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산(金剛山)의 장안사(長安寺)를 중건한 비문
가정 이곡 ( 가정집 6권)
성천자(聖天子)가 즉위하신 뒤로 7년째 되는 해에 황후 기씨(奇氏)가 원비(元妃)의 신분으로 황자(皇子)를 낳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중궁의 위의를 갖추고서 흥성궁(興聖宮)에 거처하였다. 이에 내시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숙세(宿世)의 인연으로 은혜를 입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황제와 태자를 위해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려고 하는데, 불승(佛乘)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복전(福田)이 되고 이익이 된다고 하는 일이라면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금강산 장안사가 가장 수승(殊勝)하다는 말을 듣고는, 복을 축원하여 위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이곳과 같은 곳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3년(1343, 충혜왕 복위 4)에 내탕(內帑)의 저폐(楮幣) 1000정(定 정(錠) )을 출연(出捐)하여 사원을 중건할 자금으로 삼고 길이 상주하게 하였으며, 다음 해에도 그렇게 하고, 또 그 다음 해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승도 500명을 모아 그들에게 의발을 시주하고 법회를 열어 낙성식을 거행한 다음에, 궁관인 자정원사(資政院使) 신(臣) 용봉(龍鳳)에게 명하여 이 일에 대한 본말을 돌에 기록하게 하였다. 이에 그가 조서(詔書)를 받들고 얼마 전에 와서 마침내 신 곡(穀)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금강산은 고려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서 왕경(王京)으로부터 500리쯤 떨어져 있다. 이 산의 승경은 천하에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실로 불서에도 기재되어 있으니, 《화엄경(華嚴經)》에서 설한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그곳에서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000보살과 함께 항상 반야(般若)를 설법하고 있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옛날에는 동방 사람들이 당초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서 단지 선산(仙山)이라고만 지칭하였다. 그러다가 신라 시대에 탑묘(塔廟)를 증보(增補)하고 수식(修飾)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선감(禪龕)이 벼랑과 계곡 가까이에 잔뜩 들어서게 되었는데, 장안사는 그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서 이 산의 도회(都會) 역할을 하였다.
대개 이 사찰은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에 창건되었고, 고려 성왕(成王) 때에 중건되었다. 아, 법흥왕 뒤로 400여 년이 지나서 성왕이 새롭게 할 수 있었는데, 성왕으로부터 지금 또 400여 년이 되어 가건마는 아직도 흥복(興復)하는 자가 있지 않았다. 비구(比丘) 굉변(宏辨)이 퇴폐한 사찰의 모습을 보고서 동지와 함께 이른바 담무갈보살에게 서원(誓願)을 세우기를 “이 사찰을 새롭게 하지 못할진댄, 이 산이 두고두고 증거하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그 일을 나누어 주관하며 인연 있는 중생들을 널리 모집하였다. 산에서 재목을 베어 오고 사람에게서 식량을 구해 모았으며, 그 고을 사람들에게 품삯을 주고 인부로 고용하여 돌을 다듬고 기와를 구웠다. 먼저 불우(佛宇)를 새롭게 하고 나서 빈관(賓館)과 승방(僧房)의 공사를 그런대로 차례차례 마무리해 가던 차에 계속해서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또 탄식하기를 “세존(世尊)이 기원(祇園)을 지을 적에 고독(孤獨)이 황금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해서 어찌 그런 사람이 없기야 하겠는가. 