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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자호란(丙子胡亂)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이전 상황
1636년 청태종은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12월 10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범하였다.
인조반정의 정권이 들어선지 채 1년도 못되어 반란사건이 일어난다. 이 반란사건은 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일으킨 것으로 1624년 1월에 문희, 허통, 이우 등이 인조에게 이괄이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간언을 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괄의 난은 인조가 한성을 버리고 도주했을 정도로 조선 조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내부 반란사건으로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떠난 사건은 처음이어서 민간과 조정은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민간에 대한 사찰이 강화되어 민심은 혼란스러웠으며, 게다가 이괄이 북방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내려옴으로써 변방의 수비에 허점이 생겨 후금의 침략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 당시 조선이 내부반란으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중국 대륙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형성하고 있으니 1618년에 누루하치는 후금을 건국하였다. 누루하치는 본래 건주위주에 속하는 부족장이었는데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동쪽에서부터 세력을 키워 점차 북쪽 장해, 색실 등을 점령해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만주의 동부와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은 퉁쿠스계의 부족으로 이들은 반농(半農) 반수렵(半狩獵)의 생활을 하고 있어 문화는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말을 잘 타고 용맹한 민족이었다. 중국의 수․당시대에는 말갈이라 불렀고, 발해가 융성할 때는 발해에 속해 있다가 후에는 거란에 속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여진족이라 불렀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을 오랑캐라고 불렀으며 무시했다. 명나라때에 이르러 여진족은 다시 분열되었다가 그 명대 말기에 이르러 누루하치가 건주의 여진족을 중심으로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운 것이다. 후금의 누루하치는 조선에 대해 친화정책(親和政策)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홍타시(태종)는 대륙정복이라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조선 정벌이었다.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일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후금에 투항하여 누루하치와의 화해를 맺고 청에 머물러 있는 강홍립의 위치는 중요하였다.
갑자년 이괄의 난에 구성부사 한명련이 참형을 당하자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참화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도망쳐 강홍립을 찾았다. 한윤은 “광해군이 폐위되어 버린 조정에는 간신배들이 들끓고, 그 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죽이고 있소.”
강홍립의 숙부이신 진창군과 처자 모두가 주살되었다는 말에 조선을 떠난 지 10년이 가까운 강홍립으로서는 한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언젠가는 가족에게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던 기대가 무너지면서 이를 악물고 홍타시의 막하에서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하였다. 홍타시가 조선정벌의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을 간파한 강홍립은 성의껏 홍타시를 모시고 있었으니 이것도 또한 정묘호란의 촉진제가 되지 않았겠는가!
강홍립을 지지한 사람은 바로 홍타시의 형 귀영개였다. 선왕 누루하치의 유언에 따라 순순히 아우 홍타시에게 왕위를 물려준 귀영개는 “먼저 조선을 칩시다. 조선을 치기 위해서는 전군이 필요 없고 정예병 3만이면 족하오.” “그렇다면 형님이 병사 3만을 인솔해 조선을 치십시오. 강장군은 조선 지리에 밝고 의견을 내세울 사람이니 향도를 맡아 안내하시오.
며칠 후 홍타시는 조선에 조서를 보냈다.
「조선의 왕은 우리 후금에 대해 무례한 짓을 저질렀도다. 그 첫째 부왕이 흉거하셨는데도 문상에 참여하지 않았고, 둘째 모문룡과 전투를 하면서도 우리 군사는 조선의 백성을 다치지 않게 했는데도 감사의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셋째 모문룡을 도와 우리를 배반했고, 넷째 조선은 우리 백성을 천시하여 박절하게 대하였으니 그 무례함을 응징하겠노라.」
홍타시는 이런 편지를 보냄과 동시에 병력을 출동시켰다. 인조 5년(1627) 1월 11일, 3만의 후금 군사는 요동을 출발해서 1월 13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향해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방어전을 폈으나 실패하였고, 인조는 장만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했으나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김상용 유도대장에게 명하여 한성을 지키게 하고, 소현세자는 전주,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을 하였다.
후금은 조선 측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들이 출병한 이유 일곱 가지를 밝혔다. 먼저 조선의 만주 영토를 후금에 내놓을 것,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3만의 군사를 지원할 것 등 세 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이에 최명길 등이 강화회담에 나가서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으며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앞세워 정묘약조를 성립시키어 후금을 철군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김홍립의 오해가 풀려 중간역할을 잘하여 많은 성과가 있었다. 정묘조약이 맺어진 뒤 후금은 군사를 되돌리고 두 나라의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와의 외교를 끊을 수 없는 점을 양해시키고, 조선은 후금과 명나라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킬 것과 국경에 무역시장을 열고, 두 나라가 형제관계를 맺어서 사이좋게 지내기로 하였다.
