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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유치명(柳致明)]
성인(聖人)의 학문은 체(體)도 있고 용(用)도 있으니, 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이다. 그 내용이 육경(六經)에 갖추어져 있으나 삼대(三代) 이후에는 그만 공언(空言)이 되고 말았다. 대저 광대한 천하와 유구한 고금으로 볼 때 그동안 성현(聖賢)과 호걸이 태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혹 재능은 있어도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도에 고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갈암(葛庵) 이 선생(李先生)은 호걸의 자품을 타고났고 성현의 학문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또한 융숭한 예우를 받고 조정에 초빙되어 임금을 바른길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불우한 채 세상을 떠났으니, 육경에서 말하는 치세(治世)를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없단 말인가. 아아, 탄식할 일이다.
선생의 휘(諱)는 현일(玄逸)이요 자는 익승(翼昇)이니, 천계(天啓) 정묘년(1627, 인조5) 1월 11일 기묘일에 동해 가 영해부(寧海府)의 인량리(仁良里)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성품이 호준(豪俊)하고 활달하였다. 6세 때 부친 판서공(判書公)의 곁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람의 양 눈썹이 곤괘(坤卦)를 닮았다.” 하니, 판서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어릴 적 놀이를 할 때에 나무를 이용하여 제단을 쌓고 문선왕(文宣王 공자)의 위호(位號)를 만들어 놓고 읍양(揖讓)의 예(禮)를 갖추었다. 9세 때 중씨(仲氏)인 존재(存齋) 선생이 뜻을 묻자 선생은 “원수(元帥)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요동(遼東)을 수복하고 싶습니다.” 하였으니, 요동이 오랑캐에게 점거되어 있는 것을 분하게 여겼던 것이다. 10세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납매(臘梅)를 읊기를,
꽃나무 아래서 술을 마시고 싶노니 欲飮花下酒
오랑캐 놈들이 성을 포위했다네 虜賊圍城闕
하였다.
일찍이 동네 아이들을 거느리고 자신은 높은 곳에 올라 단풍나무를 꺾어 기(旗)를 삼고 진(陣)을 펼쳐 지휘하면서 규율을 따르지 않으면 그 부대의 대장을 매질하니 아이들이 모두 두려워 복종하며 명령대로 따랐다. 또 〈태극의상도(太極儀象圖)〉를 만들어 원회운세(元會運世)1)를 추산(推算)하였다.
그리고 경사(經史)의 서적들을 즐겨 탐구하여 온축한 지식이 날로 섬부(贍富)해졌다. 한편으로는 《손오병법(孫吳兵法)》과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즐겨 보았으며 평소 기상을 자부하여 사람을 현혹하는 음사(淫祠)를 헐기도 하였다. 그러다 15세 때에 이르러서는 심신을 수렴하여 법도에 맞게 행동하였으며, 갑신년(1644, 인조22)에는 오잠(五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이해에 숭정황제(崇禎皇帝 명(明)나라 의종(毅宗))가 사직과 함께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개한 나머지 침식이 편안치 못하여 격산동사민서(檄山東士民書 산동의 사민에게 보내는 격문)를 의작(擬作)함으로써 가슴속의 울분을 토로하였다.
몇 해 뒤에 부친 판서공을 따라 수비(首比)의 산중에 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거처를 ‘갈암(葛庵)’이라 편액하고 내면의 심성(心性) 공부를 하고 외면의 세상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무릎을 안고 길게 휘파람을 불며 2)시국을 근심하고 세태에 분개하는 심정을 스스로 금치 못하였다.
병오년(1666, 현종7)에 도내(道內)의 사림(士林)들이 소(疏)를 올려 기해년(1659, 효종10) 국상(國喪) 때의 잘못 사용한 예(禮)에 대해 논박하고자 하였다. 이에 선생에게 부탁하여 소장을 지었는데, 그 말미에 “천자(天子)와 제후(諸侯)가 이미 대서(代序)를 이어 전중(傳重)하였으면 다시 계출(系出)의 종지(宗支)나 적서(嫡庶) 여부는 따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 소장이 수용되지는 못했으나 식자(識者)들은 옳다고 하였다.
갑인년(1674, 숙종 즉위년)에 숙종(肅宗)이 등극하여 초야의 숨은 인물을 두루 찾을 때 선생은 연이어 능사랑(陵社郞)에 제수되었으나 당시는 부친 판서공의 상중(喪中)이었다.
정사년(1677, 숙종3)에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를 제수받고 배명(拜命)하였고,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한 달 남짓 만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이 “이 사람은 마땅히 경연청에 두어야 한다.”라고 상에게 아뢰어 이해 겨울에 지평(持平)으로 초배(超拜)되었다. 선생은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아 이듬해 봄에 취직(就職)하고 소장을 올려 ‘정학을 밝힐 것〔明正學〕’, ‘기강을 진작할 것〔振紀綱〕’, ‘공도를 넓힐 것〔恢公道〕’, ‘간언을 받아들일 것〔納忠諫〕’, ‘민정을 살필 것〔察民情〕’ 등 다섯 조목을 진달하였다. 또 변무사(辨誣使)를 보내지 말 것을 청하면서,
“북로(北虜)는 만세(萬世)를 두고라도 반드시 원한을 갚아야 할 우리의 원수이니, 우리가 애걸하여 저들이 들어주느냐의 여부에 따라 일희일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자 정고(呈告)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근친(覲親)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이 주수군민(舟水君民)2)이란 비유를 인용하고 화공에게 명하여 이를 그림으로 그리게 한 다음, ‘학문을 좋아할 것〔好學〕’, ‘현자를 등용할 것〔用賢〕’, ‘간언을 받아들일 것〔納諫〕’, ‘잘못을 고칠 것〔聞過〕’, ‘재화를 가볍게 보고 덕을 귀하게 여길 것〔賤貨而貴德〕’ 등 다섯 가지 설을 그림 아래에 첨부하였다. 이에 선생이 탄식하기를,
“성상께서 이처럼 총명하시니 한 말씀 올려서 뜻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이를 부연 설명하는 설을 짓고 소장과 함께 올렸다. 그 말미에서
“옛날의 제왕 중에 이 다섯 가지를 바탕으로 삼지 않고서 치도(治道)를 이룬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학문이란 어찌 널리 섭렵함만을 말하는 것이겠으며, 현자란 어찌 임금의 뜻을 따르기만 하는 이를 말하는 것이겠으며, 간언을 받아들이고 잘못을 고친다는 것이 어찌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임시로 따름을 말하는 것이겠으며, 재화를 가볍게 보고 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 어찌 말과 겉모습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배를 부릴 때는 형세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운행하기 어려운 법이니, 이는 참으로 배를 타고 물에 나아가는 이가 마땅히 유의해야 할 바입니다.” 하니, 상이 칭탄(稱歎)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다. 당시에 허견(許堅)과 복선군(福善君) 남(柟)의 옥사가 일어나 종실과 대신들이 연루되어 주벌(誅罰)을 당하거나 유배되는 사건이 해를 이어 일어났다. 