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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다, 이젠. 나도 지겹다 이거야. 나한테 중국집 음식은 자기랑 안 맞는다고 했으면서.
겨울은 고급 중국 요리 전문점에 나란히 들어가는 백현과 우희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가만히 서 있다가는, 유동 인구가 넘쳐 흐르는 이곳에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빠르게 뒤를 돌았다.
1.
‘나 짜장면 못 먹어. 딴 음식도 나랑 안 맞아. 다른 애랑 가.’
언젠가, 겨울은 백현에게 ‘지금 백현과 우희가 나란히 들어간’ 저 음식점을 가리키며 말했었다. ‘저기 진짜 맛있대요, 저랑 점심 같이 먹으면 안돼요?’ 백현은 언제나 그렇듯이 겨울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저는 선배랑 점심 먹으려고, 친구들 다 보냈단 말이에요.’ 10번 찍으면 넘어가겠지 여겼던 백현은 열 한 번, 열 두 번, 열 다섯번을 찍어도 넘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그녀는 오기가 생겼다.
‘저기 친구들 오네, 같이 먹어. 나는 선약이 있어서 먼저 간다.’
백현은 교문을 나서는 겨울의 동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결국, 이 날도 겨울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숱한 날들 속에서, 겨울은 언제나 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물론, 이 날도.
2.
‘선배, 저 집에 데려다 주세요.’
또 다른 언젠가, 겨울은 동기들과의 술자리를 위해 학교 앞 주점으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여기 백현 선배도 있다~.’ 라는 주연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지. 대충 옷을 주워 입고 주연에게 온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며 집을 나섰다.
주점 문을 열기전에는 심호흡을 열 댓 번도 더 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문 밖을 타고 겨울의 귓가에 꽂혔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겨울의 심장 소리가 그 소음을 압도했으니 말이다.
겨울은 백현의 옆, 옆에 위치한 테이블에 동그랗게 앉아있는 제 동기들을 보며 들어섰다. 하필, 백현의 자리가 주점 문을 바로 바라보고 있는 곳이었다. 주연의 얼굴 향했던 겨울의 눈동자는 어느새 백현을 향해 있었다. 백현의 시선도 겨울을 향했다. 의미 없는 눈맞춤이 이어졌다.
“겨울아! 여기여기! “
주연의 목소리가 신호탄처럼 쏘아져 울렸다. 그에, 백현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먼저 시선을 떼는 백현을 바라보며, 겨울은 이 날도 쓴 물을 마신 것처럼 속이 답답함을 느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 앞에 보이는 소주병의 개수가 하나 둘 늘어갔다. 겨울의 시선은 무의식 속에서도 그를 좇았다. 백현이 주섬주섬 옷을 챙기는 것이 보였다. 휴대폰을 테이블에 두고 일어나는 것을 보니, 아마 술기운을 쫓으러 바깥으로 향하는 듯했다. ‘이때다.’ 겨울은 옆에서 병 나발을 불고 있는 주연에게 먼저 가겠다는 인사를 남겼다.
“어?.. 벌써가게..?”
“선배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거야! 말리지 마. 나 간다!”
한 듯, 안 한 듯한 인사를 마치고, 겨울은 주점을 ‘뛰쳐나왔다.’ 그러면, 주점 문 옆에 조용히 앉아 밤 바람을 맞고 있는 백현이 보였다. 그도 술기운이 돌고 있는지, 살짝 풀려 있는 눈으로 겨울을 올려다봤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내 백현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왼쪽 손으로는 턱을 괴고, 오른쪽 손은 무릎에 걸쳐져 있었다. 저 시선 끝에 항상 내가 있으면 어떨지 수 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생각했다. 매년 초마다 진행되었던, 사회과학대 연합 엠티에서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혼자만의 사랑이 이렇게까지 부풀 수 있는 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은, 구름이 눈을 머금고 있는 시기다. 어느새 그가 겨울의 마음에 들어온 지 꼬박 9개월이 지났다는 얘기다.
“선배, 저 집에 데려다 주세요.”
다시금 백현의 눈망울이 겨울을 향했다. 몇 분의 침묵이 이어졌다. 백현의 고개가 완전히 겨울에게 기울었다. 여전히, 왼손으로 턱받침을 한 상태였다. 한숨을 내쉰, 그의 입 바깥으로 하이얀 김이 새어 나왔다.
“가자.”
“..진짜요?!”
“…너는 참,”
“……"
“아니다.”
