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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의 인물 스크랩 팔공산이 배출한 청백리 괘편당(掛鞭堂) 이영(李榮)
이팝나무 추천 0 조회 50 11.03.18 05: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중기 무신이자 청백리였던 이영을 기리는  대구시 동구 공산동 미곡마을의 청백서원 유허비  대원군 서원철폐령때 훼철되고 지금은 잡초만 무성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대구시 북구 검단동 금호강변에 있는 압로정현판 원래 괘편당 이영이 만든 정자였다고 한다. 외손자 송담 채응린이 중건 대구지역 사림들이 모여 자연을 벗삼아 노닐며 시를 짓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제주시 대정읍에 있는 제주 향교 한 때 제주목사였던 청백리 이영도 이곳에서 제주의 문풍진작에 기였하였을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 괘편당 이영은 본관이 영천(永川)이다. 영천이씨는 영양군(永陽君) 이대영(李大榮)과 영동정(領同正) 이부(李?)를 파조로 하는 두 계통이 있다. 괘편당은 전자의 후예다. 그들이 팔공산과 인연을 맺은 데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조선조 초 부사직을 지낸 이현실(李玄實)에게는 보흠(甫欽)과 보관(甫款)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모두 대과에 급제하니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맏이 보흠이 1457년(세조 3) 지순흥군사로 있으면서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해 유배지 박천에서 교살되는 화(禍)를 입는다.

집현전 박사, 감찰, 서장관, 등을 역임하고 함양군수로 나가 있던 그를 1448년(세종 30) 왕이 직접 지대구군사(知大邱郡事)를 제수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이용하기 어려운 의창, 싱평창 대신에 부담이 덜한 민간주도의 사창(社倉)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행하게 하여 문종의 총애를 받아 전도가 양양했기 때문에 좌절감은 더 컸을 것이다.

이 때 풍저창(豊儲倉, 대궐 안에서 쌀, 종이, 콩 등 생필품을 관장하는 기관) 부사로 있던 둘째 보관(甫款)이 교살된 형 보흠의 시신을 평안도 박천에서 경상도 영천까지 무려 2천리 길을 모시고 와서 장례를 치렀다. 이 지극한 형을 존경하는 마음을 두고 충장공 자손들은 이런 훈육을 받았다고 한다. ‘부사공 후손들을 만나면 연령이나 항렬에 관계없이 먼저 읍(揖)부터 하고 대하라’고했다고 한다. 보관은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이름을 세보(世甫)로 바꾸고 숨어든 곳이 팔공산 자락 깊숙한 마을 내동이다. 팔공산을 안고 있는 대구는 한 때 형 보흠이 수령으로 있던 곳이다. 이런 연유로 보관은 영천이씨 팔공산 입향조(祖)가 되었다. 정조 때 두 분 모두가 복권되어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보흠은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광주의 대치사, 영천의 송곡서원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괘편당 이영(李榮, 1494~1563)은 영천이문의 대구 입향조 보관의 현손(玄孫)이다. 그는 1494년(성종 25) 해안현 북촌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생각이 원대했으며, 용맹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향시(鄕試)에도 당당히 합격하니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글공부를 접고 무예를 익히며 병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514년 (중종 9) 무과에 당당히 합격 훈련원봉사를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과 하동·남포·단성현감 등을 역임했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목민관의 도리를 다해 백성을 보살피니 임지마다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1538년(중종 38) 안동의 판관으로 있던 어느 날 상관인 부사와 의견이 맞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고 말았다. 부사 역시 그 일로 벼슬을 버렸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괘편당이 공정하고 사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오히려 칭찬했다고 한다.

의주, 단천군수를 거쳐 1545년(인종 1) 정평부사로 승진했다. 변방에 사는 주민들의 어려움을 잘 헤아려 선정을 베푸니 관찰사가 장계(狀啓)올려 표창을 건의 했다. 다시 통정대부(정3품)로 승진하면서 경원부사로 자리를 옮기고 1551년(명종 6)가선대부(종2품)에 또 다시 승진 회령부사로 제수되었다.

