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실 수렴청정은 조 대비가 고종이 15세 되던 해인 1866년(고종 3년)에 물러나면서 끝났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그때부터가 친정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법적 제도적 근거 없이 살아 있는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실질적으로 상왕처럼 군림했기 때문에 고종의 실질적 친정은 한참 뒤로 밀리게 된다. 어린 시절에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의지와 생각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지만 즉위 10년이 지나 22세가 되자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옹호하는 신하들을 몰아내어 자기 주도적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직접 친정을 하였다. 흥선대원군 섭정 시기의 치세와 대원군의 실각 과정은 흥선대원군/생애 문서 참조.
흔히 부인 민씨나 그 일족과 힘을 합쳤다는 야사에서 기인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여흥 민씨 일족 세력은 기존의 외척가들에 비해 받쳐줄 세(勢)가 약해 강성하지 못했다.
외척 세력이 득세하던 세도정치를 엎고 등장한 흥선대원군이 과거의 전철을 밟으며 누대로 강력한 세도가의 여식을 왕비로 뽑을 리 없었다. 더구나 명성황후는 가까운 혈족과 친지가 없던 거의 고아 신세였다. 그런데 어떻게 여흥 민씨가 척족 세력으로 득세를 했을까? 기이하게도 여흥 민씨는 고종뿐 아니라 흥선대원군, 그 아버지 남연군에게는 처가이면서 외가인 기묘, 기이한(?) 3중의 겹사돈이었다. 심지어 고종 뒤의 순종까지도 첫 부인 순명효황후가 여흥 민씨였다.[8] 단순히 명성황후 한 사람 때문에 여흥 민씨 세력이 득세했다고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고종은 친정 초기에 박규수, 이경하를 비롯한 흥선대원군파, 중도의 안동 김씨 일문, 흥인군 이최응, 김병학을 비롯한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골고루 탕펼하여 조정의 균형을 잘 맞추면서도, 민승호와 민겸호를 비롯한 여흥 민씨들을 등용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물론 고종은 대원군의 개혁을 대부분 계승하여 호포제[9], 사창제, 서원 철폐 등을 고수했고 만동묘(萬東廟)[10]는 복구하였으나 국가가 제사를 주관하게 하여 유림의 명분은 충족시켜주되 힘은 돌려주지 않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 당백전만큼은 아니었지만 화폐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호전(청전)을 혁파했고 문세도 없애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무렵의 정치를 보면 기본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어도 '전통 시대 군주'로서 평타 이상은 되는 게 이 시기.
다만 재정적으로 이 시기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유는 당백전을 대체하기 위한 '청전(淸錢)' 때문으로, 크기와 구리 무게가 상평통보의 1/3인 것이 막대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기 때문이다.[11] 이 때문에 조선은 한순간에 국고가 사실상 1/3로 줄어드는 재정난에 몰렸고 세수 확보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12]
1875년(고종 12년) 강화도 영종진 앞바다에서 운요호 사건이 벌어졌다. 측량(해안 측정)을 구실로 접근한 일본군의 운요호는 조선군이 정당한 위협 사격을 하자 즉각 공격을 감행했고 영종도 수비대가 일본 수병 36명(전원 전장식 단발총 무장상태)의 상륙에 전혀 저항하지도 못하고 전멸했다. 사실 영종도는 1866년 무장한 선원 200명의 공격에 그래도 어느 정도 저항한 전과가 있는 곳이고 운요호 1척에 초토화되었다는 초지진 또한 그보다 고작 4년 전인 1871년에는 미 해군 포함 2척과 슬루프함 2척의 함포 사격을 하루종일 받으면서도 미군 상륙 개시 전까지 계속 응사하던 나름 튼튼한 포대였다.[13]
그런데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느냐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1874년(고종 11년) 1월, 고종의 친정 이후 강화도 일대의 군영에 돌릴 예정이던 예산(군비/군수 지원금)들이 모조리 끊기고 전부 박살났던 것. 청전(청나라의 동전) 폐지로 갑자기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야기되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강화도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한강 통행세)를 혁파하여 가뜩이나 재정력이 부족했다. 때문에 운요호 사건 시점에서 경기도 서해안의 주요 수군영은 몇 달째 군수 지원이 끊긴 상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부득이한 조치들이었는데 국가 1년 예산의 15배도 넘어가는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1866년(고종 3년) 11월에 당백전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말 무리하게 찍어낸 흥선대원군의 화폐 정책 때문에 당시 조선의 화폐 유통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벌어지는 상황[14]이었다. 이후 2년 만에 말도 안 되는 악화[15]인 당백전이 폐지되었는데 인플레이션[16]이 벌어진 상황에서 당백전이 폐지되자 조정의 재정난이 극도로 심화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흥선대원군이 주력한 것이 관리들이 밀수입한 청나라의 동전인 '청전(淸錢)' 유통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청전 유통이 합법화된 것도 1867년(고종 4년)의 일로 이것도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그리고 유통되던 당백전을 회수하는 과정도 당백전을 청전으로 바꿔준 다음에 당백전을 다시 녹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청전도 상평통보의 1/3의 가치밖에 없는 악화였다. 관리들이 청나라 동전을 밀수했겠는가? 이 청전은 삽시간에 상평통보 유통량의 40%를 점유하였고 조선 내에서는 화폐를 불신하는 풍조가 다시 생겨났다. 당백전으로 불안했던 경제 사정에서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된 것도 당연한 수순. 