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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תישׁארב; Genesis)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본 성경 2 - 창세기 1.hwp
창세기 12장은 이스라엘의 역사 즉, 교회의 역사의 시작을 다루고, 창 1-11장은 인류의 보편사이다. 12장부터의 이스라엘의 역사란 선택된 백성의 역사이다. 이를 구속사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전면에 나타나고 여타의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나타난다.
창 1-3장은 매우 압축되어 있어 이 부분을 다루면 성경전체를 다루게 된다. 그러므로 매우 방대하다. 1-3장이 이스라엘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했으나 이는 셈으로 연결된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 누가복음은 아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상태에수부터 시작한다. 1-3장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구속은 창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창 11장은 바벨탑 사건이다.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시날 땅에서 한 평야를 발견했다. 그리고 거기서 정착해서 살았다’ → 12장 1절의 땅의 주제가 11장에서도 나온다. 따라서 11장, 12장의 structure가 같다.
׃םשׁ ובשׁיו רענשׁ ץראב העקב ואצמיו םדקמ םעסנב יהיו2
ינפ־לע ץופנ־ןפ םשׁ ונל־השׂענו םימשׁב ושׁארו לדגמו ריע ונל־הנבנ ׀ הבה ורמאיו4
׃ץראה־לכ
(11:2 와예히 베나스암 밐퀘뎀 와임체우 비크아 베에레츠 쉬네아르 와에쉐부 샴)
(11:4 와요메루 하바 | 니베네-라누 이르 우믹달 웨로쇼 바샤마임 웨나아세-라누 쉠 펜-나푸츠 알-페네 콜-하아레츠)
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ריע;이르 이 중요한 것이다. 탑(망대)은 ריע의 부속물로서 짓자는 것의 주요 대상은 ריע이다. 여기서 ריע는 도시 보다는 국가의 의미이다. 당대는 국가의 경계가 분명한 것도 아니요 한 성을 중심으로 국가를 이룩했다. 즉 11장에서도 하나의 나라 건설을 다루고 있다.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소명 사건을 조명해 보면, 11장 바벨탑 사건과 나라 건설이라는 유사성이 있고, 한편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나라는 축복의 나라인데 다른편 11장의 나라는 그 종국이 흩어지는 결과 즉 분열과 멸망, 저주받은 나라로 끝난다.
언어의 혼잡 : 의사소통의 단절은 인류사의 분열이며 특히 그 내적분열을 의미한다. 고대사회는 농경사회이므로 땅과 유리될 수 없는 때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착지를 떠나지 않는다. 역병, 기근, 전쟁 등 목숨을 내놓는 그런 사건시만 자신의 땅을 떠나는데 따라서 정착지 땅을 떠나는 것은 저주를 뜻한다.
창 12:1-3절은 아브라함의 소명사건이다(각 사건은 전체 역사와 연관되므로 문맥은 중요시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 시각으로 아브라함을 보았으나 창 12:1-3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성경은 구속사와 발맞추어 기록되었다).
창 12장의 key word는 다음과 같다. 11장에는
Land 지시할 땅(רשׁא ץראה 시날평지
Nation = 큰 민족 לודג יוג ⇒ 큰 성과 대
Blessing 네 이름을 창대케 함 자기 이름
(name, 모든 복의 근원이 됨 저주받음
민족에게 축
복의 매개자) 지시할 땅(하아레츠 아쉐르), 큰 민족(고이 가돌)
이에 앞서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오는데 성과 대를 쌓는 일이 나온다. 그 이유는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다. לדגמו ריע ונל־הנבנ 절; 니브네-라누 이르 우믹달)
이 두 가지 사건은 크게 대조되는데 둘 다 나라(왕국건설)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땅에 나라를 건설하고, 그 나라는 축복을 받고, 그 나라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는다. 11장의 사건은 자기네들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셨다. 이것은 저주를 의미한다(땅을 떠나도록 한 것,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이 흩으신 저주의 대표적인 예). 하나는 세계 만민의 축복의 나라이고 하나는 저주의 나라이다. 왜 이런 상반된 결과를 낳는가? 여기서 서로 다른 것은 무엇인가?