계해년(1683, 숙종9)에 재해의 방책을 아뢰라는 구언(求言)의 어지(御旨)가 내렸기에, 선생은 천인(天人)이 교감하는 이치를 힘써 말하면서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현실에 비유하고 사적(史蹟)을 근거로 재난의 이유를 증명해 보였는데, 그 결론은 외척(外戚)을 단속하고 형옥(刑獄)을 신중히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에 한 재상이 역적을 두둔하였다는 명목으로 선생을 치죄(治罪)할 것을 청하였는데, 변호해 주는 사람이 있어 일이 무마되었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에 발탁되었다. 도타운 내용으로 어지가 내렸으나 선생은 간곡히 사양하였다. 상이, “빨리 생각을 바꾸기를 내가 날마다 바란다.” 라고 하유(下諭)하고, 도신(道臣)을 시켜 어서 상경할 것을 권하였므로 마침내 소명(召命)에 나아갔다. 도중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옮겨 임명되었다가 곧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승진되었다. 마침 인현왕후(仁顯王后)가 궁궐에서 축출되는 사건이 일어나 조정의 신하들이 이에 극력 쟁집(爭執)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고, 또 명하기를 “감히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벼슬이 갑작스레 높이 승진하였고 게다가 나라에 변고가 있다.’는 이유로 글을 올려 벼슬을 고사(固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 배필의 사이는 인륜(人倫)의 시작이고 풍화(風化)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혹 불행히 변고를 만나더라도 또한 힘써 도리를 다하고 은의(恩義)를 온전히 지켜야 할 것이고, 대뜸 위엄(威嚴)으로 처단(處斷)하여 거조(擧操)가 온당치 못하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것은 옛날에 비방목(誹謗木)과 감간고(敢諫鼓)4)를 설치해 두었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 소장을 고을 수령과 승정원에 바쳤으나 모두 위로 올리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떠나겠다고 더욱 간청하였으나 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옮겨 임명되었다. 이에 선생은 고사하기를,
“신이 이전에 내려진 명을 중지해 주실 것을 청하고 있던 터에 도리어 새로운 벼슬을 받으니, 만약 주제넘게 이 자리를 받는다면 이는 기회를 보아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고, 또
“경신년 옥사 때 허견(許堅)과 복선군(福善君) 남(柟)의 경우는 주벌(誅罰)을 피하기 어려우나 연(㮒), 환(煥), 혁(爀)을 연좌시킨 것은 옛날에 종친(宗親)들의 죄를 다스리던 도가 전혀 아닙니다. 또 오두인(吳斗寅)의 족속(族屬)들을 금고(禁錮)한 것과 이상진(李尙眞)을 유배한 것과 같은 경우도 정상을 참작하여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그리고 땔감과 쌀, 고기 등을 넉넉히 지급하게 하는 한편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함에 상경을 재촉하는 명이 더욱 급하였다. 이에 선생은 마침내 배명(拜命)하고 주강(晝講)에 입시하였다. 강(講)이 끝난 뒤에 진언하기를,
“전하께서는 진덕(進德)과 수업(修業)에 조금도 느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또한 전하의 거조가 온당하여 민심이 쏠리듯 조정으로 모이게 해야만 백성을 고무, 진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선생이 처음 군부(君父)를 뵐 때 진퇴에 법도가 있었고 부주(敷奏)가 명쾌하여 온 조정의 신료들이 좋은 사람을 얻었다고 기뻐하였으며, 상도 눈길로 전송하였다. 또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복더위로 인하여 경연을 정지하였다 하여 선생은, 정자(程子)가 소대(召對)할 것을 청하고 진덕수(眞德秀)가 야대(夜對)할 것을 청한 일과 우리 성종(成宗)께서 일찍이 행했던 일들을 인용하여 경연을 계속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간간이 성균관에 나아가 제생(諸生)들을 회유(誨諭)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승진하였으나 사양하였으며, 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겸임되었고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겨졌으나 연이어 사양하였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축출되어 사저에 살게 된 뒤로 조정에서는 엄한 어지(御旨)를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 말을 내는 이가 없었는데, 선생이 상소하여 항론(抗論)하기를, “비(妃) 민씨(閔氏)는 왕비의 법도를 따르지 않아 성상의 버림을 자초하였습니다. 그러나 육례(六禮)를 갖추어 맞이하여 중전의 자리에 올라 지존(至尊)을 모신 지가 거의 10년이 됩니다. 지금 비록 폐출(廢黜)하였으나 여염집에 살게 하면서 그 생활 물자마저 끊어 버린 것은 지나친 처사입니다. 그러니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진황후(陳皇后)와 곽황후(郭皇后)를 대우했던 고사에 의거해 이궁(離宮)에 거처하게 하면서 방위(防衛)를 설치하여 신중히 규금(糾禁)하고 생활 물자를 적절히 지급한다면 아마도 변고에 곡진히 대처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도타운 내용의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는 않았다.
분황(焚黃)을 위하여 여러 차례 향리로 돌아가게 해 주길 청하였다. 대궐을 떠날 즈음에 상소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것〔固邦本〕’, ‘군대를 잘 훈련시킬 것〔訓戎兵〕’, ‘인재를 양성할 것〔養人才〕’의 세 조목을 아뢰고 승보시(陞補試)ㆍ학제(學製)ㆍ공도회(公都會) 등 잡과(雜科)를 혁파하고 학교와 과거에 관한 제도를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주장에 따라 다시 제정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칭찬하는 뜻으로 하유(下諭)하기를, “경이 조정에 돌아온 뒤에 아뢴 대로 논의해서 결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듬해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불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얼마 뒤 세자(世子)의 책봉례(冊封禮)가 있었고 선생은 원자보양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상경길에 올랐는데 또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贊善)에 임명한다는 새로운 명을 받았다. 도성 밖에 이르러 대본(大本)과 급무(急務)를 논한 소장을 올렸다. 이 소장에서 말한 대본은 바로 은미한 심술(心術)과 이욕(利慾)의 근저를 지적한 것이고, 급무는 대부분 국정의 실책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다. 상이 비답을 내려 칭찬하였으나 당시 집권층의 여론이 좋지 못하여 오랫동안 불평이 풀리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연이어 다섯 번이나 소장을 올려 해임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자 마침내 마땅히 떠나야 할 네 가지 이유를 논하는 소장을 올리고는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도성을 나와 하향(下鄕)하였다. 이에 상이 사관(史官)을 뒤쫓아 보내어 “과인이 큰일을 함께하기에 부족한 임금이라 여겨서인가?”라고 자책하는 내용으로 전유(傳諭)하였으나, 선생은 그래도 사체(辭遞)하였다.