겨울이 백현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가끔씩 호의 아닌 호의를 베푸는 그 때문이었다. 내가 불쌍한 건가. 아무렴 좋았다. 그가 나에게 가끔 베푸는 호의에 나는 기절할 듯이 기뻤으니까.
3.
2번의 호의를 받아 내기 위해, 나는 항상 8번의 차가움도 받아냈다. 나는 굴하지 않고, 매일 카톡을 이어 나갔다. 이상한 게, 꼭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내 연락을 끊어내진 않는다. 주연과 여진은 그의 행동을 ‘어장관리’라고 일컬었지만, 그렇다기엔 그의 행동은 너무 가차 없었다. 그는 같은 학교 사람과 연애를 한 적이 없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한 정보였다. ‘아니야, 그냥 cc가 싫은 게 아닐까.’ ‘너랑 선배랑 과도 다른데 무슨 소리야.’ ‘아니 진짜 캠퍼스 커플 말이야. 학교라는 공통 분모가 맘에 걸리는 게 아닐까 하고..’
나의 희망 사항일지도 모르겠으나, 여태 우리학교에서 연애한 전적이 없는 걸 보아하니, 꽤나 합당한 추측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직진. 그냥 직진하기로 했다. 내가 싫은 거라면, 그가 나를 끊어내도록.
‘선배, 저희 같이 듣는 교양 수업 팀 과제 말이에요. 저랑 같이 할래요?’
-아니, 나 같이 할 사람 따로 있어서. 미안
‘선배.. 오늘 학식 돈가스 나온다던데, 드셨어요?’
-응. 방금
이렇게 차갑다가도.
-선배, 강의실에 가디건 두고 가셨는데요?
-네가 갖고 있어. 다음 수업 때 줘.
이렇게 의도를 알 수 없는 부탁까지 했다. 나를 끊어 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그 였음에도, 굳이 나를 멀리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가 없다.
- 네 그럴게요!
-고마워.
그래서, 나는 내가 먼저 그를 멀리할 수 없다. 내 눈길과 내 온갖 신경이 그에게로 쏠리는 것은 어쩌면 불가항력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의 향이 진득히 묻은 가디건을 손에 쥐고, 한참 동안 강의실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4. 현재
어느새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요즘엔, 선배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항상 날이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봄날의 그였으나, 최근엔 겨울 바람을 밀어내고자 하는 따뜻한 봄 같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내 모든 제안을 거절해야 마땅한 그였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나와 점심을 먹고, 집에 데려다 달라는 내 칭얼거림을 다 들어주다 못해,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널 누가 말려.”
“이제 제가 좀 덜 불편해요?”
“………””
“아직도 제가 불편해요?”
“아니, 안 불편해.”
“덜 불편한 게 아니고?”
“응,”
“…….”
“불편한 적 없었어.”
이런 말도 해줬으면서. 따뜻한 봄 같은 사람이 되어있었던 건, 나 때문이 아니라 우희 선배 때문이었을지도. 집
에 돌아오기까지 참으로도 많은 생각을 거쳤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9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생각보다 많은 상처를 입었다. 다치고 다쳐서 이제는 상처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무덤덤해졌다. 오늘, 선배와 우희 선배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음식이 맞지 않아 가지 않겠다고 말한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내 마음을 또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그만 할거야.”
긴 시간동안 내 노력으로 이어 나갔던 카톡도, 이젠 끝이다. 망설임없이 방을 나갔다. 내일 아침이 되면, 또 후회할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비참해지기 싫었다. 혹시라도, 선배가 정말 내가 불쌍해서 나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던 거라면. 그의 감정이 단지 연민이었던 거라면 내 자신이 너무 안쓰러워질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시계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5.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이번 학기에도, 지난 학기에도. 사회과학대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그와 나는 겹치는 과목이 꼭 한 개씩 생기곤 했다. 오늘은 유일하게 그와 수업이 겹치는 날이기도 했다. 지난 일주일동안, 내 예상과 한 치도 어긋남 없이 그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 여태 뭐한거지. 주연과 여진에게 술을 마시며 여러 차례 하소연도 끝마쳤다. 나만 이런건가 하는 생각에, 억울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내가 혼자 좋아해서 그런 건 맞는데, 왜 이렇게 짜증나지? 억울하지?
‘원래 다 그런 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줬으면 하는 건 당연한 욕심 인 거야.’
