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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문인록(師友門人錄)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의 휘는 종직(宗直)이고, 자는 계온(季昷)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 단종1)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천순(天順) 기묘년(1459, 세조5)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학문이 정심(精深)하고 문장이 고고(高古)하여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며, 명현 석사(名賢碩士)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문하의 제자 가운데 도학(道學)으로 이름나서 위로는 염락(濂洛)과 포은(圃隱)의 근원을 접하고, 아래로는 후학들에게 끝없는 아름다움을 열어 준 자는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유호인(兪好仁), 박한주(朴漢柱)이다.” 하였다.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를 당하였다.
율정(栗亭) 이 선생(李先生)의 휘는 관의(寬義)이고, 자는 의지(義之)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이천(利川)에 우거했는데, 경술(經術)에 밝고 덕행(德行)을 수양하였으며 성리(性理)의 학문에 정밀하였으므로 당시의 학자들이 많이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일두(一蠹) 선생이 약관의 나이에 가서 배웠다. 성묘(成廟)가 명하여 불러서 성리의 근본을 강론하게 하였으며, 또 천지의 도수(度數)와 일월성신(日月星辰), 그리고 세차(歲差)와 역법(曆法)을 물었는데, 분변하여 대답함에 실수가 없었다. 후에 이조 판서에 포증(褒贈)되었다.
김굉필(金宏弼)의 자는 대유(大猷)이고,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다. 선생과 더불어 점필재의 문하에 수학하였다. 일찍이 함께 마음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학문하여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배워서 무엇하겠는가.” 하니, 한훤이 말하기를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있지 않은 곳이 없고, 또 있는 곳도 없다.” 하였다. 성묘(成廟) 경자년(1480, 성종11)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관직이 형조 좌랑에 이르렀다. 연산군(燕山君) 무오년(1498, 연산군4)에 사화(史禍)를 만나 희천(煕川)에 부처(付處)되었고,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거듭 사화를 만나 처형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고, 호는 추강(秋江)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성묘조(成廟朝)에 상소하여 소릉(昭陵 단종(端宗) 생모의 능)의 복위를 청하였으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 세상에 대한 마음을 끊어 버리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다. 연산군 갑자년에 부관참시의 화를 당하였다.
주계군(朱溪君)의 이름은 이심원(李深源)이고, 자는 백연(伯淵)이고, 호는 성광(醒狂)이며, 태종(太宗)의 현손(玄孫)이다. 선생과 함께 점필재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경술에 밝고 덕행을 수양하였으며 충효하고 정직하였다. 임사홍(任士洪)의 부도함을 미리 알아차리고 그가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이라고 강력하게 진달하니, 성묘가 느껴 깨닫고서 임사홍을 외방으로 찬배(竄配)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정사가 혼란해져 그의 무고(誣告)에 연루되어 두 아들까지 죽음을 당하였다. 중묘조(中廟朝)에 특별히 일품(一品)에 추증하고, 또 그 문에 정문(旌門)하게 하였다.
무풍부정(茂豐副正)의 이름은 이총(李摠)이고, 자는 백원(伯源)이며, 태종의 증손이다. 선생과 함께 점필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났고 시어(詩語)가 기묘하였다. 추강이 그의 도량이 큼을 칭찬하였다. 양화도(楊花渡) 어귀에 별장을 짓고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무오년에 거제(巨濟)에 장류(杖流)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조위(曺偉)의 자는 태허(太虛)이고, 호는 매계(梅溪)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모두 원대한 사업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미 처음 벼슬해서 성묘의 지우(知遇)와 장려(奬勵)를 크게 입었으나, 부모의 봉양을 위해 고을 수령이 되기를 청하여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었다. 이 당시에 선생이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였는데 매우 후하게 위문하였다.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다. 연산조에 점필재의 시문(詩文)을 수찬(修撰)한 일로 의주(義州)로 귀양 갔다가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다. 홍치(弘治) 계해년(1503, 연산군9)에 졸(卒)하였다. 갑자년에 부관참시의 화를 당하였다.
유호인(兪好仁)의 자는 극기(克己)이고, 호는 뇌계(㵢溪)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충효(忠孝)하고 청검(淸儉)한 데다 시문이 고고하고 필력이 굳건하므로,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칭찬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8)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갑오년(1474, 성종5)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다. 선생과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졸한 뒤에 선생이 제문을 지었다.
박한주(朴漢柱)의 자는 천지(天支)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호는 오졸재(迂拙齋)이다. 선생 및 김한훤당과 함께 점필재의 문하에 수학하였는데, 당시에 ‘필문삼현(畢門三賢)’이라고 일컬어졌다. 성묘 을사년(1485, 성종1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과 헌납(獻納)을 지낼 때는 언사(言事)가 직절(直截)하였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무오년에 벽동(碧潼)에 장류(杖流)되었다. 갑자년에 거듭 사화를 만나 죽음을 당하였다. 중묘 초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표연말(表沿沫)의 자는 소유(少游)이고, 호는 남계(藍溪)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성묘 임진년(1472, 성종3)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지내고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선생과 같은 군(郡)에서 생장하여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무오년의 사화 때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다.
