 외교, 조세행정, 재정정책 등 중요한 정치적 사안은 민회(ecclesia)에서 토론을 통해 단순과반수 다수결 거수 표결(擧手表決)로 의사결정(의사결정, decision-making)하였다. 민회는 Homeros 시대의 agora에서 유래했으며 Dracon 시대에 활동하고 있었고 BC 594년경 Solon 법 제정으로 18세 이상 남자 시민(자유민)의 최종적인 의사결정기구였다.
나. 공공법정(公共法廷, dikasterion,dicastery) 토론
Ceisthenes 민주개혁때(BC 508~507년경) 생겨났고 heliaia(아테네법원, 시민법정)는 항소법원이 생기자 1심법원이 되었다. 매년 자유민 6000명이 discatai(심판인)으로 뽑혀 dicasterion이나 배심원에서 시민을 대표하여 discatai 500명(사법사건은 200명) 정도로 한 집단을 이루어 한해의 재판을 처리했다. 중요 사건이 있을 때에는 여러개의 dicasterion이 함께 일해 평결하고 유무죄 가부 동수이면 무죄판결을 내렸다. 법정토론은 소송의 규모와 중대성에 따라 달랐고 법정기소와 변호는 speech와 토론(변론)으로 이루어 졌다.
2. 토론연구
가. Aristotle
Aristotle은 정치・사회・법정토론의 주제를 정책(policy), 가치(values) 및 사실(facts)로 구분하여 각 주제에 따라 토론 기법 특성을 연구하였다.
정치토론(deliberative) | 정책과 가치에 대한 토론 | 현재 학술토론의 주류 |
사회토론(epideictic) | 정책과 가치에 대한 토론 | 현재 학술토론의 주류 |
법정토론(forensic) | 사실 유무에 대한 토론 | 모의법정토론 |
나. 토론학과 토론 학원
⑴ 토론과 토론 평가능력을 민주시민의 역할을 위한 기본적 소양
⑵ 토론 학원 성행
academy | Platon 운영 | Aristoteles 수학 |
lykeion | Isocrates 운영 | 토론의 교육적 관점 강조 |
⑶ 토론학의 비조(鼻祖)
Protagoras는 토론학의 비조(鼻祖)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그 만물은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 인식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모양 |
그 만물은 그런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이 있다. | 변증법(dialectic)의 기초가 되어 2000년후 Hegel에 의해 인류역사변천을 정반합(正反合)으로 설명하는 도구가 된다. |
다. 학자들
⑴ Socrates
토론의 교육적 관점 강조
⑵ Isocrates
토론의 교육적 관점 강조
⑶ Lysias, Antiphone
수수료를 받고 원조 대필
⑷ Aristotle
스승의 학문과 sophists들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서구 학문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Rhetoric에서 정치, 사회, 법정토론의 기법과 전략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Ⅱ. Rome
1. 공화정
가. comitia(집회소)
로마시민은 광장에 있는 집회소(forum)에서 토론을 하였다. forum은 정치적 견해와 공공토론을 하는 행위 및 집회장소(공공광장)로 포획선의 뱃부리를 forum에 장식한 연단을 rostra(rostrum의 복수)라고 했다.
The Forum in Ancient Rome was the marketplace where many Romans did business and met and discussed issues. The city of Rome had 5 fora (plural of forum: the Forum magum (nowadays it is called the Roman Forum) and four imperial fora: the Forum Of Caesar, the Forum of Augustus, the Forum of Nerva and the Forum of Trajan.
나. senate(원로원)
정책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토론은 의회와 forum에서 주로 이루어 졌으며 원로원과 민회는 치열한 토론장이었다.
다. 법정토론
로마는 그리스와는 달리 배심원이 아닌 전문 지식을 가진 법관이 판결하였으며 소송인인 원고와 피고는 직접 기소와 변호에서 변호인이나 검사를 통해 대리인이 토론을 담당하였다.
