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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墓誌銘) 병서 [송시열(宋時烈)]
신독재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후 내가 외람되이 신도비명을 지었는데, 선생의 아들 김익형ㆍ김익련이 문인 윤선거 등과 함께 그것을 비에 새겨 신도(神道)에 세웠다. 얼마 안 되어 선생의 두 아들과 윤공이 서로 이어 다 세상을 뜨자 지금 선생의 손자인 김만리ㆍ김만성 등이 내게 와서 말하기를, “유지(幽誌)가 갖추어지지 않아 다시 청합니다.” 하였다. 아, 선생 문하에서 직접 배운 사람들이 많았었지만 지금 와서는 살아 있는 자라곤 나뿐이니, 내 비록 병들고 늙었으나 어떻게 감히 사양할 것인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諱)는 집(集)이요 자는 사강(士剛)이며, 사계(沙溪) 노선생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노선생의 비(妣)는 조 부인(曺夫人)으로 첨추(僉樞) 조대건(曺大乾)의 따님이며, 만력 갑술년(1574, 선조 7) 6월 6일에 선생을 서울 정릉동(貞陵洞) 집에서 낳으셨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특출하여 말을 배우던 시절에 벌써 손가락 하나를 입에다 세우고는 “이것이 가운데 중(中) 자입니다.” 했으며, 5세가 되자 책을 읽고 글자 쓸 줄을 이미 알았고,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천곡(泉谷) 송공 상현(宋公象賢)과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에게서 배웠는데,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선생이 지은 시를 보고는 장차 큰 문장가가 되겠다고 하였다.
임오년(1582, 선조 15)에 노선생이 상중에 여막에 계실 때 선생이 곁에서 모시고 전(奠)을 도우면서 모든 것을 예에 따라 하였고, 병술년(1586, 선조 19)에 조 부인이 세상을 뜨자 선생이 너무 슬퍼하여 몸이 여위었다. 신묘년(1591, 선조 24)에 진사에 합격했고, 경술년(1610, 광해군 2)에는 성균관의 추천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의 무고옥(誣告獄)에는 온 집안이 거의 화를 면치 못할 뻔하여 드디어 노선생을 모시고 호서(湖西)의 연산(連山)으로 돌아왔다. 그때 폐조(廢朝)의 정사가 어지럽고 인륜 질서가 문란하여 선생은 어버이 봉양과 학문 강론 외에는 달리 하는 일이 없었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등극하자 노선생이 맨 먼저 소명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선생의 학행이 출중하다 하여 발탁해서 대직(臺職)에 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선생은 굳이 사양하고 어버이 봉양을 위해 부여 현감(扶餘縣監)을 제수받았다. 선생은 모든 폐단을 제거하고 교화(敎化)를 베풀기에 힘써 날마다 선비들과 함께 경전을 토론하다가 정묘년(1627, 인조 5)에 병으로 체직되었는데, 그곳 사민(士民)들이 비를 세워 송덕하였다. 무진년(1628, 인조 6)에는 임피 현령(臨陂縣令)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돌아왔고, 그 후로도 익위사 위솔, 전라 도사 등의 명을 받았으나 다 사양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 9) 가을에 노선생이 세상을 떴는데, 선생은 그때까지도 근력(筋力)으로 예를 지켜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정문(情文)을 다하였다.
갑술년(1634, 인조 12) 봄에는 선공감 첨정을 제수하고 여름에는 사헌부 지평으로 불렀으나, 사장(辭狀)을 올렸다. 그 이듬해에 다시 제수되고 병자년(1636, 인조 14) 봄에는 장령에서 두 번이나 집의가 되고 사이사이 종친부 전첨, 종부시 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 병으로 그만두었다. 병자년 겨울에 오랑캐가 들어왔을 때는 선생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란(赴亂)했으나 행조(行朝)에 도착하기 전에 적들이 길을 막아 버려서, 그 길로 물러가 동지들과 의려(義旅)를 규합하여 북으로 올라가 근왕(勤王)하려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도성에 들어가 위로의 말씀을 올렸다. 무인년(1638, 인조 16) 가을에 다시 집의로 부름을 받고는 사장을 올려 체직되었다. 겨울에는 상변(上變)한 사람이 있어 선생의 서제인 김고(金杲)가 체포당하고 사건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선생이 병을 무릅쓰고 서울에 들어가 아우 참판공 김반(金槃)과 함께 석고대죄하자 상이 특명으로, ‘안심하고 물러가라.’고 하고는 이어 이르기를, “김고가 망언한 죄가 있기는 하나 그의 부형을 위해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다.” 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 17)에 다시 소명이 있어 선생은 지난겨울의 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한번 사은하려고 조정에 나왔는데,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았다. 이에 두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입시하니 상이 갖은 위로를 다하였다. 이어 경의(經義)의 강론에 들어가서 규계(規戒)를 올렸는데, 상이 한참 경청하다가 소회(所懷)를 다 말하라고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임금의 마음 하나가 모든 일의 근원이 됩니다. 그 마음을 잘 간직하여 기르고 발동할 때마다 잘 살피면 인욕(人欲)은 물러가고 천리(天理)가 유행하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요순의 심법(心法) 아니던가.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리라.” 하였다. 또 묻기를, “마음을 다스리고 정사를 하는 데 무엇이 가장 요체인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마음 다스리는 데는 경(敬)이 주가 되어야 하고, 정사는 무엇보다도 성실이 제일입니다.” 하자 상이 좋은 말이라고 하였다.
