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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잡록(嶺南雜錄)
임인년(1662, 현종3) 2월 18일 내가 현풍(玄風)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들으니 현풍의 선비인 곽태재(郭泰載)는 바로 존재(存齋) 곽준(郭䞭)의 양증손(養曾孫)으로 고요함을 지키며 책을 읽는다고 하였다. 고을 사람에게 물었더니, 진휼감관(賑恤監官)이 뽑은 유사(有司) 중에 곽태형(郭泰亨)이라는 자가 있는데, 바로 곽태재의 형이라고 하였다. 내가 곽태형으로 하여금 곽태재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내 장차 지나는 길에 찾아보겠다.” 하고, 19일에 10여 리쯤 가서 곽태재의 집을 찾아 들어가니, 태원(泰元)ㆍ태형ㆍ태재ㆍ태도(泰道) 네 형제가 나와서 만나 보았다. 태원이 몇 그릇의 음식을 장만하여 술을 몇 순배 돌리고는 자리를 파하였다.
태재는 외모가 야위어서 파리하니 참으로 이른바 산택(山澤)의 구선(癯仙)으로 언어와 기상이 자못 안정되고 자상하여 고요히 수양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태원은 말하는 것이 대부분 경솔하여 들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도내(道內)의 인재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소자(邵子)가 이르기를 ‘한 사람의 출생이 천만 인의 출생에 해당하는 것이 성인(聖人)이다.’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천만 인의 지혜를 모아야 성인을 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도가 날로 나빠져서 인재가 날로 줄어드니, 한 사람의 출생이 수십 명의 출생에 해당하는 자도 적습니다. 만일 조정에서 인재를 거두어 쓰고자 한다면 오직 여러 사람을 널리 거두어서 여러 사람의 지혜를 널리 채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니, 여러 사람 가운데에 특별히 재주가 뛰어난 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나는 인하여 태재에게 이르기를 “내 들으니 존장께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독실히 하여 옛 성현의 책을 오로지 공부한다고 하니, 반드시 드러내어 저술하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연히 만나 서로 허여하였으니, 소원하다고 자처할 수 없기에 감히 저술을 한번 보기를 원합니다.” 하니, 태재는 굳이 사양하고 내놓지 않다가 마침내 《곽존재유사(郭存齋遺事)》 한 권을 내놓았는데, 당시 유명한 사람들이 혹은 제문을 짓고 혹은 비갈을 지어서 칭찬함이 매우 성대하였다.
태원이 말하기를 “존재께서 평소에 저술하신 것이 많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을 만나 순절(殉節)하실 때 병화(兵火)에 다 없어졌고, 유시(遺詩) 3수(首)도 다른 사람의 집에서 얻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제목에 모두 “남의 시운에 차운한 것이다.” 하였는데, 첫째 수에는 “지극한 이치 예로부터 번거롭지 않으니, 서각의 번거롭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것과 일반이네. 주소(注疏) 다는 사람들이 만일 귀취를 밝히지 않았다면, 후학들이 어떻게 성인의 말씀을 알겠는가.〔至理從來不待繁 一般西覺厭煩喧 疏家儻未明歸趣 後學何由透聖言〕” 하였고, 둘째 수에는 “묘당에서 평소 경륜을 강하였는데, 오늘날 남자 대장부 몇 사람이나 있는가. 창해에 피가 흘러 피비린내 땅에 가득하니, 헤어질 때 서로 권면함은 살신성인에 있다오.〔廟堂平昔講經綸 此日男兒有幾人 滄海血流腥滿地 臨分相勉在成仁〕” 하였으며, 셋째 수에는 “작별한 뒤 전란에 막혔으니, 어떻게 좋은 소식 물을 수 있겠는가. 행하고 감춤 홀로 의지하는 곳에, 모름지기 세한의 마음 기억해야 하네.〔別後干戈阻 何由問好音 行藏獨倚處 須記歲寒心〕” 하였다. 아래의 두 시를 보면 가슴속에 일찍부터 한 번 죽을 각오를 품었음을 알 수 있으니, 구차히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진실로 실천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내가 또 태재에게 묻기를 “조정에서 백성들의 일을 걱정하여 어사(御史)를 내려 보내기까지 하였으나 나는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서 이처럼 막중한 임무를 맡았고 또 본도의 물정과 사세를 잘 알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도내의 사람들은 조정에서 어사를 내려 보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자기들끼리 미리 의논하여 ‘어사가 이렇게 하면 좋을 것이요,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하니, 이른바 ‘이렇게 하면 좋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의논을 듣기 원합니다.” 하였더니, 태재가 말하기를 “도내에 거듭 흉년이 들어서 공사 간에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백성들의 목숨이 그나마 붙어 있는 것은 또한 조정과 본현(本縣)의 수령이 걱정하고 염려하여 어루만져 준 덕분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곡식이 다 떨어져서 계속 댈 수 없을 것이니, 어사께서 만약 성상의 뜻을 펴서 굶주린 백성들이 비록 죽음에 이르러도 원망하지 않게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곡식을 수송하여 옮겨서 없는 것을 있게 만들고 남는 것을 미루어 부족한 곳에 보충하는 것으로 말하면 어사께서 반드시 평소 정하신 계책이 있을 것이니, 초야에 엎드려 있는 이 사람이 어찌 감히 알겠습니까.” 하였다.
