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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충익모광국 추충분의협책평난 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아성부원군 이공 신도비명〔輸忠翼謨光國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鵝城府院君李公神道碑銘〕
내가 우리 영조 임금을 섬길 때 가까이 모신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영조께서 신하들과 선조 시대의 인물을 논할 때면 매번 이르기를,“아계(鵝溪)는 실로 국조(國朝)의 명인(名人)이다.” 하였다. 아계는 고(故) 상국(相國) 이공(李公)의 호이다. 공이 선조 임금과 의기투합하여 비록 상상(上相 영의정)의 지위를 지냈으나, 시운은 붕당이 처음 나뉘는 때를 만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여 있었던 일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방하여 천하 후세를 현혹시킬 만하였다. 그러나 영조께서는 밝은 지혜로 옛 신하를 논평할 때 섬세한 저울이 어긋나지 않았으며 문득 공에 대해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호를 일컬으며 이르기를, “명인이로다, 명인이로다.” 하였다. 아, 공이 살아서는 성조(聖祖)를 만나고 죽어서는 신손(神孫)을 만난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지 사람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또한 성대하지 않은가.
공의 휘는 산해(山海)이고, 자는 여수(汝受)이며, 한산(韓山) 사람이다. 고려 말기에 문효공(文孝公) 가정(稼亭) 곡(穀)과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색(穡) 부자는 문장으로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목은의 막내아들 종선(種善)은 우리 조정을 섬겼고 시호는 양경(良景)이며, 그의 아들 계전(季甸)은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인데, 이분들이 공의 6대조와 5대조가 된다.
고조 휘 우(堣)는 성균관 대사성이고, 증조 휘 장윤(長潤)은 현감이다. 조부 휘 치(穉)는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섬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비로소 풀려났으며 별세할 때의 관직은 판관이었다. 아버지 휘 지번(之蕃)은 호가 성암(省菴)이고 관직은 내자시 정(內資寺正)이다. 어머니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현령 남수(南脩)의 따님으로 바로 공을 낳은 분이다.
공은 인신(人臣)으로서 귀함이 극에 달하여, 아버지를 의정부 영의정 한천부원군(韓川府院君)에, 조부를 의정부 좌찬성에, 증조를 이조 판서에, 어머니를 정경부인에 추증받게 하였다. 성암공과 그 아우 토정공(土亭公)은 모두 당대의 현자(賢者)로서 덕을 쌓아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실제로 드러난 것은 공의 대(代)에서였다.
공이 태어날 때 토정공은 울음소리를 듣고 아기가 세속의 아이들과 같지 않을 것을 이미 점쳤다. 공은 겨우 돌을 넘기자 스스로 글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공은 어떤 사람이 이빨이 세 개인 쇠스랑을 지고 당(堂)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자 갑자기 말하기를 “산(山) 자다.”라고 하였다.
성암공이 황고산(黃孤山)의 초서(草書)를 얻어서 벽에 붙여 놓고 아끼며 완상했는데,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와 보니, 종이가 몹시 얼룩지고 더럽혀져 있어서 괴이하게 여기고 힐문하였다. 유모가 아뢰기를, “아이가 이끌기에 제가 안아서 보게 해 주니 흔연히 손가락으로 위아래로 죽죽 그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하였다. 공이 이에 종이와 붓으로 바로 글자를 쓰게 하자, 한 획도 틀리지 않게 써서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5세 때 토정공이 공의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기특하게 여겨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쳤는데, 한마디 말에 바로 천지와 음양의 이치를 알고는 그림을 가리키며 다른 주장을 내며 다투었다. 일찍이 글을 읽느라 밥 먹는 것을 잊어서 토정공이 혹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독서를 그치게 하고 밥상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운자를 불렀는데, 부르는 대로 응하여 대답하기를,
밥상 더뎌도 민망한데 배움을 더디 하랴 食遲猶悶況學遲
배 주려도 민망한데 마음을 주리게 하랴 腹飢猶悶況心飢
살림 가난해도 마음 치료할 약 있으니 家貧尙有療心藥
모름지기 영대에 달 뜰 때를 기다려야 하리라 須待靈臺月出時 하니, 토정공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6세 때 큰 글씨를 썼는데, 붓을 잡고 비틀거리는 것이 마치 신묘한 조화 속에서 붓을 휘둘러 먹물을 뿌리는 것 같았고 글자의 모양이 절로 기이하고 힘차서 당시의 명공(名公)과 위인(偉人) 들이 날마다 찾아와 글을 요구하느라 수레와 말이 나란히 모여들었다. 명종이 그 명성을 듣고 병풍에 글을 써서 올리라고 명하자, 공이 병풍 위를 걷고 달리면서 썼는데, 특명으로 공의 발자국을 그려서 보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성암공은 공의 명성이 너무 일찍 나는 것을 염려하여 공을 이끌고 동작나루 근처 강가 정자로 이사했는데,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 임금호 형수(林錦湖亨秀), 박소고 승임(朴嘯皐承任)이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에서 배를 타고 와서 “동호의 독서당은 도가의 봉래산이라네.[東湖讀書堂道家蓬萊山]”라는 열 글자를 큰 글씨로 써 줄 것을 청하고 큰 병풍을 만들어 소중히 간직하였다.