12장에 나타난 동사는 하나님 1인칭으로 되어 있다. 왕국건설의 주체가 하나님이다(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왕국). 반면 11장의 동사는 사람들(1인칭 복수)이다(우리 이름을 내고 건설하자. 즉 사람이 주어인 인간의 왕국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2개의 unit가 공통점이 있으나 한편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축복과 저주). 이 근본적인 차이는 사람을 위한 왕국건설과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건설(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운)이라는 것이다.
인간왕국은 왜 저주로 끝나고 하나님의 왕국은 축복으로 끝나는가? 이 두 사건은 대조로 시작하여 대조로 마친다. 두 사건 모두 주제는 왕국건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동사의 주어가 하나님,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은 축복의 왕국이고 다음은 저주의 왕국(주어가 사람, 사람의 나라)이다. 두 왕국의 건축자가 다르다. 그런데 창 12:1-3 앞에는 셈-데라의 족보가 나오고 11:1-9 앞에는 노아 후손의 족보가 나온다. 홍수 후 노아 후손의 역사는 홍수 이후의 새 인류의 역사이다. 10장에서는 홍수 이후 인류가 어떻게 세계로 흩어지는가를 나타내는데, 그 다음이 바벨탑 사건이라고 하면 홍수 이후 인류의 새로운 역사의 특성을 드러내주는 전형적인 Topical-event라 하겠다. 홍수 이후 은혜를 입은 노아 후손의 새 역사는 시날 평야에서 자기 이름들을 내기 위한 것으로 특성된다. ‘하늘에까지 닿는 탑’이 상징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자세라고도 하는데 군사력을 상징할 수도 있다. 어째튼 이것은 하나님께 도전하고 반항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자신의 지위를 하나님의 지위까지 높아지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이같은 상태를 흩어버리셨다. 저주하셨다. 족보의 기능은 ㉠ 지금 시작한 역사는 이전 역사의 근원으로 올라가고, ㉡ 그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는 왜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는가? 창 6장의 문맥으로 살펴보자. 창 6:5에는 ‘ובל תבשׁחמ רצי־לפ’(콜-에체르 마쉐보트 리보) 그 마음에 생겨먹은 꼴이 원래(항상) 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은 그 생각의 근원이 악한 것이다. 인간은 속속들이 썩었다. 완전히 썩은 상태 즉, core(핵심)까지 완전히, 또한 평생 동안 악했다. 즉, 전적 타락, 부패하여 전혀 돌이킬 수 없었던 상태이다. 이것이 홍수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창 5장에 시작된 아담의 역사로부터 악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두 쓸어버리기로 하셨는데 노아만이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8:22에 보면 사람의 내적, 심적 부패성은 치료되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시며,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저주하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홍수의 근본 원인인 ‘사람의 악함’이 홍수 후에도 없어지지 않은 채인 것을 아시고 잠정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새 인류는 그 근본부터 심판과 멸망이 자초되도록 되어 있다. 탑의 성격은 그것이 종교적인 건축물인지 어떤지는 상관 않고도 탑의 의미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 보겠다는 의미이다.
노아의 세 아들의 새 역사가 결국 바벨탑에서 드러나듯이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함으로써 근본적인 마음의 악이 처리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악의 표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흩어짐). 그러므로 인류의 보편역사는 저주와 심판의 역사이다. 근본적으로 악한 인간의 역사는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벨탑 사건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벌이는 어떤 노력이나 왕국은 하나님의 심판밖에 불러오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멸망받음을 나타내 보여준다.
창 11:10부터는 셈-데라의 족보이다. 아브라함 역사의 근원은 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노아의 술취한 사건과 셈의 행동을 통해서 인류의 운명이 결정되어버린다(창 9장).
9:26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라’고 노아가 셈을 축복한다. ‘...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최초로 나타나는데 ‘셈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셈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covenant fomular는 ‘나는 네 하나님 되고 너는 내 백성’인 것인데 특별한 관계를 표현할 때 쓰인다.
홍수 이후 인류가 새롭게 시작하지만 그 역사는 망하기로 운명지어진 역사이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축복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위대한 큰 경륜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약속이 12장의 약속이다. 심판과 멸망을 자초할 인류 역사와 인간 나라 속에서, 그 배경 속에서 생명과 축복을 주시는 축복의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의 새 역사가 시작되면서 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를 전제로 하고 또 다른 줄기로 셈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심판과 저주 가운데서 한 sign으로서 셈의 역사는 은혜로 이루어진다. 셈과 함께 하신 은혜의 역사는(데라로부터) 아브라함으로부터 큰 진전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셈의 약속이 구체화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새 왕국 건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셈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것이다. 스스로 인간의 힘으로 하는 모든 노력은 멸망으로 끝남을 보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왕국의 건설을 선언하신 것이다(창 12:1-3).
