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면서
오늘부터 약 1년(주3회, 월.수.금)에 걸쳐 圓山 위정철님께서 집대성하신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수정본, 435쪽)」을 밴드에 게재 합니다.
이를 통하여 선조님들의 사상과 후손사랑을 깊이 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아시다시피 상기의 책자는 천년세월 동안의 선조 60여분의 귀중한 명문장을 한 곳에 모은, 말그대로 집대성한 문집인 동시에 일종의 문집해설서라고 사료됩니다.
선집의 내용이 넓고 심오하여 이해하는데 비록 한계가 있을지라도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는 심정으로 접근한다면 훨씬 멀리보고 더 깊은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으로 감히 확신합니다.
덧붙여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경우에 따라서 문장을 분리하는 경우도 있음을 깊으신 마음으로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심부름꾼인 사자(使者)는 장흥위씨 부장공파 33세인 위상환입니다. 감사합니다.
(0001일차)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Ⅰ. 國 譯 篇
□ 忠烈公(繼廷) 遺稿
◇ 忠烈公 魏繼廷의 遺稿
1. 가계와 출신지 및 생졸년
충렬공 위계정(魏繼廷)의 생애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문선》 《장흥 위씨 족보》 《개인 유고집》등에는 소략하게 기록돼 있다. 따라서 어떤 기록도 그의 생애를 온전하게 밝혀줄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우선 〈고려사 위계정열전〉부터 보자. 여기에는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했다”라는 사실만 기록돼 있다. 그리고 〈문종세가〉에는 “급제한 시기나 첫 관직 등은 기록이 없다”라고 부연하고 있다.
그러니 가계나 생졸년과 출신지 등은 제대로 밝힐 길이 없다. 다만 네이버 사전에는 “장흥 위씨의 중시조인 고려 초의 시중(侍中) 위창주(魏菖珠)의 후손이다. 문장에 능했으며 청렴하고 바른 말을 간하기로 유명했다” “또한 동시대인과 달리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적혀있다. 아마도 사서와 위씨 족보 등을 참고한 기술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정체는 기록을 토대로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 장흥 위씨의 '본관' 은 '장흥' 이며 단일본이라는 점이다. 본관이 장흥인 이유는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시조 위경(魏鏡)은 중국 관서 출신이었다. 선덕여왕은 당나라 태종(이세민)에게 도예지사(道禮之士)의 파견을 청해 638년(戊戌) 자국의 한림학사를 보내니 이들이 팔학사이다. 위경은 동래한 이후 문화 창달에 이바지해 벼슬이 아찬(阿湌)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들은 298년간 실계로 인해 세계등이 분명치 않다. 고려 초에 시중(侍中)을 역임한 창주(菖珠)를 중조로 삼아 끊어진 세계를 이어왔다. 위계정은 장흥 위씨의 족보상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한 4세 기로(耆老)의 차남으로 정종 때에 태어났다. 생년은 확실치 않지만 일부 기록에는 1038년으로 적혀 있다. 동시대 최사추(崔思諏, 1034-1115)나 임의(任懿, 1041-1117) 등과 선후배이니 맞게 보인다.
졸년은 1107년은 이론이 없다. 이해는 16대 예종(睿宗) 3년, 북송(北宋) 대관(大觀) 원년 정해(丁亥)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위계정은 1038년에 장흥에서 태어나 69세에 타계한 것이다. 사후 17년째인 1124년 인종(仁宗)은 “시호와 함께 예종묘정에 배향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런데 그의 묘소는 고향인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제암산 북쪽 기슭에 있다. 공의 묘소는 사후 633년만인 1740년에 찾은 것이다.
또한 일부 사서에서는 위계정이 “동시대인과 달리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기술했다. 왜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있다. 몽고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대에 활동했던 최자(崔滋)는 저서 《續破閑集》에서 그를 “문장에 뛰어난 인물이라” 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정작 공이 남긴 작품은 거의 없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글이 남아 있었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2. 宋나라 使行과 觀燈詩
기록상으로 2차례 또는 4차례나 송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된 것처럼 나타나 있으나 확실한 것은 두 번으로 모두 송나라를 다녀온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첫 번째 로 파견된 1087년의 기록은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는 물론 각종 사서(史書)와 요즘 이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논문에서도 누락돼 있다. 즉, <麗宋使行, 고려 中期 對宋 외교의 재개와 의의>의 박사학위 논문에도 빠져있다.