2. 전제정
토론은 elite의 소유물로 변질된다. Cicero는 “나와 함께 공화정은 끝났다”는 유언과 함께 살해되었다. Marcus Fabius Quintilianus는 수사학자로서 토론을 공교육에 편입시켰고 “덕망을 갖춘 훌륭한 화자”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저서로는 웅변교수론(Institutio oratoria)이 있다.
로마제국 시대에 토론은 시민교육의 기본과목으로 자리 잡으며 로마제국의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토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토론의 실용성을 강조하여 학문으로 심화시켰다. BC 63년 Lucius Sergius Catilina(BC 108~BC 62) 반란 음모에 대한 Marcus Tullius Cicero(BC 104~BC 43) 탄핵연설은 대통령탄핵 토론의 전형이다. Cicero는 토론 및 법정토론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그리스 토론학을 로마 공화정에 맞게 재구성하였다.
제2절 중세
Ⅰ. 토론 주제의 변경
정치적・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진실 규명 토론은 사라지고 성경해석(hermeneutics)과 전달 방법에 관한 토론이 발달하였다. 삼위일체(trinity), 성모마리아(God Mother, the (Blessed) Virgin Mary), 연옥교리(doctrine of purgatory) 등
Ⅱ. 악의 대변인(evil's advocate)과 신의 대변인(God's advocate)
교황청은 성인에비후보자나 추기경을 검증하는 과정을 철저히 하기 위해 신의 대변인 사무부서와 악의 대변인 사무부서를 설립하였다.
악의 대변인 사무부서는 해당 성인의 과거의 모든 전력을 조사하고 성인이 되지 않아야 할 이유만을 찾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의 대변인 사무부서는 성인후보자의 장점만 찾는다. 악의 대변인이 현대 토론에 영향을 미쳤다.
Ⅲ. plaza(광장)의 역할
공중들의 의사소통은 plaza에서 지속되었다.
Ⅳ. 대학
renaissance운동과 더불어 Bologna, Paris 대학이 설립되어 토론은 인문과 자연과학의 필수요양과목이 되었고 Oxford는 1~2년동안 필수과목이 되었다. Oxford는 1년 명제 또는 주제에 대한 찬반토론, 2년 심화과정, 4년 졸업생의 구두시험으로 되었다.
제3절 영미
Ⅰ. 영국
1. 하원의 설립과 토론
1265년 하원인 서민원(House of Commons)이 설립되었으며 하원의 업무중 하나가 토론이었다.
2. 대학간 토론대회 효시(嚆矢)
14세기에 Cambridge대학과 Oxford대학 학생들간의 대학간 토론대회가 처음 열렸다고 한다.
3. Francis Bacon(1909~1992)
영국의 학자, 정치가로서 영국의회의 민주정치의 기능을 강조하고 의회 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근대 영국 의회 토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4. 18세기 중엽민주주의 발전
다양한 형태의 토론 동아리가 생기면서 cafe에서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하면서 중산층이 정치적・사회적 도약의 발판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토론의 기술과 능력은 영국의원의 기본 소양이 되고 영국 의회의 토론은 근대 토론의 규범이 되었으며 의회식 토론(parliamentary debate)의 원류가 되었다.
5. 19세기 중엽 Edmund Burke
토론의 정치적・교육적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토론의 활성화를 권장했다.
Ⅱ. 미국
1. town hall meeting
미국 토론 문화의 근원은 town hall meeting에서 찾을 수 있다. town hall meeting은 공동체의 자유토론방식으로 시민 누구나 참가하여 자기 의사를 표명하고 투표로 결정하는 회의 방식을 말한다.