겨울에 또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당시 영남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이 ‘관찰사(觀察使) 이담명(李聃命)이 임의로 구휼하였다.’고 하여 문비(問備)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이듬해 봄에 선생이 사직하면서 급암(汲暗)과 한소(韓韶)5)가 거짓으로 황제의 명을 빙자하여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하였던 사례를 들면서,
“옛날의 신하들은 인심을 수습하는 것을 일삼았는데 지금의 논자들은 다만 경비가 부족하게 될 것을 걱정하니 이는 유약(有若)이 ‘어찌하여 철법(徹法)을 쓰지 않습니까?’6)라고 한 논의는 결국 오활한 것이 되고 왕홍(王鉷), 양신긍(楊愼矜) 7)따위가 나라에 충성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목내선이 몹시 화가 나서 도성을 나가 자신을 인책하자 선생도 소장을 올려 자신을 탄핵하였다.
이조 참판으로 전보되어 다시 사양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함께 데리고 돌아오게 하였다.
9월에 마지못해 소명(召命)에 응하였다. 아직 도성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 상이 예관을 보내어, “육신묘(六臣墓)에 치제(致祭)를 하고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고자 하는데, 조정의 의론이 반대하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선생이 논의하기를,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천명(天命)과 민심에 떠밀려 그런 부득이한 거사를 일으키셨던 것인데 육신(六臣)은 절의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지조를 변치 않았으니, 그 마음은 곧 백이숙제(伯夷叔齊)가 무왕(武王)을 그르다고 여긴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공자(孔子)는, 주(周)나라 사람인데도 오히려 그들이 정벌을 말리다가 굶어 죽은 것을 두고,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8)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세조께서 사육신(死六臣)을 두고 ‘후세의 충신’이라고 하신 하교는 실상은 후사(後嗣)가 될 임금들에게 심중의 뜻을 은근히 내비치신 것이니, 이번의 조처는 참으로 선대(先代)의 뜻을 계승하는 큰일입니다.”하였다.
도성에 도착한 뒤에 인대(引對)하였다. 당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선생이 진언하기를,
“이 책은 참으로 치평(治平)의 요긴한 도를 담은 것입니다. 전에 송(宋)나라 이종(理宗)이 이 책을 읽기를 좋아하였으나 치적(治績)이 매우 지리멸렬했던 것은 어찌 허문(虛文)만 숭상하고 실득(實得)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전하께서는 이를 거울로 삼아 경계하소서.”
하고, 다시 아뢰기를,
“옛날 선조(宣祖) 때에 간관(諫官) 김성일(金誠一)이 대신이 뇌물을 받은 일을 논척(論斥)하자, 영상(領相) 노수신(盧守愼)이 받아들여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이에 선조께서는 두 사람이 다 옳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부디 전하께서는 선조를 본받으시고 노수신의 일로써 대신을 책려(責勵)하십시오.”
하였다. 당시에 언관(言官)이 진언하여 대신을 핍박하였다가 상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진언한 것이다. 상이 자주 경연에 납시어 매우 지성스럽게 자문하셨기에 선생은 성의를 다하여 임금을 깨우치고자 하였다.
하루는 전석(前席)9)한 자리에서 상이 담비 갖옷을 하사하니, 선생이 사례하기를,
“‘임금이 옷을 하사하면 임금을 위해 죽는다.’는 옛사람들의 말을 신은 공경히 외우며, 성은에 보답할 것을 도모하겠습니다. 송(宋)나라 신하인 왕조(王朝)가 한 말〔斗〕의 명주(明珠)를 받은 일 때문에 천서(天書)와 관련된 일을 간하지 않은 것10)을 신은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시경(詩經)》의, ‘내게 아름다운 손님이 있는데, 진심으로 우러나 주고자 하는지라.〔我有嘉賓 中心貺之〕’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가상하게 여기는 뜻을 보였다.
임신년(1692, 숙종18)에 사체(辭遞)하였다. 당시 청(淸)나라 사람들이 장백산(長白山) 남쪽을 순시하려고 하였는데, 조정 의론이 장차 길을 소제(掃除)하고 그들을 영접하여 인도하고자 하였다. 선생이 크게 놀라 즉시 청대(請對)하여 상에게 ‘한(漢)나라 때 후응(侯應)이 변방의 방비를 혁파하지 말 것을 쟁론한 일’, ‘주자(朱子)가 횡산(橫山)의 일을 논한 것’, ‘양시(楊時)가 하삭(河朔) 삼진(三鎭)의 일을 간한 것’ 등을 인용하여, 불가하다고 극력 진언하였는데, 마침 그 일이 절로 중지되었다.
다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아뢰기를,
“대간(臺諫)은 임금의 이목이니, 직분으로써 억눌러서는 안 됩니다. 대간이 언사(言事)할 때 먼저 재상에게 보고하도록 해서는 안 되며, 임금도 재상의 의견을 보아 윤허 여부를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혹자는 대신을 흔드는 주장이 아닌가 하여 매우 놀라고 걱정하였다. 또 모종의 일을 진달하여 상이 진노하자 선생은 일어나 절하고 다시 아뢰었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성스러웠다.
3월에 체직되어 당일로 바로 귀향하였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하유(下諭)하기를,
“이러한 때에 경(卿)을 그리는 마음이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는 것보다 간절하니, 경은 나를 곤란하게 하지 말고 애타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연이어 이조 참판과 대사헌에 임명되자 그해가 다 가도록 힘써 사양하였다.
계유년(1693, 숙종19)에 다시 사직하고 이어 아뢰기를, “전하께서 등극하여 치세(治世)를 이루고자 애쓰신 지 어언 19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현실에 안주하여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차츰 의욕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대신(大臣)과 비변사(備邊司)의 관원들이 나라를 경영할 원대한 계책을 내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직언이 올라오지 않고 염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근래 수년 동안 변괴가 거듭 생기고 있으며, 변방의 방비도 우려할 만한 점이 없지 않으니, 미연에 방비책을 주도면밀히 강구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하였다.