정묘호란은 이렇게 하여 막을 내렸으나 후금은 세력이 점점 커져서 1636년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고 고치고 왕을 황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조약에서 선정한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군신관계를 맺어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천 필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폐(歲幣)를 요구하고 군사 3만을 지원하라고 했다. 청나라에서 온 사신은 거만하게 청나라에 신하의 예로 대하고,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하니 인조는 불같이 노하며, 무례하기 짝이 없다며 청나라 사신을 만나기조차 싫어했다. 어전회의가 열리자 조정은 두 가지 의견으로 엇갈렸다. 청나라와 맞서 싸우자는 주장과 우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가며 나라의 힘을 키우자는 주장이 맞섰다. 주전파는 성리학자들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홍익한, 윤집, 오달제와 예조판서 김상헌 등이었다. 이무렵 주화파는 성리학에 비판적인 입장에 있던 양명학자인 최명길 등이 중심이 되었다. 전쟁을 하자는 주전론이 우세하자 인조는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의 교서를 내렸다.
청나라는 인조 10년(1632)에 이르러 형제지국을 군신의 나라로 정하고, 조선을 얕보고 멸시하는 태도를 취해왔으나 인조 14년 왕비 한씨가 죽자 조문사절을 보내어 조상하고, 자기 나라 후금국이 황제지국이 되었다는 통보를 하였다. 조정에서는 척화파 신하들이 후금의 부당한 처사와 오만방자함을 힐난하며 사신을 죽이고 척화하는 동시에 대항하여 싸우자고 비분강개하였다. 그러나 척화파들의 이러한 기개 만은 장하였지만 후금과 싸울 실력은 없었다. 더욱이 후금의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 등이 금천교에 임시로 마련된 왕후 한씨의 제청에 조상할 때 무사가 지키는 등 심상치 않는 분위기를 보이자 용골대와 마부대는 겁을 먹고 조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고 도망을 갔다. 이 모양을 보던 백성들은 일제히 일어나 큰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고 “오랑캐 놈들이 달아난다. 잡아 죽여라!”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큰 화근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비변사에서는 조선팔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문을 내려 백성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국가가 졸지에 정묘년에 난을 당하여 부득이 그들과 화친을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우리들을 자주 괴롭히고 국경을 넘어와 약탈을 감행하였으며 공갈하였다. 참으로 일찍이 없었던 수치이다. 국민은 모두 이 치욕을 씻고자 분연이 일어섰다.
이제 오랑캐는 더욱 창궐하여 황제라고 자칭하고 우리와 군신지국이 되겠노라하니 어찌 들을 수 있는 말이냐! 강약존망(强弱存亡)의 형세를 생각할 여지도 없이 대의로써 결단하여 그들의 서신을 물리치고 그 말을 배척하라. 오랑캐 사신들은 노하여 달아났다. 이것은 한양시민들이 모두 목격한 사실이다. 오랑캐의 내습이 조석 간에 있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우리 백성들은 이러한 정의의 의거를 알면 즉시 궐기하여 원수를 없앨 것을 맹세해야 한다. 전에 쓰라린 난을 겪은 일이 있으므로 먼저 국민에 고한다. 이 뜻을 각 도에 유고(諭告)하노니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은 각각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시민은 자원하여 전의와 싸움터로 나와 같이 도적을 물리치는데 총 궐기하라.」
이 글이 적의 사신을 통해 청태종에게 전해지니 이제는 꼼짝없이 무서운 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조정에서 척화론(斥和論)이 강력히 대두되니 화친을 주장하던 최명길은 이래가지고는 종묘사직이 위태롭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긴장을 풀고 화친을 계속하는 한편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척화파들은 최명길을 처벌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니 시국을 판단할 줄 모르는 처사였다. 10월에 이르러 청나라에서는 조선이 맹약을 어겼으니 척화 대신과 왕자를 보내면 화의에 응할 용의가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쳐들어 가도록 하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였다.
