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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墓表
송환기宋煥箕
옛날 나의 선조(先祖) 우암(尤菴) 문정공(文正公)께서 학문은 고정考亭 주자朱子을 종주로 삼고 의리는 춘추(春秋)를 지켜 뭇 선비를 모아 대성(大成)하였는데, 황파(黃巴 기사년을 말함)의 화를 만나신 뒤로 인심의 함익(陷溺)과 천리의 인회(堙晦 막혀 어두워짐)가 날로 더욱 심해졌으니, 우리 한수재(寒水齋) 권 선생이 직(直) 자의 요결(要訣)을 지키고 세도의 책무를 담당하여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어 다시 그 정학(正學)과 대의(大義)를 밝히지 않았다면 사문(斯文)에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선생의 휘(諱)는 상하(尙夏), 자는 치도(致道)이니 계통系統이 안동(安東)에서 나왔다. 시조(始祖) 휘 행(幸)이 고려 태조를 섬겨 태사(太師)가 되어 권씨(權氏)로 사성(賜姓)되었는데, 이때부터 대대로 현달한 분이 있었다. 아조(我朝)에 이르러 좌참찬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양평공(襄平公)인 휘 감(瑊)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선생의 7세조이다. 증조 휘 주(霔)는 찰방(察訪)으로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祖) 휘 성원(聖源)은 부사로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고(考) 휘 격(格)은 집의(執義)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 3대의 행업(行業)은 우암이 지으신 찬성과 의정 두 공(公)의 묘각(墓刻)에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비(妣)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도정(都正) 초로(楚老)의 딸이고 구원공(九畹公) 춘원(春元)의 손녀이다.
선생은 숭정(崇禎) 신사년(1641) 5월 8일에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중후하여 보는 사람들이 이미 덕기(德器)가 될 줄 알았다. 조금 자라자 지기(志氣)가 범상하지 않아 세상을 개탄하며 공업(功業)으로 스스로 기약하였다. 18세 때,
태공법을 읽고 大讀太公法
양보음을 읊었네 長吟兩甫吟
내 나이 팔십이 아닌데 吾年未八十
뭣 때문에 눈물로 옷깃 적시리 何事淚沾襟 라는 시를 지었으니, 대개 이 시는 스스로 자신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신축년(1661)에 사마시司馬試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였는데, 성망이 대단하다. 정미년(1667)에 중국인 진득(陳得) 등 1백여 인이 표류해 제주(濟州)로 와서, 영력황제(永曆皇帝)가 바야흐로 한 모퉁이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은 이들을 잡아다가 청(淸) 나라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분연히 말하기를, “이것은 대의(大義)와 관계된다.” 하고서, 드디어 약간의 동지(同志)와 더불어 밀소(密疏)를 올려 불가함을 극론하였고, 의정공(議政公)도 상소하여 극력 간쟁하였으나 모두 비답을 받지 못하였다. 민 문정공(閔文貞公) 유중(維重)이 선생의 손을 잡고 깊이 경탄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신해년(1671)에 의정공의 상을 당하였다. 선생이 일찍부터 우암ㆍ동춘(同春) 두 선생 문하에 유학(遊學)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세상 생각을 끊어 버리고 더욱 실학(實學)에 힘썼다. 상복을 벗고는 즉시 화양(華陽)으로 가서 집지(執贄 폐백을 드리고 문인이 됨)하고 수업(受業)하니, 우암은 오도(吾道)를 위하여 사람을 얻었다고 매우 기뻐하였다. 갑인년(1674)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을묘년(1675)에 우암이 북쪽으로 귀양 가자, 선생이 여러 문인들과 함께 상소해 변명하고서 가족을 이끌고 청풍(淸風)으로 들어와 그 거실(居室)을 수암(遂菴)이라 이름하고, 또 한수재(寒水齋)라는 편액(扁額)을 걸었으니, 이는 모두 우암께서 지어 준 이름이다.