주연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교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끝남과 동시에, 학생들은 미리 싸 두었던 가방을 들고 줄을 지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하필이면, 여진과 주연 둘 다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다. 어제 우리는 바닥에 드러누워 새벽을 지새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많은 양의 술을 들이켰다. 그럼에도, 내가 멀쩡히 이곳에 있는 건, 둘 보다 튼튼한 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혹시나, 그와 마주칠까 싶어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최대한 마주치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속으로 되새기며, 강의실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이겨울,”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 그의 지인이 있는 걸까 주위를 둘러봤지만, 나 혼자였다.
“…저요?”
“여기 너 말고 다른 겨울이가 또 어딨어”
저 봐. 또 차갑게 말한다. 이에 나도 기분이 상했다. 내가 끊어 주겠다는데, 그만 질척거려 주겠다는데. 또 나를 불러 세운다. 그가 또 나를 흔든다.
“먼저 나 불러준 적 한번도 없었잖아요.”
“…….."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삐딱해.”
“이제 관두려고요.”
“뭘,”
예상보다 쉽게 입이 떨어졌다.
“저 이제 그만 흔들릴 거예요.
“……..."
“저 싫다는 사람, 그만 붙잡을 거예요. 그만 매달릴 거예요.”
“........."
그가 표정을 굳혔다. 입술을 꼭 다문다. 차갑게 내려 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어느새 우리 사이엔 정적, 차가움, 냉기와 같이 쌀쌀한 것들만이 남았다.
“그러니까,”
“………”
“선배도 나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면, 그만 흔들어요.”
미련없이 돌아섰다. 아니, 미련이 없는 척 돌아섰다.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오려 몸부림 치고 있었지만, 입술을 꼭 깨물고 참았다. 잘했어.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도 이제 나 좋다는 사람 만날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6.
내가 간과했던 사실 하나. 내가 살고 있던 곳, 선배가 사는 곳. 거리는 10분 여 남짓. 우리의 동선이 겹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매우, 매우 높았다.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를 풀러 집 밖을 나섰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항상 향하는 곳은 PC방이었다. 여러 명이서 단체로 가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혼자, 조용히 게임만 즐기다 오는 것이 최고라 여겼다.
선배도 나와 같은 취향을 갖고 있는 걸 금세 망각해버렸다.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 누가 알았을까. PC방에서 벗어 나고 있는 그, PC방 입구에 들어서고 있는 나. 나와 그는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정적은 먼저 깬 건 그였다.
“요즘 바쁜가 봐.”
“그다지요.”
“근데, 왜 연락 안 해?”
“말 했잖아요, 질척이는 거 안 하겠다고.”
그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만 질척이겠다고 선전 포고를 했으니, 얼씨구나 하고 내 손아귀에서 벗어난 걸 기뻐할 줄 알았다. 서로를 몰랐던, 봄날의 그 때로 돌아갈 줄 알았다. 우리는 영영 남이 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왜,”
“………”
“갑자기 네가 변한 이유를 알아야,”
“………”
“내가 변명을 하든, 사과를 하든 할 거 아니야.”
“………”
“응?”
“내가 가자고 했을 땐, 죽어도 싫댔으면서.”
나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네가 미운 게 아니라, 너에게 서운했던 거라고. 내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잠시 가시를 돋군 것 뿐이라고. 어쩌면, 그가 지금처럼 나를 잡아 주길 기다리면서.
“학교 앞에 있는 ‘란’ 말이에요.”
“…어?”
“…그 중국집 말이에요! 나한테는 중국 요리 입에 안 맞는다고 싫댔으면서, 다른 애랑 먹으러 가라고 보내기까지 했으면서.”
“아,”
“…………"
“설마, 너 그 날 본 거야?”
난 또 뭐라고, 깊게 한숨을 내쉬는 그를 보며 눈가가 붉어졌다. 또 그런 표정. 지겹다는 그 표정.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나 진짜 상처 받아요.”
“………”
“여태, 선배 좋아하느라 밉보이기 싫어서 말도 못했어요.”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데?”
“지겹다는 표정,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
“……….”
“할 말 없으면 갈게요.”
그를 두고, 다시 내가 먼저 뒤를 돌았다. 저번에도, 지금도. 여전히,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말해달래서 말해줬더니,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머리가 아파온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꼭, 눈이 올 것만 같았다.
7.