진주(晉州)에 이르러 의흥 현감(義興縣監) 하홍도(河弘度)가 덕천(德川)에 있는 조남명(曺南冥)의 서원(書院) 아래 20여 리쯤 되는 곳에 산다는 말을 듣고 만나 보고자 하였다. 3월 1일 저녁밥을 먹은 뒤에 하 의흥의 집에 이르니, 하공(河公)이 나와서 맞이하여 앉았는데 눈썹이 길고 머리가 희어서 자못 예스럽고 질박하며 진실한 풍모가 있었다. 내가 인하여 백성들을 구휼할 때에 행할 만한 계책을 물으니 모른다고 사양하였으며, 이 지방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고을 사람들이 딴 소원은 없고 다만 조정에서 기개와 힘이 있는 암행어사를 자주 보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이 편리하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만약 대동법을 시행하면 모든 물건을 다 무역해야 하고 무역을 하려면 관리들에게 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 사이에 반드시 백성들을 침책(侵責)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백성들이 반드시 더욱 곤궁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서 그가 저술한 글을 보여 줄 것을 청하였더니, 본주(本州)의 목사(牧使)인 조석윤(趙錫胤)의 비문과 〈계서모에 대하여 상복을 입을 것인가 입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분별함〔繼庶母中服喪不服喪辨〕〉이라는 글을 보여 주었다.
또 조정의 득실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간의 모든 일을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듣고 알겠습니까. 다만 듣자니 근일에 역법(曆法)이 잘못되어서 오랑캐들의 요망한 방법을 가지고 만고에 변함없이 행해 오던 규정을 폐지한다고 하니, 이것이 가탄스럽습니다. 무릇 24절기는 으레 차차로 점점 줄어들어서 윤달에 이르는데, 지금 시헌력(時憲曆)은 24절기가 혹은 이르기도 하고 혹은 늦기도 하니, 결코 옛 법이 아닙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소생도 이 역법에 관해 들었는데 절후를 헤아리는 데에 십분 마땅한지는 모르겠으나 또한 원래 의의가 없지 않습니다. 춘분부터 추분 때까지는 태양의 궤도가 북쪽에 가까워지므로 아래에서 보면 도수(度數)가 점점 넓어지고, 추분부터 춘분 때까지는 태양의 궤도가 점차 남쪽에 가까워지므로 아래에서 보면 도수가 좁아집니다. 비록 24방위가 각각 제자리가 있으나 천체가 둥근데 태양이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낮의 길이가 이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요, 절기가 혹 이르기도 하고 혹 늦기도 하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헌력의 역법은 춘분부터 추분 때까지는 절기가 또한 길고 추분부터 춘분 때까지는 절기가 또한 짧습니다. 그러나 하지와 동지에 이르러서는 옛 책력과 지금 책력이 일찍이 한 번도 차이가 없으니, 어른께서는 이것을 세세히 상고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하공이 말하기를 “나는 역법을 아는 자가 아니요, 다만 《서경(書經)》〈요전(堯典)〉의 주석을 보고서 절기가 점점 늦어져 윤달을 이룬다는 것을 평소에 알고 있었는데, 지금 새 책력을 보니 예전에 들었던 것과 다르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하공은 자못 순후하고 근신하며 책을 읽은 사람이었으나 등용할 만한 재주는 없는 듯하였고, 또 이미 늙고 병들어 세상에 쓰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깊이 은둔하여 자기 몸을 닦아 후진들을 가르쳐서 좌우에 늘어서 모시고 있음에 엄연한 기상이 있으니, 또한 존경할 만하였다. 내가 도내의 인재 중에 등용할 만한 자를 물으니, 합천(陜川)의 선비 배일장(裵一長)과 덕천서원(德川書院) 아래에 사는 박만(朴曼)과 초계(草溪)에 사는 전 현감 권극경(權克敬)과 고성(固城)에 사는 전 감찰 이덕구(李德耈)를 천거하였는데, 배일장과 박만은 학행(學行)으로, 권극경은 관리로서의 재간으로, 이덕구는 정직한 도로 천거하였다.
