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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재 순 주필
한국의 근현대는 동서 문명의 만남과 민중의 주체적 자각으로 전개되었다. 서양의 근현대는 약육강식과 부국강병을 내세운 국가들의 식민지 지배와 정복을 위한 전쟁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의 근현대는 강대국 일본의 식민 지배를 극복하고 민주 공화의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과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한국 근현대의 중심에는 동학운동, 독립협회, 신민회, 3·1운동이 있었다. 실학자들과 개화파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실패한 후에 동학은 아래로부터의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동학에 의해서 한민족의 실질적인 민주적인 민중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동학은 한국 근현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근현대의 기본원리와 이념을 민주화, 과학화, 세계화라고 한다면 동학은 민주공화의 이념과 체제를 알지 못했고 과학화와 세계화를 구현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안창호와 이승훈의 신민(新民)운동은 민주화와 과학화와 세계화의 근 현대적 이념과 원리를 온전히 알고 구현하려 했다. 1965년에 쓴 ‘이승훈, 심부름군에서 심부름군으로’란 글에서 함석헌은 “혁명 두목(최제우)의 목이 형장에서 떨어지는 바로 그 갑자년(1864) 봄에, 마찬가지로 이 역사를 위해 애를 태우고 장차는 그가 하려던 것보다 더 큰 혁명을 일으킬 한 운명의 아기(이승훈)”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혁명보다 안창호와 이승훈이 일으킨 인간 교육혁명이 더 큰 혁명이라고 함석헌은 말했던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도 함석헌은 동학사상을 유교·불교·도교의 사상들을 뒤섞은 비빔밥이라고 낮추어 보았다.
동학과 씨알사상의 시대적 맥락과 배경
홍경래난을 비롯해서 민중의 삶과 운동을 중시했던 함석헌이 왜 동학에 대해서는 이렇게 냉정한 평가를 하는 것일까? 함석헌의 동학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학사상과 씨알사상의 시대적 맥락과 내용적 차이를 살펴보아야 한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독립운동을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안창호와 이승훈의 교육독립운동은 독립협회를 계승한 신민회의 목적사업으로 전개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장엄하게 실패한 1894~5년 직후인 1896년에 독립협회가 조직되었다. 아무 준비 훈련 교육 없이 죽창 들고 혁명운동에 나갔다가 잘 훈련되고 준비된 일본군에게 수만 명이 살육을 당했고 이어서 10~30만 명의 농민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한민족은 새로운 국가를 세울 힘을 잃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길로 직행하게 되었다.
독립협회와 신민회는 동학운동에 대한 반성으로 민족교육 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안창호가 준비와 교육과 훈련을 그처럼 강조한 데는 동학혁명운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전제되어 있었다. 주문과 부적을 강조하고 부적을 불태운 재를 먹으면 건강해진다는 동학의 비과학적 행태는 정직과 진실을 추구한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운동과는 결이 달랐다. 독립협회와 신민회 계열의 인물들은 서양의 기독교 신앙과 민주정치와 과학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반해 동학은 비과학적 행태를 보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서구문명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안창호 이승훈과 함께 함석헌은 비과학적이며 배타적인 동학으로는 나라와 민족을 깨워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하다.
일본에 망명했던 동학 교주 손병희는 개화파 인사들과 사귀면서 전봉준의 동학혁명노선을 포기하였다. 독립협회의 인사들을 많이 끌어들인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출판교육문화운동에 천도교의 역량을 집중하였다. 10여년 동안 출판 교육 문화운동을 벌인 후에 천도교는 신민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승훈과 손을 잡고 3·1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함석헌은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등이 보여준 맑은 지성과 높은 양심, 순수한 영혼에 비하여 200만 신도를 아우르는 큰 종단 천도교의 지도자였던 손병희, 최린 등이 보여준 정치적인 행태를 비판적으로 보았을 것이다. 무교회 신앙을 통하여 맑은 지성과 높은 양심과 순수한 영혼을 추구한 함석헌은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사용하며 정치적 지향을 가진 천도교 신자들을 높이 평가할 수 없었다.