집에 도착해 침대로 곧장 향했다. 왠지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털썩 누웠다. 눈을 감고 몇 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머리를 관통하는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무거웠던 것이 아마 감기 몸살에 걸린 듯 싶었다. 침대 옆 간이 탁자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12통’
뭐야, 괜스레 놀란 마음을 다잡고 통화 목록을 살폈다. 6통은 여진과 주연에게서 온 전화였고, 나머지 6통은 백현에게서 온 전화였다. 흐릿한 눈가를 비벼 대며,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실재하는 것인 것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첩첩이 쌓여 있는 부재중 목록을 뒤로하고, 상단바를 내려 노란색 알림 버튼을 눌렀다. 여진, 주연, 나로 이루어진 단톡방에는 ‘얘들아, 나 감기인 것 같아.’라는 나의 마지막 말풍선 아래로 걱정이 담긴 말들이 여럿 오갔다. 그래 이 말만 남기고 사라졌으니 그렇게 전화를 한 만도 하지. 근데 선배는 왜? 여진과 주연은 그렇다 쳐도, 백현이 나에게 여섯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지잉-
멍하니 휴대폰만 응시하던 시간이 꽤나 길어질 때쯤, 다시 한 번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겨울, 자는 거야? 많이 아파?’
미리보기 창으로 떠 있는 메시지에, 제 멋대로 마음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고 있지.
‘문고리에 죽이랑 약 걸어 두고 갈 테니까 챙겨 먹어,’
다시금 진동하는 휴대폰, 그와 동시에 문 밖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직감했다. 선배구나하고. 순간 나는 현관문이 S극 내 발이 N극이라도 된 것 마냥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아까 무슨 말을 지껄이고 그를 등졌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현관문을 잡은 손이 땀으로 가득했다. 열까, 말까 망설이길 뒤로 하고 도어락 잠금을 풀었다.
“…어..?”
그러면 엘리베이터를 타려 다가 문을 열고 등장한 나로 인해 그 자리에 꼼짝 없이 달라붙어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옭아맸다.
“뭐해요 여기서?”
“많이 아픈 거야? 어디가 어떻게 아픈 지 잘 몰라서 이것 저것 사 왔,”
“이건 또 뭐고, 저 아픈 건 어떻게 아셨어요?
식은땀으로 인해 살짝 젖은 내 앞머리를 질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를 무시하고, 문고리에 걸려있던 약 봉지와 죽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분명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다. 누가 눈꼽만큼도 관심 없는 이에게 이러한 호의를 베푼 단 말인가. 억울해서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쌍방인 것 같다가도 어느새 혼자 삽질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어디 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서 영영 나오고 싶지 않았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너 몸 괜찮아지면 그때,”
“들어오세요”
“뭐?”
“저는 지금 들어야겠으니까, 들어오시라구요.”
그래서 나는 들어야겠다. 지금 그가 나에게 베푼 호의에 대해. 길게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이마를 짧게 짚은 백현이 ‘그래 알겠어. 다 얘기 할게.’ 라는 말을 남기고 나를 지나쳐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나는 지금 전장에 나가기 전, 심신을 가다듬는 한 나라의 장수가 된 것만 같았다. 마침내, 문이 완전히 닫혔음을 알리는 도어락 알림음 소리가 울렸다.
8.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나 진짜 상처 받아요.”
“………”
“여태, 선배 좋아하느라 밉보이기 싫어서 말도 못했어요.”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데?”
“지겹다는 표정,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
“……….”
“할 말 없으면 갈게요.”
백현의 머릿속에 겨울이 했던 말들이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겨울의 말을 듣고, 백현은 한참동안 자신이 어떻게 겨울을 보았는지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알 턱이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이 특정인을 바라볼 때 어떤 눈으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지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거 아닌데.”
하, 투박한 공기가 입 밖을 배회했다. 어쩐지 목도 뻐근한 것 같았다. 겨울이 저에게 등을 돌리고 쌩하니 가 버린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꾸 그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비단 이번 뿐만이 아니었다. 집에 데려다 달라며 당당히 말하곤 했던 상황도, 피곤에 찌든 저를 용케 알아채고 박카스를 건네던 상황도, 길가에 피어난 꽃을 보며 활짝 웃는 얼굴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미는 모습도, 저 멀리서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하하호호 떠들던 그 모습도. 그에게 그녀를 떠올리는 일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며칠 전, 백현은 저의 마음을 확실하게 정의 내렸다. 이건 쌍방이라고.
백현은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겨울에게로 향했다. 오해라고,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무엇이든 말 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손에 있던 휴대폰을 들어 어느새 익숙해진 번호를 누른다. 연결음이 재차 이어지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나를 보기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이겨울 아직도 전화 안 받아?”
귓가를 관통하는 그 이름. 백현은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어?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겨울의 친구들이었다. 여진은 통화연결음이 길어지자 이내 통화 종료버튼을 누른다.