창 12장의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한 형태가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만방에 알리겠다는 것, 그리고 열방들이 그를 듣고 그를 통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왕국 건설의 약속을 주시고 있다. 성경은 역사적 흐름을 따라 기록되었으므로 메시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역사적 흐름을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을 곧장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키는 것은 성경에 대한 가난함이다.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은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면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 생명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건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에 대한 성취이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한 형태가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만방에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방들이 그를 듣고 그를 통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Abraham - David(구약에서의 하나님 왕국의 형성)
David - Captivity(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왕국의 와해)
Captivity - Jesus Crist(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왕국의 재건 → 왕국의 소망)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다(하나님 왕국의 도래). 히브리서 11장 8-9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건설하시는 한 성, 왕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역사의 핵심은 하나님의 왕국건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건설자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히 12:10절의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말은 창 12:1-3절의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약속으로 봐야 한다.
참고) 폰 라드 - 성경의 중심주제는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적 역사보다도 각 시대마다 그 공동체에 있어서의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에, 당시 각기 나에게 주는 의미를 따지다보면 중심 주제는 없어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역사의 일반적 흐름을 찾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개별적 역사로서 분리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 일관된 흐름의 한 가운데에서 의미를 가진다. ‘일관된 무엇’ 곧 중심주제를 골자로 하여 형성되는 사건이다. 연속적 흐름으로서의 역사의 증거는 성경에 있어서 족보기록이다. ‘족보’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가 연결된 의미를 주고 그 근원을 파내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주제 아래 그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내 왕국을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를 ‘족장사’(Patriarchal History)라고 한다.
* 족장사의 구조(frame)
아브라함(11:27-)
이 삭(25:12-)
야 곱(36:1-) 이 큰 세 덩어리로 구분된다.
이 역사는 성경에서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지칭된다. 이 3 구조는 전체로서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 족장사의 관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12장) :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나라를 허락하시자 4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갔더라’고 기록한다. 롯도 함께 간다. 함께 간 의미가 13장에 나온다. 6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그 도착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온다. 세겜 땅 모레 = 가르치는 사람(종교적 점치는 자). 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의미는 지시하신 땅이 바로 이 땅이며 이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 하시며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실 것을 확인하신다. 하나님 자기 나라를 세우실 땅이 바로 가나안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였다.
8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 말은 창 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와 같은데 이것은 예배와 같은 의미이다. 부르는 것은 예배의식에서 한다. 도움을 간구한다. 예배를 드린다의 의미이다. ‘단을 쌓고’ 대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곳에 단을 쌓는다. 신을 예배하는 곳에 성전을 짓고 신을 예배했다는 것이 종교적 풍습이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자체는 옳을 수 있으나 종교적 풍습이라고 격하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람을 만나셨다는 의미로서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전제하면서 성막이나 성전의 기능 혹은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그런데 8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으며 여기에 단을 쌓았다는 것은 다른 의미,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 19:19 애굽에도 단을 쌓겠다 ⇒ 애굽 백성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제단을 쌓은 의미를 살펴보면 이 땅은 하나님이 섬김을 받는 땅이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나라가 세워질 땅임을 확인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 말씀, 계시, 교통하시며 인간의 섬김을 받으시는 곳이 바로 제단을 쌓는 곳이라는 의미라면 이 땅이 바로 하나님이 섬김을 받는 땅이요,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실 왕국의 약속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의 왕국건설에 관련된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하나님 왕국의 진정의 역사이다. 창세기의 역사에서 왕국건설의 실현(예비적 성취)이 가나안 땅이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제사와 아울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표현한다).