병자호란의 발발
병자년(1636) 11월, 조선의 사신이 심양에 도착했다. 국호를 대청으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태종은 위엄이 자못 대단하였다. 지난번 용골대가 도망친 일로 조마조마하던 사신을 태종은 점잖게 대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는 사신에게 친서를 주며 ‘척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모두 심양으로 보내라. 만일 따르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리라.’하니 이는 청태종의 경고였다. 중국대륙의 정복을 눈앞에 둔 태종은 만일 조선이 자신의 뜻을 따라준다면 구태여 발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척화론이 지배하는 조정에서는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 특히 수찬 오달제, 부교리 윤집 같은 사람은 국론을 해치는 한성판윤 최명길을 참하라고 상소했다. 최명길도 급박한 국난을 보고 소신을 굽힐 수 없었다. “국가에서는 수비할 계책도 없고 화의도 반대니 만일 적이 침입하면 무엇으로 막으리오. 적이 일단 국경을 넘는다면 일은 늦은 것이요. 그렇지 못하다면 화친으로 적을 막아야하오. 싸울 힘도 없고 또 화친은 반대하니 장차 변을 당하여 후회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입을 열면 곧 반대하고 백성을 척화로 이끌고 있소. 저들은 신의 참뜻을 모르고 화(和)자 소리만 해도 반대하니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같은 실정에서 화친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을 것이오. 후진의 고조(後晋의 高祖)는 신하 상유한(桑維翰)의 간언에 따라 거란에 스스로를 신하라 칭하고 후에 마침내 중원을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후에 고조의 아들 출제(出帝)가 즉위해서 상윤한의 진언을 무시하고 거란에 대적했다가 나라를 망쳤습니다. 상유한이 거란에 나라를 팔기위해 칭신(稱臣)을 간했습까? 아닙니다. 상유한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오랑캐의 힘을 빌리고 그것으로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눈앞의 체면을 고집한 출제는 나라를 망치고 무엇을 남겼습니까? 이 옛 고사가 바로 지금의 조선과 같은 것입니다. 척화의 소리는 옳은 것이나 그것을 받침할 힘이 없습니다. 화친은 부끄러운 일이나 그것으로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척화이며 무엇을 위한 화친입니까? 눈앞에 닥친 국난을 구하기 위해 지혜가 필요합니다.”
최명길은 자신을 참하라는 주위의 상소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인조를 잡고 애원하였다.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이 옳은 것 같으나 거센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청태종은 공공연히 침입할 날짜를 정해놓고 거듭 경고했지만 조정에서는 특별한 방책도 없이 척화론만 비등하고 있었다. 조선의 태도를 주시하던 청태종은 드디어 12월 1일, 청나라, 몽고, 한인으로 혼성된 10만 대군을 심양으로 집결시켰다.
인조 14년(1636) 12월 20일, 청나라 태종은 용골대와 마부대를 선봉장으로 삼고 10만 대군으로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침입하여 10일에는 안주로 쳐들어 왔다. 12일에는 의주부윤 임경업으로부터 장계가 들어오고, 13일에는 평양에 쳐들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더니 14일에는 장단에 이르렀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문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 임경업 장군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에는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합쳐서 8백 명밖에 없었다. 적에게 많은 군사가 있는 것처럼 꾸미는 수밖에 없었다. 10만의 청나라 군사를 막기 위해 임경업 장군은 성 둘레에 수백 개의 창검과 깃발을 꽂고 허수아비를 성 뒤에 잔뜩 세웠다. 또 모든 백성들은 횃불을 두 개씩 들게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군사들에게 화포를 쏘도록 하였다.
“저 성을 지키는 장수가 누구인가?” 마부대가 묻자 그의 부하가 임경업 장군인데 전략이 뛰어나고 호랑이처럼 용맹스럽다고 소문나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첫 싸움에 패하는 것보다는 임경업을 피해가는 것이 좋겠구먼.”
청나라 군사들은 백마산성을 건드리지 않고 피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사나운 기세로 쳐들어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무인지경같이 밀어닥친 것이다. 말로만 떠들어 대는 것은 조정의 벼슬아치들이고, 지방의 수령들은 적을 막아 싸울 생각은 않고 길을 비켜주는 형편이었다. 12월 14일 우선 종묘의 신주를 강화도로 옮기고, 빈궁과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으며, 인조와 소현세자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서울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인조 임금은 남대문 밖에서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했으나 적병이 이미 양천강을 건넜다는 허위 정보 때문에 강화도를 포기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전 철산부사 지여해가 나서며 아뢰기를 “적이 3일도 못되어 서울에 육박하였으니 그들은 매우 피로에 지쳐있을 것입니다. 포병으로 사현(무악재 고개)에서 적의 선봉을 공격하여 일단 저지시키면 그 사이에 강화로 들어가십시오, 신에게 5백 명의 군사만 주시옵소서.”
