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제 |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은 적절한 것이었다 |
논의 배경 | 조선 15대왕 광해군(1608~1623년 재위)군은 중국대륙에서의 명청 교체기의 국제적 변동 속에서 명분보다는 실리적・자주적 외교를 추진하였다. 광해군은 건주여진이 후금을 건국하여 강성해지자 국방대비책으로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 박엽, 만포첨사 정충신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가 후금 정벌을 위해 원병을 요청하자 1618년에 강홍립·김경서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도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명령했다. 명군이 패하자, 강홍립은 부차 전투에서 후금에게 투항한 뒤 본의아닌 출병임을 해명하여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책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명분에 치우치지 않은 채 실리를 택한 뛰어난 외교 정책이당시의 정세에 비추어 적절한 정책이었는지 아니면 정세를 잘못 판단한 것인지가 논의의 초점이다. |
용어의 정의 | 광해군(광해군) : 조선제15대왕 명(明, 1368~1644년) 주원장(朱元璋, 자 국서(國瑞), 연호 홍무제(洪武帝), 묘호 태조(太祖), 시호 고황제(高皇帝))이 세운 나라 청(淸, 1616~1911년) 누르하치(Nurhachi, 奴爾哈齊,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으로 후금 건설. 공식 이름은 쿤둘런 칸, 연호 천명(天命), 여직(女直:여진의 명대 호칭), 이름 게렌구룬베 우지레 겡기옌(모든 나라에 은총을 내리는 영명한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고황제(高皇帝).)가 세운 나라 중립외교정책(中立外交政策) :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벌인 광해군의 실리적이고 자주적인 외교 정책. |
| 찬성 | 반대 |
주장1 | 논점 | 1. 명분과 실리를 다 추구하였다. | 1. 명분과 실리를 다 잃어 버렸다 |
논거 | 명과 후금싸움에 명을 지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아 명과 후금 양쪽으로부터 고립되지 않았다. | 임진왜란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잊었고 청으로부터도 나약한 존재라고 인식되게 되었다. |
주장2 | 논점 | 2. 결과적으로 후금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 2. 끝내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가져왔다. |
논거 | 광해군 재위기간중에 청으로부터 침입은 없었다. | 광해군때는 후금이 침략하지 않았지만 불과 1년후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
주장3 | 논점 | 3. 외세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적 노력이었다. | 3.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불과했다. |
논거 | 당시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적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 광해군의 정책은 위험한 줄타기정책이지 확실한 동맹국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