안동(安東)에 이르러 수동(壽洞)에 사는 정생 시식(丁生時栻)의 집에 가서 유숙하였는데, 정생이 말하기를 “이 마을은 산세가 두루 감싸고 있고 큰 내가 앞으로 돌아 흘러가서 매우 유명한 마을입니다. 임진년(1592, 선조25)과 정묘년(1627, 인조5) 사이에 명나라 장수가 왔었는데, 이곳에 이르러 묻기를 ‘이곳에는 천하의 유명한 사람이 나왔을 것이니, 일찍이 이전에 어떠한 사람이 이곳에 살았는가?’ 하므로 고을 사람들이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명나라 장수가 말하기를 ‘이는 한 나라의 유명한 사람이요 천하에 이름난 자가 아니니, 또 어떠한 사람이 있는가?’ 하였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이 밖에는 공업(功業)과 명성이 상락공보다 더한 자가 없습니다.’ 하니, 명나라 장수가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물화천보(物華天寶)도 인걸지령(人傑地靈)에 해당할 수 있으니, 이 지역의 기이한 보물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고을 사람이 대답하기를 ‘이 지방 사람들은 용문석(龍文席)을 잘 짜서 온 나라의 최고이고 매년 또한 명나라 조정에도 진상으로 바치니, 이것이 또한 지리(地理)에 응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명나라 장수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그러하다. 무릇 천하에 유명한 물건이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산천이 맑고 고움은 이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그 말이 지극히 해학적이고 허탄(虛誕)하나 이것을 기록하여 애오라지 신기한 소문을 널리 전하는 바이다.
정생은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석유황(石硫黃)은 모래흙이 섞여서 사용할 수 없으나 만약 쇠고기나 돼지고기 등의 기름을 섞어서 녹이면 찌꺼기를 제거할 수 있는데, 시험해 보니 참으로 좋았습니다.” 하였는바, 유황은 바로 군수 물품 중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외국에서 사들여 매년 부족함을 염려하는데, 이 말이 과연 맞는다면 무비(武備)를 맡은 자에게 들려줄 만하다.
영천(榮川)에 이르렀다. 예전에 들으니, 본군(本郡)의 자민루(字民樓) 아래에 김생(金生)이 쓴 백월서운탑비(白月棲雲塔碑)가 있다고 하였는데, 찾아가 보니 비석은 아직 완전하였으나 비석에 새긴 글자의 획이 닳아 이지러져서 탁본(拓本)을 할 수가 없었다. 비석 옆에 새겨진 소지(小誌)가 있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 김생의 필적을 비해당(匪懈堂)의 집고첩(集古帖)에서 보고는 용이 꿈틀거리고 범이 누워 있는 듯한 기세를 좋아하였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많지 않음을 한스러워하였다. 영천에 와서 들으니 이웃 고을인 봉화현(奉化縣)에 한 비석이 옛 사찰 터에 홀로 남아 있는데 김생의 글씨라 하였다. 나는 세상에 드문 귀한 보물이 잡초 사이에 매몰되어 있는데 거두어 보호하는 사람이 없음을 애석해하고, 들소가 뿔로 비비고 목동들이 부싯돌로 쓸까 모두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인 전 참봉 권현손(權賢孫)과 함께 상의하고 이 비석을 옮겨다가 자민루 아래에 안치한 다음 난간을 둘러치고 문을 단단히 해 달아서 만약 탁본하는 사람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게 하니, 이는 함부로 범하고 손을 댈까 염려해서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생의 필적이 세상에 널리 전해져서 진신 사대부(搢紳士大夫)로서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다투어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천백 년 동안 황폐한 골짝에 버려졌던 비석이 하루아침에 큰 집으로 옮겨져서 세상의 보배로 여겨지게 되었으니, 물건이 드러나고 숨음은 또한 운수가 있는가 보다. 내 비록 재능이 부족하여 창려(昌黎)의 박아(博雅)함에는 미치지 못하나 이 물건이 감상할 줄 아는 자를 만남은 진실로 기산(岐山)의 석고(石鼓)와 다르지 않으니, 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정덕(正德) 4년(1509, 중종4) 가을 8월에 군수인 낙서(洛西) 이항(李沆)이 기록하고 박눌(朴訥)이 쓰다.” 하였다.