경신경화庚申更化 후에 제수(除授)의 명이 누차 내렸고, 병인년(1686)에는 지평에 제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사년(1689)에 화가 일어나자, 우암이 귀양 가는 도중에 사문(師門)에 전래(傳來)하는 서적(書蹟)을 선생에게 전수하고, 《주서차의(朱書箚疑)》의 속성(績成)을 부탁하였으며,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는 선생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기로 기약했더니 지금 끝내 들음도 없이 죽게 되었다. 앞으로의 일은 오직 치도(致道)만을 믿을 뿐이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종주(宗主)로 삼고, 사업(事業)은 마땅히 효묘(孝廟)의 대의를 종주로 삼으라.” 하고, 또 주자가 임종할 때 문인들에게 훈계한 직(直) 자의 뜻으로써 고하였으니, 이는 사도(斯道)에 대한 간절한 부탁으로 모두 법문(法門)의 요결(要訣)이므로 수수(授受)하는 사이에 간곡하고 자상함이 이와 같았다. 이로부터 선생의 책임이 더욱 무거워져서 은거하며 뜻을 독실히 지켜 오직 선사(先師)의 유훈(遺訓)을 실추시킬까 두려워하였다.
갑술년(1694)에 우암이 설원(雪怨 원한이 풀림) 복작(復爵)되었고, 선생도 거듭 발탁되는 성은을 입어 장령, 사업, 진선, 집의가 되었으나, 모두 소명에 따르지 않았다. 대개 선생의 출처는 진실로 대의로써 자정(自靖)할 계획이었는 데다가 더구나 이때에 겨우 당화(黨禍)를 겪고나자 윤증의 무리가 이어 일어나 세도(世道)가 날로 무너져갔으므로 선생이 더욱 세상에 뜻이 없었던 것이다. 무인년(1698)에 호조 참의에 특별 제수되었다. 이때 상이 노릉(魯陵) 및 신비(愼妃)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키고자 하여 수의하라는 명을 내렸다. 선생이 헌의하기를, “노산(魯山)의 위호를 추복(追復)하는 것은 귀신이나 사람에게 한이 없음이 되지만, 신비를 태묘(太廟)에 추배(追配)하는 것은 자사(子思)의 훈계를 어김이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은 드디어 선생의 의논을 따랐다.
경진년(1700)에 이조 참의에 제수하여 찬선(贊善) 좨주(祭酒)를 겸대하게 하였다. 계미년(1703)에 상소하여 이경석(李景奭)의 손자 하성(廈成)이 우암을 침범하여 모욕한 일을 명확하게 변론하고, 이어 경(經)을 훼손하고 현인을 무욕(誣辱)한 박세당(朴世堂)의 죄를 배척하니, 상이 옳게 여겨 받아들이고 호조 참판에 특별 승진시켰다. 갑신년(1704)에 대사헌에 제배되었다. 이해에 화양(華陽)에 황제묘(皇帝廟)를 세워 방(牓)을 만동(萬東)이라 하고 봄에 향사(享祀)의 예를 행하였으니, 실로 우암의 유탁(遺托)을 따른 것이다. 이때 상이 바야흐로 사당을 세워 신종황제(神宗皇帝)에게 향사하기를 의논하여, 좌상(左相) 이공 여(李公畬)로 하여금 선생에게 묻게 하니 선생이 강력히 찬성(贊成)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대체로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단(壇)을 쌓아 향사하였으니 지금의 대보단(大報壇)이 그것이다.
을유년(1705)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고, 임진년(1712)에는 품질(品秩)이 올라 한성 판윤에 제배되었고, 이내 총재(冢宰 이조 판서)로 이배되었으나, 사직을 청원하여 체직되고, 다시 도헌(都憲 대사헌(大司憲))에 제배되었다. 상이 경연 중에 선생의 아우 부제학 상유(尙游)를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대사헌을 만나 보기 원한다고 분부하며 매우 곡진하게 타일러 부제학으로 하여금 이 뜻을 선생께 전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실로 특이한 대우였다. 계사년(1713)에 상이 군상(君喪)에 참최 삼년(斬衰三年)을 입는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여 사관(史官)을 보내어 선생에게 묻고, 마침내 선생의 의논을 따라 백대(百代) 동안 인습해온 누습(陋習)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을미년(1715)에 《가례원류(家禮源流)》 서문의 일로 상소해 견벌(譴罰)을 자청하고, 이어 윤증이 전후에 스승을 배반한 사실을 논증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1월에서야 비로소 비답을 내리면서 크게 옳게 여기지 않는 뜻이 있었고, 얼마 뒤에는 윤증의 무리가 없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 번갈아가며 올린 무소(誣疏)로 인하여 서(序)의 후문(後文)을 궁내(宮內)에서 불태워 없애라는 명을 내리고, 선생을 파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관학 유생의 변명 상소가 계속되었으나, 상은 일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상은 정원에 명하여 윤증의 신유의서(辛酉擬書)와 우암이 지은 선거(宣擧)의 묘문(墓文)을 등서(謄書)해 들이게 하고, 드디어 비망기를 내리기를, “지금 이 의서를 자세히 살펴보건대 글 속에 과연 과격한 말이 많으니 많은 선비들의 신변(伸辨)이 괴이할 것이 없다.” 