이렇게 당백전의 무리한 발행과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재정 위기를 그나마 넘어가기 위해서 도입된 청전이 한순간에 조선 경제를 다시 휘청하게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4년~5년이었다.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화폐 부실 문제로 1874년(고종 11년), 청전이 폐지되자 다시 올랐던 인플레이션을 포함해서 역작용으로 디플레이션이 이어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다시 극심한 재정난으로 돌아가야 했다. 경강수세가 폐지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고종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왕실 재정에 집착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자신이 장악하려고 하였는데 이런 초기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흥선대원군의 무리한 경복궁 중건이 국가 근간의 등골을 빼먹는 수준으로 조선 정부의 재정적 여력을 악화시켰다는 것과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 과정에서 발생했던 과도한 인플레이션과 폐해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왜 고종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도 다시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천천히 폐지하는 것이 어떠냐는 비판도 성립하기 어렵다. 화폐 개혁을 시간을 두고 진행한 경우는 거의 100% 그레샴의 법칙이 왜 무서운지 알게 된다. 단적으로 당백전이 발행되자마자 조선에서는 상평통보가 씨가 말랐고 당백전이 폐지된 이후에도 관북 이상 지방과 영남 지방은 청전 같은 악화는 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부작용은 더더욱 집중되었으며 그 부작용은 안 그래도 허약한 조선 조정의 재정난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청전을 폐지해서 군사력을 더 떨어트렸느냐 라는 것은 억지 비판이 된다.
그 뒤로 고종은 새로 화폐를 발행하는 데에 상당히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한다. 묄렌도르프가 당오전(當梧錢) 주조를 주장하자 김옥균의 차관 도입에도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이 뒤통수 치는 바람에 차관 도입은 실패하고 당오전은 당오전대로 막장으로 굴러가서 효과는 못 봤다. 그러나 중화의 강자로 군림했던 중국 청이 서양(영국, 프랑스 등)에게 단숨에 수도 베이징(北京)이 무너지고 일본이 미국 페리 제독에게 강제로 개항되는 상황에 군비를 삭감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조선 경제가 모두 초토화되는 사태라도 불과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등 수백 년 전 외침을 겪어왔던 나라에서 "당장 쓸 일도 없는 군대"라고 신경 쓰지 않은 것은 큰 오판이자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당시 조선 조정의 인식이 "가랑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고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우리나라에 서양 놈들이 와서 뭐 하겠어"하는 인식이었던 것.
일본 운요호의 무력에 조선은 놀라기는 했지만 이최응과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 조정 대신들과 고종은 문호 개방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 문[國門]을 열고 관(館)을 설치하여 통상(通商)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러 유림과 흥선대원군의 결사 반대조차 옳지 않다고 무시하고 강화도 조약[17]을 조선 조정과 제대로 된 협의 없이 반강제적으로 체결한다.
그러던 중 민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선혜청(宣慧廳)의 부패(비리, 공금 횡령 등)로 인해서 가뜩이나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 이후에 푸대접받고 있던 오군영 구식 군인들이 무려 13개월치[18]나 월급을 못 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나마 훈련도감을 비롯해서 특별한 소속이 있는 군인들은 제때 월급을 꼬박꼬박 받을 수 있었으나 별기군 창설 이후 수많은 구식 군인들은 특별한 소속없이 방치되었고 그들은 왕십리에서 채소를 재배해서 부업으로 겨우 먹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위험 수위에 이르자 그들에게 1개월 치 급료가 지불되었는데 문제는 급료로 지불된 쌀이 겨와 모래가 섞인 썩은 쌀들이었다. 분노한 군인들이 항의하자 고지기들은 겁도 없이 군인들에게 썩 꺼지라고 적반하장격으로 오히려 큰소리를 쳐댔고 분노한 군인들은 그 고지기의 얼굴과 몸을 단체로 반병신되게 밟아 죽사발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않고도 규율을 지킨 것이 가상하다"고 칭찬하면서[19] "나라에서 월급 못 준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니 잘 타이르라"는 정상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민씨 일가의 수장인 선혜청 제조 민겸호는 왕의 명령을 가볍게 제끼듯 무시해버리고 주모자들을 강제 연행, 감금한다. 이에 구식 군인들 사이에서 "민겸호가 잡아간 군인들을 죽일 것"이라는 찌라시가 돌았다. 폭발한 군인들은 선혜청 제조 민겸호,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해 원성을 사던 고관 대작들을 보이는 즉시 닥치는 대로 죽였고, 일본군 훈련 교관들과 일본인 민간인도 일본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참히 살해했다. 주조선 일본 공사 요시모토 하나부사(義質花房)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고 겁에 질린 고종은 허겁지겁 흥선대원군을 모셔와 "군인들을 달래달라"고 요청하며 다시 전권을 내어주었다. 군인들은 대궐에 나타난 흥선대원군을 보고 열광, 환호했으며 중전을 내어 줄 것(폐위)을 흥선대원군에게 강력히 요구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중전(中殿)은 이미 승하하셨으니 안심하고 물러나라"는 말을 하여 군인들을 안심시킨 뒤 해산시키고 임오군란의 큰 원인제공을 한 단체였던 별기군을 완전 해체하며 강화도 조약을 비롯하여 일본과의 모든 통상 조약의 파기를 일방적, 독단적으로 선언한다.