“안 받는데? 아파서 자고 있나?”
“왜, 이겨울 아파?”
“아, 아까 아프다고 톡 왔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안 돼서요.”
그래, 아까 PC방 앞에서 보았던 겨울은 왠지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오들 오들 떨리는 몸. 날이 추워 그런 줄 알았는데- 백현의 미간에 여러 갈래로 주름이 이어졌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쓸어 올리고, 한 손으로는 애꿎은 휴대폰만 만지작 거렸다.
“가봐야 되나?”
“그래야 되지 않을까?”
“저기”
백현은 여진과 주연의 대화를 가로챈다.
“내가 가 볼게.”
어쩐지 겨울의 몸살이 제 탓이 된 것만 같다. 당황해 하는 그들에게 ‘집에 여러 번 데려다 줘서 어딘지 대충 알아. 혹시 이겨울 무슨 죽 좋아하는지는 알아?’ 라고 말하며 반박 경로를 차단한다. 그러면 그들은 머뭇거리며 겨울이 가장 잘 먹는 그 메뉴를 말한다.
9.
“여진이랑 주연이한테 우연히 들었다고요?
“응”
그니까, 왜 선배가 여기에 왔냐고요. 제가 묻고 싶은 건 내가 아픈 거랑 선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요. 목구멍까지 말이 차 올랐다가 사라진다. 그래, 아파서 궁상 떨고 있는 후배 챙겨주러 온 거겠지. 나는 또 한번 위안을 한다.
“왜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가”
대뜸 그가 물었다. 제가요? 아, PC방 앞에서요? 반문하면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 거린다.
“미워서요.”
“미워?”
“네.”
“내가 미워?”
“…………”
저봐 저봐. 무표정한 모습을 하고 남의 심장은 잘도 떨어뜨린다. 왜 인지 미움 받기 싫어하는 아기 오리 같아서 내 마음도 살짝 누그러질 뻔 했다. 그래서 내가 밉냐 재차 묻는 말에 차마 답하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그렇지 뭐, 아 머리가 다시 핑핑 돈다.
“그 음식점,”
“……….”
“교수님이 사주신대서 같이 간 거야. 뭘 좀 도와드려서.”
“…네?”
“거기서 저 중국음식 싫어요 할 순 없잖아.”
“………..”
그가 변명을 한다. 근데, 변명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구나. 하지만, 나는 태평히 이 얘기를 넘겨버릴 수 만은 없었다. 그 한 장면을 보고 며칠 간 끙끙 앓았던 내 모습과 부러 그를 피해 다니고, 얼렁뚱땅 넘겨 짚는 말만 해댔으니 말이다. 길게 숨을 내뱉었다. 쥐구멍 어디 없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꼬리를 살며시 비집고 새어 나오는 웃음은 막기 역부족이었다. 나는 참 모순적인 사람이라고 성찰하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일부러…..”
“……….”
더 할 말이 남았던가.
“그런 표정 지은 거 아니야..”
“……….”
“네가 나를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
“그래서 그랬어.”
“……….”
“상처일 줄 몰랐어, 전혀”
“…진심이에요?”
이번에도 백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홀린듯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검정색 머리칼에 손이 스쳤다. 고개를 아래 위로 작게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렸던 그 머리칼 위로 나의 손이 겹쳐졌다. 그가 잠깐 흠칫하더니, 내 손을 그대로 잡곤 저의 손에 꼭 가두었다. 내 손이 아래로 내려졌다. 나의 손에는 여전히 그의 손이 쥐어 있었다.
“예전엔 아니었어. 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봐도, 나한테 어떤 말을 내뱉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어.근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에 네가 스며들어 있었어. 하루가 온통 너로 가득했더라.”
담담한 그의 말투 때문인지, 믿기지 않는 말들이어서 인지. 시야가 흐려졌다. 깊게 잠식된 줄만 알았던 눈물이 이제서야 터져 나온다.
“겨울아, 자꾸 네가 생각나.”
볼에 눈물길이 새겨지자, 그가 나의 손을 잡고 있는 오른손을 뒤로하고 왼손으로 그 길을 조심스럽게 지워버린다.
“일주일 전에도, 어제도, 오늘도. 왜 연락이 없지, 이제 내가 싫어졌나, 아픈가, 바쁜가, 자꾸..자꾸 생각나.”
‘……….”
“네가 그랬지, 너 좋아하는 거 아니면 그만 흔들라고.”
“……네”
“이번에도 네가 말해 줄래?”
“……….”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종국엔, 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럴 수밖에,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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