하고, 선생의 서용을 특별 명령하고, 또 서의 후문(後文)을 도로 인쇄해 넣도록 명하고, 이어 깊이 뉘우치고 부끄러워한다는 뜻을 담은 별유(別諭)를 내리고서 특지로 선생을 좌찬성에 제수하였다. 대개 상이 처음에는 윤증의 정상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서 매양 윤증의 배사(背師)가 오로지 묘문(墓文) 일사(一事)에서 연유하였다고 하여 드디어 아비와 스승에는 경중이 있다는 분부를 내렸는데, 의리가 극진히 설명되어 피차가 주장하는 논쟁의 사실이 자명해진 선생의 소(疏)를 봄에 미쳐서는 점점 깨닫는 바가 있어 대처분(大處分)을 내리는 데 이르렀고, 또 따로 문자(文字)를 작성해 공안(公案)으로 결정해서 후왕(後王)으로 하여금 변개(變改)하지 말게 하였으니, 수십 년 동안 결정되지 못했던 사문(斯文)의 시비(是非)가 이때에 이르러 크게 결정되었다.
정유년(1717) 봄에 상이 온천욕(溫泉浴)을 하기 위해 온양(溫陽)에 거둥하였다. 선생이 행궁(行宮)을 향해 출발해 가다가 괴산(槐山)에 머무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간절히 부르면서 직명(職名)을 해면(解免)하고 포의(布衣)로 들어와 알현하도록 허락하였다. 선생은 드디어 행궁으로 가서 호가(扈駕)의 의리를 준용(準用)하여 융복(戎服)으로 입대하니 상이 매우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선생의 손을 잡고 정성스러운 말로 유시하였다. 선생이 곧 학문 심법(心法)의 요결(要訣) 및 춘추(春秋)의 의리와 계술(繼述)의 도로써 진술하고, 또 하나의 직(直) 자가 근본을 바루고 다스림을 내는 방법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끝으로 위 무공(衛武公)이 나이 90세에 억계(抑戒)를 지은 것을 인용하여 상에게 대지(大志)를 분발할 것을 권면하니, 상이 용모를 변동하며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함께 서울로 갈 것을 간절히 바라 마지않았다.
이날의 융숭한 은례(恩禮)와 융화한 계합(契合)은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바였으므로 선생도 은우(恩遇)에 감격하였으나, 스스로 늙어 정신이 혼미하여 다시 힘을 펼쳐 벼슬에 나아갈 가망이 없다고 여겨 명을 받들지 않고 물러났는데, 갑자기 아들이 위독하다는 급보(急報)를 받고는 소(疏)를 남겨 놓고서 곧장 돌아왔다. 대가(大駕)가 환도(還都)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선생을 발탁하여 우의정에 제배하였다가 이내 좌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동궁(東宮)이 대리하고 있었으므로 선생이 상서하여 사직하고, 이어 권면 경계하는 말을 진술하였다. 무술년(1718)에 단 의빈(端懿嬪)의 상(喪)에 상이 대공복(大功服)을 입었다가 뒤에 기복(期服)으로 개복(改服)해야 된다는 의논이 있자, 선생이 대공을 주장해 대답하였는데, 실로 기해년 기년(期年)의 예를 따른 것이다.
경묘(景廟) 신축년(1721, 경종1) 8월 29일에 8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0월에 충주(忠州) 속곡(束谷)의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선생이 별세한 뒤에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일찍이 재적(載籍)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참혹한 사화(士禍)가 일어나서 계묘년(1723) 겨울에 선생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였다. 그러다가 영종(英宗) 을사년(1725, 영조1)에 복관(復官) 치제(致祭)하고 문순(文純)이란 시호를 내렸다. 배위(配位)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군수(郡守)로 영의정에 추증(追贈)된 중휘(重輝)의 딸이고 광평대군 여(廣平大君璵)의 후손으로 정숙(貞叔) 유가(柔嘉)하여 부덕(婦德)을 갖추었는데, 선생보다 10년 앞서 별세하였다. 속곡(束谷)에 부장(祔葬)하였다.