공은 11세 때에 비로소 과장(科場)에 나가 노닐었는데, 고시관이 공이 지은 글을 보고 놀라 말하기를,
“어찌 왕자안(王子安)의 ‘가을 물과 긴 하늘’이라고 한 구절 아래에 있겠는가.” 하고, 장원에 뽑아 놓고 시험지를 잘라 나누어 갔다. 무오년(1558, 명종13)에 성균관에 올라갔다.
경신년(1560)에 명종이 알성시(謁聖試)에서 선비들에게 과거를 보였는데, 공이 장원을 차지하고 신유년(1561)의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받아 승문원에 분속되었다. 다음 해에 홍문록(弘文錄)의 선발에 들어 정자가 되고, 그다음 날 명종이 불러 어전으로 나오게 하여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세 글자를 큰 글씨로 쓰게 하였다.
계해년(1563)에 저작에 오르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하였다. 이때 본관(本館)에서 원악(元惡)인 윤원형(尹元衡)의 죄를 성토했는데, 차자의 말은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고 같은 반열에 있던 사람들이 목을 움츠렸다.
갑자년(1564)에 박사, 수찬, 정언을 지냈다. 이로부터 홍문관에 잇따라 제수되었다. 이 당시 중국 사신이 잇따라 오자, 조정은 문장과 학문을 두루 갖춘 자를 선발하여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공보다 앞서는 자가 없었다. 한림 검토(翰林檢討) 허국(許國), 급사중(給事中) 위시량(魏時亮)은 공이 주선하고 응대하는 것을 보고 설관(舌官 역관)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번 행차가 헛되지 않았구나. 동국(東國)에 참으로 사람이 있구나.” 하였다.
이조 좌랑ㆍ정랑, 의정부의 검상ㆍ사인, 홍문관 응교ㆍ전한, 직제학, 상의원 정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되어 특명으로 예문관 응교를 겸직하였는데, 이것은 극선(極選)으로서 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경오년(1570, 선조3)에 동부승지에 올랐다가 이조 참의, 대사간, 부제학으로 옮겼다. 을해년(1575)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전에 성암공은 병든 부모를 위하여 넓적다리 살을 베어 드렸다가 노쇠와 병이 빌미가 되어 5년 동안 앓았다. 공은 그동안에 사간원, 홍문관, 승정원, 이조ㆍ예조ㆍ공조ㆍ형조의 참의에 제수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나 모두 간호하기 위하여 사직하였고, 지물(志物)의 봉양을 반드시 극진히 하고 탕약은 반드시 손수 달이며 허리띠를 풀지 않고 전혀 음식을 먹지 않자 보는 이들이 감탄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슬픔으로 건강을 잃어 거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으나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삼 년을 마쳤다. 상복을 벗은 뒤에 잇따라 홍문관과 승정원의 장(長)이 되었다가 잠깐 대사성이 되었다.
기묘년(1579)에 가선대부에 오르고 특명으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병조 참판으로 옮겨 1년 있다가 정경(正卿)에 오르고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신사년(1581)에 대사헌을 거쳐 이조 판서에 이배(移拜)되자 공이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 문성공 이(李文成公珥)가 방문하여 말하기를, “공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이렇게 나라의 형세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직분을 다하여 임금에게 보답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병을 이유로 선비들의 바람을 저버립니까.”하자, 공이 이 말에 감동하였다. 공이 인재를 감별하는 일을 직접 하고 진퇴를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자, 비록 신분이 높거나 요직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감히 사사로이 벼슬을 구하지 못하였다. 선조가 공에게 내린 비답에서 이르기를, “듣건대, 경이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문밖은 새그물을 칠 만하다고 하니, 내가 장차 경에게 보답하고자 한다.” 하고, 이 문성공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벗의 행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니, 세도(世道)를 구할 만하다.” 하였다. 어느 날 공이 김효원(金孝元)을 사간에 의망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정을 불화하게 만든 자가 김효원 이 사람이다. 서관(庶官)이나 낭료(郞僚)에 두면 족한데 어찌 곧장 사간에 의망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김효원의 등용할 만한 실상을 힘써 진달하고, 유 문충공 성룡(柳文忠公成龍)이 홍문관으로서 또한 그것을 말하였다. 이해에 모친상을 당하여 상례(喪禮)를 부친상 때처럼 행하였다. 그리고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삼 년을 마쳤다. 선조께서 공의 청빈함을 걱정하여 관아에 명해서 제수를 제공하게 하고, 또한 관찰사에게 명하여 쌀과 콩을 내려 주게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상제를 마치자 특명으로 의정부 우찬성에 올랐고, 이조ㆍ예조ㆍ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겸대한 것은 지경연사, 판의금부사, 홍문관 제학, 지성균관사였다.
