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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복음말씀묵상/ “저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27:45-50)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마27:46; 막15:34).
예수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27:50; 막15:37-38).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나의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분은 숨을 거두셨다(눅23:46).
그 후에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시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려고 말씀하셨다. “목마르다.”
예수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시고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그분은 머리를 숙이시고, 영을 넘겨드렸다(요19:28-30)
1. 다윗의 시편 22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큰 소리로 외치신 “저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말씀이 나에게 던지는 너무도 애절한 여운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미흡함이 나를 언제나 그 의미에 접근하도록 서성이게도 독려하기도 하였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다윗의 시편 22편의 깊이에 어느 정도 도달하고 있는가? 다윗의 “저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시22:1)라는 그 절망적인 부르짖음의 진정한 의미는 체험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은 단지 지식적인가?
시편 22편은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시로 알려지고 있다(벧전 1:10-12; 눅24:25-26, 44-47). 그러므로 이 시는 다윗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기초로 삼고 있지만 그 이상의 훨씬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께서 이 시에 있는 극심한 고통의 부르짖음을 인용하신 점에서도 입증된다.
주님은 제삼 시 즉 오전 아홉 시에 못 박히셨다(막15:25).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여섯 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셨다. 처음 세 시간 동안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으셨고, 마지막 세 시간 동안 그분은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심판받으셨다.
마지막 세 시간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고난받는 대속물로 여기신 바로 그 시간이었다(사53:10). 그러므로 어두움이 온 땅에 임했는데, 이는 우리 죄와 죄들과 모든 소극적인 것들이 거기서 처리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우리의 죄로 버리셨기 때문이다(46절).
45절의 때까지, 사람들은 그들의 온갖 불의함을 모두 들어내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불의한 것을 다 행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44절). 그리고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구주를 심판하셨고 그분을 버리셨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버리셨다. 왜냐하면 그분이 죄인들을 대신하셨고(벧전2:24; 사53:6). 우리 죄들을 담당하셨고(밷전2:24; 사53:6),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고후5:21).
처음 세 시간 동안 사람들은 그분께 온갖 불의한 짓을 행했고, 정오부터 온 땅에 어둠이 덮였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이 어두움의 마지막 오후 세 시쯤에 주님은 "엘리 엘리 레마 사막타니"라고 시편에서 인용하신 말씀들을 외치셨다. 주님은 사람들의 핍박을 받고 계실 때에는 하나님이 그분과 함께 계셨으므로 그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다.
그러나 후반 정오부터는 하나님이 그분을 버렸으므로 어두움이 임했다. 언제나 아버지와 ‘하나’ 이셨던 예수님께서 이 시간 아버지와의 분리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분은 크게 소리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신 우리의 대속물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분을 버리셨다.
2. 이사야 53장
이사야 53장은 바로 이때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십자가의 그분 위에 두셨던 때임을 계시하고 있다.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의로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들을 이 대속물 위에 올려 놓으셨고 우리의 죄들을 위해 의롭게 심판하셨다. 이 시간 동안 그분은 거기 십자가 위에 있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분을 버리신 것이다.
그분은 죄가 되셨다. 한편으로 주님은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심판하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의의 문제였다.
이사야 53장에서 병(질고)과 고통은 하나님에게 맞으며 버림받은 표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런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존재여서 멸시를 당하고 쫒겨났다. 하나님에게 벌받은 것으로 드러난 죄인하고는 아무도 관계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어긋나는 새로운 깨달음이 이사야 53장 4-6절에 표현되어 있다.
곧 이 한사람이 당한 고통의 원인은 그 사람 자신의 죄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죄에 있는데, 이 죄를 그가 지고 가서 없애버린다는 것이다(요1:29). 그리고 10-12절에서 하나님께서 결론을 내리신다. 멸시받고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은 자기 종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후손)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53:10-11).
종이 많은 사람의 죄악을 친히 담당함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할 것이라 하심은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다(롬5:19).
그러나 다윗의 생애의 많은 사건 중 이 시편의 내용과 일치하는 곳은 어디쯤일까? 다윗은 과연 어떤 환경에서 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망의 부르짖음을 토해야만 했을까? 많은 시편 학자들이 다윗의 위험과 전쟁으로 가득 찬 나름의 환경을 적용하면서 이 시편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없다는 것까지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한다.
3. 사무엘하 15-19장
그러나 본인은 사무엘하 15장에서 19장까지의 내용이 그 배경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시편의 특징은 죄 고백에 대해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으며 원수들에 대한 저주도 없다는 것이다. 주로 악인에 의해 죽음에 처한 의인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사무엘하 15-19장의 내용을 묵상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사무엘하 15장에서 다윗의 자식인 압살롬의 4년에 걸친 치밀한 반란으로 다윗은 예루살렘성을 떠나게 되며, 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심한 굴욕을 겪는다. 사무엘하 15:30절에서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고 한다.