인조는 묵묵부답이었다. 5백은 고사하고 단 5십 명도 없는 형편이었다. 모두 뿔뿔이 달아나 제 목숨 보전하기에 급급하였다. 최명길이 나서며 아뢰기를 “신이 단기(單騎)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과 회담하여 지연시키겠사오니 그 시간을 이용하여 남한산성으로 가시옵소서.” 왕은 최명길의 뜻이 갸륵하여 궁중의 군사 2십 명을 주어 최명길을 보호하라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슬금슬금 달아났다. 최명길은 홍제원에 이르러 적장 용골대와 마부대를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끄는 작전을 폈다. 왕은 그 사이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2월 16일 청나라 대군은 마침내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한편으로는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한편 인조는 남한산성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방위태세를 갖추었다. 서울에서 달려온 신경진은 동쪽의 성의 망대를 지키게 하고, 구굉은 남문을 지키게 하며, 이서는 북문을 지키게 했다. 이학을 중군을 삼고, 수원부사 구인후는 부장으로 삼아 수원부의 병사로 조전(助戰)하게 했다. 이시백은 서성을 지키게 하고, 이직은 중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군사는 모자랐다. 여주목사 한필원, 이천부사 등이 약간의 병사를 이끌고 왔으나 성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모자라는 인원이었다. 어쨌거나 적은 무인지경으로 달려 5일 만에 경기도 일대를 지나 서울로 들어왔다. 남한산성은 필요한 군사를 갖지 못해 허울뿐인 성벽이 되었으니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밤늦게 파주목사 기종원이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성에 도착하였다. 성안의 병사의 수가 9만 2천이요, 문무관원이 2백, 노비가 2백여 명, 호종관과 노복이 합쳐 3백여 명이 성안에 있었다. 이날 인조는 성안의 모든 사람을 모아 유시를 낭독했다.
「과인이 덕이 없어 오늘 같은 비운을 겪으니 슬기가 없어 살피지 못함이요, 어질지 못해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하지 않은 바이요. 강병을 기르려 하지 않음은 아니었으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이러므로 적이 우리를 업신 여기고 쉽게 침범하였도다.
지난 정묘년의 치욕을 당할 때에는 후일을 위한 계책이라고 여기고 치욕을 당했으나 이제 오랑캐가 감히 천자를 칭하여 대의를 더럽히고 오만한 요구로 우리를 능멸하느니 화의는 사라졌다. 이기면 남을 것이요, 이기지 못한다면 모두 망할 것이다. 원컨대 모두 죽음으로 살기를 구하라. 노력으로 평화를 얻자. 모두의 뜻을 하나로 모아 대적한다면 멀리서 온 적은 우리를 얕볼 수 없을 것이다.」
인조의 유시가 낭랑히 퍼지자 문․무 대신들은 물론이요 병졸에 이르기까지 눈물을 아니 흘리는 자가 없었다.
「우리가 의를 쫒으니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요, 곧 원군이 도착하면 적이 오히려 우리를 두려워할 것이다. 무릇 어른은 아이를 사랑하고 아랫사람은 웃어른을 도와 한마음으로 어려움에 맞서라. 우리는 모두 한 성안에서 삶과 죽음을 같이하는 사람이다. 이 추위와 이 고통을 당하여 어찌 혼자 편하기를 바라리오. 과인의 마음이 바늘로 찌르는 듯이 아프건대 모두의 마음이야 또 어찌 괴롭지 않을까! 오직 뜻과 힘을 합쳐 서로 보전키로 힘쓰라.」
치욕에 분연히 일어선 인조의 음성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가슴을 치며 엎드리는 신하가 있는가 하면 엎드려 방성대곡을 하는 백성이 있었다. 12월 19일이 되었다. 적은 쉽게 항복하리라 믿었다가 일이 여의치 않자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군사들은 성루에서 대포를 쏘아 적을 쫓는 한편 총융사 구굉(具宏)이 출정해서 적군 2십여 명을 죽였다. 군관 이성익(李成翼)도 용감히 싸워 오랑캐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정축년의 새해가 되었다. 외로운 산성에서 오랑캐에 둘러싸여 맞은 새해라 허전하였다. 이제 성안에는 마초가 떨어져 군마(軍馬)가 쓰러지고 백성들은 허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식량은 양곡 1만4천3백석, 장 2백2십 항아리, 약 오십일 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이런 상태로 버틴다면 얼마를 더 견딜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 겹겹이 둘러싸여 외부의 소식이 차단된 성에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산성은 고립되고 군량미도 떨어져 부득이 식량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군은 도착하지 않고 군량미도 차츰 떨어져가고……. 그렇다고 항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묘년으로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좀 더 대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내일에 대처했던 들 이런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친론과 척화론
최명길이 주도하는 화친론(和親論)과 김상헌이가 주도하는 척화론(斥和論)이 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목숨을 건 대립이었지만 그 배경을 간단히 기술해 본다.