3월에 사관(史官)이 특별 하유를 가지고 내려왔는데, 내용이 더욱 간곡하여 4월에 하는 수 없이 소명에 나아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더욱 도타운 말씀으로 위로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전에 유충(幼沖)하실 적에는 처사에 다소 착오가 있더라도 오히려 장래에 잘 하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춘추(春秋)가 한창이시니 수신修身, 제가(齊家)로부터 치국(治國), 어세(御世)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립된 계획과 법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혹 기쁨과 노여움으로 지나친 거조가 있으시니, 성덕(聖德)에 큰 누가 됩니다. 옛날에 태갑太甲이 그 덕을 잘 마쳤는데 이윤伊尹은 ‘덕이 한결같지 못하면 매사에 흉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로 경계하였습니다.11) 부디 전하께서는 ‘그 덕을 일정하게 하고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라.’는 경계를 유념하십시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 복(福)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집안에서 근본하고 도가 상실되는 것도 모두 집안에서 연유한다고 합니다. 주자(朱子)가 임금에게 고하기를 ‘부부의 분별이 엄하고 적서(嫡庶)의 구분이 바르며 뇌물이 이르지 않고 청탁이 통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제가(齊家)가 잘 된 것입니다. 또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닦아 모든 행동을 예의에 따른 것으로써 궁중을 바로잡고 인척(姻戚)을 검속하여 화란(禍亂)을 막는 근원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며12),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은 선조(宣祖)에게 ‘참소하고 이간질하는 화는 모두 내시와 부인들이 간사함을 품고서 화란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 정상이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한 번이라도 귀를 기울여 듣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 빠져듭니다.’라고 하였으니13), 이 양현(兩賢)의 말이 지극히 통절합니다. 이에 신은 감히 미리 사전(事前)의 경계를 진달합니다.” 라고 하였다.
6월에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하였다. 사퇴를 청했다가 도리어 승진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한 가지 일로 도를 시행할 수 있는 단서로 삼고자 하여 덕을 닦는 방도와 인재를 기르는 것, 그리고 풍속을 바로잡는 법 등 조목별로 세 통의 차자(箚子)를 올리고 옛날에 선비를 뽑던 법 및 주자가 개편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7월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세 번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 또 면대(面對)하여 사직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에 왕자가 새로 태어났기에 선생이 진언하기를, “왕의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는 처음 왕자가 탄생했을 때부터 등급을 분명히 하고 적서(嫡庶)를 엄히 구분해야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이 국가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왕자들의 복이 됩니다.” 하였다. 또 2품(品) 이상의 관원들로 하여금 각각 덕행(德行), 문학(文學), 재능(才能)을 갖춘 세 사람을 추천하게 한 다음, 대장은 각각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추천하게 하되 천주법(薦主法)을 엄히 시행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그러나 좌의정이 ‘향약(鄕約)을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고 예조 판서가 ‘인재를 선발하는 법은 갑자기 거행하기 어렵다.’고 아뢰어 마침내 ‘우선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은 일마다 저지를 당했기 때문에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결심을 하였다.
갑술년(1694, 숙종20) 초에 진정소(陳情疏)를 올려 사퇴를 청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신은 우직하고 물정에 어두운 탓에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길러 세도를 만회하고자 하면 고도(古道)에만 집착하여, 국사를 잘 조정하여 성상을 보필하려는 묘당(廟堂)의 은미한 뜻에 어긋나게 되며, 세금을 줄여 민력(民力)을 조금이나마 펴고자 하면 그저 용서할 줄만 알아, 백성의 원망을 감수하고 봉공(奉公)하려는 묘당의 지극한 뜻에 어긋나게 되며, 관직에 알맞은 사람을 뽑기 위해 청탁을 전혀 배제하면 오로지 아는 사람만 천거하고 자기의 뜻만을 주장하여 인사(人事)상의 규례를 곡진히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국(報國)하려는 마음이 도리어 허망한 결과를 낳고 마니, 어찌 감히 주제넘게 자리에 앉아 미혹하여 일을 그르치는 잘못을 거듭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소장을 일곱 차례나 올려 고사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분황(焚黃)하는 일을 빌미로 휴가를 청하여 어전(御前)에서 하직하니, 상이 선생을 인견(引見)하고 어주(御酒)를 하사하였다. 선생이 절하여 사례하고 아뢰기를,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닦아 나라의 법도와 기강을 세우시며 작은 오락을 멀리하고 큰 계책을 도모하소서.” 하였다.
3월에 고향 집에 도착하여 소장을 올려 체직을 청하고 장차 벼슬길에서 은퇴하려 하였다. 그런데 소장이 채 조정에 들어가기 전에 실의(失意)한 자들이 음모를 꾸몄다가 일이 발각되어 장차 중형에 처해질 일이 생겼다. 그런데 김인(金寅)이라는 자가 고변(告變)하자 상이 노하여 옥사를 담당했던 신하들이 모두 안치(安置)되니, 온 조정이 온통 저쪽 편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선생은 ‘거리가 멀어 조정에 돌아오기 쉽지 않다.’는 이유로 향리에 있으면서 전에 체직되었으며, 이윽고 대계(臺啓)가 잘못 선생에게 미쳐 홍원(洪源)으로 유배되었다. 홍원에 막 도착하자마자 금위군(禁衛軍)이 내려와서 선생을 체포하였는데, 장령(掌令) 안세징(安世徵)이 중전을 이궁(離宮)에 안처할 것을 청한 선생의 소장 중에서 ‘왕비의 법도를 따르지 않아 성상의 버림을 자초하였습니다.〔自絶于天〕’, ‘신중히 규금해야 합니다.〔謹其糾禁〕’라는 두 구절을 들어 화심(禍心)을 품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산역(高山驛)에 이르자 또 국문(鞫問)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김인이 공초(供招)에서 선생이 전에 올린 상소에서 ‘적서(嫡庶)를 엄히 구별해야 한다.’고 한 구절을 가지고 임금의 의중을 떠본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차 어떠한 화가 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아들 재(栽)가 곁에서 울부짖으니, 선생은 안색을 변치 않고 느긋한 음성으로, “화와 복은 운명에 달린 것이니 너는 당황하지 말라.” 하였다. 대질심문할 때에 이르러 안세징이 심리한 내용을 보고는 부끄러워 후회하며 자신의 언사(言事)가 사실과 어긋났다고 자책하였다. 김인도 누차 공초를 바꾸어 죄를 줄 수 없게 되었는데도 종성부(鍾城府)에 안치하는 것으로 논죄되었다. 이때에 위관(委官) 이하가 선생의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고 모두들 암암리에 심복하여 “이 어른은 오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70여 일 동안 구금되어 있던 몸으로 원로에 시달렸는데도 더욱 정신이 맑고 기력이 좋았다. 배웅하는 제생(諸生)들에게 말하기를, “환난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니, 이 늙은이의 일로 위축되지 말고 장부의 기상을 더욱 힘써 기르도록 하라.”하였다.