우부승지로 개차되어 병으로 사양하자 상이 의원과 약을 보내왔는데, 선생이 체직을 간곡히 빌자 마침내 그대로 허락하였다. 그러나 뒤에 다시 여러 번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을 제수하면서 이르기를, “이 직책은 경에 밝고 행실이 닦인 이가 맡아야 맞다.” 하였다. 갑신년(1644, 인조 22) 가을에는 공조 참의,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효종 대왕이 대군(大君)에서 세자로 책봉되자 대신이 말하기를, “김모는 일생을 성리학에 종사한 사람이므로 그로 하여금 동궁을 모시게 하면 틀림없이 많은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여, 소명이 매우 간곡했었다.
병술년(1646, 인조 24) 봄에 이산(尼山)의 적 유탁(柳濯) 등이 난리를 꾀하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이 진술한 공초에 ‘감히 김 승지 집 근처로 지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상이 그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비록 도적의 무리인데도 무서워하고 조심할 줄을 알았으니, 현자가 나라에 그렇게 유익한 것이로구나.” 하였다.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의 말에 의해 상이 세자 찬선(世子贊善)이라는 자리를 별도로 두고 누차 불렀으며 또 공조(工曹)로도 불렀으나, 기묘년에 물러난 이후로 제수 명령이 빈번하게 있을 때마다 한결같이 병을 이유로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세상을 맡을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 27)에 효종 대왕이 왕위를 이으시고는 특별히 부르면서 이르기를, “이렇게 망극한 날을 당해 더욱 생각나는 것이 옛일에 밝은 독서인이지만, 선왕조 시절에도 단 하루도 조정에 있지 않았던 그대가 더구나 정성이 부족한 나를 두고 올라오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선생이 즉시 들어와 신명(新命)에 사은하자 상은 쌀과 반찬을 넉넉하게 내리고 예조 참판을 특별히 제수하였다. 전조(銓曹)가 전례에 없는 일이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독서한 인재를 등용하면서 꼭 전례에 구애받을 것이 뭐가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네 번씩이나 상소하여 간곡히 사양하자, 상이 이르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맡기는 것도 현자를 예우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공조로 옮겼다.
봉사(封事)를 올려 상례(喪禮)와 시무(時務)에 관해 논했는데, 그 대략은 이러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천륜 질서는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인데, 옛 경문(經文)과 국제(國制)와는 서로 안 맞는 것이 많습니다. 당초에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대충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는 모든 절문(節文)에 대해 당연히 강구를 해야겠기에, 여기 대략 그 줄거리를 추려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올립니다. 전하께서 특별히 지휘를 내리시어 일왕(一王)의 제도로 삼으셨으면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천하의 큰 근본은 바로 전하의 마음 하나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급선무는 기강(紀綱)을 진작하고, 궁위(宮闈)를 엄히 하고, 현량(賢良)을 등용하고, 민은(民隱)을 돌보고, 실지 효과를 책임지우는 것입니다.” 하고, 또 대행 대왕의 시호 문제 및 자강(自強)의 방법에 관해 논하고, 끝에 가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제손(諸孫)들을 조속히 풀어 돌아오게 할 것을 말했는데, 그것은 당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들이 자기 어머니에게 연좌되어 귀양살이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이 손수 비답하기를, “올린 내용들이 다 절실한 일들이어서 탄복할 정도이다. 다만 모두 문제만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니, 다시 분명하게 날 가르쳐 주기 바란다.” 하고, 이어 《소학》의 주설(註說)과 《중용혹문》의 구두를 바로잡아 올리도록 명하고는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그때 뜻을 거스른 유신(儒臣)들에 대해 비답이 준엄했었는데, 선생은 직을 사양하고 이어 아뢰기를, “임금은 남의 말을 들을 때는 마음을 비워 수용하고 말씀과 명령을 하실 때는 반드시 조용하고도 평온하게 하셔야지, 발끈 화를 내거나 불평을 토로하여 아랫사람들이 깊고 얕고를 논의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비답하기를, “경이 그렇게 말하니, 나로서도 후회가 된다.” 하였다. 선생이 세 번 사양하자 해당 아문에서 논의하여 체직하도록 명하고, 이어 사대(賜對)하여 상이 이르기를, “경을 보고 싶어한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이렇게 올라와 주어 너무나 기쁘다. 나라에 다른 보배라고는 없고 오직 경이 보배이다.” 하였고, 선생은 이르기를, “신이 선왕조에서도 임금의 마음 하나를 들어 말씀 올린 적이 있지만, 사실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 다스리는 일도 제일 중요한 것이 인재를 얻는 일이지만, 인재 발굴에 있어 제일 필요한 것은 역시 임금 한 분의 정밀한 통찰력입니다.” 하니, 상은 다 허심하게 받아들였다.
