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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일시 : 2024-4-10 (수)
o 날씨 : 맑음
o 트레킹경로 : 통일전 - 서출지 - 남산동 삼층석탑 - 염불사지 삼층석탑 - 칠불암 -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고위봉 - 천룡사지 - 관음사 - 용장공용주차장 - 함월사 - 경애왕릉 - 삼릉 - 배리삼존불 - 지마왕릉 - 포석정 - 창림사지 삼층석탑 - 남간사지 - 일성왕릉 - 남산성지 - 불곡마애여래좌상 - 탑골마애불상군 - 미륵곡석조여래좌상 - 보리사 마애석불 - 헌강왕릉 - 정강왕릉 - 통일전(원점회귀)
o 거리 : 27km
o 소요시간 : 7시간 50분
o 지역 : 경주
o 트레킹 포인트: 경주남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남산화강암, 남산둘레길,
o 일행 : 나홀로
o 트랙 :
o 코스지도
염두에 두고 있던 경주남산 유적둘레길 트레킹을 나섰다. 경주 남산은 산 전체가 '야외박물관'이라고 불릴만큼 수많은 불교 유적이 산재하는데, 남산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 유적을 따라 남산을 한바퀴 돌아보는 대약 25km 내외의 트레킹코스다. 선답자들의 후기도 별로 없고 참고할만한 트랙도 없어서 사전에 꼼꼼히 도상훈련을 했는데도 남산입곡석불두는 두차례나 알바를 했음에도 결국 찾지 못했다. 출발지는 통일전으로 정하고 시계방향으로 남산을 돌아 통일전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남산의 하단부를 돌기 때문에 등산이라기 보다는 트레킹 또는 걷기에 가깝지만 칠불암에서 고위봉을 넘어 용장골로 이어지는 구간과 일성왕릉에서 남산신성을 넘어 불곡마애여래좌상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산행에 가깝다. 그리고 산속 높이 위치하고 있는 보리사 마애석불도 힘든 구간이다. 실제는 얼마 안되는 높이지만 20km 이상을 걸은 후라 체력적으로 부담을 느낄수 있는 곳이다. 전체시간을 대략 7시간 정도를 예상했는데 알바 등의 이유와 거리도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1시간 정도 더 걸린 것 같다. 중간중간 이정표와 안내판이 있기는 하지만 문화유적을 쉽게 찾아서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도 않고, 문화유적간 매끄럽게 이어지는 동선의 흐름이 아쉬웠다고 할까...
[경주 남산] 고위봉(494m)과 금오봉(468m) 두 봉우리가 중심이 된 남산은 남북(10km)으로 길게 누운 모습으로 경주의 남쪽에 솟아 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골짜기가 깊고 능선이 변화무쌍하여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릴 만큼 불상과 탑, 석등, 연화대좌 등 수많은 불교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적들은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두드러지기보다는 남산의 자연경관을 크게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가며 집단적으로 어우러진다. 산 전체를 기단부로 삼은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대표적인 예이고, 바윗면을 그대로 이용한 마애불이 특히 눈에 많이 띈다. 이 밖에도 남산 기슭에는 신라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을 비롯하여 신라의 천 년 역사를 마감하는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鮑石亭)’까지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역사적 장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불교가 신라에 전해진 이후 7세기 전반 경부터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몇 군데의 석축만 남아 있는 용장사지는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절을 감싸고 뻗은 동쪽 바위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데, 자연암석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기단과 탑신을 올렸다. 곧, 자연암석이 하층기단일 수도 있고, 그 아래 바위산 전체가 또한 하층기단일 수도 있는 셈이다.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스케일과 상상력으로 보면 세계 그 어느 석탑이 이에 견줄 수 있을까. 용장사지 삼층석탑의 스케일에 준하는 불상이 있다. 칠불암 위에 곧바로 선 남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신선암 마매보살상(높이 1.4m)이다. 불상은 마치 구름 위 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를 아래로 내려뜨린 채 유희하는 듯 편안한 자세(유희좌)이다. 풍만한 얼굴이지만 표정은 무심한 듯,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인간을 구제할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고 할까. 옷자락 역시 구름에 날려 흩어지는 듯 서서히 사라진다. 경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입지도 교묘하지만, 조각수법 또한 하늘을 나는 듯 표현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출지] 이곳은 까마귀가 신라 소지왕(재위 479~500)의 목숨을 구한 전설이 서려있는 연못이다. 소지왕 10년(488) 정월 대보름날에 왕이 궁밖으로 행차하였는데 쥐와 까마귀가 나타나 쥐가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라"하였다. 왕이 병사를 시켜 따라가게 하였더니 이 못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거문고 갑을 쏘시오" 라고 쓴 편지를 바쳤다. 이에 왕이 궁으로 돌아와 활로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랬더니 그 속에 몰래 숨어 있던 궁주와 승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 뒤로 이 못에서 글이 나왔다 하여 '서출지'라 하였으며, 정월 대보름 날에는 소지왕을 살려준 까마귀에게 찰밥을 주는 '오기일'이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경주지역에서는 정월 보름날에 아이에게 감나무 밑에다 찰밥을 묻어두는 '까마귀 밥주자'라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가에는 조선 현종5년(1664)에 임적이 지은 이요당이라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안내판)