다윗이 피신하기 위하여 감람산 길로 올라가면서 지나간 장소는 천년 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신 그 장소이다(막14:32-42). 다윗 시대에도 감람산 마루턱에는 성소가 있었다(왕상3:2). 그 환란 중에도 다윗은 계속 여호와께 기도하고 있었고(삼하15:31), 다윗의 기도의 응답으로 여기서 옛 친구(삼하16:17) 후새를 만난다.
감람 산마루를 넘어서자 다윗 일행은 베냐민 땅에 들어서게 되며 이곳의 사울왕의 사람들과 사울와의 많은 수행원이 다 보는 앞에서 다윗을 “피를 흘린 자”라며 심한 모욕을 당한다(삼하16:5-8). 그러나 다윗은 이 심한 굴욕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에 굴복한다.
다윗은 이 환란 중에도 한결같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로서 저주가 주술적으로 파괴되는 힘을 쓰지 못하게 한다. 다윗은 역경 가운데서도 악을 악으로 갚는데 사로잡히지 않는데(삼상24:13, 17, 19; 25:21, 26, 28, 33) 이 점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받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것을 입증한다(삼상25:30).
다윗의 병사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다윗의 생명을 지키려고 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문제를 완전히 임금 한 사람과 결부시킨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자기 백성과 전쟁을 벌려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 쓰기보다는 자신의 왕위와 생명을 노리는 아들 압살롬의 안전을 더 염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윗이 심복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마지막 동족상잔의 치욕의 전쟁을 명하면서도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어니라(삼하18:1-5). 동족 간의 살육이 이 만에 이르렀다(18:7).
아들 압살롬의 죽음과 승리를 전해 받고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18:33)고 통곡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이러한 다윗의 태도 때문에 군대의 사기가 떨어져 휴유증을 겪게 된다.
따라서 아마도 이만 명 이상의 참혹한 죽음을 가져온 동족상잔의 치욕의 전쟁과 다윗의 수하들이 분열되고 그 모반의 주모자가 아들 압살롬이었던 다윗 왕을 생각해 보라. 다윗의 그 많은 고난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친족과 친지들 간의 상상할 수 없었던 죽음의 투쟁은 다윗으로 하여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1)라고 이 내부적인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절규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22편에서 열조(4절), 모태(9절) 등의 표현에서도 유추할 수 있겠다.
4. 시편 22:21하 “주께서 응락하시고”
시편 22:21절하에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탄원 중인 다윗에게 대반전이 일어났다. 한순간에 깨달음이 찾아왔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에 순간에 반응하셨다. 한순간에 사망에서 생명 안으로 다윗을 옮기셨다. 다윗은 많은 고난을 거치면서 그러나 영적으로는 더욱 성숙해갔다.
“주께서 응락하시고”에서 사용된 히브리어의 완료시제는 다윗의 구원과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의 표현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과 애절한 탄원으로 시작한 다윗의 기도는 21절하에서 갑자기 하나님께서 자신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삼하12:10-12).
다윗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징계가 그 집에서 떠나지 않았다. 삼하 12장을 묵상하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는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셨는데 다윗이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죄가 두 가지니 벌도 두 가지이다.
곧 우리아를 살해한 벌로는 다윗 자신의 집에서 나온 칼이 그 죽일 대상을 찾을 것이다. 이 칼이 바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모반 사건이다. 간음에 대한 벌로는 다윗 자신의 아들이 뭇 사람들 앞에서 간음할 것이다(삼하16:22; 20:3). 다윗은 자기 자신에게 사형판결을 이미 내렸다(삼하12:5).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로 다윗은 새로운 삶을 허락받지만 형벌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삼하12:9-12절). 다윗은 여생을 사면받은 죄인으로 살아간다. 다윗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들였듯이 이제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집에도 새로운 삶을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신뢰한다.
우리아의 처가 이제는 다윗의 처 밧세바로 된다.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다른 모든 아들들(삼하3:2-5; 5:14-16)보다 더 사랑을 받아 왕위 계승자가 된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처럼 문제가 되었던 혼인에서 태여난 바로 그 아들을 사랑하신다(삼하12:25의 여디디야는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를 뜻한다).