내가 보건대 이 비석은 매우 두꺼워 후면에 새긴 글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비를 뒤집게 하여 보니, “신라국(新羅國) 석남사(石南寺) 고(故) 국사(國師) 비명(碑銘)”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후기(後記)에는 “문하법손(門下法孫) 석 순백(釋純白)이 짓다.”라고 하였고, 끝부분에는 큰 글씨로 “현덕(顯德) 원년(954, 광종5) 갑인 7월 15일에 세우다.”라고 쓰여 있었으니, 글자의 체가 김생의 글씨와 매우 닮았으나 치밀함은 미치지 못하였다. 또 아랫면은 오랫동안 축축한 땅기운을 받아 글자의 획이 더욱 심하게 망가져 없어져서 중간에는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많이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진년(1592, 선조25)과 정묘년(1627, 인조5) 사이에 중국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밤낮으로 탁본을 한 것이 거의 수천 본(本)이었는데, 이때 날씨가 추워 먹물이 얼었기 때문에 이글거리는 숯불을 가해서 이로 인해 비석이 많이 손상되었습니다. 그 후 명나라 사신인 웅화(熊化)가 왔을 때에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어 백월비(白月碑)의 탁본을 청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비석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여 다시 명나라 사신에게 물어서 비로소 비석이 있는 곳을 알고는 별도로 차임한 관원을 보내어 비석을 탁본하여 주었습니다.”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 벌이기를 좋아하지 않고 옛것을 좋아하지 않음이 심하다고 이를 만하다.
아, 이른바 낭공대사(朗空大師)가 어떠한 불자(佛子)인지 알 수 없으나 마침내 김생의 글씨에 의탁해서 비문이 먼 후세에 전해져 지금에 이르고, 또 이것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천하에 유명한 보물이 되었으니, 무릇 사람들 중에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자는 의탁하는 바를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양수(歐陽脩)의 이른바 “부도(浮屠)와 노자(老子)의 허망한 말을 다만 자획의 공교함 때문에 차마 대번에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또 생각건대 안동의 용문석(龍文席)도 오히려 산천의 깨끗한 기운을 독차지하였으니, 지금 이 한 조각의 돌이 무지하여 말이 없어서 음성과 색깔과 냄새와 맛의 즐거워할 만함을 알지 못하나 그 광채와 값어치의 귀중함이 용문석보다 백배나 더할 뿐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는 흘러가는 물과 우뚝 솟은 산에 아름다운 기운이 충만하니, 또한 여기에 정기가 모여서 다시 인걸을 잉태하여 세상의 상서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쩌면 이리도 인물이 나오지 아니하여 조용하단 말인가.
또 이공李公이 기록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는 지붕과 깊은 추녀가 있어 잘 보존하였다고 이를 만하나 지금은 쥐구멍 가운데에 버려져 있어서 이른바 난간과 문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리하여 비석을 망가뜨리는 일이 목동들이 부싯돌로 삼고 소들이 뿔로 비비는 것보다 도리어 심하니, 손을 대어 어루만지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회를 일으키게 한다.
그 후 성주(星州)에 이르러서 목사 윤형각(尹衡覺)과 백월비의 일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윤 목사가 말하기를 “아무개가 일찍이 영천 군수가 되었을 때에 친구 중에 백월비를 탁본하여 보내 달라고 청하는 이가 많아지자, 고을의 병폐가 됨을 분하게 여겨서 마침내 비석이 서 있던 곳을 마구간으로 만들고 말똥과 거름을 가득 쌓아 파묻히게 해서 사람들이 손을 대어 탁본할 수 없게 하였으니, 비석이 많이 망가지고 난간이 모두 훼손된 것이 그때에 있었다.” 하였다.