2. 미국의 독립과 토론
1776년 미국은 독립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채택하면서 토론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3. Lincoln-Douglas debate
1858년 Abraham Lincoln과 Stephen Douglas는 Illinois주 상원의원선거에서 Abraham Lincoln의 제의로 총 7회에 걸쳐 노예제도의 찬반에 관한 토론을 하였는데 Abraham Lincoln은 당시 상원의원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유명세를 타고 2년후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Lincoln-Douglas debate이다. 이 토론은 1대1 토론으로 주로 가치토론을 논제로 한다.
4. 대통령후보간 토론대회
1960년 John F. Kennedy와 Richard Nixon간 TV를 통해 전국적으로 방송되었다.
5. 학술 및 대학 토론
가. 1826년 lyceum 운동
Massachusetts주에서 일어나 지식인, 정치인, 법조인 등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모여 연구동아리을 만들고 speech와 토론을 통해 다양한 주제로 의논하였다.
나. 1947년 대학생 토론대회(NDT, National Debate Tournament)
1920년대 처음으로 대학간 토론대회가 열렸고 1947년 미국토론학회(American Forensics Association, AFA)가 주관하는 전국대학생토론대회(NDT, National Debate Tournament)가 미국 육군사관학교 West Point에서 열린후 토론문화가 대학에 확산되었다.
다. 1971년 CEDA
Cross Examination Debate Association(교차조사토론협회)이 토론을 개최하였다.
라. 1985년 ADA
1985년 American Debate Association(ADA) 발족하였다.
마. 2002년 public forum debate
제4절 동아시아
Ⅰ. 중국
1. 경연(經筵)
BC 1세기경 한나라에서 국정을 논하던 경연(經筵)에서 비롯되었다. 경연(經筵)은 經幄(경악)이라고도 했는데 경연(經筵)은 왕이 학문이 높은 신하들과 유교경전이나 역사책을 읽으면서 정책을 토론하는 제도였다.
2. 제자백가
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제자백가(諸子百家, Hundred Schools of Thought) 또는 현상적 표현인 백가쟁명(百家爭鳴, 영어: Contention of a Hundred Schools of Thought)은 중국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의 여러 사상가들과 그 학파들을 말한다.
나. 출현배경
제후들이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인재를 등용하면서 다양한 사상가와 학파가 출현하였다
다. 능력위주
춘추전국시대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雰圍氣)가 조성된 시대였다.
라. 구류십가(九流十家)+병가(兵家)
백가 | 내용 | 학자 |
유가(儒家) | 효제(孝悌)・인의(仁義)・예(禮))를 중심으로 한 도덕정치 | 공구(孔丘), 맹가(孟軻), 순황(荀況) |
도가(道家) | 정신적 자유와 자연과의 조화(無爲自然), 인위의 배격 | 노자(李耳, 李耼), 열어구(列御寇), 장주(莊周) |
음양가(陰陽家) | 음양이원(陰陽二元)과 5행(五行)을 조합하여 신비적인 종교철학을 주창 | 추연(鄒衍), 추석(鄒奭) |
법가(法家) | 군주의 권위를 존중하는 강력한 법치 주장하는 정치철학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어 천하통일을 도모 | 관이오(管夷吾), 이리(李悝), 오기(吳起), 상앙(商鞅),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 이사(李斯) |
명가(名家) | 논리학파이며 명(名)과 실(實), 즉 개념과 대상의 불일치를 교정하려는 데 목적 | 등석(鄧析), 혜시(惠施), 공손룡(公孫龍), 윤문(尹文), 별묵(別墨) |
묵가(墨家) | 차별 없는 사랑(兼愛) 강조, 평화 주장, 능력 중시, 존비친소(尊卑親疎)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를 주장한 유가의 형식주의와 계급제도를 타파, 사리사욕 타파, 절검(節儉)과 근로(勤勞) | 묵적(墨翟), 별묵(別墨) |
종횡가(縱橫家) | 열국(列國)을 돌아다니며 독특한 변설로 책략을 도모하는 사람들로 열국의 연합체를 조직시켜 그 힘의 균형을 이용해서 권력을 쟁취하려는 사상가 | 귀곡자(鬼谷子), 소진(蘇秦) : 합종책, 장의(張儀) : 연형책 |