최명길이가 주장하는 화친론은 당시 조선의 힘으로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치솟아 오르는 후금의 국력을 당할 수 없으므로 서로 화친하여 조선의 안위를 보전하는 것이고, 김상헌의 척화론은 이백년이나 섬겨 온 명나라가 있으니 오랑캐와 화친을 꾀하는 것은 도리를 모르는 금수(禽獸)의 소행이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최명길의 화친론에 타당성을 부여하게 되지만 당시 사정으로는 그 명분에 있어서 김상헌의 척화론이 우위에 있었으므로 최명길의 화친론과 오랑캐에 머리 숙인다는 매국노의 누명을 써야할 만큼 위험한 것이다. 화친론은 척화론이 첨예하게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선 조정은 인조 14년 병자호란을 맞았다. 또 한번 소용돌이 속에서 화친론이 조정의 공론으로 채택되었다면 병자호란 같은 참극은 경험하지 않았겠지만 그가 매국노로 몰릴 만큼 척화론이 우세한 그 당시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남한산성이 청나라 병사들에게 완전 포위된 지 23일째인 1637년 1월 18일, 조선 조정은 청나라 진영에 화친을 청하는 국서를 보내기로 했다. 바로 그 국서를 최명길이가 쓰고 있는데 김상헌이 그 사실을 알고 달려와 국서를 찢어 팽개치면서 최명길을 질타했다. “지천 자네! 선대부께서는 사우(士友)들 사이에 지조있는 선비라고 추앙을 받았는데 자네는 어찌 그 모양인가? 선대부께서 통곡을 하시고 계실걸세.” 그러나 최명길은 태연히 대답했다. “대감께서 찢으셨지만 저는 도로 주워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최명길은 김상헌이 찢어 팽개친 국서를 주워 모아서 풀로 붙인 것이다. 찢은 사람 열지자(裂之者)는 김상헌이었고, 주운 사람 습지자(拾之者)는 최명길인 셈이다. 여기서 열지자도 가(可)요, 습지자도 가(可)라는 말이 생겼는데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를 모두 옳다(可)로 보는 것은 두 사람의 참뜻이 모두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이 꼭 한 가지일 수만은 없다. 김상헌의 명분론도 때로는 필요한 것이었으나 그 어려웠던 시기에 실리론을 펼칠 수 있었던 최명길의 용기는 더욱 귀한 것이다.
치욕의 삼전도
주전파와 척화파가 한참 논쟁을 펼치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조는 결심을 한다. 인조 15년(1637) 1월 30일, 남한산성에 몽진하여 적국과 대치하고 있던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인조는 소현세자와 휘하들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선다. 적장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서이다. 적장이란 후금을 창업한 누루하치의 아들인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를 말하지만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 조성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를 오랑캐(만주족)의 괴수로 멸시해 왔으므로 그에게 머리를 숙여야하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 마련된 수항단(受降檀)에 올라 청태종 홍타이치에게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지 2백46년, 조선의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몸소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청태종 홍타이치는 항복한 조선왕에게 견딜 수 없는 수모를 강요했다. 전쟁의 책임을 조선 조정에 전가하는 이른바 전후 처리하는 착취의 감행이었다. 그중 하나가 수항단에 마련되었던 자리에 비석을 세워 청태종 홍타이치의 위명을 영원히 기리되 그 비문은 자신들이 검증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오랜 논의 끝에 대제학 이경석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참판 오준에게 쓰게 했으며 참판 여이징으로 하여금 전서하게 하였다. 짓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통한의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괴수를 황제라고 부르고, 그의 은혜를 입어 조선 종사가 유지되며 따라서 백성들이 편하게 살게 되었음을 돌비석에 새겨 만세에 전해야하는 욕스러운 문장을 지어야하니 조선의 사대부로서는 피눈물을 쏟아야하는 수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전문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대청 숭덕 원년(大淸 崇德元年) 겨울 12월에 관온 인성(寬溫仁聖) 황제께서 우리 편에서 먼저 화의를 깨뜨렸으므로 크게 노하시어 위무(威武)로 임하시어 바로 동녘을 치시니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 남한산성에 계셨는데 위태롭고 두려워 마치 봄날 얼음을 밟는 것 같으시어 밝은 해를 기다리시기를 50일이나 되었다. 동남쪽 여러 군사가 잇따라 피해 무너지고 서북쪽 군사들은 산골짜기에 틀어 박혀 한걸음도 나오지 못하였으니 성 안의 양식 또한 떨어졌다. 이러한 때에 황제께서 대군(大軍)으로 성에 육박하시니 마치 서릿발 같은 바람이 가을 낙엽 껍질을 휘몰아가려는 것 같고, 화로의 이글거리는 불이 조그마한 새털을 태워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므를 삼으시고 오직 덕을 펴시는 것을 앞세웠다. 그리하여 칙유를 내리시어 항복하면 짐은 너를 온전하게 할 것이다.’