그런데 청나라 이홍장의 지시로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쳐 흥선대원군을 자신들의 진지로 초청하는 체하며 그를 강제 납치하여 청나라 톈진로 끌고 가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동시에 홍계훈의 기지로 목숨을 건졌던 명성황후가 청나라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다시 집권하게 된다. 청나라가 나름 친청적인 면모를 보인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간 이유는 흥선대원군의 쇄국(통상 수교 거부 정책) 재개가 일본을 더욱 자극하여 동북아시아의 균형을 망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정여창의 눈에 들어 출세한 23세의 젊디젊은 위안스카이는 북양 군벌의 철수 이후 조선에 잔류한 청나라군을 지휘하며 조선에서 총독이라도 되는 것마냥 고종을 꼭두각시 혹은 암군(暗君, 어리석은 임금)이라면서 자기가 행사하겠다고 오만방자하게 왕처럼 군림 행세하게 된다.
이 와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의 지원을 얻어 정변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1884년(고종 21년)의 갑신정변이다. 우정국 사건을 시작으로 민영익을 베어 넘긴[20] 그들은 민씨 일파, 고종과 명성황후를 확보하여 경우궁[21]으로 옮기고 자신들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대하던 관료들을 입궐시킨 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였다.[22] 고종은 사태가 심각해졌는지, 아니면 수습하기 어려웠는지 눈물을 흘리며 제발 그들을 살려달라고 김옥균 등에게 붙잡고 사정하듯 애원했지만, 피를 보고 눈이 뒤집혀 크게 흥분한 급진 개화파들은 고종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급진 개화파는 정강 14조를 발표하여 개각(改閣)을 단독으로 선언했지만, 눈치 빠른 명성황후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고 "효유대왕대비(效裕大王大妃)께서 넓은 곳으로 옮기길 원한다"고 말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가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하여 넓어 방어하기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이 패착(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무너진 패배 요인)이 되어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1,500명의 청군과 이에 합세한 조선군이 몰려들면서 급진 개화파는 완전히 궁지에 몰린다. 급진 개화파는 고종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고종이 죽어도 효유대왕대비(신정왕후 조씨)가 계신 창덕궁에서 죽을 것을 고집하여 결국 고종을 놔두고 자기들만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투를 자른 후 일본으로 암암리에 도주/망명하는 처지가 된다.
이중에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 홍영식은 남아 오조유가 이끄는 청군에 합류하려던 고종을 만류하던 중에 느닷없이 공격해온 조선 병사들에게 도륙당해 죽는다. 결국 이들의 정변으로 인해 개화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말았고 급진 개화파의 친족들은 무참한 죽임을 당하고 저잣거리에서 효수당한다. 그리고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사대 관계)은 오히려 공고해지고 말았다. 한편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조선에 한성조약[23]을 강요하며 배상을 모두 받아냈고 청에겐 무력 시위를 하여 1885년(고종 22년)에 톈진 조약[24]을 체결하는 데 모두 성공했다.
9.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1894)[편집]
갑신정변 이후 10년간 조선은 청나라가 주도권을 잡고 유럽, 미국, 일본의 세력이 주변을 기웃거리는 묘한 공백 상태에 빠진다. 주차관 위안스카이가 국왕에 준하는 실세권력자가 되어 조선에 군림하긴 했지만 그의 행보는 이홍장의 제지 및 다른 열강을 의식했는지 의외로 소극적이었고 별 의미 없는 10년이 어영부영하며 훌떡 지나간다. 그 10년간 고종은 5군영을 3군영으로 개편했다가 다시 4군영으로 개편하는 군제 개혁에 착수했는데 기존 정변에서 거의 쓸모가 없었던 군에 대한 불신 때문에 급히 행한 것이었고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 했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 내무부를 설치하여 궁내 사무와 군국 사무를 겸하게 했고 이 과정에서 친위 세력인 여흥 민씨들을 다시 기용했다.
육영공원을 비롯한 학교, 제중원 등의 근대식 병원, 전신, 전기 등이 이 시기에 들어왔다. 하지만 고종의 일련 개혁들은 어디까지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대혼란 이후에 극도로 불안해진 나머지 자신의 왕권 유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두루뭉술했다. 정권 유지에 대한 집착은 정권 유지 기반인 재정 확보에 매달리게 했고 내무부는 개혁 조치가 아니라 고종의 개인 비자금 확보에 더 주력했다. 서양 신식문물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마구잡이로 들여온 일부 무기와 군함도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한편 계속된 교세 확장에 고무되고 기존에 금지된 천주교, 개신교의 합법화에 자극받은 동학이 대대적으로 합법화를 요구하게 된다. 1892년(고종 29년) 교주 최시형의 허락 아래에 공주에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열려 충청 감사 조병식을 통해 동학 합법화의 뜻을 전달했다. 조병식은 "나라에서 하는 일을 감영에서 와서 따지면 뭘 어쩌라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동학 단속을 다소 완화했다. 이후 삼례에서 더 큰 집회가 열렸지만 충청도에서 거둔 것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1893년(고종 30년), 동학 대표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최제우를 신원하고 동학을 합법화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복합상소).