10절에 극심한 기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다. 애굽은 삼각주로서 나일강의 범람으로 아주 비옥한 땅이다.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는데 애굽에 내려갔던 일은 죄로서 더 큰 죄를 짓게 된다고 종래 해석해 왔다. 아내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며 애굽 왕에게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시했는지 않했는지 기록이 안나왔지만 지시했을 수도 있고, 기근 때문에 내려갔을 수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성경의 모든 사건을 도덕화하는 것을 moralize한다고 한다. 선악으로 모든 사건을 구분하려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moralize할 수 있다. 그 근거가 있다. 그러나 기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탐욕 때문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moralize할 수 없다. 저자가 그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저자의 기록의 목적, 그리고 저자의 관심이 아브라함이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셨다. 즉 그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약속받은 자와 사라를 보호하셨다에 point가 있다.
하나님이 사라를 보호하심에 주된 관심이 있었다(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룰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을 사라를 보호하셨다). 즉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이루심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행위가 책망받을 만한 것이었다는 것은 바로의 책망을 통해서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도덕적 차원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아브라함과 함께 사라도 약속을 받은 자(bearer of promise)이다. 그들을 바로로부터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 : 약속 자체에 대해 신실하심을 보여주신다.
13장 애굽에서 귀환한 것이 먼저 기록된다. 아브라함의 윤리적 경건의 상태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이 지키시고 부를 소유하여 돌아오게 하셨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인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바로 앞에 수치를 당한 것, 애매한 사람이 고통을 당한 것 등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 성경이 그런 의도가 아닌 것을 보여준다.
애굽에서 돌아온 후 부유해진다. 땅이 협소하여 롯과 아브라함이 함께 거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아브라함과 롯이 살고 있는 땅은 목축하는 곳으로 물이 굉장히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땅이 협소하였다는 말은 땅이 좁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고 샘과 초지가 목축업에 필요한데 이런 것이 부족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단 들은 물이 넉넉하고 애굽처럼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한다. 11절까지는 롯의 잘못을 볼 수 없다. 12절에 롯이 장막을 옮겨 소돔에까지 이르른다. 그런데 소돔은 악하여 큰 죄인의 성이다. 사람들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성에까지 이르며 성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성이 있는 지역을 택한 것은 롯의 동기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땅의 악함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탐욕적으로 그 땅을 선택했다면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떠날 때의 그 동기도 외적 영광, 인간적인 동기로 떠난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롯의 신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순한 요소와 피상적인데가 그의 신앙에 있지 않았나 보여진다.
어떤 동기와 상황에서 되었든 간에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결별의 의미가 무엇인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아브라함과 롯이 분리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축복하신다. 여기서 떠난 후라고 못박은 것이 중요하다. 그 뒤에 그 의미가 나온다. 떠난 후 하나님이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하신다. 이것은 12장에서 하신 약속을 확인시키심이다. 그 약속이 롯과 헤어진 후에 확인되었다는 것은 롯이 그 축복의 약속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 족장사에 있어서 주된 관심은 누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땅을 상속할 것인가? 이다. 그 땅의 상속은 그 나라의 상속이요, 그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 롯의 사건을 통해서 역사적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이 땅까지 왔으나 그러나 롯은 이 땅의 약속에서 떨어져 나갔다. 롯이 이 약속에서 떨어져 나간 것의 의미는 족장사에서 밝혀진다. 그러면 무엇이 이 땅을 소유하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이어 16절에는 땅의 약속뿐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후손을 주겠다하심. 너를 통해 큰 민족, 큰 나라를 이루겠다는 약속이 다른 형태를 취한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음을 가진 자, 믿음의 족속의 조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위의 약속을 전제로하여 이 약속을 의식하여 한 말이다.
종횡으로 행하여 보라는 말은 이 땅을 네 발로 밟으면서 이 땅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땅인 것을 체험해보라는 말이다. 비록 네가 지금은 나그네로 다니지만 먼 미래에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을 믿음으로 확인하며 살라는 의미이다.
14장의 등장 인물은 ① 시날(메소포다미아의 바벨론 = 이라크)왕 아므라벨(לפרמא;아므라펠 Hammurabi),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이 Hammurabi와 같은 시대로 추정하며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ל(라메드;‘ㄹ’발음이 남)자가 빠져서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시날왕은 강력한 나라의 왕이다. ② 엘라살왕 아리옥 = 이 사람은 정확치가 않다. ③ 엘람왕 그돌라오멜 = 페르시아(이란 동쪽)의 큰 세력으로 추측, ④ 고임(יוג(고이)의 복수, 민족의 복수로서 고유명사인지 소국가의 연합체인지 확실하지 않다)왕 디달(헷족속 = 지금의 터어키로서 애굽과 세력을 다투던 큰 세력이다. 애굽과 형제의 조약을 맺음). 이상의 왕과 요단 서편의 5개의 소왕국(소돔왕, 고모라왕, 아드마왕, 스보임왕 등)과의 싸움이 일어난다.