일남(一男) 욱(煜)은 부사(府使)를 지냈고, 측실의 아들 도(燾)와 찬(燦)은 모두 요사(夭死)하였으며, 딸은 신지(申智)의 아내가 되었다. 부사의 이남(二男) 중에 양성(養性)은 첨추(僉樞)를, 정성(定性)은 창수(倉守 현감(縣監))를 지냈으며, 두 딸은 이사휘(李思徽)와 참판 황재(黃梓)에게 시집갔다. 서자(庶子)는 첨사(僉使)를 지낸 순성(順性)과 오성(五性)이다. 첨추의 아들 제응(濟應)은 목사를 지냈고, 네 딸은 남혁관(南赫寬), 이장원(李長源), 군수 김철행(金喆行), 판서 이경옥(李敬玉)에게 시집갔다. 창수의 아들 진응(震應)은 자의(諮議)를 지냈고, 다섯 딸은 이동복(李東馥), 대제학(大提學) 오원(吳瑗), 정랑(正朗) 민백형(閔百亨), 목사 김성휴(金聖休), 참판 김양행(金亮行)에게 시집갔다. 이사휘의 아들 규항(奎恒)은 군수를 지냈고, 황재의 아들 인검(仁儉)은 판서를 지냈다. 현손(玄孫)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중에서 현달(顯達)한 사람으로는 감역(監役) 중정(中正), 군수 중립(中立), 현재 주부(主簿)로 있는 중집(中執)인데, 중집이 현재 선생의 제향을 받들고 있다.
선생은 용의(容儀)가 웅대하고 훌륭했으며 기국(器局)이 크고 넓어 동정 어묵(勳靜語默)에 심히 삼가 지킴이 없었으나 절로 법도에 맞아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면 점잖고 씩씩하여 두려운 생각이 들고 가까이 나아가 보면 온화한 화기가 사람들을 엄습(掩襲)함이 있었다. 제행(制行)에 일찍이 맺고 끊은 듯하거나 모가 나게 한 적이 없으나 방한(防限 예의)을 어기지 않았고, 언의(言議)에 일찍이 과격하거나 준엄하게 한 적이 없었으나 사리를 판별함에는 반드시 엄격히 하였다. 선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여 남의 선을 겸허하게 수용하였기 때문에 뭇 선이 모두 선생에게로 모여 지부 해함(地負海涵) 같았다. 선생의 학문과 교육은 한결같이 자양(紫陽 주자(朱子))을 근본으로 삼아 잠심(潛心) 완미하고 숙고 강명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기 때문에 조예가 이미 깊었으되 더욱 깊어지고 보존한 바가 이미 정밀하였으되 더욱 정밀해졌다. 그러나 규모가 광대하여 규각(圭角)이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선생의 작은 곳을 본 자는 큰 곳을 보지 못하였고 선생의 겉을 안 자라도 꼭 속까지는 알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선생을 안 자는 대체로 드물었다.
선생이 어버이를 섬김에는 효성을 다하였고, 거상(居喪)할 때에는 몸이 바싹 여위도록 슬퍼함이 진정에서 나왔다. 이때 나이가 한창 때인데도 눈이 어둡고 수염이 세어 거의 몸을 보전할 수 없을 뻔하였다. 선생은 어려서 조부모의 양육을 받았으므로 보답해 섬김에 심력(心力)을 다하였고 돌아가신 뒤 상복을 벗고나서도 거친 밥을 먹고 사랑에 거처하며 심제(心制)의 뜻을 붙였다. 사문(師門)을 섬김에도 정성을 다하였고, 우암의 상을 당해서는 애모(哀慕)의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기일(忌日)에는 재계 소사(素食)하고 눈물을 흘렸고, 우암에게 받은 부탁을 한결같이 다 준수하여 남김이 없었다. 선생은 애군 우국(愛君憂國)의 정성이 단충(丹衷)에서 나와 비록 강호(江湖)에 은거하며 세상과 서로 떨어져 있었으나, 뜻이 임금과 백성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령 임금이 편치 않다거나 정사가 잘못되었다거나 백성들이 고생스럽다거나 하는 소식을 들으면 얼굴에 근심스러운 기색을 띠고 침식(寢食)도 편히 하지 못하였다. 경묘(景廟) 때에는 국본(國本 세자(世子))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저사(儲嗣)를 책립(冊立)했다는 소식을 들으심에 미쳐서는 숨이 거의 넘어가는 때였지만 오히려 기뻐하는 기색이 돌며 마치 일어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선생은 의리를 강명함에 있어 본말을 끝까지 궁구하였기 때문에 간혹 전인(前人)들이 발명(發明)하지 못한 것을 발명함이 있었다. 