이에 고종 이하 조정은 매우 긴장했다. 고종은 "이단(異團)을 탄압하는 것이 열성조(列聖祖)의 법"[25]이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유림들도 앞을 다투어 "동학을 탄압해야 한다"는 상소를 일제히 올렸다. 결국 조정은 동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동학 지도부는 보은에 전국의 모든 교인들을 집합시켰고 보국안민(保國安民),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깃발을 휘두르는 수만 명의 교인이 보은에 집결했다. 경악한 조정은 어윤중을 내려 보내 동학교도들을 달래려고 시도한다. 한편 조정은 동학교도들이 서울로 진공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는데 강화도와 평양의 병력을 수원과 용인에 급파하고 서울의 군사들을 대기시키자는 논의에 고종은 외국 군대(외세)를 동원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조정은 고종의 주장에 크게 반대했지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쓰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입장을 계속 고수했다. "어차피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으니 청군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한편 어윤중은 동학 교인들을 타일러서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실 해산이 신속했던 것은 동학 지도부가 전봉준을 비롯한 과격파에 스스로가 놀랐기 때문이었다. 전봉준 등은 전라도 금구로 이동하여 또 집회를 가졌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하여 마침내 봉기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동학농민운동 문서 참조.
조정은 황토재에서 관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홍계훈과 장위영 병력을 급파하지만 장성 전투에서 또 패전보를 듣고 전라 감영까지 함락 당하자 마침내 고종과 민영준은 위안스카이와 접촉하여 청군의 도움을 적극 요청하게 된다. 위안스카이는 이에 "간단한 일"이라고 호언장담했고 이에 이홍장도 파병을 결정하여 아산만에 청군이 도착한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은 홍계훈의 독일제 쿠르프 야포 포격에 잇달아 패해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었고, 청군의 등장에 일본군이 톈진 조약을 빌미로 덩달아 인천에 나타나면서 조선도, 청도, 농민군도 동시에 당황한다.
농민군은 "이러다가 나라가 외세의 전쟁터가 되겠다"고 전주 화약을 관군과 맺고 평화적으로 물러났고, 조선 정부는 청과 일본에 모두 철수를 요구한다. 청나라는 이에 곧바로 응했지만 일본은 "우리가 알기론 동비(東備, 동학농민군)들이 소탕되지 않았다."란 억지를 부리며 철수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자 청나라는 일본군이 혹시 뒤통수 맞을 것을 두려워하여 저러는가 싶어서 동시에 철수하잔 제안을 했으나 일본은 이마저도 거부한다. 이에 조선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미국, 영국이 중재에 같이 나섰으나 일본은 이 역시 매몰차게 거부했고 역으로 청나라에 같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고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잔 제안을 한다.
청나라는 "동학 란은 이미 다 끝났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일인데 왜 니들이 더 난리냐?"라고 거부했고 일본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퍼부어 아산만에서 청나라 군함들을 전격 침몰시키니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일본은 난데없이 경복궁을 야밤에 기습으로 불법 점령하고 조선의 대청 독립 선언(조선에 대한 청나라 종주권 포기)을 강요한 다음에 고종을 위협, 겁박하여 청나라의 모든 조약을 전면 파기하고 모든 청군은 조선을 떠나라는 국왕의 명령서를 받아낸다. 일본은 대원군을 포섭하여 고종에게서 빼앗은 전권을 위임한다. 대원군은 민씨 일족들을 숙청하면서 내정 개혁에 착수하려 했지만 문제는 대원군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일본 때문에 별다른 힘이 없는 바지사장 같은 느낌이라 할 수 있다. 실세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박정양을 비롯하여 일본의 뒷배, 후원을 받는 친일적 성향을 띠는 新급진 개화파들이었다. 군국기무처(軍局機務處)가 설치되고 갑오개혁이 새로 실시된다.
이 시기에 노비제, 신분제가 폐지, 철폐되었고 도량형의 통일, 화폐 개혁, 조세의 금납화, 재정 일원화가 실시되었다. 과부의 재가 허용, 조혼 금지, 과거제 폐지, 과도한 고문(압슬형) 폐지, 연좌제 폐지도 동시에 실시되었으며 지방관(사또와 같은 수령)의 개인 사법권도 박탈하고 형사적인 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을 일원화 했다.
한편 자신이 일본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대원군은 전봉준[26], 이홍장 등과 은밀히 접촉하면서 힘을 합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권력을 쥐어달란 로비를 하고 있었는데 청군이 평양 전투를 비롯해서 일본군에게 개 박살나고 동학농민군도 우금치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자세한 것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문서 참조.
어쨌거나 조선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인해 요동을 빼앗은 걸 다시 토해내는 것을 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할 생각을 가지고 인아거일(引啞拒日)이라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내는 외교 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독일과 미국에도 구조 요청을 보내지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도 별다른 힘을 갖고 있진 못했고 미국은 금광(금광채굴권)만 먹었다.