갑신년(1584)에 다시 총재(冢宰 이조 판서)에 제수되어 양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이때 동인과 서인으로 당을 나누는 것이 비로소 극성해져 입주출노(入主出奴)하니, 국론이 일정하지 않았다. 상이 한창 공에게 뜻을 두어서 공은 누차 사양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는데, 상이 이에 이르기를, “공은 사심이 없다. 그래서 내가 평소에 도움을 받은 것이다.”
하였다. 이에 공이 뜻을 다하여 가려내니 들에는 버려진 현자가 없고, 정색하여 악을 물리치고 선을 권장하니 조정에는 요행으로 벼슬을 얻은 사람이 없었다. 김동강 우옹(金東岡宇顒), 김학봉 성일(金鶴峯誠一), 이동암 발(李東巖潑), 정곤재 개청(困齋介淸), 조월천 목趙月川穆, 이송와 기李松窩墍와 같은 이들은 모두 공이 천거하였다. 비록 의견이 달라 공과 화목하지 못한 자들이라도 인재 선발의 공평함을 이야기할 때면 모두 공보다 앞선 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정 상국 지연(鄭相國芝衍)이 병이 심해지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대답하여 아뢰기를, “이산해의 문장과 학문과 식견과 도량은 일찍부터 공보(公輔 재상)가 될 기대를 받았고, 호오(好惡)에 조금도 치우침이 없어 나라를 화평하게 하는 복이 있을 것이니, 크게 쓸 만합니다.”
하였다. 이 문성(李文成 이이(李珥))이 상언(上言)하여 아뢰기를, “신은 이산해와 어릴 적부터 벗으로 친하게 지내서 그의 장점을 다 압니다. 신으로 하여금 이산해와 함께 관직을 맡아 사무를 처리하게 한다면 신이 그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형을 잡고 인재를 가리는 것에 이르러서는, 신도 따라잡지 못할 것을 압니다.” 하여, 상이 이르기를, “이산해는 뛰어난 문재(文才)를 지녔으나 능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나는 일찍이 그는 덕을 지닌 사람으로서 문장과 학문과 도덕과 기량이 유속(流俗)을 진정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 또한 평소 마음을 허여하였고, 그는 전형을 잡고 공평함을 다하였으니 아마도 벼슬길을 맑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공은 인재를 선발하고 조화를 부리는 자리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 잇따라 상소를 올려 매우 간절하게 사직하였으나 상이 번번이 별도의 유지를 내렸는데 “비록 10년이 될지라도 체직시키지 않겠다.”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승정원에 명하여 사직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김응생(金應生)이란 자가 윤대관(輪對官)으로서 나아와 아뢰기를,
“한 사람이 오래 인사 행정의 권한을 잡으니 그의 권세가 무거워질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심히 진노하고 친히 글을 지어 내렸는데, 그 대략에, “지금 저 이조 판서의 사람됨에서 두터운 덕과 큰 재주, 큰 기국과 아량, 순결한 충정과 굳은 지조는 우선 놔두고 논하지 말고, 단지 그의 용모와 기상에 나아가서 논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말은 입을 나오지 못할 듯하고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여, 한 덩이 진실한 기운이 혼연히 마음에 가득 차서 과장하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태도가 한 점도 없기 때문에 난폭하고 교만한 자도 족히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고 교활하고 거짓된 자도 족히 정성을 바친다. 이 사람은 상고 시대의 인물이지 동방의 보통 사람이 아니다. 비록 진 혜제(晉惠帝)로 하여금 그를 만나게 하더라도, 눈을 들어 한번 본다면 그가 군자다운 사람인 줄을 잘 알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조정의 정사를 제멋대로 하는 짓은 아무리 권하더라도 그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바라볼 때마다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고,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임금의 사악한 마음이 자연히 저도 모르게 감화되었으니, 참으로 군자 가운데서도 군자다운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저 김응생이란 자는 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머리를 들어 혀를 휘둘러 현혹시키고 이간질하는데, 그의 소행을 살펴보면 해를 보고 짖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정당(鼎鐺)에도 귀가 있는데, 어찌 이조 판서가 나의 사직신(社稷臣)이라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지난해에 경안(慶安)이 유성룡을 참소하고, 올해는 김응생이 이산해를 참소했다. 이 두 신하는 나라의 버팀목이다. 기둥과 주춧돌 같은 신하를 청승(靑蠅)이 번갈아 어지럽히는 것이 이런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무슨 까닭인가.”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김응생을 구제하고 훗날 정사를 볼 때 누차 그 사람을 의망하니, 상이 공에게 이르기를, “저 사람은 경을 해치려 했는데 경은 도리어 저 사람을 쓰니, 도덕과 아량이 미칠 수 없다.” 하였다. 김공 우옹(金公宇顒)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산해를 의지하고 신임하시니, 소인배들이 백방으로 그를 배척합니다. 지난날 김응생의 말로 살펴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김응생이 어찌 혼자 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정철(鄭澈)이 그를 사주했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여, 대답하여 아뢰기를, “지금 정철의 마음 씀씀이를 살펴보면 사람들의 말이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하였다.