[경주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이 두 삼층석탑은 염불사 터로 전하는 남산 동쪽 봉구곡 자락에 무너져 있던 것이다. 두 탑을 복원하기 전에 동탑은 도지동 어거사지 삼층석탑 1층 지붕들과 합쳐져 불국사역 앞에 세워져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3년과 2008년 두차례에 걸쳐 염불사지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역 앞의 탑을 해체하여 2009년 1월 이곳에 두 삼층석탑을 복원하였다. 두 탑은 비슷한 규모로 2층 바닥돌에 3층으로 몸돌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형태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피리사라는 절에 신기하고 기이한 승려가 있어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염불 소리가 서라벌 360방 17만호에 들리자 않는 곳이 없어, 사람들은 스님을 공영하였으며 스님이 돌아가신 후 피리사를 염불사로 고려 불렀다고 한다. (안내판)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은 칠불암 내에 있는 바위 면에 새겨진 7구의 불상을 지칭한다. 동쪽을 향한 넓은 바위 면에 삼존상이 있고, 삼존상 바로 앞의 네모산 돌기둥에는 면마다 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본존과 두 보살로 된 삼존상, 돌기둥의 게 면에 새겨진 사방불을 협쳐 모두 7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으므로 암자의 이름을 칠불암이락 부른다. 이곳에 있던 원래의 사찰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불상군의 핵심 불상은 삼존불 중앙의 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가사를 걸치고 '향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사방불은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손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정면에 해당하는 동쪽면의 불상은 약그릇을 지니고 있어 약사불임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뒤쪽에는 여러개의 구멍이 뚫려있다. 또 돌기둥 위에 홈이 파여 있고, 주변에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 원래 지붕을 덮은 석굴사원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에는 '약사경'과 '금강경'을 새긴 석경의 파편들이 발견되어 복과 장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민간의 약사 신앙과 관련된 사찰로 보인다. 석불의 제작시기는 석굴암 본존불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안내판)
[경주 배동 삼릉] 이곳은 신라 제8대왕 아달라왕(154~184), 제53대 신덕왕(912~917), 제54대 경명왕(917~924)의 능이 모여 있다고 해서 삼릉이라 부른다. 모두 박씨 왕들이다. 아달라왕은 도로를 개통하는 등의 내치에 힘썻고, 173년에 왜와 사신을 교환하였다. 신덕왕과 경명왕 대의 신라는 경주지역을 다스리는데 그쳤다. 국토의 대부분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가 이미 신라의 국운이 기운 시기였다. 중앙에 있는 신덕왕릉은 1963년 도굴을 당하였는데, 굴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되었고 벽면은 병풍처럼 색이 칠해져 있었다. 서편의 경명왕릉은 경명왕이 세상을 뜨자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한 후에 다른 곳으로 산골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안내판)
[경주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본존(本尊) 높이 2.75m, 왼쪽 협시상(脇侍像) 높이 2.36m, 오른쪽 협시상 높이 2.36m이다. 조선시대에 무너진 것을 1923년 복원하였다. 얼굴과 몸이 어린아이를 묘사한 점은 장창곡 삼존상과 같으나 장식적이고 생경한 것은 신라 조각사상 새로운 양식의 등장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肉髻)는 2중이며 소발(素髮)이다. 목은 없어 머리가 그대로 원통형 체구 위에 얹혀 있으며, 어깨선을 제외하고는 몸의 굴곡을 느낄 수 없다. 손은 큼직하고 시무외(施無畏)·여인원(與願印)을 짓고 있으며, 어깨에 걸친 법의(法衣)는 묵직하며, 앞면에 U 凸형 무늬가 4줄 있다. 이같이 둔중하고 강직한 작풍(作風)이 불상 전체를 지배하고 있으나, 동안(童顔)과 균형을 잃은 체구 등의 수법은 따뜻한 생명을 실감하게 하는 자신감이 넘친 기법이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이 있을 뿐이며 불상과 같은 돌로 만들었으나 거의 깨어졌다. 이 원형 두광은 얼굴·신체·의(衣)무늬 등과 함께 이 불상의 제작연대를 입증해 준다. 왼쪽 보살은 좀 수척하며 기법상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다.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쓴 얼굴은 눈을 바로 뜨고 미소를 띠고 있다. 허리는 가늘고 뒤틀려 있어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며, 하체에도 다소 입체감이 나타나 있다. 이 보살은 목걸이, 허리의 띠매듭, 다리에 드리운 U형 천의(天衣) 자락 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천의는 무거워 보인다. 오른쪽 보살은 왼쪽 보살과 달리 본존불에 가까우며 특히 장식적이다. 얼굴도 본존과 같이 눈을 내리뜨고 몸도 무겁게 처리되었다. 목걸이는 두드러지게 굵고 3가닥 선의 가운데 커다란 꽃을 장식한 점은 장창곡 좌보살상과 비슷하다.