그러나 송나라의 과학자요 정치가인 심괄(沈括, 1031-1095)의 저서 <몽계필담(夢溪筆談)의 보필담(補筆談)>에는 사행기록과 함께 위계정의 한시가 남아 있다. 그의 자(字)는 존중(存中)이고 전당(錢塘: 현재 浙江省 杭州) 태생이다.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했으며 왕안석(王安石)의 변법(變法)에 참가해 혁신적 정치활동을 한 정치가였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실현하고 경험하고 듣고 본 것을 기록하여 불후의 명저(名著) 몽계필담을 저술했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지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도 같은 내용이 수록돼 있다. 이 책은 기전체(紀傳體)의 한국통사. 필사본. 그가 찬술한 본편(本篇) 70권과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보충한 속편 15권을 합쳐 85권이다. 청나라 마숙이 찬술한 《역사(繹史)》를 모방해 ‘해동역사’라 했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이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본떠서 강목을 꾸민 것과 흡사하다. 이들 두 사람의 유고집에 부사(副使) 자격으로 송나라에 다녀온 사실은 다음의 시로도 확인할 수 있다.
1) 夢溪筆談 (共)著: 沈括
(1)《宋詩紀事》 卷九十五
澠水燕談云高麗海外諸夷中最好儒學祖宗以來數有賔客貢士登第者自天聖後十年不通中國熙寜四年始復遣使修貢因泉州黄慎者為向道將由四明登岸比至為海風飄至通州謝太守云望斗極以乘槎初離下國指桃源而迷路誤到仙鄉詞甚切當使臣御事民官侍郎金第與行朴寅亮詩尤精如泗州
○山寺詩云門前客櫂洪濤急竹下僧棊白日閑等句中土人亦稱之寅亮為其國詞臣以罪廢之復與金第使中國魏繼廷 <續筆談十一篇에서 발췌>
<해설>
민수연담(澠水燕談)에는 이렇게 말했다.
“고려는 해외의 여러 오랑캐 중 유학을 가장 좋아한다. 조종(祖宗) 이래로 여러 차례 빈객과 공사와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있었다. 천성(송나라 연호) 이후에 수십 년을 중국과 통하지 않다가 희녕(神宗 연호) 4년(1071년)에 비로소 다시 사신을 보내고 공물을 바치려 했다. 황주의 황신이란 이가 길을 안내하여 사명을 통해서 해안에 오르고자 했는데, 도착하여 바닷바람으로 표류하여 통주 해문현의 신항에 이르렀다. 먼저 문서로 통주에 보내 태수에게 치사하여 말하기를 ‘북두성을 바라보고 배에 올라 처음으로 나라를 떠나서 도원(桃源)을 지향했으나 길을 잃어 선향(仙鄕)에 이르렀습니다.’ 했으니 글이 아주 꼭 들어맞는다.
사신인 어시민관시랑 김제와 동행한 박인량의 시가 더욱 정교한데-
○‘사주 귀산사의 시’에 이른 ‘문 앞의 손님의 삿대에는 큰 파도가 급하고 / 대나무 아래에는 중의 바둑에는 밝은 햇볕이 한가롭네.’ 등의 구절은 중국 사람들도 또한 칭찬하였다. 박인량은 일찍이 그 나라의 사신(詞臣)이었는데, 죄를 지어 파면 당했다가 얼마 후에 김제를 따라 중국에 사신으로 왔다.”라고 적고 있다. 민수연담에서 보았듯이 중국은 옛날부터 고려를 오랑캐로 여겼으나 주변 4융(戎) 가운데 유학을 좋아한다고 해서 조금은 좋게 보고 있었다.
(2) 魏繼廷為進奉副使句
千仞綵山擎日起一聲天樂漏雲來(해동역사 참조), 補夢溪筆談朴景綽 景綽為主簿
髙麗史朴景仁寅亮子初名景綽字令裕力學登科累官尚書左僕射參知政事修國史致仕卒年六十七諡章簡 22句
勝事年年傳習乆盛觀全屬逺方賔(해동역사 참조), 補夢溪筆談元祐六年高麗使人入貢上元節于闕前賜酒魏繼延(廷)朴景綽皆賦觀燈詩時有佳
<해설>
고려사에 박경인은 박인량의 아들이다. 초명은 경작이고 자는 영유이다. 힘써 공부해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차례 상서, 복야, 참지정사의 벼슬을 했고 국사를 편수하고 나이가 많아 사직하고 67세에 사망했다. 시호는 장간이다. 위계정과 박경인 양인의 한시 대구는 아래와 같다.
(3) 海東繹史 第68卷
인물고(人物考)
고려(高麗) 위계정(魏繼廷), 박경작(朴景綽)
<원문>
元祐二年,高麗使人入貢,上元節於闕前賜酒,皆賦《觀燈》詩,時有佳句。進奉副使魏繼廷句有“千仞彩山擎日起,一聲天樂漏雲來。”主薄樸景綽句有“勝事年年傳習久,盛觀今屬遠方賓。”
<해설>
원우(元祐) 2년(1087, 선종4)에 고려의 사신이 조공하러 들어왔는데, 상원절(上元節)에 대궐 앞에서 술을 하사하고 모두에게 관등시(觀燈詩)를 지어 올리게 했다. 이때 지어 올린 아름다운 시구가 있으니, 부사(副使) 위계연(魏繼延)으로 표기돼 있다. 위계정의 한시는 아래의 대구(對句)가 유일하다.