상이 산릉(山陵) 및 혼전(魂殿)에서 왕비(王妃)까지 제사를 모시려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길사 흉사가 병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정신 이황(李滉)이 이미 논한 바 있습니다.” 하였고, 또 반곡(反哭) 후에 안신제(安神祭)를 모시려고 하자 선생이 또 말하기를, “그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예문(禮文)에는 없습니다.” 하였다. 곧 도헌(都憲)을 제수받고는 또 진언하기를, “요즘 제배(除拜)하는 과정에서 성인으로서 공평을 잃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래서는 나랏일이 다시 가망이 없게 됩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시고 지극히 공정을 기하도록 노력하시기를 삼가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있어 내 매우 가탄(嘉歎)을 느낀다.” 하였다.
그때 또 김 문정공을 좋아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이 있어 꽤나 불손한 말을 하기에 선생이 그에 대해 논하자, 상이 비답하기를, “소관(小官)이 원로를 그렇게 업신여기는 까닭은 내가 원로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상은 선생이 직임을 간곡히 사양하여 마지않는다 하여 공조 참판으로 갈아 임명하였는데, 산릉의 부토를 마치고는 선생이 누차 물러갈 것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특진관으로 입시하여 《중용》을 진강하면서 사치의 폐단에 관해 말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돌아갈 뜻을 굳히자 정부와 옥당 그리고 태학의 제생들이 여기저기서 만류할 것을 청하는 글월을 올렸고, 김 문정공은 말하기를, “옛날에 사마광(司馬光)은 국사를 여회숙(呂晦叔)에게 맡기면 된다고 했었지만, 지금은 누구에게 맡길 것이냐.”고 하고, 드디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보기에 김모는 유가의 덕망 높은 사람으로 노성하고 단아하며 신실하여 사림들 모두가 우러러보는 존재이고 성명께서 조정을 함께하고 있는 것을 너도나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은 그를 가게 둬서는 안 되고 조정에 있으면서 신화(新化)를 돕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두 번이나 근시를 보내 만류했지만, 선생은 사은하고 남교(南郊)로 나가 있었다. 상이 선생의 조카인 승지 김익희(金益煕)를 특별히 침전으로 불러 이르기를, “그대가 가서 내 뜻을 전하라. 그대를 보내는 까닭은 내 뜻을 잘 전하기를 바라서이다.”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이 마지못해 다시 들어왔다. 상은 내사(內使)를 보내 기거를 물었고, 선생은 선생대로 또 소를 올려 물러갈 것을 간청하니, 이에 상이 이르기를, “역시 이 엄동설한에 나이 많은 이가 길을 가자면 어려운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염려해서이다. 나를 위해 잠시 머물러 있으면 국가에도 보탬이 되고 사림들의 본보기도 될 것 아닌가.” 하였다. 그리고 즉석에서 도헌을 제수하고는 이르기를,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말고 늘 경연에 들라.” 하였다. 조금 후에는 이조 판서에 승진 임명하면서 이르기를, “천위(天位)와 천직(天職)을 함께하지 않으면 그것은 왕공(王公)으로서 현자를 존대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으므로, 선생은 드디어 나아가 사은하고 성심을 다해 그 지우(知遇)에 보답할 것을 생각했고, 조야에서도 앞다투어 큰 기대를 걸었다.
선생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자리를 이으신 지 이미 반년이 되었는데도 정치 체제가 확립되지 않았고 나라 형세가 더욱 쇠퇴한 것은 그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재주가 부족해서이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선왕이 반정(反正)을 했을 때 오늘에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인재들이 자리를 맡고 있었으나 끝내 이루어 놓은 공적 하나 없어 그것이 천고의 한인데, 지금도 혹시 전날처럼 돼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 신은 내심 너무나 걱정이 됩니다. 부견(苻堅) 같은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래도 일시적이나마 인재를 얻어 할 일을 해냈었고 진 목공(秦穆公) 같은 이는 소 먹이던 백리해(百里奚)를 재상으로 기용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어질기만 하다면야 자급(資級)에 구애받을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매우 좋은 말을 했다.” 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임금이라면 도량이 넓어야 하는데, 근래 전하의 뜻을 거스른 자들이 현저히 소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 대동법만 하더라도 그것이 목적은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고 국력을 여유있게 하자는 것이겠지만, 아직 체제가 확립되기 전에 그것부터 먼저할 것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한 말은 다 노성한 말들이어서 듣기에 참 기쁘다.” 하였다.