동학의 정신문화사적 배경
동학은 한민족이 근현대에 창조한 종교사상이다. 동학에는 동아시아와 한국의 정신문화적 전통과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다. 동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동아시아(중국)와 한국의 정신문화적 특징과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 정신문화의 특징과 성향
아시아 대륙의 중앙에서 형성된 중국의 정치종교문화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넓고 큰 아시아 대륙의 높은 산들과 큰 강을 아우르며 거대한 통일국가를 형성한 중국은 유기체적이고 통합적인 정신문화를 형성했다. 중국 문명은 자기중심적인 중앙을 가지고 전체를 아우르는 느슨한 통합을 이루었다. 중국문명에서는 중심적 통일이 강조되면서도 정복적 억압적 성격은 약화되고 전체를 아우르는 느슨한 통일을 지향한다. 중국어는 이러한 중국문화를 잘 나타낸다. 중국어는 서양의 언어처럼 ‘주어 동사 목적어’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어와 동사가 앞에 나온다는 점에서 중국인의 자기중심적 통일적 지향이 드러난다. 그런데 중국어는 주어와 동사가 앞에 나와 있지만 주어와 동사가 전체문장을 확고하게 지배하지 않는다. 중국어의 낱말들은 그 의미가 확정되어 있지 않고 모호하며 맥락과 연관에 따라 의미가 바뀐다. 중국어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중국어와 마찬가지로 중국문화는 확고한 통일적 자기중심을 가지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느슨한 유기체적 화합(和合)을 지향한다.
농업사회에 기초한 중국 문명은 하늘과 땅의 자연 질서와 법도에 순응하는 조화롭고 현실적인 정신문화를 발전시켰다. 하늘과 땅과 인간(생명)의 합일을 지향하는 정신과 철학을 발전시켰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로 되는 길을 찾고 그 길을 충실히 가는 도덕철학을 확립하였다. 중국의 철학은 천지인 합일에 이르는 길을 찾고 그 길로 성실하게 가는 도(道)의 철학이며 그 길로 가는 힘과 역량을 기르는 덕(德)의 철학이고 도와 덕을 몸, 맘, 삶에 체화하는 수행의 종교이고 천지인 합일에 이르는 삶을 알뜰하고 성실하게 사는 생활 종교이다. 유교, 도교뿐 아니라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도 수행과 생활의 종교다.
중국의 정신문화는 천지인 합일을 이루는 통합적 생명철학을 형성하였다. 주역에서 하늘(乾)과 땅(坤)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생명과 인간을 낳고 살리며, 기르고 보살핀다. 만물과 생명과 인간은 하늘과 땅의 법도에 따라 계절의 질서와 변화에 맞추어 살아간다. 하늘과 땅과 인간(생명)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어우러져 하나로 되어가는 삶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유교와 도교는 하늘의 법도와 질서에 맞추어 살려는 노력과 함께 땅의 질서와 조건에 맞추어 살려고 하였다. 땅의 물질적 질서와 영향을 반영하는 음양오행설, 풍수지리설이 나왔으며, 인간이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간에 따라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명리학이 발달했다.
중국문화에는 땅의 물질적 차원을 넘어서 하늘의 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요소와 땅의 물질적 조건과 영향을 강조하는 형이하학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중국문화는 하늘과 땅과 인간(자연과 생명과 정신)을 통합하는 공동체적 생명철학을 낳았다. 그러나 중국문화는 서양문명에 비추어 결여된 것이 두 가지 있다. 서양문명에서 그리스인들은 순수 수학(기하학)을 낳았다. 순수 수학은 실용적인 필요와 목적과 관계없이 수학의 원리, 개념, 논리, 정의를 그 자체로서 탐구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실용적인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으나 순수 수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수를 가지고 인간과 국가의 운명을 점치려고 하였고 비과학적인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과 명리학을 발전시켰다. 음양오행이나 풍수지리가 인간의 생명과 정신에 대한 물질(환경)의 제한적인 영향을 말하는 것이라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음양오행과 풍수지리가 인간의 생명과 정신에 대한 물질적 조건과 요소들의 결정론적 운명론적 지배를 뜻한다면, 그것들은 인간의 생명과 정신을 억압하고 해치는 비과학적인 불건전한 사상으로 전락한다.