시편22:21하의 다윗의 깨달음은 삼하12:10-12의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로 받아들이는, 곧 시편 22편의 다윗의 탄원의 기도가 하나님의 형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다윗의 자세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섬광같은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곧 다윗의 자아가 완전히 파쇄되고 온전히 주님만을 의뢰할 때 이 순간 하나님과 다윗은 영안에서 하나였다. 그 생사를 초월한 전적인 신뢰가 이 시의 후반부(시편 22:22-31절)가 전반부의 탄원시에서 찬양시가 탈바꿈하게 한다. 앞에서 이 시편의 특징이 주로 악인에 의해 죽음에 처한 의인에 대한 설명뿐, 죄 고백에 대해 한마디도 없고 원수들에 대한 저주도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왕으로서의 다윗의 입장, 곧 반란군도 역시 여전히 다윗의 백성이며, 반란군의 수괴 역시 자기의 아들 압살롬일 때 그 소년 곧 아들 압살롬이 모반의 주모자였다 하더라도 자기의 원수로는 여기지 않게 될 터이다.
이럴 때 왕으로서의 탄원이란 악인에 의한 죽음에 처한 의인의 수난으로, 왕으로서 모든 사태의 진상을 이미 파악하고 있을 때의 그러나 절박한 위기 앞에서, 사건의 구체적인 기술보다는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왕의 기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교훈적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시나이다”(시편 22,1-2). 도저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어떤 극단적인 종류의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하나님이여”를 두 번이나 외치며, “어찌”라는 표현이 부르짖음의 절박함을 드러낸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에 의해 사용된 표현이다. 다윗이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른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신 듯하다. 다윗이 낮에도 밤에도 끊임없이 부르짖어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시다.
시편6:8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벌레”(톨라)는 형용사적으로는 ‘붉은’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홍색을 띤 지렁이나 구더기류를 일컫는다. 부패물에서 나온 것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은유적으로 ‘악하고 멸시당하는 존재’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머리를 흔들며”는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경멸과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다(마27:39). 사람들은 다윗을 비웃으며 여호와께서 저를 구원하시지 않음을 인해 그의 믿음을 조롱한다.
비록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을 경험하였음에도 현실은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믿음과는 전혀 다른 공허한 것임을 나타낸다. 시편 22:8에서 사용된 이 표현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마27:42-43). 그러나 그들은 이 예언을 성취하고 있음과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시편 22편의 다윗의 고난은 지금까지의 그의 경험과는 사뭇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의 죄와 무능 때문에 이 상상할 수 없는 피바람의 전쟁을 야기 했다는 자책감과 절망감은 지금까지 그의 어떠한 고난의 경험과도 비교할 수 없이 처참했을 것이다. 자식과 가신들의 전쟁, 모멸감, 수치심, 괘심함, 원망, 죄와 무능, 고뇌, 그러나 일촉즉발의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은 너무나 엄중하다.
그러나 자기 때문이라는 다윗의 자기진단이 이 시에서 구체적인 적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버림이라는 절망감에 “저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며 절규하게 한다. 당신은 이러한 절망과 자기 포기의 긴박한 환경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어떤 것이든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볼 때, 아무것도 꿈쩍할 수 없으며 극단적인 무력감을 느낄 때, 어떤 환경 안에서 내가 미물처럼 전혀 존재감마져 느낄 수가 없을 때, 마치 지금 막 감옥에 갖친 죄인처럼 사방이 차운 쇠창살과 두꺼운 벽돌벽, 그리고 노려보는 같은 방의 각종 죄수들, 아무것도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절망적인 환경에 처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버림이라는 절망감에 “저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절규하는 당신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이 절망적인 환경으로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여기는 그 낮아짐 속으로 하나님은 나타나신다! 다윗이 본래 처했던 정황 가운데에서 당한 고난과 극도의 외로움은 주 예수께서 오셔서 당하신 십자가의 모형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그러한 외로움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그와 동일한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위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이상 어떻게 예수님의 죽으심이 다윗의 고난과 견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윗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과 연관 지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11-14에서 그 고난 때문에 ‘나는 너희들의 고난과 지금의 어려움을 잘 안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 고난이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듯이 고난은 우리를 예수님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분과 동일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놀라운 것을 공유하게 된다. 우리가 고난을 지겹고 원수처럼 생각하지 않고 친구로서 바라본다면 고난은 우리가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사순절을 맞아 이 말씀 묵상의 부담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떠나심을 절규하는 다윗의 영과 접촉합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죄가 되심으로 하나님의 떠나심을 체험하면서 외치시는 주님의 절규를 내 영 안에서 느낍니다!
오! 주 예수님!
주님께서 바로 나의 운명이시라는 강한 확신을 깨닫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운명이신 오 주 예수님이여!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주님께서 저의 운명이십니다!!!
아멘 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