무자년(1588)에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가 모두 비었다. 영의정 소재(穌齋) 노공(盧公)이 일찍이 공과 서애(西厓) 유공(柳公)을 천거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먼저 공을 선택하여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하니, 조정의 동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재상이 된 것이 늦었다.” 하였다. 이해에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의 봉호를 받았다. 대개 종계(宗系)를 고치기 위해 전후로 명나라에 보낸 상주문을 모두 공이 문형(文衡)을 관장할 때 살펴서 결정했기 때문이다.
기축년(1589)에 좌의정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이 일어나서 국청 대신(鞫廳大臣)인 정철이 해를 넘기면서 죄를 덮어씌워 한 무리의 명류인 최영경(崔永慶), 정개청 등이 또한 옥에서 죽었다. 이에 편벽된 의론을 고집하는 자들이 자기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을 한꺼번에 모조리 밀어내고자 하여, 이에 김면(金沔), 정개청 등은 곧 공이 전형하는 자리에 있을 때 학행을 포상하도록 계문(啓聞)하고 거두어 등용한 자들로 지금 모두 체포되었으니 공이 홀로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또한 공이 상국 정언신(鄭彦信)과 반옥(反獄)을 모의한다고 말하며 정언신을 국문할 것을 더욱 급하게 청했는데, 그들의 의도는 사실 공에게 있었다. 또한 광주(光州)에 사는 흉인(凶人) 정암수(丁巖壽)를 사주하여 패악스러운 상소문을 올리게 하자, 공이 교외로 나가 명을 기다렸는데, 상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제 경이 교외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놀라고 당황하였다. 그 후에 소장(疏章)을 보고 광주의 간사한 도적 몇 명이 몰래 조정을 해코지하는 것을 알았다. 경은 충성스럽고 신중하며 너그럽고 후덕하여 도량은 만석을 실은 배와 같아 옛날 대신의 기풍이 있고, 유성룡은 학문이 순정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이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로서 사림의 영수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평소에 의지하고 중시하였다. 그런데 지금 간사한 사람들이 나라의 우환을 틈타서 두 사람을 쳐서 제거하려고, 나를 어린애로 보고 손바닥과 다리 사이에 올려놓고 희롱하려 하니,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저들을 사주한 간사한 사람을 잡아야만 속이 후련하겠기에 차라리 중도를 지나친 거조가 있을지언정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경은 대죄하지 말고 마음 놓고 안심하라.” 이에 공은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때 마침 병이 심하였다. 공은 침상에 있을 때도 매번 말하기를, “선비들이 죄 없이 많이 죽어 원기(元氣)가 손상되었으니 나라를 어찌할 것인가.” 하였으며, 누차 병 때문에 사직하였으나 상은 더욱 공을 존중하고 총애하였다.
경인년(1590)에 공이 평난 공신(平難功臣)에 녹훈되었는데, 공의 뜻이 아니었다. 이로부터 선비의 기개가 꺾이고 패악스러운 상소가 잇따라 이르렀다. 상이 윤음(綸音)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심이 무너져 정암수의 무리 몇 명이 상소로 조정의 신하를 해코지하고, 우의정 정철 이하 몇 사람만을 도우며 스스로 곧은 체하나 도리어 그 정상을 드러내었으니, 가소롭다.” 당인(黨人)들이 백 가지로 공을 흔들어도 안 되자, 또한 말하기를, “공이 김공량(金公諒)과 손잡고서 궁궐을 부여잡고 오르려 한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논어》에서 ‘내가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한다면 하늘이 버릴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리라.”하였다.
신묘년(1591) 봄에 공이 상공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과 함께 억울함을 신원하고 간사함을 억제하는 논의를 창도하였다. 이에 부제학 김공 성일(金公誠一)이 맨 먼저, 처사 최영경이 무고를 받은 실상을 말하고, 대사헌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죄 없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죽인 정철의 죄를 논하자, 상이 정철을 강계부(江界府)로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다. 당인들이 반안(反案)을 내어서 이 일은 공이 시킨 것이라고 하며, 공에 대해 더욱 깊이 원한을 품었다.