선생이 오상지성인물동이(五常之性人物同異)를 논하기를, “인(人)과 물(物)의 성(性)을 이(理)로써 말하면 모두 같지만, 받은 형기(形氣)로써 말하면 다 같을 수가 없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바로 성지자성(成之者性)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오행(五行)에 있어서도 이미 같을 수가 없어 각각 그 한 가지씩만을 오로지할 뿐이니 그렇다면 인과 물에 있어서도 받은 바가 같지 않다는 것을 따라서 알 수 있다.” 하고, 미발지전 기질지성 유무(未發之前氣質之性有無)를 논하기를, “인과 물이 나는 데는 기(氣)로써 형(形)을 이루고 이(理) 또한 부여(賦與)된다. 그러므로 부여된 바의 이(理)만을 오로지 지적하여 그것을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하고, 형(形)을 이룬 기(氣)까지 겸해 지적하여 그것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태어난 처음부터 이미 기질지성이 있는 것이니 때에 따라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중용》 서문의 형기(形氣)가 심(心)이 아니라는 것과, 지각(知覺)이 지(智)의 용(用)이라는 것을 논한 데 이르러서도 모두 자세하고 정확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후대에 성인이 나와도 동의할 것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논한 시종이 문집(文集)에 빠짐없이 실려 있는데, 이를 보고서 이해하는 자는 도의 경지에 가깝게 나간 자라 할 것이다.
선생의 경륜(經綸)의 재주는 천품(天稟)에서 받았고 경술(經術)로써 성취하였으므로 지혜와 사려가 투철하고 논설(論說)이 횡수(橫豎 자유자재로 논리를 전개함)하여 위로 천고(千古)로부터 아래로 당세에 이르기까지 국가 흥망의 근원과, 현사 진퇴(賢邪進退)의 기미와, 산천 풍토(山川風土)의 다름과, 인물 요속(人物謠俗)의 변천을 모두 관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고금의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당세의 급무를 규획(規畫)하여 손익(損益)을 배열한 것이 또 모두 조리 정연하게 법도에 맞았다. 그러나 이미 은둔하였고, 또 ‘언불출(言不出)’의 경계를 지켜 국계(國計) 민사(民事)를 일찍이 장소(章疏) 사이에 언급하지 않았다. 문인들이 비록 보고 들은 바를 대략 기록하였으나 그 큰 규모와 자세한 절목(節目)은 후세에서 볼 수 없으니 애석하다.
아, 선생이 별세한 뒤 후학들은 모두 선생을 사모하는 생각이 갈수록 더욱 간절해져서 문인 남당(南塘) 한공 원진(韓公元震)이 행장(行狀)을 짓고, 병계(屛溪) 윤공 봉구(尹公鳳九)가 묘지(墓誌)를 지었으니, 실로 선생의 통서(統緖)를 이은 두 현인(賢人)이 이미 선생의 성덕(盛德)을 천명하였다. 지금 선생의 현손(玄孫)이 장차 표석(表石)을 세우기 위해 나에게 비문(碑文)을 부탁하였으나, 보잘것없는 말학(末學)인 내가 어찌 감히 논찬(論撰)하겠는가. 삼가 행장과 묘지명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절록(節錄)하였다.
아, 선생이 일찍이 우암의 묘표를 지었는데, 거기에, “주자의 도가 율곡(栗谷)에 이르러 다시 밝아졌고, 율곡의 업(業)이 선생에 이르러 더욱 넓어졌다.” 하였다. 그런데 한(韓)ㆍ윤(尹) 두 현인은 곧, “선생은 정전(正傳)을 이어 더욱 정온(精蘊 정밀하고 오묘함)을 궁구하였고, 성법(成法)을 지켜 척도(尺度)를 잃지 않았다.” 하였으니, 아, 성대하도다. 덕을 아는 자는 반드시 이 말이 아호(阿好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함)가 아님을 알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주자가 죽은 뒤 自朱子歿
오도가 동으로 왔네 吾道東來
군현이 많이 났지만 群賢蔚興
우암이 이어 후학을 인도하였네 尤翁繼開
진실로 선생은 允矣先生
참으로 적전이니 展也嫡傳
가을 달 한수는 秋月寒水
천만년 빛나리 於千萬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