선생은 그동안 상위(喪威)를 당했고 또 병도 있어서 사직소를 세 번이나 올렸으나, 상은 위로하고 병을 위문하였다. 대정(大政)을 마치고 나서 또 면직을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에 우상 김육(金堉)이 대동법 시행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선생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선생을 꽤 침릉(侵陵)했으므로 선생이 자신을 탄핵하면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우상이 와서 신에게 대동법의 편의성에 관해 묻기에 신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하였고 또 전석(前席)에서도 어리석은 소견을 대략 아뢴 바 있었습니다. 옛날 사마광(司馬光)과 범진(范鎭)은 뜻도 같고 길도 같았으나 악률(樂律)에 있어서는 그 논의가 처음부터 끝까지 맞지 않았었고,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은 어전에 올라서는 의견을 굳이 같이하지는 않았으나 어전에서 내려와서는 얼굴 한번 붉힌 일이 없었습니다. 옛 군자들은 다 그렇게 화이부동(和而不同)하였었지, 언제 말 한마디 맞지 않는다 하여 금방 불평을 표시한 적이 있었습니까. 우상은 심지어, ‘그렇게 시대의 조류를 거스르다가는 목숨을 건질 겨를도 없을 것이다.’ 하기까지 했는데, 그 말을 읽고서 신은 소름이 끼쳐서 안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일각인들 여기 머물러 있겠습니까.” 하고, 바로 강 밖으로 나갔다. 상이 진지하게 만류했지만, 선생은 떠나면서 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상이 손수 비답하기를, “나랏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경의 몸 하나만 깨끗하자고 이렇게 가버린단 말인가.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도 믿는 것이라곤 한두 대신들과 그리고 경뿐이다.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는 전국 시대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욕됨을 참고 서로 낮추어 국사를 이뤄 나갔었는데, 경 같은 현자가 그것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모름지기 국사의 중함을 생각해서 빨리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고, 김 문정공도 다시 소환을 청하는 차자를 올렸으며, 관학의 유생들도 상소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떠난 지 3일 후에는 사관이 뒤쫓아가서 돈유를 전하기도 했으나, 상은 선생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특별히 우상을 체직시켜 여정(輿情)을 무마하였다. 선생은 돌아가서 상소하기를, “신과 김육과는 오래전부터 좋은 사이로서 서로 혐의라고는 없는 처지인데, 다만 대동법에 관한 의견이 맞지 않아 한바탕 시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면 아랫사람이 사피(辭避)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기에 그런 것이지, 애당초 염파와 인상여처럼 틈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상이라고 무슨 딴 마음이야 있겠습니까. 이 뒤에 서로 만나게 되면 평소와 다름없이 담소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물러난 것은 그 한 일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신이 나이 많고 병도 심한 몸으로 무엇 하나 도움되는 일도 없이 어찌 갑자기 여사에서 죽기라도 하여 천고의 비난거리를 만들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이 떠나고 나자 시사(時事)는 더욱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오랑캐들이 참소로 인하여 와서 공갈하는 바람에 화를 예측할 수가 없었는데, 상이 나서서 친히 수습했던 덕으로 사건이 다행히 무마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세상에 더욱 뜻이 없어졌다. 인조의 초기(初朞)에 병을 무릅쓰고 부반(赴班)했는데, 상이 인견하고 싶어했으나 선생은 이미 돌아온 뒤였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을 때 유공 계(兪公棨)가 원지로 귀양살이 가게 되자 선생도 직임을 사양하고는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유계가 현자라고 말했으니, 견책도 함께 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두 번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연거푸 소장(疏章)을 보니 꼭 얼굴을 대한 것만 같다. 아, 세상이 이 모양일수록 노성한 사람을 쓰고 싶은 생각이 마음에 간절한 것이다.” 하였다. 그 후로도 소명을 계속 사양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 3)에 연신(筵臣) 이태연(李泰淵)이 아뢰기를, “김모는 바로 일대 유종(儒宗)으로서 상께서 특별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가해야 합니다.” 하여, 상은 즉시 가자(加資)를 명하고 이어 이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그때 선생의 나이 79세였는데, 선생은 나이가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네 번이나 상소하여 상이 결국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하교하기를, “김모의 나이 이미 팔십 당년이어서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니, 본도에서 먹을 것을 제급하여서 뜻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이 또 사양하자, 비답하기를, “내가 경의 나이와 덕을 얼마나 존모하고 있는지 아는가. 조석으로 그 덕음(德音)을 듣고 사림들의 본보기가 되지 못하게 한 것이 한인데, 그까짓 박물(薄物)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이에 선생은 그것을 가지고 일가 친척 또는 이웃들과 함께 잔치를 하였다.
계사년(1653, 효종 4)에 종전의 명대로 또 정헌(正憲)으로 올렸는데, 대신 중에 숭정(崇政)으로 가자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서 연거푸 의정부 좌참찬, 판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선생은 전후 일곱 차례나 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정에 큰 문제가 있을 때면 상이 관원을 보내 자문을 구했다.
선생에게는 몇 해 전부터 병이 있었는데 병신년(1656, 효종 7)에 와서는 그 병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선생은 단정한 몸단속이 평일과 다름이 없었고, 제생들에게도 말하기를, “내가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그 이치를 알아 그 때문에 마음이 동요된 적은 없다. 내 이것 하나만은 고인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였다. 또 조카 김익희(金益煕)에게는 말하기를, “문형(文衡)과 전장(銓長)을 한 몸에 지니고 있어 내 너를 위해 두려워하고 있다. 십분 조심하라.” 하고 경계하였다.
5월 13일에 운명하셨는데, 부음을 듣고는 상이 이르기를, “김모는 유림의 영수이고 조정에서 덕망이 높으니, 특별히 예장을 내리라.” 하고 근신을 보내 치제했으며, 뒤에 시호를 문경(文敬)으로 내렸고, 효종 대왕을 태묘(太廟)에 부사(祔祀)하면서 선생을 배향하였다. 묘소는 연산(連山)의 천호산(天護山) 고운승사(孤雲僧舍) 북쪽에 있다.