또 이와 비슷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윤 목사가 일찍이 양양 부사(襄陽府使)가 되었을 때에 한석봉(韓石峰)과 안평대군(安平大君) 등 여러 사람의 글씨를 구하고 또 선조대왕의 어필(御筆)을 얻고는 목수에게 명하여 나무에 판각해 두었는데, 윤 목사가 체직되어 돌아온 뒤에 신임 부사가 부임한 초기에 즉시 아전으로 하여금 판각한 나무를 가져다가 뜰 가운데 쌓아 놓고는 도끼로 패어 불을 지르게 하였다. 좌수(座首)가 나아가서 절하고 또 청하기를 “성주(城主)께서는 반드시 탁본해 달라고 청탁하는 일이 많음을 고통스럽게 여겨서 이처럼 불태우려는 거조가 있으신 것이니, 병폐를 줄이는 방도로는 실로 합당하나 이 가운데 한 판자는 바로 선조대왕의 어필인데, 또한 도끼로 패고 불태우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제가 가져다가 민가에 두어서 관청에 폐해를 끼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부사가 대답하기를 “과연 어필이라면 불태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창고 속의 지배(地排) 아래에 갖다 두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꺼낼 수 없게 하고, 또 속히 썩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인정이 괴벽하고 이상함이 마침내 이와 같은 자가 있으니, 내가 이 말을 들으매 그 사람의 지혜롭고 어리석음, 어질고 불초함은 굳이 많은 말을 할 것이 없으나 객지에서 한 번 듣고 웃어넘기는 이야깃거리로 삼기에 충분하다. 또 생각건대 장의(張儀)가 초(楚)나라 정승에게 볼기를 맞고 범수(范睢)가 위제(魏齊)에게 갈빗대가 부러지고 손자(孫子)가 방연(龐涓)에게 다리를 잘렸으니,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물건이야 어찌 한탄할 것이 있겠는가. 소릉(昭陵)의 난정첩(蘭亭帖)은 온도(溫韜)에게 서축(書軸)이 훼손되었고 광명(廣明)의 보살상(菩薩像)은 황소(黃巢)의 난리에 불태워졌으나 후세 사람들이 오히려 전하여 감상해서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신묘한 보물은 본래 귀신이 꾸짖어 보호하는 것이다. 어찌 한때의 인력으로 마멸되어 없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백월비를 위로하는 말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의성(義城)에 이르니, 벽 위에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의 시가 걸려 있었다. 이 시에 이르기를,
문소의 공관 후원이 깊기도 한데 聞韶公舘後園深
그 가운데 백여 척의 높은 누대가 있네 中有危樓高百尺
향기로운 바람 십 리 불어와 주렴을 걷고 香風十里捲珠簾
밝은 달에 한 가락 피리 소리 들려오네 明月一聲飛玉笛
연기 가벼우니 버들그림자 가늘게 서로 이어지고 煙輕柳影細相連
비 개니 산 빛 짙어 뚝뚝 떨어지는 듯하여라 雨霽山光濃欲滴
용황의 팔 부러진 갑지랑이 龍荒折臂甲枝郞
안찰사가 되어 난간에 기대니 더욱 두려워지네 因按憑欄尤可怕
하였으니, 이는 바로 본읍(本邑) 태수의 딸이 광증(狂症)이 나서 시를 외워 세상에 전해지는 것인데, 시구의 말이 깨끗하고 기이하니 참으로 귀신을 감동시킬 만하다.
뒤에 청도군(淸道郡)에 이르니, 고사(古事)를 적은 병풍에 영헌공의 일이 기재되어 있었다. 영헌공이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위하여 북방에 대신 수자리 살러 갔을 때 베고 있던 방패에 한 절구(絶句)를 썼는데,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할 수 있다.〔忠孝可雙全〕”는 시구가 있어 조충(趙冲)에게 칭찬을 받고 발탁되었다가 군대에서 돌아와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다고 하였다. 공의 〈문소각(聞韶閣)〉 시에 이른 바 “용황의 팔 부러진 갑지랑이, 인하여 안찰사가 되어 난간에 기대니 더욱 두렵다.”는 구절은 평소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용황절비(龍荒折臂)’가 수자리 살 때의 일을 가리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갑지랑(甲枝郞)’은 장원랑(狀元郞)이라는 말과 같으며, ‘인안빙란(因按憑欄)’은 본도의 안찰사가 되었기 때문에 와서 이 난간에 기댄 것임을 말한 것이다. 비록 이것이 과연 옳은지는 결코 알 수 없으나 애오라지 기록하여 질문의 자료로 삼는 바이다.
성주(星州)의 선생안(先生案)에 이른바 제말(諸末)이라는 자가 있으므로 윤형성(尹衡聖)에게 물었더니, 이르기를 “병자호란 뒤에 오랫동안 이 지역에 살아서 이 사람에 대한 일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고성(固城)의 상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별안간 나와서 왜적을 공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어서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일컬어졌는바, 명성이 또 그보다 더하였습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본주(本州)의 목사에 제수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서 죽어 공업(功業)이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습니다. 또 왜적과 칼날을 마주하고 대진할 때에 용기백배하여 수염과 귀밑머리가 모두 위로 곤두서서 고슴도치 털처럼 삐죽삐죽하니, 왜적들이 이것을 바라보고 신과 같다며 두려워했습니다.” 하였다.