다만 우리가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서쪽으로 경사(京師)에 갔는데, 그 일이 중궁에게 알려졌고, 또 고 자정(高資政)이 극력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성취하게 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건축(乾竺 인도(印度) )의 종교는 시대에 따라 흥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예전에 우리 세조황제(世祖皇帝)가 이 종교를 존숭하고 신봉하였는데, 그 뒤로 열성이 이를 서로 이어받아 빛나게 하고 크게 하였으며, 지금의 황제 역시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사업을 이으면서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대개 성인의 호생(好生)의 덕(德)과 불자의 불살(不殺)의 계(戒)는 똑같은 하나의 인(仁)과 애(愛)요, 똑같은 하나의 자(慈)와 비(悲)라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중궁이 보고 느낀 것도 그 유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옛날에 덕을 천하에 펼친 분으로는 오제(五帝)와 삼왕(三王)만 한 분이 없고, 후세에 가르침을 드리운 분으로는 공자(孔子)만 한 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살펴보면 오제와 삼왕 가운데에 묘식(廟食)을 향유하는 분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공자의 경우는 비록 사당이 있다고는 하나 예제(禮制)의 제한을 받는 관계로 제수를 진설하여 올리는 것도 모두 일정한 수가 있으며 그 무리가 생활하는 것도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면 다행인 형편이다. 반면에 부도씨(浮圖氏)의 경우는 그 사원이 중국과 타국을 막론하고 바둑돌처럼 분포되어 있고 별처럼 나열되어 있는 가운데, 전폐(殿陛)의 엄숙함과 금벽(金碧 단청(丹靑) )의 휘황함이 왕자(王者)의 거처와 맞먹는가 하면, 향화와 복식의 봉공이 봉읍의 수입과 대등한 실정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점이 실로 깊고 넓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니, 이 사원이 중건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사원의 건물을 칸수로 계산하면 120여 개에 달하는데, 불전(佛殿)ㆍ경장(經藏)ㆍ종루(鍾樓)ㆍ삼문(三門)ㆍ승료(僧寮)ㆍ객위(客位)는 물론이요, 취사장이나 목욕간과 같은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지없이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하였다. 상설(像設)을 볼 것 같으면, 비로자나(毗盧遮那)와 좌우 노사나(盧舍那)와 석가문(釋迦文)이 외연(巍然)히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미래의 1만 5000불(佛)과 과거의 53불(佛)이 주위를 겹겹이 에워싸며 정전에 도열해 있고, 관음대사(觀音大士)의 천수천안(千手千眼)과 문수보살(文殊菩薩)ㆍ보현보살(普賢菩薩)ㆍ미륵보살(彌勒菩薩)ㆍ지장보살(地藏菩薩)이 선실(禪室)에 배치되어 있으며, 아미타(阿彌陀)와 53불과 법기보살(法起菩薩)과 좌우 노사나가 해장궁(海藏宮)에 안치되어 있는데, 모두 장엄하기 그지없다. 장경(藏經)은 모두 4부가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에 은으로 서사(書寫)한 것이 바로 황후가 하사한 것이다. 《화엄경(華嚴經)》 3본(本)과 《법화경(法華經)》 8권을 모두 황금으로 서사하였으니, 이 또한 지극히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그리고 예전부터 소유한 전지를 국가의 법도에 의거하여 결수(結數)로 계산하면 1천 하고도 50결에 이른다. 그중에 성열현(成悅縣)과 인의현(仁義縣)에 각각 200결이 있고 부령(扶寧)과 행주(幸州)와 백주(白州)에 각각 150결이 있고, 평주(平州)와 안산(安山)에 각각 100결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성왕(成王)이 희사한 것이다. 통주(通州) 임도현(林道縣)에 염분(鹽盆)이 한 곳 있고, 개성부(開城府)에 경저(京邸)가 1구(區) 있고, 시전(市廛)에 가게를 만들어 남에게 대여한 것이 30칸 있다. 기타 전곡과 집기의 숫자에 대해서는 이를 담당한 자가 따로 있으니, 여기에서는 기재하지 않는다. 태정(泰定) 연간에 이 사원을 중건할 때부터 참여한 단월(檀越)로는 중정사(中政使) 이홀독첩목아(李忽篤怗木兒) 등의 제가(諸家)가 있는데, 그들의 명씨(名氏)를 비의 뒷면에 나열하여 기록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산 하나 있어 뼈를 드러낸 채 有山露骨
