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로서 이벽. 李檗(1754-1785?)에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신자는 없을 것 같다. 이는 그만큼 한국 천주교사와 관련하여 교조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벽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덕조.德操 호는광암 曠庵이다. 저서로서 숭례의 설이 있다고 하지만 전해온 것이 없다. 이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광암은 일찍 천주교 서적을 읽고 스스로 교리를 터득 이해하며 녹암 권철 신계 인물들이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섬기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1784년 겨울, 이승훈 베드로와 함께 한국 천주교를 창설한다. 그리고 주역으로 활동하다 1785년 을사년 봄에 발생한 추조적발 사건으로 또는 명례방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인하여 부친에 의하여 집 안에서 연금생활을 이어가다 사망하였다.
이벽은 1754년(영조 30년) 경기도 광주에 살던 기호 남인 집안에서 이부만.李溥萬(1727-1817)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선조 때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1549--1607) 후손이었으나 조부인 이달. 李鐽(1703-1773) 때부터 무반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부친은 자식들에게 무반을 권하였고 이에 따라 장남 이격과 셋째 이석은 무과에 합격하여 훗날 황해 병마절도사와 좌 포장을 각각 역임한다. 그러나 이벽은 학문에 관심이 더 깊어 광주 마재에 살던 정약현을 자형으로 맞이하여 나주 정 씨 집안과 관계를 맺으면서 정약전, 약종, 약용(사도 요한)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며 학문에 힘을 쏱는다. 이후에 권엄의 딸인 안동 권 씨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후사를 보지 못하였고 해주 정 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한 후 현모.顯謨를 얻는다.
1777년(정조 원년) 무렵 이벽은 정약전, 약용 형제와 함께 고향 인근에 있던 천진암(현재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에서 자주 만나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이러한 학문 교류는 1785년까지 이어진다. 이에 앞서 이벽은 충남 덕산으로 가 이병휴. 李秉休를 스승으로 받들었고 1776년 전후에는 성호 이익과 이병휴의 제자 녹암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녹암계의 일원이 된다. 한때는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의 가르침도 받기도 한다. 언제 어떤 경로로 이벽이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한 자료는 없다. 설에 의하면은 일찍이 북경을 다녀온 이벽의 6대조 이경상.李慶相이 거론되기도 하고 1720년과 1766년에 각각 북경을 다녀온 이이 명과 홍대용이 가져온 서학서를 구해 읽었다는 설이 전해 오지만 근거가 부족한 편이다. 다만 스승 이병휴를 비롯하여 성호학파의 인물들이 18세기 초부터 서학서를 접해 왔던 것으로 보아 이벽도 이런 분위기 아래 접하였고 이후 누구보다도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해온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해년(1779) 겨울 녹암계 인물들이 권철신을 스승으로 삼아 강학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을 찾아 가 함께 하였으니 그 장소가 바로 천진암 동쪽 산 넘어 앵자산 기슭 주어사( 현재는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하품리)였다. 이때 이벽은 강학의 주제로 서학서의 내용을 제기하였고 그 결과 주어사 강학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게 된 것 같다. 이후에도 이벽은 정약전과 만나 서양의 기하학, 역학, 수학에 대해 토론하거나 꾸준히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였다. 또 주어사 강학이 있은지 2-3년 뒤에는 녹암계 인물들 가운데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스승 안정복은 젊은 제자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을 우려하고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이병휴는 제자들이 폭넓은 학문을 연구하고 스스로 진리를 터득해 가는 것을 장려하고 나섰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벽은 광주를 떠나 한양의 수표교 인근으로 이주해 살았다. 어느 정도 교리를 이해하게 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머물고 있다는 북경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당시 북경에 갈 수 있는 통로는 연행사에 들어가는 일인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이벽은 1783년 말에 지우 이승훈 베드로가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승훈을 찾아 가 선교사들에게 기도문과 서적을 얻어오고 영세를 하라고 요청하게 된다. 실제로 이승훈은 1783년 말 북경에 도착하는 즉시 북당으로 가 선교사들을 방문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예수회 소속 선교사 그랑몽(jj.de crammont. 梁東材)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한다. 이로서 이승훈이 귀국과 동시에 교회 창설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벽은 이승훈이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을 읽는 동안 교리가 진리이며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의 가르침이라 깨닫는다. 이에 힘입은 그는 1784년 여름부터 정약전, 약용 형제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고 사헌부 지평 이가환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교회 서적을 가지고 양근(현재는 지평과 양근이 합쳐 저 양평이 된다) 감호(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강변)로 스승 권철신과 권일신을 방문하여 토론한 후 수표교로 돌아가곤 하였다. 한편 이를 파악한 안정복은 제자들에게 척사의 입장을 견지하도록 충고해 나가고 있었다. 1784년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 이승훈을 비롯하여 권일신, 정약전, 약용 형제가 모였다. 그 자리에서 이승훈은 복경 선교사들에게 배운 대로 동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니 이 최초의 세례식이 바로 한국의 천주교의 창설이 된다. 당시 정약전을 제외한 이벽, 권일신,, 정약용이 세례를 받는다. 교회 창설 후 이벽은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전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이벽의 집에서 두 번째 세례식이 홍낙민. 루가, 최창현. 요한, 김범우. 토마스, 등이 세례식을 받는다.