하였고 용마(龍馬:용골대와 마부대) 등 여러 대장들이 황제의 명에 따라 길에 가득 차 있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 문․무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으시고 ‘내가 대국(大國)에 화호(和好)를 의탁한지 10년인데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내가 어둡고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천토(天討)를 재촉하여 만백성이 어육(魚肉)이 되게 한 것이니 죄는 나 한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차마 죄인을 도륙하지 않으시고 이와 같이 타이르시니 ‘내 어찌 감히 타이르심을 받들어 위로 우리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시고, 아래로 우리 생령들을 보호하지 않으리오.’하셨다. 대신들이 찬성하여 마침내 임금께서는 수십기를 거느리시고 군전(軍戰)에서 죄를 청하였는데 황제께서는 예로써 우대하시고 은혜로써 가까이 하시었다. 한번 보고 심복으로 허락하셨으며 물품을 하사하는 은택이 신하들에까지 고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황제께서는 곧 우리 임금님을 서울로 돌아가시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를 부르시어 서쪽으로 돌아가자 하셨다. 백성을 무마하시고 농사를 권장하시니, 멀고 가까운 곳에 새떼처럼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와서 우리나라의 수천리 산하가 이전과 같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가 상국(上國)에 죄지은 지 오래되었다. 기미년(己未年)의 전쟁에 도원수 강홍립이 명나라를 돕다가 패하여 사로 잡혔다.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누루하치)께서는 다만 홍립 등 몇 사람만 머물러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돌려 보내셨으니 그 은혜가 한 없이 컸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모르다가 정묘년에 지금의 황제께서 동정(東征)을 명하시자 우리 임금과 신하는 강화도으로 피해 들어가서 화평을 청하였다. 이로부터 예우가 변치 않으시어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를 않았다. 황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시고 형제의 나라와 같이 보시어 강토를 복원하시고 강홍립 또한 돌아왔다. 그런데 불행이 근거 없는 논의가 일어나서 소란꾸미기를 선동함으로 우리나라에서 변방의 신하들에게 선칙하는 말에 불손한 말이 계속 돌아다녔다. 그 문서를 상국의 사신이 얻었으나 황제께서는 오히려 관대하게 용서하시어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먼저 명지(明旨)를 내려 나라에 출정할 시기를 효유하셨는데 귓속 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모면하지 못하였으니 우리나라 군신의 죄가 더욱 모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황제께서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시고 다시 일부 군대에 명하시어 먼저 강도(江都)를 함락시켜 궁빈, 왕자와 경사(卿士)의 가족들까지 모두 포로로 하셨는데 황제께서는 여러 장수들을 경계하시어 소란 떨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시고, 종관(從官)과 내시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셨다. 또 크게 은전을 내리시어 우리나라의 군신과 포로가 되었다. 권속들을 옛집으로 돌려 보내셨다. 서리와 눈은 따뜻한 봄으로 변하고, 가뭄은 단비가 되었으며 온 국토가 망한 것이 다시 살아나고, 끊어진 것이 다시 이어졌다. 동토(東土) 수천리가 고루 생성(生成)의 혜택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만고의 기록에 드문 일이다. 한수(漢水) 상류, 삼전도의 남쪽은 곧 황제께서 머물러 계시던 곳이다. 단(壇)과 뜰이 있는데 우리 임금께서 공조(工曹)에 명하시어 그 단을 더욱 높고 크게 하시고, 또 돌을 깎아 비석을 세워서 황제의 공덕을 드날리어 영원히 전하게 하였다. 참으로 천지자연과 함께 함이니 어찌 우리나라만이 대대로 영원히 의지하랴.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 아무리 먼 곳에 있던 자라도 귀순하지 않는 자가 없으리니 그것은 모두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큼을 본뜨고 해와 달의 밝음을 그린다하더라도 그 만분의 일이라도 방불(彷佛)케 하기에는 모자랄 것이나 삼가 그 대략을 실을 뿐이다.」
그 치욕의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석촌동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공원 안에 커다란 돌 비석으로 세워져 있으며, 약 370여 년 전 청나라의 강압에 못이겨 세워진 통한의 역사는 참담하고 수치스러운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새겨 보게 한다.
난이 끝나고 떠나는 사람들
청태종 호타이치는 조선의 세자와 대군 한 사람을 인질로 요구하였다. 조선에 대한 더 많은 요구와 거기에 따르는 핍박의 여지를 남겨 두려는 속셈이었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거절할 수 있는 명분도 힘도 없었다. 인조는 피눈물을 쏟으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갈 소현세자와 민희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그의 부인 장씨를 홍타이치에게 인질로 내 주었다. 세자 내외와 대군 내외가 인질이 되어 청나라 서울인 심양까지 끌려가자면 그들을 호위하고 수행해야하는 조정의 관원들과 내시 상궁들도 있어야 했다. 춘성군 남이웅을 재신으로 삼고 대사간 박황, 창의 감남중 등의 품계를 올려 부빈객으로 삼아서 세자를 호종하게 하였으니 또 이들을 따라가는 수행의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과는 별도로 전범(戰犯)으로 지목된 척화대신들의 강제 연행도 있었다.
