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가을
권춘수
가을이 익어간다. 후덥지근하던 여름이 가고 귀뚜라미 슬피 우는 소리가 가을 하늘에 솔솔 피어오른다. 아침저녁으론 제법 서늘한 바람이 땀에 젖은 몸과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준다.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과일들은 불그스레한 얼굴로 익어가는 가을을 반기며 마중한다. 가을은 정말 아름답고 풍요롭다.
끈질긴 코로나와 찌든 여름도 제풀에 지쳤던지 가을바람에 맥 못 추고 주춤한다. 얼굴에 맺혔던 구슬땀이 사라지고 하얀 소금이 얼굴을 얼룩지게 한다. 마음껏 들이마신 공기는 허파 속을 파고들어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청소해준다. 상쾌한 이 기분을 양 날개에 실어 가을바람 따라 세상 끝까지 날아 가보고 싶다.
가을은 빨갛다. 푸른 과일이 빨갛게 익어가면서 새콤달콤한 맛과 향긋한 향기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춘다. 추석 차례상에 오르자면 아직인 데 햅쌀이 가을의 전령사인 듯 얼굴을 들이 내민다. 질투심 많고 고집이 센 고추랑 참깨 등도 이에 못지않게 겁 없이 밥상머리에 올라앉는다.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 땅콩 사과 밤 등 햇과일도 덩달아 쏟아져 나올 채비를 한다.
땅에서 찬 바람이 나온다는 처서가 지났다. 처서가 지나면 가을이 성큼 다가온다. 그럼에도 지겨운 여름 장마는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115년 만에 수도권과 서울 남부 등지에 500mm 이상의 물 폭탄이 쏟아진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줄 모른다. 상가에는 추석 명절 준비하느라 냉장고에 돼지고기 쇠고기 등이 가득하다. 하수구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황토물이 집으로 넘쳐 들어와 선물과 살코기 등을 하나도 못 쓰게 해 버렸다. 봉사 대원들과 군 관민이 합동하여 도와주지만 태부족이다. 집과 건물 등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다. 인명과 재산 피해로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리며 망연자실한다.
부유한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서울 강남도 예외는 아니다. 고급 자동차 등이 넘쳐 들어오는 폭우에 속수무책이다. 강남의 물난리를 보면서 같잖고 어안이 벙벙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만큼 치수 사업이 잘되어있는 나라가 없다고 자부해 왔다. 그럼에도 서울의 민낯을 세계에 보여줬다는 것이 수치스럽고 자괴감마저 든다. 그것도 이틀 동안 쏟아지는 장맛비에 물바다가 되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다. 완벽함은 있을 수 없다지만 이것은 아니었다.
가로수가 쓰러지고 교통이 두절되고, 범람하는 황토물이 집으로 넘쳐 들어와 사람 앞가슴까지 차오르는 아찔한 광경을 보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서울 도심을 끼고 있는 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한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산 밑에 외롭게 사는 한 집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이삼일 후면 또다시 장마가 온다는 기상청 발표에 사람들은 넋을 잃는다. 진흙탕 속에서 겨우 살아 나온 사람들은 제발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고 또 빌고 한다.
물은 불보다 더 무섭다. 산불로 산이 숯덩이로 변해도 산은 항상 그대로이지만, 폭우로 홍수가 범람하고 토사가 흘러내리면 논과 밭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횅하니 텅 빈 밭을 보고 사람들은 억장이 무너져 아무 말 못 하고 망연자실할 것이다. 단맛 쓴맛을 다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듯이 아픔과 쓰라림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과 슬픔을 모른다.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참담했던 과거사가 있다.
지금처럼 추석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1959년 태풍 사라호가 전국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에 밤사이 시커먼 구름 떼가 몰려와 하늘을 뒤덮었다. 어두컴컴한 이른 아침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빗물이 방울을 일으키며 수챗구멍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간다. 세찬 빗줄기가 쉴 사이 없이 쏟아지더니 마당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우리 집은 비가 오면 신경이 쓰인다. 집 뒤에는 낮은 언덕에서 내려오는 작은 도랑이 있고 앞에는 깊은 산골에서 내려오는 큰 도랑이 있다. 홍수가 나면 큰물이 도랑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이 넘쳐 집으로 들어온다. 작은 도랑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도랑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부엌, 광, 방으로 물이 넘쳐 들어오기 때문이다.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모른다. 앞 도랑물이 황토물로 변하기 시작한다. 점심나절이 되었다. 앞 도랑이 범람하면서 물이 수챗구멍을 통하여 우리 집 마당으로 마구 쫓아 들어온다. 눈 깜짝할 사이 물은 넓은 마당에 가득하다. 장독대가 물에 잠기고 마구간에 물이 들어간다. 소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어찌할 줄 모른다. 장독대에 있던 크고 작은 장독들이 힘없이 물에 붕붕 떠다닌다. 비는 계속 퍼붓는다. 무릎까지 차오른다. 부엌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간다. 부엌에 있는 주방 물건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어머니는 큰 장독을 붙들고 허우적대며 안간힘을 다하신다. 앞뒤에서 쏟아져 내리는 홍수로 집은 견디다 못해 쓰러져질 것 같았다. 식구들은 정신없이 뒷산으로 피신했다. 하늘에 가두었던 물이 다 빠졌던지 시커먼 구름 떼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금세 캄캄하던 날씨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다. 마당에 가득하던 황토물이 빠지고 장독들은 구석에 나뒹굴어져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식구들은 망연자실했다.
115년 만에 장맛비에 잠긴 서울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자연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이 변해서 자연을 못살게 해서일까, 인간의 자연의 한계를 정말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일까? 이젠, 반가워해야 할 풍성한 가을이 다가올까 봐 겁이 난다. 그럼에도 힘들게 찾아온 회색빛 가을에 푸대접 말고 따뜻한 정 나누며 넉넉하고 풍성한 추석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