또한 중국문화에는 서양문명의 한 축을 이루는 히브리 기독교의 초월적 신앙과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중국은 천하(天下), 하늘 아래의 세상이다. 중국문화는 하늘을 뚫고 나아가는 초월적 정신이 부족하다. 히브리 기독교 신앙은 역사와 사회의 바닥에서 고난 당하면서 하늘과 땅을 뚫고 나아가는 초월적 하나님 신앙을 발전시켰다. 히브리 기독교는 생명과 역사의 중심에서 하늘과 땅을 초월하는 절대적 초월자 하나님을 믿었으며 초월자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우주 자연과 역사를 초월하는 영혼에 대한 신념과 이해를 발전시켰다.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하는 창조자 하나님은 역사와 사회에 대하여 무한히 초월적이면서 인간과 아주 친밀한 인격적 하나님이다. 중국문화에는 하늘을 뚫고 나아가는 초월적 창조적 혁신적 사고가 부족했다.
한국 정신문화의 특징과 성향
아프리카에서 인류가 세계로 퍼져나갈 때 한민족은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아시아 대륙 끝까지 나아간 민족이다. 주어진 땅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낫고 아름다운, 밝고 따뜻한 삶을 찾아서 해 뜨는 동쪽으로 이주해가면서 한민족은 하늘을 우러르며 높은 뜻을 길렀고 길벗들과 서로 돕고 보호하는 공동체적 사랑과 연대의 힘을 기르고, 위기에 대처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 아시아 대륙의 해 뜨는 동쪽 끝인 한반도와 만주에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아사달(아침의 나라, 땅, 朝鮮)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한민족의 건국설화들에서 하늘 열고 나라를 세웠다고 하며,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과 이치로써 교화하는 재세이화(在世理化)의 높은 이념을 제시하고, 서로 연대하고 화합하는 공동체적이고 생명 친화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해 뜨는 동쪽 아름답고 따뜻한 땅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하늘의 높은 뜻을 이루려고 했던 한민족은 하늘과 자신을 동일시했으므로 ‘한’민족, 한겨레라고 하였다. ‘한’은 하늘, 하늘님을 뜻하면서 큰, 하나를 뜻하는 말이다. 하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민족의 이러한 성향은 한민족의 종교문화적 특성을 이루었다. 한민족은 높은 산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제사하는 종교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밝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땅에서 큰 하나가 되어서 높고 아름다운 뜻을 이루려는 열망을 가진 민족이 된 것이다. 하늘(큰 뜻, 큰 하나)을 품고 밝고 따뜻한 땅을 추구한 한민족은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천지인합일의 정신과 사상을 추구하면서도 하늘을 우러르며 하늘을 중심에 두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과 하늘(하나님)을 직결시키는 한민족의 종교문화적 특징은 한국정신문화사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늘을 열고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설화들도 하늘과 나라를 일치시키는 민족문화적 특징을 드러낸다.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학자 목은 이색은 ‘하늘과 인간 사이에 간격이 없다’(天人無間)고 함으로써 중국인들이 추구한 천인합일의 사상을 보다 철저화하였다. 퇴계 이황은 ‘하늘과 나 사이에 간격이 없다’(天我無間)고 함으로써 천인합일사상을 보다 주체화하였다. 이런 정신문화적 성향을 바탕으로 정도전과 조광조는 유교의 이상을 조선왕조의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고 했다.
동학사상의 특징과 성격
동학은 서세동점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한민족의 주체적인 사상운동이었다. 서양의 정신문화에 자극을 받았으나 서양문화를 깊이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동학은 서양문화에 대항하는 동아시아와 한국의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사상운동이었다. 동학의 기본 가르침인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은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인 한사상이 오롯이 표현되고 피어난 것이다. 동학은 사람 속에 천주가 있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고 사람 속에 천지조화(천지의 창조와 변화)가 있다고 함으로써 사람을 중심에 놓았다. 이로써 동학은 유교의 천인합일을 넘어서 인간의 창조적 주체성을 강조했다.