명종은 당시 부정이 만연한 공직풍토를 개선하기 위하여 청백리를 별도로 선발하도록 해 퇴계 등 모두 33명이 뽑혔는데 괘편당도 그 중 한 분이다. 1553년(명종 8) 함경남도, 이듬해에는 함경북도 병사(兵使)가 되었다. 이 두 도는 북방 오랑캐들과 맞닿아 있는 곳이기 때문에 국방상 매우 중요시 되는 지역이다,

특히 병마벌도사는 지방군의 무예와 군사들의 훈련, 무기 제작과 정비, 군사시설의 건축과 수리를 총괄할 뿐 아니라, 호랑이등 맹수의 포획, 도적의 체포, 내란방지 등 치안업무도 함께 수행하며 특히 외적이 침입하면 즉각 대응하는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해 상황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군권의 최고 책임자다.

1554년(명종 9), 8월, 23일자 <조선왕조실록>은 그가 얼마나 청렴하며 국가관이 투철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도 병사 이영은 본래 청렴하고 소탈한 사람으로 국가 일에만 마음을 다하고 가정 살림은 돌보지 않는 채 10여 년 동안이나 오래 서북(西北)에 있었습니다. 남도병사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내를 데리고 가 겨우 8~9개월 지났는데 또 북도병사가 되자 그의 아내가 이 때문에 병이나 임지(任地)에서 죽었고, 또 호상(護喪)하여 귀장(歸葬)할 자제도 없다고 합니다. 몹시 불쌍하니 조묘군(造墓軍) 및 장사에 쓸 것도 제급하도록 하며---또 이 사람이 의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지금 몹시 추운 지역에 가게 되었으니 방한 장비도 내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대로 하라 하였다.’고 했다.    

1555년(명종 10)에는 내직인 병조참판으로 발령을 받아 귀경하는 중에 이번에는 왕이 그의 청렴성을 시험해보기 위해 선전관을 보내 휴대품을 수색하게 했다. 그 결과 짐 꾸러미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낡은 이불 한 채 뿐이었다. 왕이 ‘너의 청백함은 일월(日月)과 같구나.’고 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듬 해 다시 평안도 병사로 임명되어 이미 맡아보았던 함경 남·북도와 함께 우리나라 국방상 가장 중요한 지역의 병무책임을 모두 맡아보게 되었다. 이런 거듭된 중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1558년(명종 13)에는 병무뿐만 아니라, 고을 사람들의 복지는 물론 교육, 치안업무 등을 총괄하는 제주(濟州)목사가 되었다. 제주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험한 바닷길이기 때문에 조정의 감찰활동이 활발하지 못해 관리들이 부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산이 많은데 비해 경작지가 적어 주민들의 생활이 여유롭지 못했다. 왜구마저 자주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기 때문에 살기 힘든 곳이다. 그러나 평소 목민관으로서 소신이 뚜렷했던 괘편당은 학문과 생업을 장려하며 주민들을 크게 감화시켰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평소 애용하던 말채찍마저 관급(官給)품이라 하여 벽에 걸어두고 돌아오니 감복한 주민들이 매월 초하룻날 참배하며 공의 청렴함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해가 오래되어 채찍이 썩어버리자 이번에는 그림을 그려 두었으며 그것이 또 색이 바래지면 다시 그려 붙여 두고 집의 당호마저 ‘채찍을 걸어둔 집’이라 하여 괘편당(掛鞭堂)이라고 했다.

아호(雅號) 괘편당은 이렇게 지어진 것이다. 이후 도총부 부총관(副摠管), 청송부사, 경상우도 병사로 근무하다가 1563년(명종 18)영중에서 별세하니 향년 70세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그에 대한 졸기에 의하면 ‘영은 청렴하고 간소하며, 여러 번 병사를 지냈으나 침해하는 일 없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했다. 집이 대구에 있었는데 화재를 당하여 처자가 살 데가 없게 되자 임금이 가상히 여겨 집을 지어주고 의복과 식량을 주었다.’고 했다.

슬하에 3남3녀를 두었으며 백안동 청백서원에 봉향(奉享)되었다 임란 의병장 곽재겸은 사위로 서사원 손처눌 등과 공산성에서 창의해 해오면(解五面, 불로·공산지역? )에서 활동했으며, 달성 10현의 한 사람인 채응린(蔡應麟)은 그의 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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