김씨가 광주(光州)에서 나오기는 신라 말기에 왕자 김흥광(金興光)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스스로 서민이 되어 광주로 도망간 데서 시작되었다. 그 후로 자손이 더욱 현달하여 8대를 연이어 고려의 평장사(平章事)가 되기도 했으므로 세상에서는 그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조선조에 와서는 김국광(金國光)이 좌의정을 지냈다. 휘 계휘(繼輝)는 선조조의 명신으로서 그가 노선생을 낳았는데, 노선생은 휘가 장생(長生)이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선생은 단정하고 섬세하며 단아하고 청수하여 정한 금이나 아름다운 옥과도 같았으니, 청백하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곧으면서 휘어지지 않았다. 여러 대를 두고 아름다움이 쌓여온 나머지 시례(詩禮)의 연원을 이어받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입신의 기본으로 삼고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로 학문과 사업을 닦았다. 그 규모와 절도는 한결같이 가학(家學)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어려서는 문장에 소질이 있었으나 점점 자라면서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성리학에만 전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면서 마음을 보존하고 실천하였으며 공경하고 겸양하여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중간에 몸은 곤궁해도 마음은 형통했으며, 날마다 어버이를 곁에서 모셨다. 무릇 어버이 섬기는 도리에 있는 힘을 다해 시종 변함이 없었으므로 노선생도 매우 애지중지하여 부자(父子) 사이에 지기(知己)라고 할 정도였다.
노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는 그 법을 그대로 따랐다. 비록 기질적인 차이가 있고 덕에 나아간 데는 차이가 있었으나, 그러나 그 길은 똑같았던 것이다. 일찍이 이르기를, “학문에서 중요한 것은 언행이 일치하고 유현(幽顯)이 똑같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말 잘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것이다. 고인이 말한 ‘혼자 갈 때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혼자 잘 때 이불에도 부끄러울 것 없다. 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고 한 말이 참으로 경종이 되는 말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늘그막에는 재호齋號를 ‘신독愼獨’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자신의 실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또 선생은 세상의 학자들이 아래에 있으면서 높은 곳을 넘보고 실속은 없이 과대망상한 것을 병통으로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차라리 낮을지언정 높지 말고, 차라리 얕을지언정 깊지 말며, 차라리 옹졸할지언정 공교하지 말라. 우리 유가의 법은 원래 이와 같은 것이다. 정자ㆍ주자 이후로는 깊고 은미한 것을 다 발명하고 밝혀 놓아 다시 여온餘蘊이 없으므로, 후학들로서는 그것을 그대로 지키고 애써 행하면 그뿐인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혹 색다른 말을 만들어 선유(先儒)들의 말에 이설異說을 내세우는 자가 있으면 그것을 매우 옳지 않게 생각했는데, 여기에서 선생의 학문상 견해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선생은 만년에 도가 높고 덕이 높아 마치 봄바람이 사람을 스치듯 했으나, 그러나 성내지 않아도 위압을 느낄 정도로 사람들이 그 앞에 서면 다 엄숙하고 경건해졌다. 그것은 안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학문에 전념했기 때문에 그 지키는 바가 더욱 굳고 실천을 더욱 독실히 하여 결국 조예가 그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세상에 이름으로는 유학을 한다고 하면서 마음에 얻은 것도 몸소 행하는 것도 없는 자에 비하면 그 성위(誠僞)가 과연 어떠할 것인가. 그중에서도 일생을 마칠 때까지 몸을 오직 예로만 부렸던 점에 있어서는 사실 근세의 제현들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점이었다.
뜻이 원래 소박하여 애당초 문밖을 나설 생각이 없었으나, 늦게야 성명을 만나 그 은례(恩禮)에 감격하여 알면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은 꼭 이치에 맞는 말만 했으며, 지극한 정성과 외로운 충절은 귀신이 보증할 정도였다. 비록 시대와 운명이 맞지 않았으나, 진퇴를 의리에 입각해서 하였고,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 마음 하나만은 일찍이 진퇴로 인해 달라지지 않았다. 전후에 등대(登對)해서 나라 다스리는 법을 논할 때 언제나 임금의 마음 하나를 근본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선생이 실지 체득한 것으로서 공언(空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선생의 성품이 원래 겸양하여 본인이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원근에서 다 종사(宗師)로 받들었다. 시문(詩文)은 전혀 군말이라곤 없이 단아하고 적확했는데 몇 권의 유고가 집에 소장되어 있다. 글씨체는 정밀하면서도 힘이 있고 방정하면서도 엄격하니, 왕희지(王羲之)의 해서체(楷書體)를 깊이 체득한 것으로 근세의 전문가들도 따라갈 수가 없다.