千仞綵山擎日起 천 길의 채산이 해 받치고 솟아나자
一聲天樂漏雲來 한 소리 하늘 음악 구름 속에서 울려오네(魏繼廷)
勝事年年傳習久 즐거운 일 해마다 전해온 지 오래인데
盛觀全屬遠方賓 그 장관은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한 것이네(朴景綽)
(4) 사자성어 '不可尙書'
위계정이 선종에게 만춘의 호화주택 철거와 관등절에 춤을 추라는 지시의 불가함과 부당함을 지적한 사건이 일어난 후 공에게는 『불가상서(不可尙書)』란 사자성어가 관료들 사이에 회자됐다. 즉, "왕의 정치가 옳지 않을 경우 그 부당함을 직언했던 상서 위계정의 행실에서 연유했다" 한다. 곧 잘잘못을 사실대로 직언하는 공복을 이른 것이다. 그러나 종4품인 어사중승과 정3품인 추밀승선 때의 일이니 과연 정3품인 상서 때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어떻든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은 관료사회에서 거의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5) 生日 賀天安節 表箋
위계정은 과거에 급제한 이후 초급관리 시절부터 왕의 조서나 국서를 초안하는 사신(詞臣)으로 일했다. 좌보궐이나 지제고(知制誥)와 추밀원(樞密院) 등의 관직들은 이 같이 글을 쓰는 일과 밀법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다만「하천안절표(賀天安節表」라는 표전(表箋)은 제작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요(遼)나라 도종(道宗)의 생일을 축하하는 국서인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그의 재위기간이 1085년(乙丑)부터 1094년(甲戌)까지 9년간이니 고려로서는 선종(宣宗) 재위기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표전이 실린 <동문선(東文選)>이나 <장흥 위씨족보>에는 요와 송의 구별이 없어 과연 어느 나라 황제에게 띄우는 표전인지 혼동을 주고 있다. 그가 남긴 유고로는 송나라에 가서 지은 한시와 다음의 <하천안절 표전>이 있을 뿐이다.
(0002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시안(1일차)을 붙임과 같이 게재합니다
의견수렴차원에서 당초 일정보다 조금 당겨서 게재하였습니다
2일차 부터는 당초 일정대로 4월 5일(수)에 게재됩니다
즐거운 주말되세요/ 무곡
1일차에는 충렬공 위계정님의 생애와 관리로서의 활동기록 등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이 됩니다
원작의 작품성이 뛰어남은 물론이고 집대성한 원산 위정철님의 식견이 녹아 있어 읽는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할 것으로 보입니다./ 무곡 답글
천년세고 선집 밴드는 사실 좀 딱딱할 수 있으나, 독서모임 같이 다소 유연한 자세로 접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무곡
[장흥위씨 千年世稿選集] 밴드 게재와 관련하여 ...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내용이 본 밴드를 통하여 2023년 3월 31일에 처음
게재된 이후, 대구등 영남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종친 몇분께서 궁금해 하는 부분이 있어 아래와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종친분들의 깊은 관심과 질문에 머리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질문) 책자의 제목에서 천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왜 천년이냐?
답변) 저자인 圓山 위정철님께서 '천년세고선집' 서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천년세고선집'의 1천년은 서기 103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정확한 출생년도는 확인 불가)되는 고려조정의 대표적인 문장가인 충렬공 위계정(당태종의 위징에 비견됨)의 탄생을 기준으로 기산하여 현재까지 1천년이 된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궁금한 사항이 해소되었기를 기대합니다.
앞으로도 종친분 및 독자분께서 궁금해 하는 내용이 있으면, 최대한 해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갰습니다.
감사합니다. (茂谷 위상환)
사실 우리 씨족의 역사는 시조공께서 둉래하신 63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천년세고는 실계와 기록미비로 고려역사에 기록된 충렬공부터 현재까지 약 1천년을 기준한 것이 맞습니다. 저자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벽천
참고로 중화위씨 역사는 처음 득성한 위필만公을 기준 기원전 661년부터입니다. 중국에는 위씨가 약 8백만명 거주합니다. 중화위씨 역사는 661+2023=2,684년입니다./ 벽천
네
필만공의 한참 후손인 魏과가 秦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에다가
(結草報恩의 당사자) 또 한참 후손인 위씨 선조가 공을 계속 쌓아 더디어 기원전 403년도에 위문후가 전국시대의 선두주자로서
당당하게 魏나라를 건국하게 되었죠
탱큐입니다!/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