바위가 깎아 세운 듯 우뚝 솟았나니 嶄嵒突兀
그 이름 바로 금강이로세 名金剛兮
패서에도 기록되었듯이 貝書所著
보살이 머물러 설법하는 곳 菩薩住處
청량산에 버금간다네 亞淸涼兮
안개와 구름을 숨쉬고 내뿜나니 吹虛烟雲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한데 뒤엉켜 輪囷絪縕
신령스러운 광채를 발하누나 發神光兮
새와 짐승도 순하게 길들여지고 鳥獸其馴
벌레와 뱀도 어질게 바뀌고 蟲蛇其仁
풀과 나무들도 향기롭도다 草木香兮
석가의 제자들이 세운 암자들 釋子卓菴
공중에 다리 놓고 바위에 얹혀 梯空架巖
멀리 서로들 바라다보이누나 遙相望兮
장안이라 이름 붙인 불교 사원은 長安精舍
산 아래 기슭에 자리를 잡은 居山之下
불도들의 커다란 도량 大道場兮
신라 때 창건된 뒤로 肇基羅代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반복하면서 屢其成壞
시대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어라 時不常兮
하늘이 성신에게 길을 열어 주어 天啓聖神
우리 세조황제의 후손들이 世祖之孫
만방에 군림하게 되었도다 君萬方兮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넘치는지라 德洽好生
함령을 따뜻이 품어 주며 煦濡含靈
공왕을 흠모하였도다 慕空王兮
슬기로운 우리 황후께서는 於惟睿后
땅의 후덕함을 몸에 간직하고 體坤之厚
하늘의 강건함을 받드시는 분 承乾剛兮
신독국(身毒國)의 불교에 귀의하여 歸心身毒
그 오묘한 복을 취해 와서 取彼妙福
우리 황제를 섬기려 하였다네 奉我皇兮
생각건대 복된 이 지역은 惟此福地
신선과 부처의 은밀한 오지(奧地)로서 仙佛奧秘
많은 상서를 다투어 내는 곳 紛産祥兮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 一人有慶
하늘이 그에게 거듭 명해서 天其申命
수명이 끝이 없게 해 주고말고 壽無疆兮
두 개의 밝음이 이괘(離卦)를 이뤘나니 明兩作籬
왕업의 터전을 굳게 다져서 永固鴻基
하늘과 함께 길이 이어지리라 與天長兮
우리 황후가 내신에게 이르기를 后謂內臣
저 법신불의 교화가 惟彼法身
환히 드러나게 하라 하셨다네 其化彰兮
그리하여 불전을 다시 새롭게 하였으니 旣新其宮
그 공을 기록하여 잊지 않게 하는 것이 宜紀其庸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俾無忘兮
이에 높다랗게 비석 하나를 有石峨峨
산언덕 위에 우뚝 세우고서 于山之阿
명문을 이렇게 새기게 되었다네 勒銘章兮
[주1] 동북쪽 …… 있다:《신화엄경(新華嚴經)》권45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나온다. 담무갈(曇無竭)은 범어 Dharmodgata의 음역인데, 보통 법기보살(法起菩薩)로 많이 알려져 있다. 금강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금강산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주2] 세존(世尊)이 …… 않았다 :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고 하였다. 이에 수달 장자가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賣渡)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하였다. 수달 장자는 급고독 장자(給孤獨長者)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는데, 이 정사가 기타태자와 그의 후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으로 부르기도 한다. 왕사성(王舍城)의 죽림정사(竹林精舍)와 함께 불교 최초의 양대 정사로 꼽힌다.
[주3] 비로자나(毗盧遮那)와 …… 석가문(釋迦文) : 모두 부처의 이름인데, 불교의 종파에 따라 이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각각 다르다. 가령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노사나(盧舍那)를 비로자나의 약칭으로 간주하여 보신불(報身佛)로 규정하고는 《화엄경》에서 설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교주라고 하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비로자나를 법신불(法身佛), 노사나를 보신불, 석가모니를 응신불(應身佛)로 간주한다.