이때 섬오랑캐 평수길(平秀吉)이 의지(義智)를 보내어 우리나라에 통신사를 보내 달라고 했는데, 조정의 논의는 편한 점과 불편한 점을 말하는 것이 각기 달랐다. 공과 윤공 두수(尹公斗壽)가 명나라 조정에 주문(奏聞)해야 한다고 힘껏 주장하였다. 드디어 성절사(聖節使) 김응남이 명나라 조정에 가서 그 일을 퍽 자상하게 아뢰었다. 성절사가 도착해서 보니 명나라 조정은 유구국(琉球國)의 보고를 받고 우리나라가 사사로이 일본과 우호를 맺은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는데, 주본(奏本)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실상을 통촉하게 되었다. 그 후에 명나라 조정이 크게 군대를 보냈으니,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사실 이것 덕분이다.
임진년(1592)에 왜구가 크게 침입했다. 태평을 누린 세월이 오래되어 백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고 여러 군읍은 산산이 무너졌는데 흉악한 칼끝이 장차 서울에 도달하게 되자 조정의 의론이 혹은 “도성을 지키는 것이 좋다.”라고 하고, 혹은 “북관(北關)으로 옮겨 피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다. 공이 결연히 의론하여 아뢰기를, “왜적의 형세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명나라는 부모 같은 나라입니다. 반드시 서쪽으로 가서 다급함을 고해야 비로소 길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옳게 여겼다. 그리고 상이 하교하기를, “사태가 급박하니, 국본(國本)을 책봉하는 것이 좋겠다. 일의 감독을 맡기기에 누가 괜찮은가?” 하였다. 이때 곤전(坤殿)에게 아직 왕자가 없어서 공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이것은 신하가 참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성상의 생각에 달렸습니다. 바라건대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하자, 상이 곧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광해군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백관이 절하고 하례하자마자, 왜적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튿날 새벽에 상이 서쪽으로 길을 나서자, 공은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따라갔다. 이때가 되어 뱀이나 돼지 같은 왜적이 치달려 오는데 그 칼날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민심이 공을 믿어주었으므로 창졸간에 큰 계획을 정하였다. 그리고 장차 명나라 조정으로 달려가 하소연하고자 하여 개성에 이르렀을 때, 당인들이 틈을 타 독기를 드러내려 하고 양사(兩司)가 공이 맨 먼저 빈(邠) 땅을 떠날 것을 외친 일로 탄핵하며 유 문충(柳文忠 유성룡)과 함께 파직시키자, 공은 백의(白衣)로 어가를 호종하였다.
평양에 도착하여 또 무거운 형률을 청하자, 상이 어쩔 수 없이 평해군(平海郡)에 부처(付處)할 것을 명하고 공을 불러 보며 유시하기를, “중론(衆論)이 매우 어지럽고 이견을 조절할 겨를이 없다. 아, 경은 조금 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을미년(1595)에 정약포 탁(鄭藥圃琢)이 상신으로서 상에게 아뢰기를, “임진년 난리에 행조(行朝)가 명나라에 매우 가까이 다가가서 잇따라 구원병을 요청하고 황제의 위엄에 의지하여 서울을 회복했는데, 이것은 실로 이산해가 여러 사람의 시끄러운 비난을 돌아보지 않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큰 계획을 정한 덕분입니다. 지금에 와서 나라를 그르쳤다고 논하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산해가 아니었으면 나는 회제(懷帝), 민제(愍帝), 휘종(徽宗), 흠종(欽宗)처럼 된 지 오래일 것이다.” 하고, 공이 석방되어 돌아오자 드디어 영돈녕부사에 제수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제학을 겸대하게 한 것은 상의 특지(特旨) 때문이었다.
공이 조정에 들어가서 “나라를 회복하는 계책은 인심을 수습하는 데 달렸고 인심을 수습하는 것은 억울한 옥사를 급히 신원하는 것만 한 것이 없다.”라고 맨 먼저 말하고, 영의정 서애(西厓) 유공(柳公 유성룡)과 좌의정 두암(斗巖) 김공(金公 김응남)이 이어서 진달한 것도 공이 말한 것과 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공이 조정에 돌아와서 힘쓴 것이 많다고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다시 움직였다. 이 당시 사람들은 모두 강화(講和)와 기미(羈縻)를 주장했는데, 공은 ‘오늘날의 형세는 임진년과는 다르다. 만약 도성을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일을 어찌할 수 없으니, 전쟁에 전념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여겼다.