양희지(楊煕止)의 자는 가행(可行)이고, 호는 대봉(大峯)이며, 본관은 중화(中和)이다. 성묘 갑오년(1474, 성종5)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연산군 때 무오년의 사화를 당하여 선생이 종성(鍾城)으로 장류되었는데, 공이 편지로 작별을 고하였다. 경신년(1500, 연산군6)의 재이(災異)로 인하여 상소를 올려 무오년에 귀양 간 사람들의 억울함을 논변하자 모두 양이(量移)되었는데, 선생만은 여기에 끼지 못하였다. 임종하기에 이르러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연이어 종성의 선생에 대해 물은 것이 두 차례였다. 선생이 일찍이 공을 칭찬하기를 “백인(白刃)을 밟고 작록(爵祿)을 사양할 사람은 양가행(楊可行) 한 사람뿐이다.” 하였다.
윤효손(尹孝孫)의 자는 유경(有慶)이고, 호는 추계(楸溪)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일찍이 선생과 함께 주서(朱書)를 강론하고, 성리설(性理說) 및 예설(禮說)에 대하여 논하였다.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박형달(朴亨達)의 자는 통중(通仲)이고, 본관은 밀양이며, 호는 사미정(四美亭)이다. 학문(學問)과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에 제수되었고, 또 명경(明經)으로 봉교(奉敎)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김일손(金馹孫)의 자는 계운(季雲)이고, 호는 탁영(濯纓)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성묘 병오년(1486, 성종17)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이조 정랑에 이르렀다. 선생과 함께 점필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남계(灆溪) 가에 정자를 짓고서 선생과 왕래하며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그가 검열(檢閱)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선생의 학행(學行)을 천거하여 자신의 관직을 대신 맡기기를 청하였는데, 그 상소에 ‘정여창은 도(道)가 하늘과 사람에게 통하고 학문이 체(體)와 용(用)을 갖추었다.’라는 말이 있다. 무오사화 때 처형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강혼(姜渾)의 자는 사호(士浩)이고, 호는 목계자(木溪子)이다. 점필재의 문하에 수학하여 문명(文名)이 탁영에 버금갔다. 중묘조에 관직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조신(曺伸)은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아우이며, 호는 적암(適菴)이다. 선생이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되었을 때 시(詩)로 축하하였다.
정여해(鄭汝諧)의 자는 중화(仲和)이고, 호는 돈재(遯齋)이며, 선생의 사종제(四從弟)이다. 선생이 편지를 보내 면려하기를 “《주역》 〈몽괘(蒙卦)〉에 ‘어릴 때에 바름을 기르는 것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이다.’ 하였고, 《예기》 〈학기(學記)〉에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을 이루지 못한다.’ 하였으니, 어찌 스스로 외진 시골에 칩거하여 스승과 벗의 도움을 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에 공이 크게 감동하여 깨달아 곧 점필재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선생 및 한훤, 추강과 함께 조용히 강마해서 발명한 바가 많았다. 성묘 경자년(1480, 성종11)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삭주 교수(朔州敎授)에 제수되었고, 정미년(1487, 성종18)에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이수공(李守恭)의 자는 중평(仲平)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영의정 이극배(李克培)의 손자이다. 성묘 무신년(1488, 성종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典翰)을 지냈다. 무오년에 창성(昌城)으로 귀양 갔다가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었고, 갑자년에 사사되었다. 중묘 때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임대동(林大仝)의 자는 정숙(貞叔)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호는 회헌(晦軒)이다. 성화(成化) 갑오년(1474, 성종5)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관직이 현감에 이르렀다. 점필재가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을 때 종유하며 학업을 강마하였으며, 선생이 두류산(頭流山)에 갔을 때 용유담(龍游潭)에서 함께 유람하였다.
권오복(權五福)의 자는 향지(嚮之)이고, 호는 수헌(睡軒)이며, 본관은 예천(醴泉)이다. 성묘 병오년(1486, 성종17)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翰苑)에 선발되어 보임되었다가 옮겨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무오사화 때 김일손 등과 함께 극형을 받았다.
권경유(權景裕)의 자는 군요(君饒)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성묘 을사년(1485, 성종16)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교리(校理)로 옮겼다. 연산조(燕山朝)에 시사(時事)가 점점 변함을 알고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제천 현감(堤川縣監)이 되었다. 무오사화 때 탁영 김일손과 함께 같은 날 죽었다.
이목(李穆)의 자는 중옹(仲雍)이고, 호는 한재(寒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문장에 능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였다. 태학(太學)에 있을 때 가뭄으로 인하여 윤필상(尹弼商)의 간사함을 극론(極論)하여 말하기를 “윤필상을 삶아 죽이면 하늘이 곧 비를 내려 줄 것입니다.” 하였다. 윤필상이 길에서 만나자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반드시 이 늙은이의 살점을 먹고자 하는가?” 하였는데, 공이 거만하게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연산군 초기에 발탁되어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윤필상이 죄를 얽어 죽였다.