이 당시 이벽의 스승 권철신과 그의 아우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운 충청도 여사울 이존창과 전라도 전주 완산 초남이 유항검도 영세를 하였다. 그때부터 천주교의 종교 운동은 이승훈과 이벽의 주도 아래 빠르게 확산되어 나갔다. 김범우가 명례방에 있던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함으로써 신앙 공동체는 수표교에서 명레방으로 이전되게 된다. 1785년 이벽의 주도 아래 명레방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형조 금리들이 이곳을 지나다 우연히 집회 장소 소를 수색하게 되었으며 모여 있던 신자들을 전부 형조로 압송되는 사건이 생겼다. 이 추 조적 발 사건으로 집주인 김범우는 단양으로 유배되고 이벽은 집안 식구들에 의하여 배교를 강요받게 된다. 이벽의 부친 이부만은 아들이 동료들과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가택 연금을 시키고 신앙을 버리도록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하였고 부친이 자살을 시행하였다고 하며 사이비 신자가 계략을 써서 이벽이 교회와 멀어지게 하였고 실제로 이벽이 점점 약해져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벽은 그 해 여름 또는 이듬해 봄,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지금까지의 연구와 기록에서는 이벽의 순교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는 가정 박해를 극복하고 신앙을 지킨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에서는 이벽의 사망을 독살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벽은 사망 후 선산이 있는 포천 화현리(현재 포천군 내촌면 화현 3리)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두 부인도 훗날 합장한다. 회현리 무덤이 발견된 것은 1979년 초 천진암 성지 초석을 닦은 변기영 몬시뇰 신부님에 의해서였다. 그해 4월 10일에 이벽과 두 부인의 묘가 발굴되었고 그 안에서 지석이 확인되었으며 이들의 유해는 6월 21일에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천진암에 있는 현재 위치로 안장되었다.
이벽의 유저와 학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전무한 상태다. 이벽의 유저로 알려진 숭례의 설이 있으나 전해져 오는 것이 없고 저자가 불확실한 만천 유고의 잡고 안에 수록되어 있는 4구체 한문 가사 형식인 성교 요지와 한글 가사체인 천주 공경가가 있으나 아직까지 만천 유고의 신빙성 자체가 인정되지 않아 이벽의 저작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편 한문본 성교 요지의 본문만을 번역한 한글본 성교 요지와 한글본 이벽 전(일명 이벽 선생 몽 회록)도 전하지만 이 또한 내용으로 볼 때 신빙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편 이벽의 친척이면서 학문적 동료였던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이벽은 학문적으로 매우 높이 평가한 내용이 보인다. 실제로 정약용은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1818년 고향으로 돌아와 강진에서 중용에 대한 자신의 의론을 증보하여 저술한 중용강의보를 탈고하면서 광암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그 진덕 박학을 어찌 내게 비유하겠는가?라고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실제로 약용은 중용강의보에서 모두 7개 부분에 걸쳐 이벽의 의견을 인용하거나 그의 해석을 따랐다.
중용가의 보에 안에 수록되어 있는 이벽의 견해는 그 학문의 일단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내용은 1784년 여름 정약용이 태학에서 수행할 당시 정조가 내린 중용의 문 70조에 대한 답변을 이벽과 함께 의논하면서 듣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시기는 이벽이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신앙으로 수용해 가던 시기였다. 실제로 이벽에 견해는 다섯 번째의 이기설, 理氣說에 대한 의견을 제외하고는 일정 부분 천주교 교리와 상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상천.上天과 천덕.天德, 천신.天神과 인귀.人鬼 천명과 계 신공 구, 천명과 존 덕성, 천명의 도에 대한 이벽의 설명은 천주실의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원시 유학과 천주교 교리에 대한 그의 보유론적이고 상보적인 이해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