충절의 삼학사
대쪽 같은 지조로 홍타이치의 면전에서 조차 조선 선비의 기개를 꺾지 않았다하여 병자년의 삼학사(三學士)로 추앙받게 될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의 당당한 모습은 청사에 빛날 것이다. 조선 세자 일행이 심양에 당도하자 청태종 홍타이치는 몸소 조선인 인질들을 친국(親鞫)하겠노라 선언하고, 먼저 전범(척화신)으로 지목된 삼학사를 친국장으로 끌어냈다. 3월 7일, 청태종은 홍익한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 준다면 부귀영화를 할 수 있도록 극진히 대우할 것이라는 등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려 하였다. 홍익한은 조금도 굽힘이 없다가 홍타이치의 말이 끝나자 지필묵을 요구하여 자신의 심회를 글로 적어서 보여 주었다.
「온 세상은 다 형제가 될 수 있으나 천하에 아비가 둘 있는 자식은 없소. 조선은 본래 예의를 존중하고 간신(諫臣)은 오직 바른대로 주장함이 풍습으로 되어 있는 까닭으로 지난 봄 간관의 직을 맡고 있을 때 청국이 장차 맹약을 배반하고 황제를 참칭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만약 정말 맹약을 어긴다면 이것은 곧 천지가 둘 있게 되는 것이요, 한 집에 어찌 형제가 어그러지는 일이 있을 것이며, 하늘과 땅 사이에 어찌 두 천지가 존립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나는 위로 임금과 어버이가 다 계시되 모두 안전하게 부호해 드리지 못하였으며, 왕세자와 대군을 포로로 가게 하였고 늙으신 어머님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소. 내 한 장의 상소로 인해 나라의 환란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충효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는데 어찌 살기를 바랄 것 인가! 천만번 죽더라도 마음에 달게 여기고 피를 북에 바르면 넋은 하늘을 날아 고국으로 돌아가 놀 것이니 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 일이요. 이 밖에 더 할 말이 없으니 어서 나를 죽여주기 바라오.」
홍익한의 뒤를 이어 윤집과 오달제도 홍타이치의 친국장에 끌려 나왔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가기 전 전날인 1월 29일, 두 사람은 최명길에 의해 적진에 넘겨졌다. 적진에 당도하기 전 최명길은 윤집과 오달제에게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빌면 무사할 것이니 자신의 말을 따라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였으나 두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홍타이치는 역시 타이르는 말로 두 사람을 극력 회유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들의 목을 쳐라.” 세 사람의 조선 선비들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결의를 굽히지 않은 채 심양성의 외양문 밖에 마련된 형장에서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참되고 값진 삶을 마감하였다. 후일 청나라 조정에서도 삼학사의 놓은 기개를 가상히 여겨 그들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심양성 외양문 밖에 사당과 비석을 세우고, 그 비에 ‘삼한산두(三韓山斗)’라고 새겼다. 조선의 태산북두와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조선 땅에는 ‘환향년’이라는 말이 생겼다.
병자호란으로 만주 땅에 끌려간 조선인의 남녀 수는 자그마치 50여만 명을 헤아렸다. 그들 대부분이 곱고 나이 어린 규중처녀들과 사대부가의 내당 마님이었기에 후일 그들이 용케도 목숨을 부지하여 고향에 돌아왔을 때에는 조선 땅에 ‘화냥년(還鄕女)’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다. 병자호란이 안겨다 준 치욕적인 비극은 우리를 다시 한 번 몸서리치게 한다. 심양에서 돌아온 기혼 여성들은 갈 곳이 없었다. 사대부가에서는 돌아온 처첩들을 화냥년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았던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의정 장유까지도 속환되어 돌아온 며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구나 장유의 딸은 봉림대군의 부인이 아니던가! 이름 있는 사대부가에서는 모두 장유와 뜻을 같이 하였다. 여인의 절개에 도덕의 척도로 평가하던 시절이라 설사 그것이 전란으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할지라고 이미 더럽혀진 여인들에게는 오직 화냥년이라는 치욕의 굴레가 씌여질 뿐이었다.
버림받은 여인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더러는 목을 매고 더러는 강물에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길가에는 여인들의 주검이 즐비하였다. 최명길은 인조의 배알을 다시 청하였다. 환향녀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최명길은 “비록 ‘환향녀’들이 절개를 잃고 몸을 망쳤다고는 하나 이는 스스로 음행을 자행한 것이 아니옵고 극심한 전란과 적지에 인질이 되었던 만부득이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신이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오나 나라에 힘이 있었던들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아오리까?”