이윽고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격퇴하여, 공이 명을 받들고 수안(遂安)의 행궁으로 가서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돌아왔다. 명나라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를 참소하고 모함하여 황제에게 보고하여, 상이 장차 사신을 보내어 무고를 변론하려고 했는데, 대사간 남이공(南以恭)이 서애옹이 사신으로 갈 것을 자청하지 않는다고 탄핵하여 마침내 서애옹이 파면되어 남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공은 세도(世道)가 더욱 험악해지고 인심이 쉽게 미혹되는 것을 탄식했는데, 당시 선비들의 공론은 도리어 공이 그 일에 참여한 것으로 의심하여 공을 매우 책망했으나 공은 묵묵히 뜻을 지키며 어떠한 기미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기해년(1599) 겨울에 영의정에 거듭 제수되었다. 이때 홍여순(洪汝諄)이 심하게 권세를 부리고 아첨을 떨며 공에게 같은 반열에 올려 줄 것을 바랐으나 공이 그의 간사함을 미워하여 끝내 정승으로 선발하지 않자 홍여순이 크게 원한을 품고 변고를 고발하며 공을 모함하려 하였다. 상이 공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을 통촉하고 단지 공을 파직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신축년(1601)에 순서에 따라 추부(樞府 중추부)에 제수되고 예전처럼 부원군을 겸대하였다. 공이 강촌에서 문을 닫고 지내며 늙은 농부나 시골 노인과 서로 안부를 물으며 사니, 사람들은 공이 귀인(貴人)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무신년(1608)에 공은 70세가 되어, 누차 소를 올려 퇴직을 윤허해 줄 것을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소를 올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모략으로 동궁(東宮)을 위험에 빠뜨린 죄를 논하여 조정의 의론이 서로 옥신각신하였다. 공이 아들을 영남으로 보내어 정인홍과 서로 내통했다는 말이 나도는 데에 이르러서는 화의 조짐이 머지않아 급박해지려 했는데, 공이 태연히 동요하지 않고 대문을 닫고서 마당도 쓸지 않으니, 문생과 옛 부하 들도 공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오직 백사白沙 이공(李公 이항복(李恒福))이 분명하게 말하기를, “공이 유성룡을 구원하지 않은 적은 있으나 유성룡을 죽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였는데, 이것은 천고의 공안(公案)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해에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공은 세상에 없는 지우(知遇)를 입었기에 달을 넘기며 통곡하여 정신과 기력이 점점 위태롭게 이어졌는데, 둘째 손자 한림(翰林) 구(久)가 다음 해인 기유년(1609, 광해군1) 봄에 불행히 일찍 죽어 공이 날로 상심하여 병이 더욱 위독해졌다. 내의원과 승지가 안부를 전하느라 길을 왔다 갔다 하였으나, 결국 이해 8월 23일에 서울의 세 들어 살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큰 별이 낮에 떨어져 광선이 땅을 비췄다. 서울 사람들이 분주히 서로 전하며 놀라 허둥거렸다. 11월에 예산현(禮山縣) 동쪽 대지동(大枝洞) 간향(艮向)을 등진 언덕에 예장(禮葬)하고 부인을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공은 조정에 선 40여 년 동안 재능과 지혜로 남을 앞지른 적이 없었고, 말은 더듬는 듯하나 운치가 온화하고, 행동은 굼뜬 듯하나 온화한 기운이 차서 넘쳤다. 공은 조정에 나아갈 때마다 높은 관을 쓰고 큰 띠를 둘렀는데, 바라보면 마치 신인(神人) 같고, 신발을 신고 걸어갈 때는 땅에서 몇 치 떠서 허공을 걷는 듯하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공이 어릴 적에 토정공이 공의 자질이 아름다운 것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만약 이 아이로 하여금 배워서 확충하게 한다면 곧 상지(上智)에 버금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였다. 성암공이 일찍이 생각을 깊이 간직하고 자신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타일렀는데, 공은 가정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평소 온순하고 공손하며 신중하고 중후하였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큰일에 임하여 큰 문제를 결정할 때면 은연중에 ‘천만 명이라도 나는 대적할 것이다.’라는 뜻이 있었다. 두암이 공을 칭찬하기를, “지극히 부드러운 가운데 지극히 강한 기운을 쌓았으니, 다른 사람이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저 조정의 논의가 어그러지고부터 공이 늘 말하기를,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반드시 이것에 기인할 것이다. 기축년(1589, 선조22) 이전에는 동인이 반드시 다 옳지는 않았고, 기축년 이후에는 서인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며, 이것을 사람들에게 고하고 조정에서 주장하니, 한 줄기 맑은 의론이 이에 힘입어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공이 살아서는 시기를 당하고 죽어서는 모함을 당한 것도 애당초 이 말에서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공은 평소 집안 살림을 알지 못하였으며, 일찍이 기와 한 장 덮을 집이나 한 두둑 밭도 마련하려 한 적이 없었다. 셋집에서 살 때는 자리에 온전한 방석이 없어서 손님이 오면 언치를 깔아 주기도 하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방석으로 새는 곳을 덮기도 하였다. 아들 석루공(石樓公 이경전(李慶全))이 공이 노년에 기거를 쾌적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간소하게 집 한 채를 지으려고 했으나, 공이 말하기를, “하지 마라. 이렇게 살며 나의 본성을 온전히 하겠다.” 하였다.