아! 조정에서는 현재 인재를 찾아내어 방문하라는 명령이 있으나 아직도 내가 책임을 완수하여 성상의 바람에 부응할 만한 인재를 한 사람도 얻지 못하였으니, 오늘날에도 다시 이러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난리 때를 만나 직접 그 재주를 보지 않는다면 내 비록 하루에 열 번이나 이러한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가 간직한 재주가 저와 같음을 알지 못할 것이요, 내 비록 다행히 알아서 조정에 보고한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또한 과연 그러하다는 사실을 믿고 반드시 등용하지는 못하여 틀림없이 끝내 매몰되고 말 것이다. -윤형성은 바로 목사 윤형각(尹衡覺)의 아우이다.-
壬寅二月十八日到玄風。曾聞玄風士人郭泰載。乃郭存齋䞭之養曾孫。守靜讀書云。問諸邑人則賑恤監抄有司中所謂郭泰亨者。乃泰載之兄云。余使泰亨傳言於泰載。將於去路歷見。十九日行十餘里許。歷入郭泰載家。泰元,泰亨,泰載,泰道兄弟四人出見。泰元設食數器。行酒數巡而罷。泰載形容枯槁。眞所謂山澤之癯。而言語氣度。頗安詳。靜修可人也。泰元語多輕颯。無足採者。然余問道內人才誰爲最賢。答曰卲子云一人之生。當千萬人之生者。聖人也。以此言之。合千萬人之智則可以當聖人也。到今世道日降。人才日下。一人之生。當數十人之生者亦少。自朝家如欲收拾人才。唯當廣收諸人。博採衆智可也。至於拔萃出類之才。未之聞也。余仍謂泰載曰聞尊刻意篤志。專業古人之書。必有發爲著述者。傾蓋相許。不可以疏外自居。敢請一見。泰載固辭不出。仍出郭存齋遺事一卷。一時名人。或爲祭文或爲碑碣。稱道甚盛。泰元言存齋平生。多有著述。而臨難死節時。盡逸於兵燹。其遺詩三首。得於他人家云。其題皆云次人韻。一曰至理從來不待繁。一般西覺厭煩喧。疏家儻未明歸趣。後學何由透聖言。二曰廟堂平昔講經綸。此日男兒有幾人。滄海血流腥滿地。臨分相勉在成仁。三曰別後干戈阻。何由問好音。行藏獨倚處。須記歲寒心。觀其下二詩。可知其胸中早辦一死。可謂非苟言之。亦允蹈之者也。余又問泰載曰朝廷憂勞民事。至遣御史。而余以不才。當此重任。且未諳本道物情事勢。未知何以則可。且道內之人。聞朝廷下送御史。則必預自相議曰御史如是則可。如彼則非。所謂如是如彼之論。願得聞之。泰載曰道內荐饑。公私赤立。卽今民命之尙得保存者。亦是朝家及本縣城主軫念撫摩之德也。然念穀物將盡。無可以繼之。御史若宣布德意。使飢民雖至於死亡。不以爲怨則可矣。至於轉移穀物。以無爲有。推羨補不足。御史必有素定之計。草萊跧伏之人。何敢知也。到晉州。聞河義興弘度居在德川曹南冥書院下二十餘里許。欲與相見。三月一日夕後。到河義興家。河公出延而坐。厖眉皓髮。頗有古朴眞實之風。仍問賑恤可行之策則辭不知。問鄕人所欲願者何事。答曰鄕人無他願。唯欲朝廷數遣有風力暗行御史耳。問大同法便否。答曰若行大同。凡物皆當貿易。貿易當使官吏爲之。其間侵責小民之事必多。若然則小民必尤困矣。仍請見所著文字。則出示本州牧使趙錫胤碑文及繼庶母中服喪不服喪辨。且問朝政得失。則云凡世間事。跧伏之人。何能聞何能知。第似聞近日曆法乖錯。以外夷妖誕之法。廢萬古常行之規。是可嘆也。凡二十四氣。例爲次次漸退。以至閏月。而今時憲曆則二十四氣。或進或退。大非古法云。余曰小生亦聞此法。雖未知恰當測候。而亦非元無意義者也。自春分至秋分之間則日輪躔次近北。故自下視之。其度闊遠。自秋分至春分之間則日輪躔次近南。故自下視之。其度狹小。雖二十四方位各有其處。而天形圓而日輪隨之。故日晷長短。以此有異。