거대한 제국들 더구나 연합제국들이 이 작은 성들을 왜 쳐들어 왔겠는가? 더구나 아브라함이 318인으로 구해온 것이 가능한가? 동화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12년 동안 속국으로 지배를 받다가 13년에 이 다섯 왕들이 배반한다. 속국이 배반하자 연합하여 쳐들어 온 것이다. 성경을 볼 때 아마 다섯 왕만 배반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전 지역에 해당하는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이 연합하여 함께 배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반란의 범위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제국이 연합하여 침략했다는 것이 가능하다.
14:13에서 아브라함이 단, 호바까지 가서 롯과 재물을 찾아온다. 침공한 열강 대제국들이 아브라함의 318인에게 패퇴한다. 열강에 대한 아브라함의 승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집안은 너로 인하여 큰 자손을 이루겠다는 약속의 집안이다. 그러므로 당시 아브라함의 집안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미래 역사의 전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⑴ 아브라함의 왕국에 대한 태도와 행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태도와 같다. 아브라함에 대한 대적은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다. 아브라함에 대항하는 나라는 다 심판과 멸망으로 끝난다.
⑵ 하나님이 이미 창 12:1-3에 약속하신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함을 나타내며,
⑶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강성한 것을 표현해 준다. 즉 세상 세력이 그 앞에서 전혀 무력함을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시작된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야 한다. 인류의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을 지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했고 하나님은 가나안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땅이라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이 땅이 하나님을 섬기는 땅이 될 것을 체험하게 된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결별하는 것은 심각한 의미를 가지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이 땅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질 것라는 의미를 갖는다.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이제는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그의 삶 속에서 서서히 이미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항시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려 318명을 데리고 가서 4대 강대국 연합국을 물리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강할 것과 어떤 다른 나라도 하나님 나라를 대적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즉 창 12:1-3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이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하리라’(םשׁ לודג; 가돌 샴, 4대 강대국이 아브라함에게 무릎을 꿇는다). * Hammurabi법전 Second colum 6절에 함무라비가 주변의 모든 세력을 무찌르므로 바벨론의 이름을 존귀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가간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의미가 나라와 나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17절에 아브라함을 맞이하는 사람이 2명이다. 이 둘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이다. 살렘왕 멜기세덱 : ①살렘(예루살렘)의 왕, ②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Priestly-King, 신정일치시대의 제사장 겸 왕인 인물, ③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히 7:3).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 멜기세덱에 대한 견해
1.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표현은 바로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견해, 그래서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비스럽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가? 아니다.
2. 구약의 제사장은 다 혈통을 따라 제사장이 되었다. 멜기세덱은 혈통에 따라 된 제사장이 아니다.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 아비, 어미가 없는 인물이 아니라 레위족속, 즉 레위 혈통이 아니라 다른 혈통인데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한 인물(제사장적 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한 것이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나아온다. 아브라함에게 정치적으로 구출해준 것에 대한 감사로 영접하러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직분으로 아브라함에게 나왔다. 당시 제사장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 전달하는 자였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직분에 걸맞게 아브라함에게 나아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선언한다. 이러한 축복은 아브라함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아브라함에게 붙이신 사건 즉 아브라함의 승리를 하나님 허락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았고, 이로 인해 아브라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본 것이다. 즉 창 12:1-3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아브라함의 위치는 하나님께 복 받은자요, 만민에게 복받게 할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바친다. 승리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승리, 영광, 명예, 이 사건을 통해 그가 획득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미로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의 축복의 대리자로 멜기세덱을 인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으나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이다.
21절의 소돔왕의 태도 : 전혀 멜기세덱과 상반된 태도이다. 냉냉하고 사무적이었다.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아니라 상업적인 동기로 왔다. 구출해 준 것에 대한 상대방의 공로를 최소한 답례로 최대의 이익을 보려는 상업적인 동기로 나왔다. 소돔왕의 동기가 선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물건은 가지고 사람은 돌려달라’ 아브라함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승리, 축복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냉냉한 소돔왕으로부터 아브라함은 어떤 물건도 받기를 거절한다.