삼가 듣건대 우리나라의 도학(道學)은 포은(圃隱) 정 문충공(鄭文忠公)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조선조에 와서는 여러 유현들이 서로 이어 천명하여 문운이 대단히 융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노선생께서는 이 문성공(李文成公)의 정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오로지 질박하고 실질적인 공부를 했으며, 선생은 또 그 지결(旨訣)을 이어받아 문로(文路)가 매우 바르므로 아마 이 도학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선생은 좌의정 유홍(兪泓)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병으로 슬기롭지 못했다. 그리하여 대신 집안을 꾸려간 이가 율곡 선생의 서녀였는데, 김익형(金益炯)ㆍ김익련(金益煉)은 그의 소생으로 김익련은 참봉이고 두 딸은 생원 김태립(金泰立)과 정광원(鄭廣源)에게 시집갔다. 김익형은 김만리(金萬里)ㆍ김만규(金萬圭)ㆍ김만질(金萬耋)ㆍ김만량(金萬量)ㆍ김만당(金萬堂)을 낳았고 딸 둘은 송세걸(宋世傑)ㆍ김석보(金碩輔)에게 출가하였다. 김익련은 김만성(金萬城)ㆍ김만제(金萬堤)를 낳았는데 다 진사이고, 김만방(金萬坊)ㆍ김만용(金萬墉)은 조정에서 녹용(錄用)하였다. 김만리는 현재 봉사(奉事)이다. 나는 노선생에게서 배우고 또 선생도 섬겼으나 교육하신 은혜를 저버릴 정도로 학문 방향을 모르고 있어 지금 이 사실을 기록하는 글을 쓰는데도 그 만분의 일도 형용을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한두 가지를 추려서 말을 아는 군자를 기다리기로 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한다.
문원공의 학문은 文元之學
율곡에게서 전수한 것인데 傳自栗谷
선생은 그를 이어받아 先生侍承
연원이 분명하다 淵源端的
내 이 지문을 써서 我作斯誌
후각들에게 알리노라 以貽後覺
숭정 기원(崇禎紀元) 계축년(1673, 현종 14) 7월 일에 문인인 은진 송시열이 짓다.
墓誌銘 幷序 [宋時烈]
愼獨齋先生歿。余猥作銘文。其胤益炯,益煉與門人尹宣擧等。刻而揭諸神道矣。旣而。其二胤及尹公相繼淪歿。今其諸孫萬里,萬城等謂余曰。幽誌未具。復以爲請。嗚呼。先生之門。登炙者多。而至於今日存者。唯余矣。雖老且病。亦何敢辭。謹按。先生諱集。字士剛。沙溪老先生之第二子也。妣曺夫人。僉樞大乾女。萬曆甲戌六月六日。先生生漢陽貞陵洞里第。姿性絶異。學語時。豎一指于其口曰。此中字也。五歲而知讀書作大字。言動不妄。稍長。從泉谷宋公象賢,宋龜峯翼弼學。崔簡易岦見所作詩語曰。將爲大手筆也。壬午。老先生守制在廬舍。先生所以侍奉助奠。無不如禮。丙戌。曺夫人歿。先生致哀有羸疾。中辛卯進士。庚戌用館薦授齋郞。不就。癸丑誣告獄。闔門幾不免。遂奉老先生。歸湖西之連山。時廢朝政亂。倫常斁絶。先生養親講學外。孑然靡他。癸亥仁祖大王御極。老先生首被徵命。廷議以先生學行出類。將擢置臺職。先生丐免甚力。爲養得除扶餘縣監。務祛弊政。施以敎化。日與士子討論經籍。丁卯。病遞。士民勒碑頌德。戊辰。除臨陂縣令。未幾謝歸。自後仍有翊衛司衛率,全羅都事之命。皆辭。辛未秋。老先生易簀。先生尙能以筋力爲禮。克誠克愼。極致情文。甲戌春。拜繕工僉正。夏。以司憲府持平召。上辭狀。翌年復拜。丙子春。由掌令再爲執義。間爲宗親府典籤宗簿寺正。皆以病免。丙子冬。虜至。先生星夜赴亂。未及行朝。