유배지에 도착한 뒤로는 일과를 정해 두고 강독하고 논저(論著)하였다. 손수 《주역(周易)》 고본(古本)을 필사하여 주자(朱子)와 여동래(呂東萊 여조겸(呂祖謙))가 편찬한 구본(舊本)의 체제를 복원하는 한편 북방의 수재들을 모아서 의리(義理)를 밝힌 책들을 가르치는 등 유유자적하여 유배지에 온 죄수의 의기소침한 모습이라곤 전혀 없었다.
정축년(1697, 숙종23)에 감형되어 호남(湖南)의 광양현(光陽縣)으로 배소가 옮겨졌다. 무더위 속에 수륙(水陸) 3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갔는데도 기력과 용모가 더욱 건승(健勝)하였다. 그리고 서책을 빌려서 침잠(沈潛)하여 읽으매 지경(持敬)과 궁리(窮理)의 공부가 더욱 정밀해졌다.
기묘년(1699, 숙종25)에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돌아와 안동(安東)의 금양(錦陽)에 우거하였는데 두문불출하며 가급적 사람을 접응하는 일을 줄였다. 수업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질의 고하에 따라서 깨우치고 가르쳤다.
갑신년(1704, 숙종30) 10월 경오(3일)에 고종(考終)하니, 향년 78세였다. 이듬해 1월에 금양 북쪽 산기슭에 안장하였고, 병술년(1706, 숙종32)에 안동부(安東府) 남쪽 신석리(申石里)로 이장하였다. 순조(純祖) 임진년(1832)에 또 옛날에 살던 인량리(仁良里) 우측 산기슭에 있는 행정(杏亭)의 사향(巳向) 산기슭으로 이장하였으며, 부인 박씨(朴氏)도 공의 무덤에 천장(遷葬)하였다. 금상(今上 철종(哲宗)) 임자년(1852)에 비로소 선생이 사면되어 직첩(職牒)이 지급되었다.
선생의 선조는 월성(月城)에서 나왔으니, 신라의 개국 공신(開國功臣)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고려 때 휘(諱) 우칭(禹偁)이라는 분이 재령군(載寧君)에 봉(封)해져 재령(載寧)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휘 오(午)는 고려의 운세가 다하려는 것을 보고 은거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2대(代)를 내려와서 휘 맹현(孟賢)은 경학(經學)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 옥당(玉堂)의 장(長)이 되었다. 휘 애(璦)를 낳았는데, 현령(縣令)을 지냈다. 이분이 처음으로 영해에 거주하였으며, 선생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은보(殷輔)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휘 함(涵)으로 현감(縣監)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호가 운악(雲嶽)이니, 영해의 문헌(文獻)이 이분에게서 시작되었다. 선고(先考)는 휘 시명(時明)으로 참봉(參奉)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인 김씨(金氏)와 장씨(張氏)는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이분들의 증직은 모두 선생이 높은 관작에 올랐기 때문이다.
선생의 부친 판서공(判書公)은 기개가 높고 대절(大節)이 있어 청(淸)나라 오랑캐를 황제로 섬기는 것이 부끄럽다 하여 관직에 임명되어도 출사하지 않았다. 호는 석계(石溪)이다.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뛰어났다. 선생은 그중 셋째로 장씨 소생이다. 장씨는 경당(敬堂) 선생 장흥효(張興孝)의 따님이다. 옛날 퇴계(退溪) 선생이 선유(先儒)들의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하여 동방(東方) 도학(道學)의 종장(宗匠)이 되셨는데, 학봉(鶴峯)과 서애(西厓) 두 분 선생이 그 종지(宗旨)를 얻었고, 경당이 또 그 심학(心學)을 이어받았다. 장씨 부인은 높은 식견과 남다른 행실이 있어 여러 어진 아들을 길러 내었기에 존재(存齋) 선생 같은 분이 경당의 학문을 미루어 넓혔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고매한 데다 함양(涵養) 공부도 지극하여 기국(器局)은 우주를 포괄할 만하고, 덕(德)은 제왕의 스승이 될 만했으며, 도(道)는 전철(前哲)들의 학설을 발휘할 만하고, 변론(辯論)은 사설(邪說)을 꺾어 버릴 만했다. 대개 선생은 어릴 적부터 천지간의 큰일을 하리라 자처하여 경전(經傳)과 자사(子史)로부터 율려(律呂), 성력(星曆), 대연력(大衍曆), 《참동계(參同契)》,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이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중원(中原)이 오랑캐에게 함락되어 종국(宗國)이 망한 터라 개연히 국가를 위해 군대를 몰고 연경(燕京)으로 가서 오랑캐를 무찔러 치욕을 씻으려는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병법과 군율(軍律), 오랑캐의 실정(實情) 등을 모두 자세히 강구(講究)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일의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의 차서(次序)를 분변하고는 이 마음이 천하의 대본(大本)이니 그 근본이 서지 않고서 천하의 큰일을 해낼 수 있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주경(主敬) 궁리(窮理) 공부에 주력하여 실행에까지 이르렀으며, 이에 말하기를, “거처할 때는 공손하며 일을 할 때는 공경하며 말은 충신(忠信)하고 행실은 독경(篤敬)한 것이 곧 공자(孔子)의 가법(家法)이니, 모든 성현이 전수한 것이 단지 이 길일 뿐이다. 다만 이 도리를 생각하고 지키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충신과 독경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하였다.
부모를 섬김에는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고 은혜와 의리로 규문(閨門)의 모범이 되었으며 남녀를 엄격히 분별하고 상제례(喪祭禮)를 지성껏 모셨다. 친인척과 화목하여 환난을 구휼해 주었다. 노비를 상스러운 말로 꾸짖지 않았고 창졸간에 거친 음성과 안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가슴속이 넓고 환히 트였으며 덕성(德性)이 온몸에 넘쳤으니, 참으로 도덕이 완성된 군자라 할 만했다.