아브라함은 왜 물건 받기를 거절하였는가?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자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인간적인 것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므로,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일깨움을 받아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손으로 이루어주었다고 착각할까봐서 단호히 도움을 거부하고 있다.
내가 너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기 원치 않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와 함께 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상해주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도움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와 같이 간 사람은 세상 방법에 따라 세상의 가치 만큼 보상해 주라고 한다. 소돔왕은 불쌍한 자이다. 만민 속에 찾아온 하나님의 나라를 그러한 태도로 대하는 것은 자신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축복을 차버리는 태도이다. 아브라함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나뉘어진다. 예로서 멜기세덱과 소돔왕을 들 수 있다. 이 둘의 상반된 태도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15장은 세계 열강에 대한 승리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세계 열강과의 싸움 속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방패요, 상급이 되심을 확신해 주신다. 2절에 아브라함은 다른 태도 보인다. 나는 자식없이 죽어갑니다. ‘ירירע ךלוה’(홀렉 아리리)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잘은 모르나 85세 이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85세 때에 하갈을 취하기 때문이다. 85세가 되어서도 소식이 없자 하나님께 질문 or 항변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는 늙은이로서의 한탄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국에 그가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하나님께 무엇을 주시려나이까?하는 것은 하나님 약속의 땅에 대한 상속자의 관심이다. 나의 상속자 엘리에셀이 나의 후계가 될까요? 묻는 것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볼 때는 하나님 나라의 대변자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받은 자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자녀가 없는 것을 한탄함이라기 보다는 나에게 자녀가 없으므로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온 인류에게 복을 줄 하나님의 나라를 이을 자가 되겠는가 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염려로 묻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자녀가 없으므로 엘리에셀을 통해서라도 이 나라를 이어가시겠는가?라고 묻는다. 하나님 나라 건설의 막중한 사명의 안타까움이 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하나님은 아니다. 분명히 네 몸에서 날 자(ךיעממ;밈메에카 친자식)가, 네 몸에서 난 친자식이라야 네 후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 하늘을 보고 별을 보여주시며 이 뭇 별처럼 후손을 많게 하시리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자 그가 믿었다. 이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여기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후손을 뭇 별처럼 많아지게 하겠다는 단순히 그 사실을 믿은 것이 아니라 나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 던져 넣겠다는 보다 깊은 의미이다. 믿음이란 자기 부정이다. 단순히 어떤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보다 그분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고 그분 안에 나의 모든 것을 던져 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신자의 기본자세를 한 마디로 믿음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믿음은 가볍고 값싼 것이 아니다. 믿음은 내 생명, 내 생애를 그의 손에 맡기고 그의 뜻대로 살기로 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이때 내가 무엇으로 이 땅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지 확실한 표적을 아브라함이 요구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징표를 구한다. 아브라함이 깊은 잠이 들었는데 어두움이 임하고 심히 두려워한다. 엄위하시고, 크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임재하심을 보여준다. 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즉 출애굽 사건을 이미 예견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죽어 평안히 조상에게 돌아갈 것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의 Project는 아브라함 당대에 단기간에 걸쳐 이루어질 일이 아니요, 장기간에 걸쳐, 여러 세대 몇 백년에 걸쳐 진행될 장기적 계획이다. 4 Generation에 걸쳐 애굽에서 돌아올 것이다. 400년 동안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그 후에 돌아와 하나님 왕국이 건설될 것이다.
당시 근동지방은 매우 타락한 곳이었다. 왜 이렇게 극악하고 타락한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는가? 이런 극심한 타락한 곳에서 악을 제거하고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쪼개진 짐승 사이로 불이 지나간다(하나님 현현의 상징). 이것은 covenant (making ceremory)이다. 횃불이 지나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나가심이다. 당시 언약의식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신 앞에서 고기를 쪼개고 고기 사이를 지나간다. ‘만약 이 언약을 지키지 않을찐대 네가 이 쪼개진 짐승처럼 될 것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내가 나의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이 고기처럼 쪼개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심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처럼 극적, 감동적으로 나타낸 곳은 없다. 하나님 스스로 저주를 짊어지심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확약하신 후 하나님 나라의 지경과 경계를 말씀하신다. 흔들거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굳게 하신다. 하나님 왕국건설의 구체적 계획의 진행을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