청일 전쟁 와중에도 일본은 김홍집 친일 내각을 통해 조선과 동맹을 불합리하게 체결했고 20개조 개혁안을 통해 고종의 실권을 상당수 뺏고 명성황후의 정사(政事) 개입도 일절 금지했다. 이 와중에 청나라군 및 동학군과 내통한 것이 걸린 흥선대원군은 정치판에서 완전히 실각한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를 내무대신, 서광범을 법무대신으로 내세웠고 고종으로 하여금 홍범 14조를 반포하게 했는데 이 시기 고종의 호칭은 대군주, 왕비가 왕후, 세자가 왕태자로 바뀐다. 한편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 대사 베베르와 접촉하면서 "우리가 믿을 것은 러시아 황제 폐하뿐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 3세,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제국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이에 베베르도 고종 부부의 주장에 부응, 화답하면서 본국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주장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이 와중에 이준용 역모사건이 터지는데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고종에게는 3촌 조카)이 박준양, 이태용 등과 합세하여 2차 김홍집 내각을 없애고 고종, 태자, 명성황후를 폐한 후 스스로 왕좌에 앉으려 한 것이다. 이를 박영효와 서광범이 밝혀내어 자신들의 권위를 공고히 한다. 궁궐 수비대를 훈련대로 바꾸자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27] 역모를 꾀했다고 하는데 체포령이 떨어지자 박영효는 허겁지겁 일본 공사관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그는 명성황후, 유길준, 이노우에 가오루의 모함으로 자신이 실각했다고 멋대로 (허위)주장한다. 박영효에 의해 실각한 김홍집이 복귀했고 박정양, 이완용, 이운용, 이범진, 민영환 등의 정동 구락부 출신의 친미파와 친러파들이 득세(3차 김홍집 내각)하는데 박영효 중심의 친일 내각이 완전히 실각한 것이다.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훈련받던 훈련대도 강제 해산해버렸으며 이에 분노한 일본은 군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 공사를 부임시켰는데 이노우에 가오루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보름이나 그와 같이 지내며 모종의 계획을 꾸몄다. 그 결과가 친청파이자 친러파였던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시해한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에는 흥선대원군도 동석하여 명분 비슷한 것을 갖추었고 홍계훈과 이경직을 죽이고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이 와중에 낭인들은 고종 앞에서 감히 칼을 겨누고 왕태자 척의 머리채를 끌어잡는 등 잔혹한 행패를 부렸다. 미우라 공사는 고종의 부름에 입궐하는 척하며 입궐하여 친미파와 친러파를 내쫓고 친일파 이재면, 조희연, 유길준으로 새로운 내각(4차 유길준/김홍집 내각)을 구성한다. 각국 공사들의 추궁에 훈련대의 짓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얼버부리지만 워낙 증인들과 목격자가 정말 많아서 곧 거짓말인 게 드러난다.
새로운 내각의 핵심은 유길준이었는데 그의 주도하에 을미개혁이 실시되고 단발령이 실시되어 고종과 순종이 같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머리카락을 자른다. 거의 연금 상태의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의 외교관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일본의 독살을 우려하여 아예 그들이 만들어온 음식만을 먹으며 연명했다. 그 와중에 명성황후가 단순히 어디 피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근왕파와 민심이 매우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재순, 이도철 등의 근왕파들은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미파와 친러파,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과 합세하여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는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지만 일부 대대장의 밀고로 군부 대신 어윤중에 의해 진압/저지당한다. 정동 구락부 인물들은 각국 공관에 대피한다.[28] 한편 고종은 유림들에게 암암리 밀사를 보내 대대적으로 의병 궐기를 촉구했고 1896년(고종 33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였으며 의병들은 애꿎은 수령들을 참수하고 여러 고을을 점거했는데 이것이 을미의병이다.
을미의병으로 인해서 서울에 주둔한 군사 대부분이 각 지방으로 내려가 감시가 소홀해지자 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를 타고 아들 왕태자 척과 함께 대궐을 두고 서울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이다. 베베르는 인천항에 정박시켜 놓은 러시아 수병 117명을 동원해 즉각 공사관에 배치함으로 공사관을 지켰는데 단순히 117명이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고종을 손아귀에 쥐고 있음을 분명하게 한 제스처였다. 사실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는 일찍이 고종이 일찍부터 막대한 이권으로 매수하다 시피한 인물이었고 후일 고종이 친러 정책을 펴는 배경이 된 인물이었다.[29] 고종은 즉각 "김홍집 내각의 관료들을 죽이라"는 교지를 내렸고 군중이 김홍집, 정병하 등을 노상에서 살해했고 유길준 등은 황급히 일본으로 망명한다.