천황씨는 중국역사의 창시자이고 최초의 황제인데 최제우는 “내가 천황씨다!”고 선언함으로써 중국의 정치문화에서 한민족의 주체적 해방을 이루고 인간의 역사적 종교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였다. 동학은 대자연의 전체생명(至氣와 天主)과 천지조화가 사람 속에 있다고 하고 사람이 하늘님이라고 함으로써 사람을 자연 대생명의 중심과 주체로 보았다. 동학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천지인 합일을 지향하고 세상(천지부모)을 긍정하고 물질과 생명의 기운과 변화(外有氣化)를 말하고, 인간 주체의 신령함을 긍정하는 창조적이고 종합적인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동학의 창시자들은 과학적인 우주관과 생명관을 갖지 못한 것 같다. 생명진화와 우주에 대한 과학적 합리적 사고가 이들의 사상에는 결여 되어 있다. 최제우는 인류의 첫 인간으로 여겨진 천황(天皇)씨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 수 없었고 최시형은 천지만물의 근원이 물이고 천지가 시작되기 전에 ‘북극태음 한 물’(北極太陰一水)이 있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동학혁명운동을 일으켰던 전봉준도 봉건왕조체제를 대체할 민주정치 이념과 체제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운수(運數)와 도수(度數)를 자주 말하고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불태워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가르침으로써 운명론적이고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청산하지 못했다. 「동경대전」‘불연기연’에서 과거 인류 역사의 시작은 알 수 없으나 미래는 미루어 알 수 있다는 최제우의 주장은 역사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이다. 사계절의 변화와 질서를 중심으로 우주 자연의 질서와 변화를 생각하는 것도 우주 자연 세계에 대한 지나치게 소박하고 단순한 관찰이다. 최제우는 음양오행, 풍수지리, 명리학에서 드러나는 중국문화의 비과학적이고 운명론적인 전근대적인 사유체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전근대적이고 비과학적 사고를 청산하지 못한 동학은. 함석헌이 말했듯이, 민중의 맑은 지성을 깨워 일으키지 못했다. 동학은 생명진화의 사실을 몰랐고 우주에 대한 현대적 과학적 이해가 없었으며 운명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역사관과 우주관의 흔적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고 봉건왕조를 대체할 민주공화정에 대한 이념과 안목이 없었다. 또한 인간의 죄와 죽음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깊은 고민과 성찰이 부족했다. 신분제를 타파하고 인간의 창조적 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동학의 세계관과 역사관에는 모호하고 신비한 운명론과 결정론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씨알사상의 현대적 의미
근현대의 특징과 원리인 민주화, 과학화, 세계화에 비추어보면 동학은 근현대의 사상과 철학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사민평등을 주장하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동학은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봉건왕조를 대체할 민주공화의 이념과 체제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최제우보다 1~2세대 앞서 살았던 정약용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최제우와 최시형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또한 서양의 새로운 문명을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 동학은 동서문명의 융합과 합류로 전개된 한국근현대의 시대정신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구현하지 못했다.
씨알사상은 생명진화와 우주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이해를 가졌고 운명론과 결정론을 극복했으며 민주공화정의 정신과 이념을 확고히 가졌다. 스스로 깨지고 죽음으로써 새로운 삶을 낳으며 진화하고 고양되는 생명과 인간의 ‘진화와 진보의 진리’에 대하여 씨알사상은 진지한 성찰을 하였다. 생각하는 이성을 강조하고 말과 글을 존중하고, 우리말과 글로 생각하고 표현했다는 점에서 진화와 진보의 사상이면서 동서문명을 아우르는 세계보편의 현대사상이라는 점에서 씨알사상은 동학을 넘어섰다.
절대 정직과 진실을 내세운 안창호는 과학적 인과관계를 자연만물과 역사와 도덕 정신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진리로 받아들였다. 힘이 없으면 일을 이룰 수 없고, 작은 힘으로는 작은 일밖에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안창호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과학적이고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였다. 안창호와 함께 절대 정직과 진실을 강조했던 이승훈은 이성의 이치와 가치를 충분히 강조하고 존중하였다. 그는 하나님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기적이나 요행, 허황한 신화와 교설을 부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 신앙이 기적에 의존하는 것은 ‘절대 불가’(大不可)라고 하였다. “야소교가 처음 발생(發生)했을 때는 신기적(神奇的) 사적(事蹟)으로써 교리를 천개(闡開)하고 인심을 경복(傾服)하였지만은 차차 금일과 같은 시대에는 오직 진리(眞理)에 정신(正信)이 아니면 아니 될 것이오. 기적(奇的)의 행동(行動)은 반(反)히 인심을 유혹하는 혐의가 있으므로 대불가(大不可)라 합니다.” 남강은 기독교가 생겨났던 고대와 자신이 사는 현대를 비판적으로 구분하였다. 고대에는 신화와 기적을 사용하여 교리를 알리고 사람들의 맘을 사로잡을 수 있었겠지만,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진리를 바로 믿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깊이 체험하고 높이 평가했지만 정직과 진실, 진리와 이치를 최고로 존중하였다.