밝은 시대를 만나 사유(師儒)로 초빙되자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충성을 다하리라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로잡으라는 논의와 풍속을 바로잡고 인재를 육성하라는 주청이 소장과 진대(陳對)에 간절히 나타났다. 치도(治道)를 논할 때에는 임금이 백성과 호오(好惡)를 같이하고 나라의 근본을 견고히 할 것을 급무로 삼았고, 대의를 밝히고자 할 경우에는 장법(章法)으로 군민(軍民)을 훈도하고 변방의 방비를 신칙(申飭)하는 것을 우선하였으며 현사(賢邪)와 곡직(曲直)의 분별 및 공사(公私)와 형상(刑賞)의 도리를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진강(進講)할 때에는 핵심을 제시하여 그 말이 실정에 절실히 맞았으니, 선생의 학문은 참으로 그 대체를 알고 요체를 다한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은즉 세인들이 “대신을 흔든다.” 하였고, 직언하여 회피하지 않자 또 터무니없는 비난을 받았다. 어떤 이는 “유신(儒臣)은 단지 경전의 뜻만 토론해야 할 것이요 시사(時事)의 옳고 그름은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고, 또 어떤 이는 “당세(當世)의 일을 혼자서 떠맡으려 한다.”라고 의심하였으니, 선생이 공정한 마음과 곧은 도(道)로 관직을 맡아서는 직분을 다하려 했던 것을 어찌 알겠는가. 선생은 일찍이 “군신(君臣)의 의리가 무거우니 임금이 크게 함부로 대하지 않으면 떠나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군자가 근심하고 위태로워했던 마음이다. 다만 구차히 임금의 뜻에 영합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처음 소명을 받고 등대(登對)한 뒤부터 상의 사랑과 기대가 날로 커졌으나 선생은 유속(流俗) 속에서 홀로 고도(古道)로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진달한 말이 혹 임금의 뜻에 위배되고 주청한 일이 혹 방해를 받는 등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고심(苦心)하였으니, 계유년(1693, 숙종19) 이후의 소차(疏箚)에서 선생의 개절(凱切)한 충정을 더욱 잘 볼 수 있다. 궁중의 내밀한 문제에 이르러서는 또 온 조정이 꺼려서 말하지 못하던 것이었는데 선생은 임금의 위엄을 범하면서 거침없이 말하였으니, 이는 그 마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있는다면 오직 그 직분을 다해야 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물러남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결연히 벼슬을 버리고 떠나면서도 오히려 임금을 잊지 못하는 충정을 보였다. 지금 당시의 사퇴를 청한 상소와 임금을 면대한 자리에서 진달했던 경계를 읽어 보면 맹자(孟子)가 사흘을 묵은 뒤에야 주(晝) 땅을 떠나갔던 것과 같은 느낌이 드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중궁(中宮)을 위해 전후로 진달한 것으로 말하자면 위로는 임금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래로는 신하의 절의(節義)에 부끄럽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을 싫어하는 무리가 터무니없는 죄명을 날조하여 무함(誣陷)한 것은 겨우 선생의 몸만을 곤궁하게 했을 뿐 끝내 선생의 도는 손상할 수 없었으니, 선생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 선생은 곤액(困厄) 속에서도 마음은 더욱 태연하여 도를 논하고 글을 지으며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다. 세상의 영욕(榮辱)을 한서(寒暑)와 주야(晝夜)가 눈앞에서 번갈아 바뀌는 것처럼 무심히 보았으니, 천하의 대용(大勇)이 아니라면 그 누가 이럴 수 있겠는가. 맹자(孟子)가 “천하의 넓은 집인 인(仁)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인 예(禮)에 서며 천하의 큰 도(道)인 의(義)를 행하여, 부귀(富貴)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貧賤)이 절개를 바꾸게 하지 못하며 위무(威武)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다.” 한 대장부의 기상이 선생에게 있었다.
선생은 늘 말하기를 “도는 현묘한 것이 아니라 크게는 군신부자(君臣父子) 작게는 이목구비(耳目口鼻)의 법칙이 바로 도이니, 요순(堯舜)의 도도 이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였다. 학인(學人)들과 학문의 방도를 말할 때에도 길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그래서 사서(四書)를 우선하지 않고 다른 경서를 우선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자(朱子)가 가르친 학문의 차서(次序)를 말해 주었으며, 의문(儀文)과 같은 지엽적인 공부에 심력(心力)을 쏟는 사람이 있으면 관중(關中)의 학자들이 예(禮)의 형식에 힘을 쏟던 폐단을 가지고 말해 주었다. 또 생각하기를, ‘학자가 지견(知見)이 한번 어긋나면 그 마음에서 생겨나서 그 도를 해치게 되는 법이다. 율곡(栗谷) 이씨(李氏)와 같은 경우 퇴계 선생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비판하면서 편벽되게 혼륜설(渾淪說)만을 주장하여 기(氣)를 이(理)로 여기고 이(理)를 공허(空虛)하고 적막(寂寞)한 것으로 여겼다.’ 하고 변설(辨說)을 지어 그 오류를 밝혔다.
존재(存齋) 선생은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참으로 성인이 세상을 경영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대법(大法)이라 여겨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짓다가 끝맺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선생이 이 책을 이어 완성하여 장차 임금께 바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어린 시절 문장에 뜻을 두어 그 문장이 고아하고 간결하였다. 만년에는 의리(義理)를 밝히는 것을 위주로 하여 문장의 조리가 통창通暢하였으며 또한 진부한 말이 없었다. 소(疏), 차(箚), 강의(講義), 시문(詩文), 잡저(雜著) 등 20권이 세상에 인행(印行)되어 있다. 또 《돈전췌어(惇典稡語)》, 《존주록(尊周錄)》, 《충절록(忠節錄)》, 《영모록(永慕錄)》, 《신편팔진도설(新編八陣圖說)》, 《주수도설발휘(舟水圖說發揮)》, 《홍범연의》 등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박씨(朴氏)는 경력(經歷) 륵(玏)의 따님이고 절도사(節度使) 증(贈) 예조 판서(禮曹判書) 의장(毅長)의 손녀로 단정하고 정숙하여 규문의 범절이 매우 훌륭하였는데, 선생보다 먼저 졸(卒)하였다. 4남(男)을 두었다. 장남은 천(梴)이다. 둘째는 의(檥)인데 존재 선생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셋째는 재(栽)로 가학을 잘 이었다. 이분이 바로 밀암(密庵) 선생으로, 천거로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가 되었다. 넷째는 심(杺)이다. 세 딸은 김이현(金以鉉), 홍억(洪億), 김대(金岱)에게 출가하였다. 서자로는 전(槇), 련(槤), 반(槃)이 있다. 천(梴)은 3남을 두었으니 국환(國煥), 복환(復煥), 지료(之炓)이며, 딸은 금수익(琴壽益)에게 각각 출가했으며, 서자는 석환(碩煥), 익환(益煥)이다. 의(檥)는 2남을 두었으니 지익(之熤), 지확(之𤌍)이며, 딸은 증(贈) 지평(持平) 권구(權榘)에게 출가했다. 재(栽)는 4남을 두었으니 지훤(之烜), 지번(之燔), 인환(寅煥), 지온(之熅)이며, 딸들은 이태화(李泰和), 홍정(洪侹), 황렴(黃濂)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서자는 동환(東煥)이며, 서녀는 권혜(權蕙)의 소실이 되었다. 심(杺)은 3남을 두었으니 두환(斗煥), 규환(奎煥), 중환(中煥)이며, 딸들은 김광현(金光鉉), 정태익(鄭泰益), 유회완(柳會完)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김이현은 3남을 두었으니 몽렴(夢濂), 몽락(夢洛), 몽수(夢洙)이다. 홍억은 2남을 두었으니 세전(世全), 상전(尙全)이며, 김대의 아들은 지원(智元)이다. 전(槇)의 아들은 이환(頤煥)이고, 련(槤)의 양자는 정환(鼎煥)이다. 반(槃)의 두 아들은 양자로 간 정환과 분환(賁煥)이다. 증손(曾孫) 현손(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선생의 종통(宗統)을 이은 사람은 팔세손(八世孫) 수억(壽嶷)이다.