而節氣之或進或退。亦由於此。是以時憲曆法。自春分至秋分之間。節氣亦長。自秋分至春分之間。節氣亦短。而至於兩至則古曆今曆未嘗有異。未知丈細考及此否。河公曰僕非知曆法。只見堯典注釋。素知節氣漸退而成閏。今見新曆。有駭前聞故云矣。槩觀河公頗淳謹讀書之人。而似無發用之才。且己老病。不堪爲世用。然深藏自修。敎誨後進。左右列侍。有儼然氣象。亦可敬也。余問道內人才可用者。則以陝川士人裴一長。德川書院下居朴㬅。草溪居前縣監權克敬。固城居前監察李德耇爲薦。而裴朴以學行。權以吏才。李以直道云
到安東。往宿壽洞丁生時栻家。丁生云此村山勢周遭。大川前廻。極是名村。壬丁年間。天將出來。來到此處。問曰此地當出天下名人。未知曾前何許人居此地。邑人以上洛公金方慶對。天將曰此一國名人。而非名天下者。更有何人。邑人曰此外未有功業聲名過上洛者。天將曰若然物華天寶。亦足當人傑地靈。未知此地有可稱奇賣否。答曰此地人善織龍文席。一國之最。而每歲亦貢天朝。未知此亦應地理耶。天將嘆曰然。凡物名天下者。非寶而何。山川明麗。以有此故也云。其言極是詼誕。而錄之聊以廣異聞。丁生又云我國所產石硫黃。雜於沙土。不能用。若與牛猪等肉脂。交合鎔化則可以去滓。試之良驗云。硫黃乃軍需最切者。貿於外國。每患不足。此言如其果然。可聞諸掌武備者也。到榮川。舊聞本郡字民樓下。有金生書白月棲雲㙮碑。就見之。碑石猶完而刻畫刓缺。殆不堪模打。碑石旁有刻小誌云余少時得見金生筆迹於匪懈堂集古帖。愛其龍跳虎臥之勢。而傳世恨不多。及來于榮。聞隣邑奉化縣有碑。獨存於古寺之遺墟。金生之書也。余惜希世之至寶埋沒於草莽之間。而無人收護。野牛之礪角。牧童之敲火。咸可慮也。遂與郡人前參奉權賢孫共謀。移轉而安置於字民樓下。繚以欄檻。固其扃戶。苟非打模之人。使不得出入。恐其妄有犯觸也。由是金生之筆迹。廣傳於時。而搢紳好事之徒。爭先賞翫。噫。千百年荒谷之棄石。一朝輸入大廈而爲世所寶。夫物之顯伏。亦有其數歟。余雖才能薄劣。不及昌黎之博雅。此物之遇賞則固不異於岐山之石鼓。夫豈偶然哉。正德四年秋八月。郡守洛西李沆記。朴訥書。余觀其石極厚。後面想必有所刻。使人覆而見之。題云新羅國石南寺故國師碑銘。後記門下法孫釋純白述。末端大書云顯德元年歲在甲寅七月十五日立。字體酷肖金生。而縝密不及。且是下面久當地氣。訛缺益甚。中間多有不可辨志之字。邑子云壬丁年間。唐人來此久留。晝夜模打幾數千本。時當日寒墨凍。故加以熾炭。因此多傷。其後熊天使化之來也。未渡江前。先送人乞白月碑印本。朝中諸人不知碑石在於何處。更問天使。始知所在。別送差官。印出以贈云。東人之不好事不好古。可謂甚矣。嗟乎。所謂朗空大師。不知何許釋子。而乃託金生之字。使其碑文傳諸久遠至今。而且流入中華。爲天下絶寶。凡人之欲傳於後者。顧不可愼所託耶。歐公所謂浮屠老子詭妄之說。特以字畫之工。不忍遽廢者。信然矣。且念安東之龍文席。猶能專山川淸淑之氣。則今此一片石。雖頑然無語。不見聲色臭味之可樂。其光價之貴重。非特百倍過而已。然則此地之流峙扶輿磅礴。其亦鍾精於此。而更不得孕育人傑。爲世之瑞耶。抑何其寥寥也。且觀李公所記則其時蓋覆深簷。可謂至矣。今則委諸鼠壤之中。所謂欄檻扃戶。無復存者。其爲銷鑠。反甚於敲火礪角。著手摩挲。令人興感。後到星州。與尹牧使衡覺語及白月碑事。牧使言某人曾爲榮川守者。以親舊多請印送白月碑。憤其爲邑弊。乃以碑石所置之處爲馬廐。使糞壤堆積。掩埋。人不得下手模打。碑石之多缺。欄檻之盡毀。在於其時云。且有一事與此相類者。牧使曾爲襄陽府使時。求得韓石峯安平諸人書。且得宣廟御筆。命匠梓木以置。遞歸之後。有一府使。於出官之初。卽使吏取刻本板積置庭中。以斧斫之。加之以火。座首進拜。且請曰城主必以印本乞丐之多爲苦。有此焚燒之擧。其在省弊之道。實爲恰當。而其中一板。乃宣廟御筆。亦使斧斫火燒。