공은 나랏일을 내려놓고 한가로이 거처할 때는 필마를 타고 종 하나를 데리고 산수 간을 오가며 세상 밖에서 담박하게 지냈으며, 흥을 풀 때는 번번이 회포가 시에 드러날 뿐이었다. 글을 읽을 때에는 열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리면서도 잊어버린 것이 없었으며, 또한 소리를 내어 읽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명나라의 경리(經理)가 왜적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와서 수레가 나라 안에 가득했을 때 장관이나 병졸조차도 말하기를, “외국의 삼(蔘)과 초피(貂皮)가 보배가 아니라 이 상공의 시문을 얻으면 그 보배로움이 백패(百貝)와 같을 뿐만이 아니다.” 하였다.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이 또한 말하기를, “공의 시문은 비유하자면 공중에 지어 놓은 누각(樓閣)과 같고 천성에서 나온 것이니 만약 착실하게 글을 읽었다면 그저 그런 하찮은 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였다. 평소 저술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병화(兵火)에 다 잃어버려 몇 권만이 세상에 전한다.
공은 일찍이 제갈량(諸葛亮)이 “신이 죽은 후에 곡식 창고에 남는 곡식이 있고 재물 창고에 남는 비단이 있게 하여 폐하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말을 외우며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이렇게만 해도 족하다.”
하였는데, 세상을 떠난 날에 집에 곡식이 한두 섬도 없어서 나라와 이웃이 준 부의(賻儀)를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염습하고 관을 만들었다.
아, 붕당이 생긴 이래로 비방과 칭찬은 모두 증오와 애정에서 나와서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나, 이른바 야승(野乘)과 패설(稗說)이 그대로 따라 서술하거나 입방아를 찧으며 진실을 미혹시켜 온 세상에 퍼뜨리니, 믿을 만한 역사 같았다. 공이 김공량과 손잡았다는 것으로 말하면, 기축옥사를 주도한 자는 당여가 몹시 많고 공을 매우 원수로 여겼으나 공에 대한 선조의 예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어 공을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이에 음흉한 사람과 내통했다는 밝히기 어려운 말로 공을 모독했음을 누가 모르겠는가. 공이 “하늘이 버릴 것이다. 하늘이 버릴 것이다.”라는 말로 평상시 거처할 때에 스스로 맹세한 것은 자기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남이공이 유 문충을 탄핵한 일로 말하면, 이 일이 어찌 공과 관계되겠는가. 설령 공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남이공도 어찌 남의 지시를 받아서 탄핵을 한단 말인가.
선조께서 승하하신 것은 무신년(1608)이고 공이 사망한 것은 기유년(1609)이나 공이 6개월을 병석에 있는 동안 입으로 말하지 못한 것은 한음공이 지은 공의 묘지명에 분명하게 실려 있다. 그런데도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공이 무함한 기록이다.”라고 말하며 이 말을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올리기까지 하였다. 《국조보감》이 얼마나 막중한 책인데 이러한 거짓말로 위로는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는 한 세상을 그릇된 길로 이끌었으니, 개탄스럽다. 그러나 영조께서 이미 공이 국조의 명인임을 알았으니, 밖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오로지 사사로이 미워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공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한스러운 것은, 공으로 하여금 의주(義州)에서 임금을 모시게 하고 서애, 백사(白沙) 등 여러 공이 그 외교력을 발휘하여 적을 막은 것을 명나라로부터 중시받게 했다면 반드시 크게 볼만한 점이 있었을 텐데 도리어 공은 동해의 바닷가에서 죄수로서 갇혀 있느라 계책을 하나도 내지 못했으니, 당론이 나라를 해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부인 조씨(趙氏)는 좌참찬 조언수(趙彦秀)의 따님이다. 공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 한 번도 사사로운 일로 공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 몸종이 어떤 사람이 준 선물을 받아 몰래 전달한 일이 있었는데, 부인이 발끈 성을 내며 말하기를,
“내가 늙었구나. 이런 말이 어찌 귀에 들어온단 말이냐.”
하고, 편지를 불사르고 몸종의 볼기를 쳤다. 부인은 살림이 빈한했으나 베풀기를 좋아하여, 녹봉이 대문에 들어오면 자루를 쥔 사람들이 서로 이어 들어왔다. 제사 때는 반드시 음식을 손수 하며 추위와 더위를 따지지 않았고, 자제들이 딸이나 며느리를 시켜 노고를 대신하게 할 것을 청하면, 말하기를,
“내가 음식을 하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스스로 정성을 다하는 것이니 해될 것이 없다.”
하였다.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4남 4녀를 두었다. 장남 경백(慶伯)은 19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알성시 문과에 뽑혀 남상(南床)의 극선(極選)에 들었으나 불행히 요절하였다. 둘째 아들 경전(慶全)은 좌참찬을 지내고 한평군(韓平君)을 습봉(襲封)하였으며 호는 석루(石樓)이다. 셋째 아들 경신(慶伸)은 성균 진사이다. 넷째 아들 경유(慶愈)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 큰딸은 홍문관 교리 이상홍(李尙弘)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에게 시집갔는데, 임진년 난리에 절개를 지키다가 죽어 정려(旌閭)를 하사받았다. 셋째 딸은 헌납 유성(柳惺)에게 시집가고, 넷째 딸은 참판 안응형(安應亨)에게 시집갔다.