잡가(雜家) | 자신만의 창의적 사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제자백가의 주장과 이론을 절충(雜)하고 해설하여 집대성(雜) | 여불위(呂不韋), 유안(劉安) |
농가(農家) | 농업생산 기술과 사회사상, 특권층의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를 주장 | 허행(許行) |
소설가(小說家) | 고사(故事, 세상의 사건, 설화 등)를 이야기로 전하고 서적남기는 학파 | 육자(鬻子, 초나라 대부), 청사(靑史) |
병가(兵家) | 강병책(强兵策), 병술(兵術)을 논하던 학파 | 손무(孫武), 오기(吳起), 손빈(孫臏), 범려(范蠡) |
영향 | 중국 학문과 사상의 뼈대 형성, 정치와 문화에 영향 |
도가 : 황로학(黃老學) 또는 노장학(老莊學)
3. 2002년 중국 중앙방송국(CCTV) 전국대학생토론대회
전국 대학생 토론대회 생중계
4. 2012년 국제토론교육협회(International Debate Education Association) 베이징(北京) 사무소
토론 교육 박차
Ⅱ. 일본
1.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
게이오 대학(1858년 慶應義塾)의 설립자 겸 근대 일본의 정신적 지주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의사표현 능력 함양을 근대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서수문명의 원동력을 토론과 speech 문화로 파악하고 이를 전파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2. 군국주의
1887년 모든 정치적 speech 및 토론 club 폐쇄하였다.
3. 1945년 후
1950년대부터 토론 교육이 다시 할상화되고 1960년부터 대학생토론대회 수상자들은 유럽과 미국대학생들과 토론순방을 한다.
Ⅲ. 우리나라
1. 부여(扶餘)의 제가회의
부여(扶餘)에서 초기에는 왕 아래 있는 馬加(마가), 牛加(우가), 狗加(구가), 豬加(저가)의 제가회의(諸加會議)에서 국가중요정책을 논의하고 왕을 추대하기도 하고 오곡이 익지 않으면 왕에게 책임을 묻기도 했으나 후기에는 왕권이 세습되어 전제왕권이 강화되었다.
2. 삼국시대
가. 고구려
일찌기 고구려는 5부족(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 연노부),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절노부(絶奴部)) 연맹때부터 제가회의(諸加會議)를 열어 국가 중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고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나. 백제
정사암(政事巖)은 백제 때, 정치를 논의하고 재상을 뽑던 곳으로 사비(泗沘:지금의 부여) 부근의 호암사(虎巖寺)에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국가의 재상인 좌평을 뽑을 때 후보 3, 4명의 이름을 이 정사암 위에 봉함해두었다가 뒤에 이를 열어 확인했다고 한다.
다. 신라
화백(和白)은 신라 때에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하던 귀족 회의 제도이며, 의결 방법은 만장일치제였다. 우리나라 사서에는 기록이 없고 신당서(新唐書) 동이전 신라조, 수서(隋書) 신라전, 당서(唐書) 신라전에 화백 회의는 중대 사건이 있어야 개최되고 회의의 참석자는 보통 인민이 아닌 백관이라는 것, 또 여기서 한 사람의 반대라도 있으면 회의의 결정은 내리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백의 이 만장일치 제도는 단 한 번의 예외를 남겼는데 경순왕의 고려에 대한 항복 결정이었다.또한 화백은 귀족의 단결을 굳게 하고 국왕과 귀족 간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일례로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라는 이유로 화백에서 25대 진지왕(576~579)을 폐위하였다. 이 화백 회의와 신라 고유의 신앙과 결부된 경주 주위의 4영산인 청송산(東), 모지산(南), 피전(西), 금강산(北)과의 관련설이 있으나 자세하지 않다. 화백의 원칙은 귀족뿐 아니라 신라 전 사회에 널리 행하였고, 각계각층의 독재력의 발생을 억제하여 신라 국가의 완전성을 증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학자에 따라 남당(南堂) 회의로 보기도 한다.