허반(許磐)의 자는 문병(文炳)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계묘년(1483, 성종14)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어 나아가 벼슬하는 데 태연하였으며, 일마다 옛날을 사모하였다. 한훤당이 그의 천성적으로 단아함에 감복하였다. 무오년(1498, 연산군4)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정자(正字)에 이르렀다.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이원(李黿)의 자는 낭옹(浪翁)이고, 호는 재사당(再思堂)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기상이 당당하여 6척(尺)의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였다. 성묘 기유년(1489, 성종20)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호조 좌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원지(遠地)에 장류(杖流)되었다가 갑자년의 사화에 죽었다. 중묘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이주(李胄)의 자는 주지(冑之)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후손이다. 문장에 능하고 기절이 있었다. 망헌(忘軒)이라고 자호하였다. 성묘 무신년(1488, 성종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무오년의 사화에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피살되었다.
강겸(姜謙)의 자는 겸지(謙之)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성묘 경자년(1480, 성종11)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정랑(正郞)에 이르렀고, 무오년에 장류되었다. 아우 강형(姜詗)의 자는 형지(詗之)이다. 경술년(1490, 성종21)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갑자년의 사화에 죽었다. 뒤에 참판에 추증되었다.
정희량(鄭希良)의 자는 순부(淳夫)이고, 호는 허암(虛庵)이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연산군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다. 얼마 뒤에 무오년의 사화에 연좌되어 의주(義州)로 귀양 갔다가 김해(金海)로 양이(量移)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풀려났다. 매양 세상을 피하여 은거할 뜻이 있었는데, 하루는 이르기를 “갑자년의 화가 무오년보다 심할 것이니, 우리들은 또한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자취를 감추었다.
홍한(洪瀚)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성묘 을사년(1485, 성종16)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천성이 강직하여 남을 허여함이 적었는데, 지위 높은 권세가를 거스른 탓에 무오년의 사화에 걸려 장류되어 도중에 죽었다. 중묘조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강경서(姜景敍)의 자는 자문(子文)이고, 본관은 진주이며, 호는 초당(草堂)이다. 성묘 정유년(1477, 성종8)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또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무오년의 사화에 장류되었다. 중묘조에 관직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다. 뒤에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정승조(鄭承祖)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연산군 갑인년(1494, 연산군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보임되었다. 무오년에 원지(遠地)에 장류되었다.
이종준(李宗準)의 자는 중균(仲勻)이고, 호는 용헌(慵軒)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문장에 능하고 서화(書畫)에 뛰어났다. 성묘 을사년(1485, 성종16)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점필재의 문하에 종유하였다. 무오년의 사화에 연좌되어 피살되었다.
최부(崔溥)의 자는 연연(淵淵)이고, 호는 금남(錦南)이며, 나주(羅州) 사람이다. 성묘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교리가 되었다. 무오년에 귀양 갔다.
임희재(任煕載)의 자는 경여(敬輿)이며,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연산군 무오년(1498, 연산군4)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점필재의 문도로서 장류되었다.
강백진(康伯珍)의 자는 자온(子韞)이고, 본관은 신천(信川)이며, 점필재의 생질(甥姪)이다. 성묘 정유년(1477, 성종8)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사간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화를 입어 장류되었다.
이계맹(李繼孟)의 자는 희순(希醇)이며,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성묘 기유년(1489, 성종2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점필재의 문도로 장류되었다. 중묘조에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이인형(李仁亨)의 자는 공부(公夫)이고,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아우 이의형(李義亨)과 종자(從子) 이도(李翿), 이숙(李䎘), 이굉(李翝)과 더불어 점필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화(成化) 무자년(1468, 세조14)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부관참시되었다.
노우명(盧友明)의 자는 군량(君亮)이고, 본관은 풍천이며, 호는 신고당(信古堂)이다. 선생이 안음 현감으로 있을 때 왕래하며 학업에 대해 물었다. 도(道)를 즐거워하고 의(義)를 행하여 당시 명류(名流)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희증(李希曾)의 자는 노옹(魯翁)이고, 본관은 합천(陜川)이며, 호는 월휘당(月暉堂)이다. 선생이 종성(鍾城)에 있을 때 3년간 수학하여 세상의 명유(名儒)가 되었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묘 2년 정묘년(1507)에 대교(待敎)로서 상소하여 무오년의 제현(諸賢)을 신원(伸冤)하였다.
고숭걸(高崇傑)의 자는 백고(伯高)이고, 본관은 고성(高城)이며, 호는 낙천당(樂天堂)이다. 종성에 있을 때 선생에게 수학하여 교화의 덕을 깊이 받았다. 정덕(正德) 병자년(1516, 중종11)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니, 북쪽 변방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