선생은 먼 후대에 외진 이역(異域)에서 태어나 멀리 시대를 거슬러 올라 성현의 학문을 이었다. 경의(敬義)의 공부로 안팎을 닦고 경륜(經綸)의 뜻으로 출처(出處)를 정도에 따랐다. 이에 당대의 영재들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으며, 게다가 집안의 훌륭한 자제가 그 학통을 이어 그 전수가 호학(湖學)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자사(子思)와 맹자(孟子)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어찌 성대하지 않으리요.
후손 상건(相健)이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보잘것없는 후생으로 부끄럽게도 문장이 부족하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선생의 외후손(外後孫)으로 남기신 가르침을 얻어 배울 수 있었고, 또 이 글에 나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래서 삼가 연보(年譜)와 후현(後賢)들의 기록들에 의거하고 삼가 평소 마음속에 느끼던 바를 덧붙여서 글을 찬술하여 돌려보낸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붙인다.
도의 흥망은 道之顯晦
실로 사람에게 달렸나니 實惟在人
삼대 이후로는 三代以降
정주(程朱)에 의해 밝아졌네 闡于洛閩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逮我休明
퇴계가 나오신 뒤로 陶山有作
선생이 이어 일어나시니 先生嗣興
영명한 재주와 깊은 학문이라 英材邃學
뜻은 우주를 다 감싸고 志包區宇
식견은 고금을 꿰뚫었나니 識貫今古
박람하고 요약한 그 공부 旣博而約
대본인 마음을 위주했어라 大本是主
이에 임금이 크게 공경하여 王庸丕欽
재신(宰臣)의 높은 벼슬 내리니 加之鼎軸
선생이 이에 소명을 받아들여 先生是膺
조석으로 임금을 계도하였지 朝夕啓沃
정자와 주자가 올린 진언이요 朱程論思
이윤과 부열이 올린 훈계였나니 伊傅誥語
진퇴를 때에 맞게 했으며 時行時止
또한 훌쩍 떠나 초야에 은둔했지 亦旣遐擧
군자가 하는 일은 君子所爲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법 人固不識
환난 속에서도 태연한 모습 素患行患
비방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談笑矰繳
지주가 거센 물결에 부딪치며 砥柱衝波
물 중앙에 완연히 서 있는 듯 宛在中央
토론과 저술을 쉬지 않았으니 論著不休
그 필력 정녕 도도하였어라 大筆泱泱
영욕에는 마음 아니 흔들렸지만 寵辱不貳
그래도 근심하던 바는 있었나니 所憂則有
근심 중에 즐거움이 있었으니 憂中有樂
그 덕업 크고 오랠 수 있었어라 可大可久
후세에 전해져도 폐단이 없으니 傳之無弊
후생을 열어 주고 선배에도 빛나도다 啓後光前
하늘의 운수는 반복되는 법 昊天其復
은혜로운 사면의 명이 내려졌네 恩誥迺宣
둔운산의 남쪽에 遁雲之陽
우뚝한 봉분이 있어라 堂斧有崇
이 비석의 글 후세에 길이 보이노니 刻示後百
사도가 이에 더욱 융성하리라 斯道彌隆
철종(哲宗) 6년 을묘(1855)에 후학(後學)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의금부사 한성부좌우윤 오위도총부부총관 병조참판(同知義禁府事漢城府左右尹五衛都摠府副摠管兵曹參判) 완산(完山) 유치명(柳致明)은 삼가 찬술하노라.
[주1] 원회운세(元會運世) : 원(元)은 우주가 열린 뒤부터 소멸되기까지의 한 주기를 가리키는 말로, 1원은 12회(會)이고 1회는 30운運, 1운은 12세世이고, 1세는 30년年이 된다. 따라서 일원은 12만 9600년이 된다. 《皇極經世書 觀物》
[주2] 무릎을 …… 불며 :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출사(出仕)하기 전 남양(南陽)에서 몸소 농사를 지을 때 〈양보음(梁甫吟)〉이란 노래를 지어 매일 새벽과 저녁이면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길게 불렀다 한다. 이를 포슬음(抱膝吟)이라 하여 지사(志士)의 울울한 심회를 읊은 시를 뜻한다.