3. 고려시대
고려 왕조실록에 토론내용이 담겨져 있다. 몽골 침입에 대한 화의 여부 및 범죄 유무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4. 조선시대
가. 경연(經筵), 소대(召對), 야대(夜對)와 서연(書筵)
경연(經筵) 또는 경악(經幄)은 고려 조선시대에 왕이 학문 높은 신하들과 매일 유교 경전이나 역사책(史書. 사서)을 읽으면서 정책을 토론하는 제도로서 경연에는 의정부 정승 이하 고관들이 참여하는데 경전을 읽고 해설하는 일은 홍문관(弘文館)이 맡았다. 경연은 매일 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하루에 두 번 또는 세 번 가졌다. 매일 정기적으로 하는 경연 외에 임시로 하는 경연을 소대(召對)라고 하고 밤에 하는 것을 야대(夜對)하고 하였다.
書筵(서연)은 세자를 교육하는 것으로 세자는 성균관에 가서 입학식을 치르고 나서 궁(宮) 안에 있는 시강원(侍講院)에 나가 교육을 받았는데 의정부 대신들이 사부(師. 정1품) 부(傅.정1품)와 이사(貳師.종1품)가 되고 2품 관리들이 빈객(賓客. 좌빈객. 우빈객. 정2품)과 부빈객(副賓客. 좌부빈객. 우부빈객.종2품)이 되고 그 밑에 찬선(贊善, 정3품) 보덕(輔德. 정3품) 겸보덕(兼輔德. 정3품) 진선(進善. 정4품) 필선(弼善.정4품) 겸필선(兼弼善. 정4품) 문학(文學.정5품) 겸문학(兼文學. 정5품) 사서(司書.정6품) 겸사서(兼司書.정6품) 설서(設書.정7품) 겸설서(兼設書.정7품) 자의((諮議.정7품) 등의 관리를 두어 세자를 교육하고 경사(經史)를 논하였다.
나. 의정부와 비변사
다. 상참(常參), 윤대(輪對), 차대(次對)
상참(常參) | 국왕이 매일 편전에 나가 의정부, 6조,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시종신(侍從臣)인 삼사(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예문관, 승정원의 대신들과 만나정책을 토의하고 결정하는 것 |
윤대(輪對) | 국왕이 5명 이내의 6품 이상 문관과 4품이상 무관을 관청별로 교대로 만나 교대로 정사를 논의하는 것 |
차대(次對) | 국왕이 매달 6차례 의벙부 의정,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고급관원과 전직 대산들을 만나 정책 건의를 듣는 것 |
라. 조선왕조실록
마. 병자호란때 척화론(斥和論)과 주화론(主和論)
바. 예송 논쟁(禮訟論爭)
효종의 정통성과 장자 여부를 부고 서인과 남인간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조선의 예법에 따르면 상복에는 3년복인 참최(斬衰 ; 상복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으로 삼년상에 해당)와 3년 또는 1년복인 재최(齋衰), 9개월복인 대공(大功), 5개월복인 소공(小功), 3개월복인 시마(緦麻)의 다섯 종류가 있다. 부모상에는 자녀가 삼년복을 입는다. 자식이 먼저 죽었을 경우 부모의 상복은 죽은 자식이 장자이면 삼년복 중자(衆子 ; 맏아들 이외의 여러 아들) 즉 차자 이하의 상에는 일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며느리의 경우도 장자부(長子婦 ; 맏며느리)의 상에는 일년복을 입어야 했으나 중자부(衆子婦 ; 맏며느리 이외의 며느리)의 상에는 대공복을 입는 것이 예법이었다.