賊已塞路。遂退與同志糾合義旅。將北上勤王。俄而聞媾成。先生入都進慰。戊寅秋。復徵以執義。呈狀遞。冬。有人上變。先生庶弟杲被逮。事將不測。先生舁疾入京。與弟參判公槃。席藁待命。上特命安心退去。仍曰。杲固有妄言之罪。而特爲其父兄原之。己卯。復有召命。先生以前冬事。兼欲一謝隆恩。遂造朝。陞拜承政院同副承旨。再辭不許。旣入侍。上慰諭備至。講說經義。因進規戒。上甚傾聽曰。可悉陳所懷。先生曰。人主一心。萬化之源。誠能存養。察其所發。則人欲退聽。天理流行矣。上曰。此堯舜心法。予當體念。又問治心爲政。以何爲要。先生曰。治心當以敬爲主。而爲政則貴在誠實矣。上稱善。改右副。辭以疾。上問以醫藥。先生乞遞益力。遂許之。後累除元孫輔養官曰。經明行修。實合此任。甲申秋。拜工曹參議左副承旨。孝宗大王由大君陞儲貳。大臣言金某一生沈潛性理之學。使侍東宮。則必有薰陶之益。召旨甚懇。丙戌春。尼山賊柳濯等謀亂伏法。其爰辭。有不敢近金承旨廬下之語。上歎曰。雖賊徒猶知畏憚。賢者之有益於人國也如是矣。上以淸陰金文正公言。別置世子贊善屢召。復有工曹之命。蓋自己卯退歸之後。除命頻繁。而一以病辭曰。世道之責。自有其人矣。己丑。孝宗大王嗣位。特召曰。當此罔極之日。益思稽古讀書之人。爾在先朝。猶未嘗一日在朝。況予誠薄。焉能上來。先生卽入臨。仍謝新命。優賜米饌。特拜禮曹參判。銓曹以格外爲言。上曰。稽古讀書之人。何可拘於常規。先生四疏懇辭。又再告。則上曰。強其所不欲。亦非待賢之道。遂移工曹。上封事論喪禮及時務。其略曰。臣竊惟天釵,天秩自有典常。古經,國制因革相承。當初急遽。未免放過。前頭節文。猶宜講究。今略論梗槩。爲一冊以進。冀殿下特賜指揮。以爲一王之制。又曰。天下之大本。殿下之一心。是也。今日之急務。振紀綱,嚴宮闈,用賢良,恤民隱,責實效。是也。又論大行易名及自強之道。未言安置諸孫。早宜放還。蓋昭顯世子三子。嘗坐其母竄外也。上手批曰。所上諸事。歎服其切實。第皆引而不發。願更明以敎我。仍命訂定小學註說及中庸或問句讀以進。拜司憲府大司憲。時儒臣忤旨。有嚴批。先生辭職。仍進啓曰。人主聽言之道。惟在虛心容受。辭令之間。必須從容平穩。絶不可暴怒不平。使群下議其淺深也。御批卿言至此。予亦悔焉。三辭令該曹議遞。而賜對。上曰。欲相見久矣。卿今上來。忻幸可喩。國無所寶。惟卿是寶。先生曰。臣嘗於先朝。只以人主一心爲言。誠以此外無他道也。爲治之道。在於得人。而得人之要。又不外於一人之精鑑矣。上皆虛心嘉納。上欲於山陵及魂殿幷祭王妃。先生曰。吉凶不可幷行。先正臣李滉已有所論矣。又欲於返哭後。設安神祭。先生曰。於禮無可據之文。旋拜都憲。又進言曰。近日除拜之間。或失聖人平蕩之義。如此則國事無復可望。伏願克去己私。務循至公焉。批曰。卿之愛予如此。深用嘉歎。時有一種人不悅於金文正公。頗無遜言。先生又論之。御批以爲小官侵侮元老。無乃予之尊敬未至而然歟。上以先生懇辭不已。遞拜工曹參判。山陵旣復土。先生屢乞退不許。以特進入侍。進講中庸。因言奢侈之弊。已而歸意益決。政府,玉堂,太學諸生。交章請留。金文正公曰。昔司馬公謂國事付之呂晦叔。今日將付之誰。遂上箚曰。臣伏見金某儒門宿望。老成端亮。士林莫不嚮仰。爭喜聖明得致同朝。臣以爲不宜苟循其去。以補新化也。上再遣近侍留之。先生辭謝。遂出南郊。上特召先生從子承旨益煕于寢殿曰。爾其往諭予意。所以遣爾者。冀其善諭也。先生不得已還入。遣內使問起居。先生又再疏乞許退。上曰。亦慮其雪天嚴寒。高年行役之爲難也。爲予暫留。則國家之補益。士林之矜式。爲如何哉。卽拜都憲而曰。勿拘常規。每入講筵。俄陞拜吏曹判書曰。不與之共天位,治天職。則非王公之尊賢也。先生遂出謝。思竭誠心。以答知遇。朝野爭相想望。先生入對曰。殿下嗣服已半年。而治體不立。國勢愈替。厥咎安在。上曰。非不勉勵。才實不逮。先生曰。先王反正。耆俊在服。非今日比。而竟無底績之盛。可謂千古之恨。或慮今日復如前日。臣不勝私憂也。且如苻堅。固不足道。然必得一時人才。以做事功。又如秦穆公用飯牛者爲相。苟知其賢。何資級之可拘。上曰。卿言甚好。先生又曰。人主之量。貴於恢弘。而近來忤旨之人。顯有疏外底意思。且大同之法。要可以便民裕國。然國體未立。非所當先。上曰。卿言皆老成可喜。先生適遭喪威。且有疾。三疏請辭。上慰諭問疾。旣行大政後。又乞免不許。時右相金堉力主大同之議。與先生不合。頗侵先生。先生自劾曰。頃者右相來問大同便否。臣以爲重難。亦於前席。略陳愚見。昔司馬光,范鎭。志同道合。而至論樂律。則終始參差。韓琦,范仲淹。上殿未嘗苟同。下殿未嘗失色。古之君子。和而不同如此。何嘗一言不合。而便以不平相加哉。至其所謂觸忤時忌。救死不贍之語。臣讀來竦然。不能自定。臣何敢一刻淹留乎。卽出江外。上勉留甚至。先生行且陳疏。上下手批曰。卿之不念國事。潔身長往。何至於此。國事雖危。所恃者惟一二大臣與卿耳。廉,藺戰國之士。