경전은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후(厚)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을 지냈다. 둘째 아들 구(久)는 18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의 초시와 회시에 장원하고 20세에 문과에 장원하여 천거로 한림이 되었으나 형 후와 모두 일찍 요절하였다. 셋째 아들 부(阜)는 성균 진사이다. 넷째 아들 유(卣)는 문사(文詞)를 잘했으나 어린 나이에 죽었다. 다섯째 아들 무(袤)는 예조 판서를 지냈고 호는 과암(果菴)이다. 딸은 이조 참판 조수익(趙壽益)에게 시집갔다. 경신은 1녀를 두었는데, 그 딸은 이탁(李琢)에게 시집갔고, 우(佑)라는 서자를 두었는데 그는 이괄(李适)의 난리를 만나 인성군(寅城君)에 봉해졌다. 이상홍은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이지화(李志和)는 익위 사어(翊衛司禦)이고, 차남 이지천(李志賤)은 한성부 좌윤이며, 큰딸은 지평 임숙영(任叔英)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현령 최행(崔行)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진사 정시망(鄭時望)에게 시집갔다. 이덕형은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여규(李如圭)는 판결사(判決事)이고, 둘째 아들 이여벽(李如璧)은 현감이고, 셋째 아들 이여황(李如璜)은 승지이며, 딸은 부사 정기숭(鄭基崇)에게 시집갔다. 유성의 아들은 유정헌(柳廷憲)이고, 딸은 배시중(裵時中)에게 시집갔다. 안응형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안헌규(安獻規)는 좌랑이고, 둘째 아들 안헌징(安獻徵)은 감사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입신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손들은 다음과 같다. 증손 인빈(寅賓)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서 그쳤다. 현손 중에 동근(東根)은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사서를 지냈고, 운근(雲根)은 현감을 지냈고, 석근(石根)은 감역(監役)을 지냈고, 효근(孝根)은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를 지내고 정언에서 그쳤으며, 도근(道根)은 교관을 지냈다. 5대손 중에 덕운(德運)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를 지내고 정랑에서 그쳤으며, 서손인 재운(載運)은 참봉이다. 6대손 건(謇)은 참봉이다. 7대손 중에 수일(秀逸)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를 지냈고, 수하(秀夏)는 문과에 급제한 전(前) 한성부 좌윤이고, 봉서(鳳舒)는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都事)를 지냈다. 8대손 중에 경명(景溟)은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홍문관을 거친 전 승지이고, 주명(柱溟)은 전 도사이다. 지금 명(銘)을 부탁하는 사람은 정명(鼎溟)이다. 나는 감히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비 내리고 구름 피어오르니 雨降雲出
하늘이 동방을 돌아보셨네 天眷于東
가정과 목은 신비롭게도 稼牧有鬼
신동을 안아 보냈네 抱送神童
일찌감치 조정에 이름 알려져 蚤揚于廷
광채가 임금을 감동시켰네 彩動人主
홍문관과 독서당을 玉署湖堂
편안히 가볍게 올랐네 晏晏平步
승진하여 전형을 잡고 晉秉銓衡
뜻을 펼치기 시작했네 方始展布
맑은 감식안 거울 걸어 놓은 듯하여 淸鑑懸鏡
많은 인재들 물고기 뛰듯 하였네 群才躍鱗
화곤이 하늘에서 내려오길 華衮天降
대문에 참새 그물 칠 만하다 하니 羅雀之門
경은 오직 나를 도우라 卿惟相予
시내 건너는 배의 노로 삼으리라 했네 俾楫于川
나라에 재난이 닥쳤을 때는 國有危難
공의 계책에 힘입었네 所賴公策
우리 종묘와 사직의 신주 받들고 奉我廟社
대동강을 건넜네 浿江之涉
공의 과단성이 아니었다면 微公果斷
나라가 어떻게 나라 꼴 되었으랴 國奚以國
당인들이 망극하게도 黨人罔極
기미를 타고 독을 쏘았네 乘機虺毒
회제, 민제, 휘종, 흠종처럼 되었으리라 懷愍徽欽
성상의 유지 명확하였네 聖諭明晰
공은 바닷가에서 돌아오고부터는 公歸自海
황각에서 흰 수염 드리웠네 皓鬚黃閣
옥사의 남발을 통렬히 말하니 痛說獄濫
저들이 원수처럼 보았네 彼哉仇視
간사한 주둥이로 없는 일을 날조하며 奸喙捏無
무슨 일이든 하지 않는 것이 없었네 何所不至
백 년 후에 百年之後
영조께서 밝은 지혜로 보시니 英考聖明
무함이 만대에 사라지고 誣消萬代
영광이 구경에 미쳤네 榮及九京
사람들이여, 못 믿겠거든 人如不信
내가 새긴 비명을 보라 視我刻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