상복과 기간 | ||
부모상 | 자녀 3년복 | |
長子(婦) | 衆子(婦)<次子(婦)이하> | |
자녀상 | 부모 3년복 | 부모 1년복 |
자부상 | 시부모 1년복 | 시부모 9월복 |
5복
상복 | 기간 |
참최(斬衰) | 3년. 부모상, 장자상(長子喪 |
재최(齊衰) | 1년. 둘째아들(次子)이하 상 |
대공(大功) | 9월. 종형제와 종자매를 위한 복 |
소공(小功) | 5월. 증조부모나 제종형제를 위해서 입는 복 |
시마(麻) | 3월 |
예송논쟁
현종대에는 남인의 성장 속에서 서인과의 두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 남인이 우위를 점하였다.
구분 | 내용 | 결과 |
1차예송(癸亥禮訟)(현종 원년 1659년) | 효종 사후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 조대비 ; 효종의 계모)의 상복입는 기간을 두고 논쟁. 서인 1년설, 남인 3년설. 이조판서 宋時烈, 우참찬 宋浚吉/ 정승 윤휴(尹鑴)/다음해 장령 허목(許穆) 의례주소(儀禮註疏)를 들어 1년 복의 부당성 지적/ | 서인의 주장 수용, 尹善道: 山水로 유배 |
2차예송(甲寅禮訟)(1674년 현종 15년, 숙종 즉위년) | 효종의 비(인선왕후)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사후 계모인 자의대부(조대비)의 상복입는 기간을 두고 논쟁. 서인 9월설, 남인 1년설. 제2차 예송은 예학적 논쟁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큰 사건이었다. 송시열의 문인, 추종자/김우명(金佑明 ; 현종의 장인)․김석주 등의 청풍 김씨 외척과 복창군 이정(李楨 ;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의 아들) 남인. 현종 대에는 왕과 서인세력의 갈등, 청풍 김씨 일족과 송시열 일파의 갈등, 허적과 송시열의 대립, 남인과 청풍 김씨 외척의 밀착 등 여러 정치집단의 갈등과 이합집산이 2차 예송의 배경 | 남인의 주장 수용.빈청(賓廳)의 대표였던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 도승지 김수항(金壽恒)의 친형)과 예조판서 조형(趙珩)을 처벌하고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을 영의정 임명 |
사. 범죄사실을 다룬 의금부 유무죄 토론
아. 가치를 토론한 사헌부 기록
자. 정책을 토론한 사간원 기록
카. 과거시험 : 책문
타. 지방수령들의 죄인 문책기록
파.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
⑴ 만민공동회(1898년 3월 9일)
① 우나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대회(mass rally)
② ⑵ 러시아의 내장 간섭 및 이권 침규탄
③ 신분을 초월한 자유로운 주장 발표와 연설: 진부 백정 출신의 박성춘 연설
⑵. 관민공동회1898년 10월 29일)
① 중추원을 근대적 의회로 개편 주장
② 헌의6조(獻議六條) 고종에게 제출
헌의 6조는 1898년 독립협회에서 대한제국 정부에 제출한 결의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리와 백성들이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쳐 전제 황권을 굳건히 한다.
2. 광산, 철도, 석탄, 산림 및 차관, 차병은 정부가 외국인과 조약을 맺는 것이니, 만약 각 부의 대신들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하여 서명하고 날인한 것이 아니면 시행할 수 없다.
3. 전국의 재정은 어떤 세금이든지 막론하고 모두 다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다른 부와 부 및 사적인 회사에서 간섭할 수 없으며, 예산과 결산을 사람들에게 공포한다.
4. 이제부터 중대한 범죄에 관계되는 것은 특별히 공판을 진행하되 피고에게 철저히 설명해서 마침내 피고가 자복한 후에 형을 시행한다.
5. 칙임관은 대황제 폐하가 정부에 자문해서 과반수의 찬성에 따라 임명한다.
6. 장정(章程, 홍범 14조와 각 부처가 갖추고 있는 장정)을 실지로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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