[주3] 주수군민(舟水君民) : 임금은 배에, 백성은 배를 띄우는 물에 비유한 것으로 임금이 정사를 함에 있어서 백성들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됨을 뜻한다. 《순자(荀子)》 〈왕제(王制)〉에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4] 비방목(誹謗木)과 감간고(敢諫鼓) : 비방목은 임금의 과실(過失)을 기록할 수 있도록 다리 위에 세워 둔 나무로 순(舜) 임금이 만들었다고 하며, 감간고는 간언(諫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칠 수 있도록 궁문에 설치한 북으로 요(堯) 임금이 만들었다고 한다. 《淮南子 主衛訓》
[주5] 급암(汲黯)과 한소(韓韶) : 급암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강직한 현신(賢臣)이고, 한소는 자가 중황(仲黃)으로 후한(後漢) 때 사람이다. 급암은 하내(河內)에 어사(御史)로 갔을 때, 형편상 편의대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빈민을 진휼하고 나서 조정의 명을 빙자해 일을 처리한 데 대한 벌을 받을 것을 청하니, 무제가 현명하게 여겨 용서해 주었다. 한소는 영장(嬴長)이 되었을 때, 임의로 창고를 열어 유민(流民)들을 구제했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 《後漢書 卷62 韓韶列傳》
[주6] 어찌하여 …… 않습니까 : 애공(哀公)이 유약(有若)에게 “농사가 흉년이 들어 재용(財用)이 부족하니, 어찌해야겠는가?” 하니, 유약이 “어찌 철법을 쓰지 않습니까?〔盍徹〕” 하고 대답하였다. 철법은 소득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는 제도인데, 10분의 2를 세금으로 거두던 노(魯)나라 임금에게 이 제도를 시행하라고 한 것은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도 자연 풍족하게 된다는 민본주의(民本主義) 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論語 顔淵》
[주7] 왕홍(王鉷), 양신긍(楊愼矜) : 모두 당(唐)나라 때의 권신(權臣)들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새로운 명목의 세금을 거두자는 의론을 내어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왕홍은 현종(玄宗) 때 사람으로, 혹독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양신긍도 현종 때 사람으로, 현종이 대부(大府)의 출납(出納)을 맡기자, “여러 고을에서 바친 포백(布帛)이 찌들어서 파손된 것이 있으니, 본 고을에 돌려보내어 절고전(折估錢)을 받고 저자로 보내야 한다.”라는 의견을 내어 징수하고 조달하는 것을 번거롭게 만들었다.
[주8] 인(仁)을 …… 얻었다 : 염유(冉有)가 공자에게 “백이숙제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옛날의 현인(賢人)이다.” 하였다. 염유가 “후회하였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는데 어찌 후회하였으리요.” 하였다. 《論語 述而》
[주9] 전석(前席) : 자리를 앞당긴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의기투합함을 뜻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좌천되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다가 일 년 남짓 만에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문제(文帝)가 선실(宣室)에 있다가 그에게 귀신의 본원(本源)에 대해 물었다. 이에 가의가 귀신의 유래와 변화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다가 한밤에 이르자 문제가 그 이야기에 빠져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몸을 가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한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주10] 왕조(王朝)가 …… 것 : 왕조는 왕단(王旦)인데 조선 태조의 휘(諱)가 단(旦)이었으므로 피휘(避諱)하여 이렇게 부른 것이다. 송(宋)나라 진종(眞宗)이 거란의 침공을 받아 친정(親征)하면서 전연(澶淵)에서 금품을 주고 맹약(盟約)을 맺었는데, 후에 그 일을 부끄러워하여 “천서(天書)에 의해 봉선(封禪)하여 사해(四海)를 진압하라고 꿈에 신인(神人)이 천서를 내렸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실제로 천서를 승천문(承天門)과 태산(泰山)에서 얻게 된 것으로 사실을 날조하였는데, 당시의 현신(賢臣)이었던 왕조가 이 일에 동조하였다. 《宋史 卷6 眞宗本紀)》
[주11] 태갑(太甲)이 …… 경계하였습니다 : 은(殷)나라 왕 태갑이 이윤(伊尹)의 보필을 받아 평생토록 그 덕을 진실하고 전일하게 지켰는데도 이윤은 그 덕을 변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다. 《서경(書經)》 〈태갑 중(太甲中)〉에 “황천이 우리 상나라를 보우하사 사왕으로 하여금 그 덕을 능히 마칠 수 있게 하였다.〔皇天眷佑有商 俾嗣王克終厥德〕” 하였고,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덕이 한결같으면 매사에 길하지 않음이 없고 덕이 한결같지 못하면 매사에 흉하지 않음이 없다.〔德惟一 動罔不吉 德二三 動罔不凶〕” 하였다.
[주12] 주자(朱子)가 …… 하였으며 : 《주자대전(朱子大全)》 권12 〈기유의상봉사(己酉擬上封事)〉에 보인다.
[주13] 선정신(先正臣) …… 하였으니 : 《퇴계집(退溪集)》 권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 보인다.
[주14] 군자가 …… 마음 : 소식(蘇軾)의 〈전표성주의서(田表聖奏議序)〉에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치세(治世)에도 근심하고 밝은 임금에 대해서도 위태롭게 생각했다.〔古之君子 必憂治世而危明主〕”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9》
[주15] 맹자(孟子)가 …… 떠나갔던 : 맹자가 제(齊)나라에 갔다가 선왕(宣王)과 뜻이 맞지 않아 제나라를 떠날 때 혹 임금이 마음을 돌려 자신을 부르면 선치(善治)를 이룰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주(晝) 땅에서 사흘 동안 머문 뒤에 떠났다. 《孟子 公孫丑下》
[주16] 관중(關中)의 …… 폐단 : 관중은 북송(北宋)의 학자인 장재(張載)가 살던 곳이다. 장재의 문인들이 지나치게 예(禮)의 형식적인 측면에만 치중하였다고 정이(程頤)가 비판하였다. 《朱子書節要 卷5 答陸子壽》
[주17] 경의(敬義)의 …… 닦고 :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敬以直內〕 의로움으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義以方外〕 공경과 의로움이 확립되어 덕이 외롭지 아니하니.〔敬義立而德不孤〕”라고 하였다.
[주18] 호학(湖學) :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형제의 학문을 가리킨다. 이들은 갈암의 셋째 아들인 밀암(密庵)의 외손자들로서 모두 조선 후기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는데, 경북 안동(安東)의 소호리(蘇湖里)에서 살았기 때문에 호학이라 한 것이다.
[주19] 자사(子思)와 …… 있다 : 상채(上蔡) 사양좌(謝良佐)가 “여러 제자들의 학문이 모두 성인(聖人)에게서 나왔으나 그 뒤에는 시대가 멀어질수록 그 진의(眞義)를 잃어 갔는데 유독 증자(曾子)의 학문만은 오로지 내면에 마음을 썼기 때문에 전수에 폐단이 없었으니, 자사와 맹자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였다.
[주20] 정자(程子)와 …… 훈계였나니 : 정자와 주자가 경연에서 임금에게 올린 말과 같고, 은(殷)나라 때의 어진 재상인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이 임금에게 올린 훈계와 같다는 것이다.
[주21] 지주(砥柱) : 중국의 황하(黃河)의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이 서 있는 바위산으로,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군자에 곧잘 비유된다.
[주22] 근심하던 바는 있었나니 : 소식(蘇軾)의 〈전표성주의서(田表聖奏議序)〉에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치세(治世)에도 근심하고 밝은 임금에 대해서도 위태롭게 생각했다.〔古之君子 必憂治世而危明主〕”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