[주4] 53불(佛) :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전신(前身)인 법장보살(法藏菩薩)의 스승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이전의 53불을 말하는데, 정토종(淨土宗)의 소의경전(所依經傳)인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설명되어 있다.
[주5] 화엄경(華嚴經) 3본(本) : 60권으로 한역(漢譯)한 《60화엄》과 80권으로 한역한 《80화엄》과 40권으로 한역한 《40화엄》을 말한다. 《60화엄》은 동진(東晉) 불태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것으로 구화엄(舊華嚴)이라 칭하고, 《80화엄》은 당(唐)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것으로 신화엄(新華嚴)이라 칭한다. 《40화엄》은 《화엄경》 중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분의 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방문하며 구법(求法)하는 입법계품(入法界品)을 당나라 반야(般若)가 번역한 것이다.
[주6] 태정(泰定) : 원(元)나라 진종(晉宗)의 연호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11년(1324)에서 14년(1327)까지이다.
[주7] 패서(貝書) : 인도의 패엽(貝葉) 위에 쓴 글이라는 뜻으로, 불경(佛經)을 뜻한다.
[주8] 청량산(淸涼山) : 중국 산서(山西)에 있는 오대산(五臺山)을 말하는데, 혹서기(酷暑期)에도 더위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청량산이라는 별칭이 생겼다고 한다. 아미산(峨眉山)ㆍ보타산(普陀山)ㆍ구화산(九華山)과 함께 중국 불교의 4대 영산(靈山)으로 꼽히는데, 특히 《화엄경》에 문수보살의 주처(住處)라는 기록이 있는 관계로 예로부터 문수가 시현(示現)하는 도량으로 일컬어져 왔다.
[주9] 함령(含靈) : 범어 sattva의 음역인 살타(薩埵)를 의역한 불교 용어로, 함식(含識)이라고도 한다. 영성(靈性) 즉 심식(心識)을 함유(含有)한 유정(有情)이라는 뜻으로, 곧 중생을 가리킨다.
[주10] 공왕(空王) : 제법(諸法)의 성품이 공(空)하다는 것을 깨달아 적정(寂靜) 무애(無礙)의 경지를 체득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부처의 별명이다.
[주11] 한 …… 있으면 : 임금이 선정을 베풀어 하늘의 경사가 있게 됨을 말한다. 《서경(書經)》 여형(呂刑)에 “위로 임금 한 사람이 선정을 베풀어 경사가 있게 되면, 아래로 만백성이 그 은택을 받게 되어, 그 편안함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一人有慶 兆民賴之 其寧惟永〕”라는 말이 나온다.
[주12] 하늘이 …… 명해서 : 《서경》 익직(益稷)에 “하늘이 임금에게 거듭 명해서 더욱 아름답게 해 줄 것이다.〔天其申命用休〕”라는 말이 나온다.