천의도 묵중한 데다가 턱마저 없으며, 무겁고 굵은 달개[瓔珞]가 발등까지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장식적 효과는 수(隋)나라 때의 보살과 흡사하여 수나라 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는 귀중한 자료이다. 머리의 원형 두광에는 화불(化佛) 5구가 있고, 그 사이마다 꽃무늬가 있다. 대좌(臺座)는 원통형이며, 위아래에 겹잎연꽃무늬[複瓣蓮花紋]를 앙련과 복련의 형태로 조각하였다. (두산백과)
[포석정지] 는 유상곡수연을 하던 장소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유상곡수연이란 굽이도는 도랑물에 술잔을 띄워 놓고 그 술잔이 자기앞에 오면 시를 읇던 놀이를 말한다. 원래 돌거북이 있었다고 하는데, 돌거북이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내보내면 이 물이 돌로 만든 구불구불한 물길을 따라 흘러 되돌아오는 구조이다. 물이 흐를때 주 흐름에 반해서 생기는 회돌이 현상을 이용하여 물이 흘러가는 경로를 다양하게 했다. 신라 헌강왕(875~886)이 포석정지에 와서 남산신의 춤을 보고 따라 추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1999년 포석정지에 주변을 발굴 조사할때 '포석'이라 새겨진 기와와 함께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또 포석사에 대한 기록, 이곳에 큰 규모이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장소가 아니라 통일신라후기에 조성된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안내판)
[상서장] 1984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신라 말엽의 뛰어난 문필가 최치원(崔致遠)이 머무르면서 공부하던 곳이라 전한다. 그는 사양길에 접어든 신라의 국운을 쇄신하는 경륜을 담은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바쳤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왕건(王建)이 개국할 것을 짐작하고 상서하기를 “계림황엽곡령청송(鷄林黃葉鵠嶺靑松)”이라 하였다. 신라가 망하고 송도(松都)가 흥한다는 이 글을 보고 왕은 크게 노하였고, 최치원은 이후 해인사와 경주 남산 등에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상서장이라는 이름은 이 집에서 왕에게 상서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현재 영정각 3칸, 상서장 5칸, 추모문 3칸, 수호실 3칸으로 구성된 3동으로 되어 있으며, 1874년(고종 11)에 건립된 비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은 높이 10m, 둘레 30m에 달하는 큰 바위의 네면에 새겨진 34점의 조각들이다. 블상, 보살상, 천인상, 공양상, 사자상, 마애탑 등이 바위의 각 면에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이 계곡은 입구에서 마애탑 두개가 먼지 보이기 때문에 이 골짜기를 탑곡 혹은 탑골로 부른다. 바위의 면적이 가장 넓은 북쪽 면에는 9층탑과 7층탑이 있다. 두 탑 사이에는 불좌상이 있고, 각 탑의 아래쪽에는 사자상이 한구씩 있다. 동쪽 면에는 불상을 중심으로 보살, 천인, 승려, 감강력사 등을 주변에 배치했다. 남쪽 면에는 감실처럼 파서 그 안에 삼존불을 새겼고, 삼존불 옆에는 별로로 만들어 세운 입체적인 보살입상이 있다. 보살입상의 반대편에는 상체면 새겨진 나한상이 있다. 이곳에는 목조 구조물의 흔적과 복원된 3층 석탑이 있다. 바위의 서쪽면에는 버드나무와 대나무 사이에는 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안내판)
아래사진은 통일전 이모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