아관파천 이후에도 고종은 한동안 러시아 공사관과 기존의 궁을 오가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부각된 단체가 독립협회(獨立協會)이다. 원래는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발족했던 단체였으나, 이후 독립신문 발간 등의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조직이 그대로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별도의 단체가 되었다. 초기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형태로 출범하였으나, 개창자 중 대표적인 인물인 서재필[30], 그리고 이후에 활동하는 박영효 계열 등의 영향으로 급진 개화 단체의 성격이 강해졌다. 고종의 환궁 이후에는 개혁 방안을 두고 고종과 갈등을 빚었으며 중추원 설립 과정에서 독립협회의 과욕, 친일 성향을 보이던 독립협회에 대한 고종의 불신 등이 겹친 상황에서, 결국 중추원의 권한 남용 사건이 터지면서 고종이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무력 해산시켰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신문, 대한제국 중추원, 광무개혁 문서 참고.[31]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내외부에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적으로 근대 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이 자주 벌어졌고, 외부에서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아관파천이 시작된 지 1년 뒤인 1897년(고종 34년) 2월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정식 환궁하였다. 또한 고종은 환궁 후 10월 26일에 정식으로 국호를 황제의 국가를 뜻하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며 원구단을 축조하여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독립된 자주국임을 공식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 고종은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전면 추진하였다. 고종은 이 개혁을 통하여 근대식 정부와 행정 제도, 국민개병제와 도시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황권(皇權)'을 더욱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켜 군대를 주둔시키고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했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한 내정간섭이 심화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삼국간섭 이후로 꾸준히 신경 쓰던 인아거일 정책을 통해 러시아의 힘으로 일본을 막으려 했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당연히 러시아와 일전을 벌여야 했다. 러시아 - 일본 간의 갈등은 첨예해졌고 결국 1904년(광무 8년)에 러일전쟁이 터진다. 고종은 러일전쟁 발발 직전 프랑스 공사관으로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 공사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일제에 의해 실패한다. 일본은 또다시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으로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을 공격했고 중립을 선포한 대한제국을 강제로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32] 이때 독도를 멋대로 자기네 땅이라고 불법으로 편입하고 다케시마(竹島)로 불법 개칭 후 선언하였다.[33]
일본군은 러시아군에게 청일전쟁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끝내 승리를 거둔다. 러일전쟁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 아래에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최종적으로 일본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최후의 대일 견제 세력인 러시아가 물러나면서 대한제국은 그야말로 일본 앞에 잘 차려진 따뜻한 한 끼의 밥상이 되고 만다.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포츠머스 조약 중재 대가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짐은 현재 포위되어 있다. 국정은 모조리 간섭을 받고 일·러 개전 이래 일·한 간에[34] 체결된 국제조약과 이권에 관한 조약 등은 짐이 여지(與知)할[35] 바가 아니다. 정부대신도 모두 일본의 지휘를 받고 있다. 관고(館雇)[36] 외국인의 해고 및 공사 철퇴와 같은 것도 이는 짐의 진의가 아니라, 즉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다. 만약 정부로부터 이에 관하여 전훈(電訓)하는[37] 것이 있어도 결코 시행하지 말라. 이상 궁중으로부터 전보 발송.
▲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10월 22일 주한일본공사관이 탐지한 고종의 밀서. 암호화되어 상하이로부터 세계 각국의 대한제국 공사관들에 발신되었다.[출처]
러일전쟁의 종전 이후 일본군은 경운궁을 완전 장악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덴노의 위협적인 국서(國書)를 가지고 고종을 직접 알현한다. 국서의 내용인즉 '순순히 외교권(外交權)을 넘긴다면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정말로. 덴노의 뜻이라기보단 일본을 움직이던 고위 수뇌부들의 뜻이었겠지만.
고종은 "이는 나라를 망치는 일이니 죽는 한이 있어도 응할 수 없다"고 처음에 매우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왕 체결할 김에 최대한 대한제국에 관대한 처우라도 바라자는 안을 내놓은 이가 있었으니, 이가 바로 학부 대신 이완용이다. 그리고 고종은 "경들이 대책을 강구해 보라"며 자신은 인후통을 핑계를 대어 물러나버리고 8대신을 이토 히로부미와 면담하게 하였다.[39] 이완용은 거의 외교권을 송두리째 일본에 갖다 바치는 결과를 낳았다. 자세한 것은 을사늑약 문서 참조.
이후 대한제국은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들은 물론이고 거의 전국이 발칵 뒤집혀서 대혼란에 빠졌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도 이때의 일. 곳곳에서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자결자(민영환이 대표적으로 을사조약의 부당함에 스스로 자결했다.)들이 속출했고 백성들은 나라가 망했다고 혼비백산했다. 평민, 유림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의병이 일어나니, 이가 바로 을사의병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항 움직임도 을사늑약을 되돌리진 못 했다.
16. 헤이그 특사와 고종의 강제 퇴위(1907)[편집]
자세한 내용은 헤이그 특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고종 퇴위 반대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내가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
을사늑약의 체결은 단순히 외교권을 강탈한 수준이 아니었는데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종이 노골적으로 도움을 요구했던 미국과 영국 등의 국가들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41] 각국의 대사관을 강제 철수해버렸다.
이쯤 되면 고종이 최선적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일본은 고종의 항거를 막기 위하여 고종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고 차례로 대한제국의 권리들을 차근차근 박탈했다. 고종은 마지막 시도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지만 그들은 사전에 이 일을 안 일본의 수작으로 문전박대당했다. 결국 이준은 헤이그에서 객사(客死)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헤이그 특사이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앞에 나아가 "멋진 일을 하셨더군요. 근데 앞으로는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지 그러십니까?"라고 대놓고 비웃었으며 이완용과 송병준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고종의 퇴위를 은근히 협박하듯이 강요했다.