[주13] 두 개의 …… 이뤘나니 : 《주역(周易)》 이괘(離卦) 상(象)에 “밝음이 둘인 것이 이괘의 상이다. 대인은 이를 보고서 밝음을 이어 사방에 비춘다.〔明兩作離 大人以 繼明 照于四方〕”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황제와 황후가 이괘의 상괘(上卦)와 하괘(下卦)처럼 똑같이 밝게 세상을 비춘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金剛山長安寺重興碑
聖天子龍飛之七年。皇后奇氏以元妃生皇子。旣而備壼儀居于興聖之宮。顧謂內侍曰。予以宿因。蒙恩至此。今欲爲皇帝太子祈天永命。非託佛乘。其何以哉。凡其所謂福利者靡所不擧。及聞金剛山長安寺最爲殊勝。祝釐報上。莫玆地若也。越至正三年。出內帑楮幣一千定俾資重興。永爲常住。用明年又如之。又明年如之。集其徒五百。施衣鉢作法會以落其成。廼命宮官資政院使臣龍鳳載本末于石。以詔方來。遂命臣糓爲之文。謹案金剛山在高麗東。距王京五百里。玆山之勝。非獨名天下。實載之佛書。其華嚴所說東北海中有金剛山。曇無竭菩薩與一萬二千菩薩常說般若者是已。昔東方人未之始知。而指爲仙山。爰自新羅增餙塔廟。於是禪龕逼於崖谷。而長安寺居其麓。爲一山之都會也。盖刱於新羅法興王。而重興於高麗之成王。噫。後法興四百餘年。而成王能新之。自成王至今亦將四百年矣。而未有能興復者。比丘宏辨見其頹廢。與其同志。誓於所謂曇無竭曰所不新玆寺者。有如此山。卽分幹其事。廣集衆緣。取材於山。鳩食於人。僦面雇夫。礲石陶瓦。先新佛宇。賓館僧房。以次粗完。而費猶不給。則又嘆曰。世尊作祗園。孤獨側金。今豈無人。顧不遇耳。遂西游京師。事聞中宮。而高資政主之又力。故其成就如是。竊惟乾竺之敎與時興替。昔我世祖皇帝是崇是信。列聖相承而光大之。今上皇帝繼志述事。尤致意焉。盖聖人好生之德。佛者不殺之戒。同一仁愛。同一慈悲也。中宮之觀感有所自矣。且古之施德於天下者莫如五帝三王。垂敎於後世者莫如孔子。以今觀之。帝王之廟食者幾希。孔子雖有廟。而限於禮制。籩豆薦奠。皆有常數。其徒之食。僅取足焉。惟浮圖氏。其宮在夷夏者碁布星列。殿陛之嚴。金碧之餙。視王者之居。香火服食之奉。視封邑之入。是其感動于人者實深以廣。玆寺之興宜也。凡爲屋以間計之。一百二十有奇。佛殿經藏鍾樓三門僧寮客位。至於庖湢之微。皆極其輪奐。像設則有毗盧遮那左右盧舍那釋迦文巍然當中。萬五千佛五十三佛周匝圍繞居正殿焉。觀音大士千手千眼與文殊,普賢,彌勒,地藏居禪室焉。阿彌陁五十三佛法起菩薩翊盧舍那居海藏之宮。皆極其莊嚴。藏經凡四部。其一銀書者。卽皇后所賜也。華嚴三本。法華八卷皆金書。亦極其賁餙。至若舊有之田。依國法以結計之。千有五十。其在成悅,仁義縣者各二百。扶寧,幸州,白州,各百五十。平州安山各一百。卽成王所捨也。塩盆在通州林道縣者一所。京邸在開城府者一區。其在市廛。爲肆僦人者三十間。凡其錢糓什器之數。有司之者。不載。自泰定間重興檀越如中政使李忽篤怗木兒諸家。列其名氏于碑陰。銘曰。有山露骨。嶄嵓突兀。名金剛兮。貝書所著。菩薩住處。亞淸凉兮。吹虗烟雲。輪囷絪縕。發神光兮。鳥獸其馴。
蟲虵其仁。草木香兮。釋子卓菴。梯空架巖。遙相望兮。長安精舍。居山之下。大道塲兮。肇基羅代。屢其成壞。時不常兮。天啓聖神。世祖之孫。君萬方兮。德洽好生。照濡含靈。慕空王兮。於惟睿后。軆坤之厚。承乾剛兮。歸心身毒。取彼妙福。奉我皇兮。惟此福地。仙佛奧祕。紛產祥兮。一人有慶。天其申命。壽無疆兮。明兩作籬。永固鴻基。與天長兮。后謂內臣。惟彼法身。其化彰兮。旣新其宮。宜紀其庸。俾無忘兮。有石峩峩。于山之阿。勒銘章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