인조는 탄식만 거듭하였다. 최명길은 궁여지책을 진언하였다. 각 고을에 있는 강을 지정하고 정해진 날에 지정된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게 하는 것으로 심신을 모두 닦은 것으로 하되 그런 연후에 따뜻이 맞아들이도록 하라는 전교를 내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인조는 최명길의 진언에 따른 교지를 내렸다. 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충청도는 금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은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자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사대부가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인조의 수습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쟁 결과와 후유증
장장 8년 동안 인질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는 명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계기로 청나라 정책에 동조했고, 보다 넓은 세계에 눈을 뜸으로서 비극의 길을 걷게 된다. 청나라 섭정왕 다이곤이 오삼계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진군할 때 소현세자를 데려 갔다. 소현세자는 서양에서 들여온 신문물에 눈뜨게 되었다. 북경에서 머문 것은 70여일이었으나 7년간에 버금가는 변혁의 시간을 갖고 심양에서와는 달리 그의 행동이 자유스러웠다. 이미 명나라가 멸망하였으므로 청은 더 이상 소현세자를 구속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에 북경에서 많은 사람과 접촉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서양 선교사이자 과학자인 아담샬과의 교유는 그의 사상을 바꿔놓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아담샬과 자주 만나 역법, 천문학, 천주교 등과 같은 서양문물에 거침없이 심취하여 되도록 많은 것을 배웠다.
인조 22년(1644) 11월 26일, 마침내 소현세자는 8년의 볼모살이를 청산하고 민희빈과 두 아들 석린, 석견 등을 대동하고 북경을 떠나 조선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인조를 배알하는 자리에서 청태종에게 선물 받은 용현(벼루)을 내놓자 그 벼루를 던진 것이 머리를 맞아 소현세자는 병석에 눕게 되었고, 어의(御醫) 이형익이 놓은 침을 맞고 사흘 만에 사망하였다. 소현세자가 고국으로 돌아와 인조의 미움을 받지 않고 또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와 서양문물의 교류는 적어도 백년은 앞당길 수가 있었겠지만 그 기회가 무산된 것은 조선왕조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척화파 김상헌과 화친파 최명길이 심양 땅에 잡혀가 하옥되어 조우하게 된다. 인조 19년(1641) 전범의 죄인으로 심양 땅으로 잡혀가 하옥되어 있던 김상헌이 의주 옥으로 옮겼다가 다시 심양으로 끌려가 무기수들이 수감되는 남관의 옥사로 옮겨졌는데 그곳에서 최명길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주장만 고집하며 서로의 진심을 털어 놓는다. 김상헌이 자신의 본심을 털어 놓으며 조용히 두 사람의 생각을 비교해 보니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는 구료.” 이에 최명길이 대답하며 “그대는 돌 같아서 돌리기가 어렵고, 나의 도는 고리 같아서 경우에 따라 돌리기도 한다오.” 서로 상극과도 같았던 주장을 되풀이 하다가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은 패전국이 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적국의 감옥에 유폐되지 않았던가!
척화파 김상헌은 주전론을 강조하다가 청에게 끌려갔지만 화친파 최명길은 왜 심양 감옥에 유폐되었나? 청나라와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명나라 장수 조대수는 전사하고, 병부 상서인 홍승수는 청에게 항복하여, 홍타시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군략과 정책을 고해 바치는 과정에서 최명길과 임경업, 정태화가 명나라와 밀서를 교환하였다는 사실과 가도의 침공에서 임경업이 헛총을 쏘았다는 것까지 고해 바치니 홍타시는 즉시 용골대와 정명수를 불러 사실을 조사하였다. 최명길은 조선에 미칠 화가 두려워 자진 청나라에 들어가 김상헌과 같은 감옥에 유폐되었던 것이다. 맹장 임경업은 충주 달천 사람인데 청나라 병사에 포박되어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자신의 신세가 가련했다.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서 또한 조선의 장수로서 제대로 일도 못해 보고, 청과의 전쟁에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허무하기도 했다.
인조 20년(1642) 청으로 끌려가다가 중간에 탈출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명으로 갔으나 명은 이미 멸망했고, 1645년에 청에 잡혀 조선으로 보내졌으나 조선에 돌아와 역모 연류와 조국을 배반하고 남의 나라로 도망쳤다는 죄목으로 고문 받다가 죽었다. 숙종 때 복관되니 그 모함은 두고두고 한을 갖게 했다. 청군에 의한 군사적 피해도 컸지만 민간의 피해가 막심했다. 청군은 도적질을 일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철군하면서 50여 만에 달하는 조선여자를 끌고 갔는데 이들의 목적은 끌고 간 여자들을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어서 속가(贖價)를 낼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에도 꽤나 많았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 하여 받아들여지지도 않아 이혼문제가 정치․경제․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배명사상에 빠져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광해군과 같이 실리주의 노선과 현실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다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 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