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삼으며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완용과 송병준은 전화선까지 끊고는 고종을 사실상 궁에 감금하였다. 이에 고종은 마지못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얼마 후에 일본에서 새 황제 즉위를 축하한다는 문서가 오자 이완용은 내시 2명을 데려와 각각 고종과 순종의 자리에 세우고는 날치기로 황위를 고종에서 순종으로 교체해버렸다.
[일본 군대의 대궐 경비하에서의 황태자의 즉위식 및 외국 사신의 접견]
(신문전보 발송 20/7/1907, 3.30 p.m.)
Associated San Francisco
어젯밤 전 황제가 한밤중에 대궐에 들어가 양위에 책임이 있는 내각대신 전원을 살해하도록 비밀리에 황실경비대에 명령한 음모가 伊藤에게 보고되어 일본 군대가 대궐을 수비 중이라는 공식발표가 있었음. 상기 음모의 실현 가능성을 알리기 위해 11시에 伊藤을 방문한 한국 군부대신과 법무대신은 즉각적인 도움을 간청했음. 전 황제의 폭동진압 요청을 이미 받고 있는 伊藤은 즉시 長谷川에게 군대 출동을 명령했으며 그 군대는 한국 경비대의 계획된 공격이 대궐 통용문 반대쪽 병영으로부터 있기 전인 4시 반에 도착했음. 황태자의 즉위식은 오늘 10시에 거행되었음. 일본 및 외국 관리들에 대한 접견 희망에 따라 문관 및 무관 참모들은 4시 30분에 알현하였음. 즉위식 후 전 황제는 내각대신들과 작별했음. 長谷川 부대는 여전히 대궐을 수비 중이며 平壤聯隊는 증원 차 아침에 서울에 도착했음. 20일.
McCormick
물론 고종도 가만히 있지는 않아서 친일 내각이 어전에 모여 있는 것을 이용해 일종의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한성에 있는 한국군 주력 부대인 시위혼성여단을 호출해 덕수궁에 모여 있는 친일 내각을 싸그리 쓸어버리려 시도했던 것. 계획이 성공했다면 친일 대신들은 시위대 장병들에게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작전 실행 직전 이병무와 조중응이 눈치를 채고 궐내를 탈출,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한국군의 동태가 심상찮다는 걸 보고해 버리면서 고종과 시위대의 반격은 실패로 끝난다.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끄는 일본군이 한국군보다 30분 먼저 덕수궁에 도달한 것. 이외에도 고종 퇴위 반대 운동은 아주 격심하게 일어났다.
그렇게 1907년(광무 11년) 7월 19일, 고종은 일본의 압박과 친일적인 주변 신하의 끈질긴 퇴위 강요에 끝내 못이겨 강제로 퇴위했고 7월 20일, 한국사 최후의 군주인 순종이 주변의 강요와 협박으로 강제 즉위했다. 형식은 양위였으나 퇴위식이자 즉위식인 이날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하였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당했으며 그 결과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나 숭례문에서 치열한 남대문 전투가 크게 일어났지만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기와 병력 열세 차이로 밀려나 패배했다.
1909년(융희 3년) 기유각서 체결로 대한제국의 사법권 및 교도 행정권이, 1910년(융희 4년) 한일약정각서의 체결로 경찰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5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조선의 명맥을 이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3년 만에 멸망했다. 이후 고종과 황족들은 일본의 강요로 일본 정부에게서 왕공족 작위와 은사금을 억지로 받았다.
1908년(융희 2년) 봄 이위종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종황제의 독립자금 1만 루블(Ruble)을 가지고 연해주의 노보키예프스코예(Novokiyevskoye)에 도착했다. 한러국경에 가장 가까운 러시아 마을인 연추는 전신국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보의 집결지로서 이미 러일전쟁 초기부터 한러군사협력 및 항일의병전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황제의 자금이 이범윤, 안중근, 최재형 등이 참여한 연해주 대한독립군 조직인 同義會 창설에 소요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大韓義軍은 1907년(광무 11년)에 해산된 구한국군대를 계승하여 항일독립전쟁을 이끌어 나갈 주력부대가 됨으로써 고종황제가 그 최고통수권자가 되었음은 명백하다. 대한의군의 설립은 1908년(융희 2년) 11월에 구체화된 고종황제의 블라디보스톡 파천계획의 전제조건으로서 고종의 연해주 망명정부수립 구상의 일환이었다. 1910년 7월 28일 “고종황제로 하여금 노령의 연해주로 조속히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영도”하라고 청한 十三道義軍都總裁 유인석과 이상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항일전쟁을 지휘할 최고 사령관이 고종황제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고종황제를 정점으로 한 대한의군의 항일독립전쟁사의 序幕에 해당되는바, 이는 1945년까지 항일독립전쟁을 지속시킬 동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의군의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지대하다.-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1904~1910) 2012, vol., no.73, pp. 95-142 (48 pages)
본 연구는 러일개전(1904)에서 헤이그특사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시기(1909)까지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을 황제의 강제 퇴위(1907)를 정점으로 양 시기로 구분하여 고찰한 것이다. 전기는 개전 이후 단교되었던 한러관계가 주한공사 파블로프가 지휘하는 상하이정보국과 고종황제의 비공식 정보협력 채널을 통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전쟁기간 중 러시아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상하이정보국의 한국분과 요원들의 활동은 한러간의 정보협력뿐만 아니라 전후 이들이 의병활동에 투신함으로써 고종황제의 항일독립운동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후기는 헤이그 특사사건 이후 고종황제가 측근들을 통한 소극적인 저항보다는 연해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통해 직접 독립운동을 지휘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던 시기였다. 이를 위해 고종황제와 러시아 당국간의 비밀교섭 창구 역할은 상하이주재 러시아 상무관이던 고이예르와 현상건이 맡았으며 이들은 러일전쟁기 파블로프의 상하이정보국에서 공조했던 전력이 있었다. 따라서 러일전쟁 이후 한러관계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정보협력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1904~1909) 81 (2014.12), pp.43-84