유영모는 평생 동양문명의 뼈에 서양문명의 골수를 심는 일을 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교사로서 생각을 중심에 두는 영성적 생명철학을 형성했다. 그에게 생각은 이성의 관념에 갇힌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본 행위이며 신과의 영적 소통행위였다. 그러므로 그는 생각을 몸에서 캐낸다고 하였고 생각의 불꽃에서 ‘내가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에게 생각은 말씀의 불꽃이며 하나님과의 연락과 소통이다.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자아는 땅의 물질에서 하늘의 성령을 향해 솟아올라 나아가야 한다. 유영모의 철학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면서 생명을 살리고 높이는 생명철학이고 하늘(하나님)과 소통하고 연락하는 영성 철학이었다.
함석헌은 사람을 우주 대생명, 역사와 민족, 신적 생명의 씨알로 보았다. 그는 사람 속에서 천지창조 이전의 주체적 생명, 얼 생명을 보고, 죽음으로써 사는 씨알의 길을 말하였다. 그는 인간의 삶과 생각 속에서 신적인 창조와 심판과 구원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는 생각하는 이성을 강조하며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고 함으로써 주체적이고 과학적이며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인간관을 내세웠다. 그는 새롭게 낳고 보다 나은 생명을 낳는 갱신과 초월, 진화와 진보의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생명관과 역사관과 존재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동서의 전통사상을 비판하고 극복함으로써 유불도와 기독교를 아우르고 동학을 뛰어넘는 대종합의 사상을 형성하였다.
동서 문명의 만남과 민중의 주체적 자각으로 전개된 한국 근현대의 과제와 사명은 동학사상과 씨알사상으로 실현되었다. 한국 근현대의 민주 정신과 사상은 한사상, 샤머니즘, 유불도와 서양의 기독교, 민주 정신, 과학사상의 만남을 통해서 풍성해지고 깊어졌다. 이것을 민중의 종교철학과 사상으로 정립한 것이 동학과 씨알사상이다. 동학의 시천주, 사인여천, 인내천은 한사상을 알뜰하게 표현한 것이고 주문과 부적, 강신체험은 샤머니즘을 반영한 것이고 천주신앙은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고 자유와 평등의 민중정신은 서양의 민주정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동학에서 아쉬운 것은 과학지식과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서양문화의 자극과 영향을 받아서 민중의 주체적 자각과 혁명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근현대의 시작을 이룬다.
유영모와 함석헌이 닦아낸 씨알사상은 동학혁명의 실패를 딛고 일어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민중교육운동,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독립운동, 그리고 민족교육운동의 역사적 귀결인 삼일혁명에 담긴 한국 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을 심화 발전시킨 것이다. 씨알사상은 한국 근현대의 중심과 절정에서 형성된 철학이며 동서정신문화를 창조적으로 회통하고 융합한 대종합의 사상이고 민중의 주체적 자각을 일으키고 민중의 정신과 삶을 고양시키고 심화시키는 민주 생활철학이다.
동학혁명에서 삼일혁명을 거쳐서 씨알사상에 이르는 과정은 한국 근현대의 정신적 발전과 성숙의 과정이었다. 동서문명의 만남과 민중의 주체적 자각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동학과 씨알사상의 이러한 과정은 인간 정신의 성숙과 민주 정신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이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인간의 성숙과 민주 정신을 완성해가는 이러한 구도자적 과정은 인간과 인간 정신을 이해하고 성숙하게 실현하고 완성하려는 인류 정신사의 과제와 사명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과정이다.
한국 근현대의 이런 사명과 과제를 신영복은 ‘녹두씨알’이란 말로 표현했다. 그는 붓글씨로 ‘녹두씨알’이라 쓰고 그 아래 “녹두꽃이 지면 녹두씨알 열매 맺지.”라고 풀이했다. ‘녹두’는 동학혁명정신을 나타낸다. 아래아 ㆍ를 써서 씨알이라 쓴 것은 함석헌의 씨알정신과 사상을 가리킨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종교철학적으로 인간 정신의 성숙과 민주 정신의 완성을 추구한 한국 근현대는 동학혁명으로 시작했고 삼일혁명을 통해 발전 성숙했고 민주 정신과 철학인 씨알정신과 사상을 바탕으로 자치와 협동의 생명공동체적 시민운동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씨알의 소리’ 2021년 7·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