尙能忍辱相下。以濟國事。以卿之賢。豈不知此。須念國事之重。速爲入來。於是金文正公復箚請召還。館學諸生亦上疏。先生行三日。史官追及敦諭。上知先生不可回。特遞右相。以慰輿情。先生旣還。上疏曰。臣與金堉有久要之好。無相失之嫌。特以大同論議不合。而有一場之鬧。在下辭避道理當然。初非廉,藺相隙之比也。然右相亦何心哉。日後如得相見。當談笑如平生矣。若臣之當退。不但此一事而已。臣年迫病劇。涓埃無補。豈宜溘然於旅邸。以貽千古之譏乎。先生旣去。而時事益不可收拾矣。又敵人因譖來喝。禍將不測。賴上親爲彌縫。事幸得已。先生益無意於世。仁祖初期。力疾赴班。上欲引見。而先生已歸矣。拜大司憲。時兪公棨有遠竄之命。先生辭職曰。臣嘗言兪棨之賢。請同被譴。疏再上。批曰。連見疏章。怳若對面。噫。世道至此。思用老成。誠切于中也。自後連辭召命。壬辰。筵臣李泰淵啓言。金某乃一代儒宗。自上特加優老之典。上卽命加資。仍拜吏曹判書。時先生年七十有九。先生辭以年未準格。至於四疏。上竟許之。俄而敎曰。金某年旣耆艾。餘日無幾。其令本道題給食物。以表予意。先生又辭謝。批曰。予之慕卿齒德。容有極乎。以不能朝暮得聆德音。爲士林矜式爲恨。顧此薄物。何足云喩。先生乃與宗族鄕黨共享之。癸巳。申前命陞正憲。有大臣言超加崇政。連拜議政府左參贊判中樞府事。先生前後請辭。至於七疏。幷不許。朝有大議論。上遣官就問。先生自數年前有微恙。至丙申轉劇。而端莊檢束。無異平日。謂諸生曰。知死生之理而無所動於心。此則吾無愧於古人。又戒從子益煕曰。文衡,銓長。萃於一身。吾爲汝懼。可十分愼之。五月十三日。啓手足。訃聞。上曰。金某儒林領袖。朝廷重望。其特賜禮葬。遣近臣致祭。後賜諡文敬。及孝宗大王附太廟。以先生配食。墓在連山天護山孤雲僧舍之北。金氏出自光州。新羅末王子興光。知國將亡。自爲庶人遁于光。其後子孫益顯。連八代爲高麗平章。世號其居爲平章洞。我朝國光。官左議政。有諱繼輝。宣祖朝名臣。是生老先生。老先生諱長生。諡文元公。先生端方審密。溫雅和粹。如精金美玉。淸而不激。介而不矯。承累世積美之餘。聞詩禮淵源之訓。以孝悌忠信爲立身之本。窮理居敬爲進修之方。其規模節度。一以家學爲準。幼有華藻。稍長卽不屑也。唯專心性理之書。早夜孜孜。操存踐履。恭敬退讓。其言談擧止。無一毫放過。中遭道消。處困而亨。日侍鯉庭。凡事親之道。必竭其力。終始如一日。老先生亦深加愛重。父子間自謂知己。老先生旣歿。一遵其法。雖以氣質之稟而造德各異。其道則未嘗不同也。嘗曰。所貴於學者。爲其言行相顧。幽顯一致。不然則鸚鵡之能言耳。古人所謂獨行不愧影。獨寢不愧衾者。眞是警省語。故晩年自號其齋曰愼獨。蓋志其實也。深以世之學者處下窺高。自大無得爲病。嘗曰。寧卑毋高。寧淺毋深。寧拙毋巧。吾儒家法本來如此。程朱以後。發微闡奧。無復餘蘊。後學惟當恪守勉行而已。聞人或有刱設新奇。立異於先儒者。甚不韙之。此可見其論學之一端也。先生晩歲。道尊德成。則盎然如春和襲人。雖不怒而威。人莫不肅敬。蓋其學專用心於內。故所存益固。所履益篤。而其所造詣。終至於此。視世之名爲儒學而卒無心得躬行者。其誠僞如何也。最其役身於禮。以終其身者。此實近世諸賢之不可及者也。雅志沖素。始不欲一脚出門。晩際聖明。感激恩禮。知無不言。言必中理。至誠孤忠。可質神鬼。雖時命不遇。進退以義。而愛君憂國。一心耿耿。未嘗以旣退而有間也。前後登對論治。皆本於人主之心。此其眞實見得。非空言可比也。先生性本謙退。不以師道自居。而遠近洽然宗師之。其爲詩文。端的雅緊。絶無枝辭剩語。有遺稿若干卷藏于家。筆法精健方嚴。深得王氏楷體。近世專家所不及也。竊嘗聞之。吾東道學。蓋始於圃隱鄭文忠公。而我朝諸儒賢闡而明之。奎躔之會。可謂盛矣。惟吾老先生。實得李文成公嫡傳。專於朴實頭用功。而先生承其旨訣。門路甚正。則庶幾傳之無弊云。先生娶左議政兪泓女。病不慧。攝其家政者。栗谷先生之庶女也。益炯,益煉。其所生也。益煉參奉。二女。適生員金泰立,鄭廣源。益炯生萬里,萬圭,萬耋,萬量,萬堂。二女。適宋世傑,金碩輔。益煉生萬
城,萬堤。皆進士。萬坊,萬墉。朝廷錄用。萬里今爲奉事。余從學老先生。又事先生。學未知方。孤負敎育之恩。今於記實之文。不能形容其萬一。姑序一二。以俟知言之君子云。銘曰。文元之學。傳自栗谷。先生是承。淵源端的。我作斯誌。以貽後覺。崇禎紀元癸丑七月日。門人恩津宋時烈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