[토요판 커버스토리/단독]고종의 ‘항일 스파이’… 러와 손잡고 싸웠다
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나타나다
고종은 국외로 망명해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첫 망명 시도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1904년(광무 8년), 러일전쟁의 위험이 커지자 고종은 러시아 측에 망명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했다. 이때는 국내의 러시아 공사관뿐만 아니라 국외 망명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2002,101,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 요약집』101쪽] 하지만 이미 전쟁은 막을 수 없는 대세여서 러일전쟁으로 이어졌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사실상 떨어졌다. 두 번째 망명 시도는 1907년(광무 11년), 강제 퇴위당한 바로 그 다음해였다. 당시 일본의 감시를 피해 국외 망명을 시도했고[2002,73,박종효 편역『한국 관련 문서 요약집』73쪽] 3번째 망명 시도는 1908년(융희 2년) 11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측 대일 협상파에 의해 저지당했다. [2002,74,박종효 편역『한국관련 문서요약집』74쪽] 4번째 망명 시도는 1910년(융희 4년) 6월경에 있었는데 다시 연해주 망명 정부 수립을 기도했었다.[외교통상부,] 즉 고종은 병탄 전에만 4번의 망명 시도를 했다가 모두 좌절됐고 한일병합 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이 망명 시도 이전에부터 고종은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은 상황이었다. 1902년(광무 6년) 12월 서울 경운궁에서 고종은 인사차 찾아온 카를 베베르 전 주한 러시아공사에게 “관립노어학교 졸업생 10명을 러시아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고 부탁하였고 베베르는 고종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2년 뒤 고종이 러시아의 상하이 정보국을 통해 특별히 안부를 물었다는 졸업생들이 바로 이들이며 이때 그들 중 9명은 이미 러시아의 정보요원이 돼 있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한국인 유학생들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대항해 러시아 정보 요원으로 활약한 사실은 2015년에서야 밝혀졌는데 이는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러시아 국립역사문서보관소를 통해 당시 작성된 러시아 정부의 비밀 문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로 당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공동 항쟁에 나섰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료로 평가된다.
이 당시 유명한 인물로는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이다. 김인수도 함경도로 파견돼 첩보 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반일 첩보활동은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한러 합작으로 운영되던 상하이 정보국이 1905년(광무 9년) 11월경 일시 해체되면서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간도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새로운 인물인 레프 고이예르 상무관을 내세워 1908년(융희 2년), 상하이 정보국을 재건함. 당시 비밀 문건 중에는 고이예르가 2차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한국 의병들에게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는 계획을 세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무렵 고종의 심복인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한-러 정보 협력의 대가로 수만 명의 의병으로 구성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측과 협의하게 된다. 그러나 이상설의 계획이 러시아의 갑작스런 비협조로 실패하면서 항일의 방식을 놓고 양측의 시각차가 드러났고 러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과 화해 국면에 들어간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적극적인 무장 투쟁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김인수는 대한제국의 참령(소령)이자 고종의 시종무관이었고 한편으로는 러시아 국적자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분과 고종의 반일 친러 행보는 당시 일본의 강한 경계를 받았고 이에 일본은 러시아 측에 러시아 국적자인 김인수가 대한제국의 참령으로 복무하는 게 옳지 않다는 식으로 러시아 측에 강하게 항의하게 되지만 '빅토르 김(김인수)이 비록 러시아 국적자이지만 대한제국 출신이므로 한국군에 복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앞에와 같은 전문을 보내면 쿨하게 씹었고 이후에도 김인수는 대한제국에서 고종의 러시아어 통역관 겸 시종무관 겸 첩보원으로 계속 활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 러일전쟁이 터짐에 따라 결국 러시아로 탈출하게 된다.[43]
1915년 7월 26일 성낙형 등은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한중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때 고종의 아들이었던 의친왕도 적극 협력했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그리고 이 망명은 고종의 생전 마지막 망명시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외조카)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특사를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황실 이방자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황태자(영친왕)가 일본 여인과 결혼한다면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 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제 고종이 덕수궁을 나서 일본의 감시를 피해 신하들과 합류하면 됐지만 이때 고종이 1919년 1월, 갑자기 급서하면서 실패한다.
하지만 이 망명시도는 아예 헛되지는 않아서 훗날 연해주는 항일 의병들의 주 거점이 되었으며 많은 의병 단체들이 연해주에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 된다.
18. 의문의 최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