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 잠업의 역사
1) 조문국
의성군 금성면 명덕1리는 상리와 절골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상리(桑里)마을의 뒷산이 누에 머리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 주위에는 옛부터 桑田
(뽕나무 밭)이 많아 누에를 많이 쳤으므로 지금도 상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산 안쪽에는 절골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옛날 절이 있던 지역으로 절집이 없어진 이후에도
구전으로 전해져 지금도 절골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의성의 향토사 연구서인 "미광"에는
"그 옛날 조문국(소문국)의 왕이 나라의 동남산 형태가 잠두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양장을 장려
하여 잠사를 불러 상전을 개발하고 산명을 잠산, 상전을 상리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후 왕은 백성들에게 잠업을 권장하니 조문국은 잠업이 발달하여 인접 국가에서도 잠업을 시찰을 하고 양잠기술을 배워갔다" 는 내용이 나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경상북도 지역의 부족국가로는 경주의 사로국, 상주의 사벌국, 김천의 감문국, 경산의 압독국 영천의 골벌국, 군위의 적라국이 해당될 것으로 비정됩니다.
이 후 조문국의 왕은 잠종의 생산과 저장에 많은 불편을 느껴 조문국 동방인 빙혈(현 빙계계곡 빙혈)과 풍혈에 저장했다고 합니다. * 자료 : 미광 대정 15년(1925년)발간
2) 조선시대
조선시대 태종17년(1417년)에 의성현 북쪽 10리에 사진리에 잠실을 설치하고 책임자인
감고를 두어 잠업을 장려했는데 이것이 바로 도회잠실로 개성,가평,청풍,태인,수안,홍천,의성 등
7개 지역에 설치했습니다.의성에 도회잠실이 설치한 것은 아마도 잠종의 저장이 용이한 춘산면 빙계리 빙산의 풍혈, 병혈 등 천혜의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세종 7년(1425년) 의성잠실 감고 전부사정 장영계를 서용하여 뒷사람을 권장하라 하라고 명한 사실 이 세종실록에 전해옵니다.
* 자료 : 조선왕조실록
3) 일제 강점기 이후~
일제 강점기 때는 1908년에 발견된 춘산면 서원동(현 빙계동) 풍혈(빙혈 포함) 옆에 잠종의 저장
시설을 설치하여 우량 잠종의 보관 및 저장기술 개발에 노력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는 일본이 누에고치를 많이 생산하여 군복 등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것으로 저온 저장시설이 없던 당시로서는 빙혈,풍혈의 특이한 여건을 활용한 것입니다. 의성지방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을마다, 논.밭두렁마다 뽕나무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베이비붐세대(1955년생~1964년생)는 당시 초, 중등학생 시절로 학교가 파하면 할머니, 어머니를 따라 뽕잎따는 일과 누에 밥 주는 일에 매달려야만
했습니다. 지금은 하나의 옛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 자료 : 조선총독부관보(1910.11.29호), 조선총독부 관보 (1911. 1912년)
동아일보 풍혈빙혈 잠종저장소 보도 사진물 (1926.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