極似未安。民請取去民家。不貽官中之弊如何。府使曰果是御筆則焚燒未安。置之庫中地排之下。使人不得易出。且使速朽可也云。人情之乖異。乃有如此者。余聞此言。其人之愚智賢不肖。有不足多言。而足爲客中一笑之話柄耳。且念張儀受笞於楚相。范睢折脅於魏齊。孫子臏脚於龎涓。人猶如此。物何足歎。昭陵蘭亭。斷軸於溫韜。廣明菩薩。被燒於黃巢。而後世之人。猶能傳而翫之。不爲泯絶。則物之神寶。自有鬼神之撝呵。豈一時人力所可得磨滅耶。此足爲白月碑慰辭耳。到義城。壁上有英憲公金之岱詩。云聞韶公館後園深。中有危樓高百尺。香風十里捲珠簾。明月一聲飛玉笛。煙輕柳影細相連。雨霽山光濃欲滴。龍荒折臂甲枝郞。因按憑欄尤可怕。此乃本邑太守女子發狂所誦而傳世者。句語淸奇。眞可以動鬼神矣。後到淸道郡。有古事屛載英憲公事。兒時爲父替戍北方。所枕楯鼻題以一絶。有忠孝可雙全之句。爲趙沖所賞。拔軍還。擢科狀元云。公聞韶閣詩所謂龍荒折臂甲枝郞因按憑欄尤可怕者。尋常未解。見此始知龍荒折臂。指征戍時事。甲枝郞。猶言狀元郞。因按憑欄。言因按察本道。來憑此欄也。雖未決知其果然。而聊以記之。以爲質問之資。星州先生案。有所謂諸末者。問諸尹衡聖則云丙子亂後久居此地。聞此人事甚詳。此人乃固城常漢。因壬辰亂。猝起擊賊。所向無前。與郭再佑並稱。而聲名且出其上。朝廷特授本州牧使。未久身死。功業不大顯云。且言當交鋒對壘之際。勇氣軒軒。鬚鬢皆上指如蝟毛之磔。賊人望而畏之如神云。嗟乎。朝廷方有求訪人才之命。而尙不得一人可以塞吾責而應上須者。不知今日更有斯人否。然苟非當亂時自見其才。則余雖一日十遇。無以知其所蘊如彼。余雖幸知而聞諸朝。朝廷亦無以信其果然而必用。其必終於埋沒而已。尹衡聖卽牧使之弟
[주1] 산택(山澤)의 구선(癯仙)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천자에게 아뢰기를 “산택 사이에 거주했다고 전해지는 역대 신선들은 형용이 몹시 파리하니, 이것은 제왕이 바라는 신선이 아닙니다.〔列仙之傳居山澤間 形容甚癯 此非帝王之仙意也〕”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전하여 모습이 깡마른 은자를 가리킨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2] 서각(西覺) : 서역(西域)의 깨달은 자라는 뜻으로, 부처인 석가모니를 이른다. 부처〔佛〕는 원래 깨달음〔覺〕이라는 뜻이라 한다.
[주3] 시헌력(時憲曆) : 태음력의 구법(舊法)에 태양력의 원리를 부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히 계산하여 만든 역법(曆法)이다. 중국 명나라 숭정(崇禎) 초기에 독일의 선교사 아담 샬이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644년(인조22)에 김육(金堉)이 연경에서 들여와서 1653년(효종4)부터 사용하였다.
[주4] 물화천보(物華天寶)도 인걸지령(人傑地靈) : 하늘에서 생산된 보물도 좋은 지기(地氣)를 받고 태어난 인물과 같음을 이른다. 초당 사걸(初唐四傑) 가운데 한 사람인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물건의 정화(精華)는 하늘의 보물이니, 용천검龍泉劍의 광채가 우성(牛星)과 두성(斗星)의 자리를 쏘아 비추고, 사람이 걸출함은 땅이 영특해서이니 서유가 진번의 자리를 내려놓게 하였다.〔物華天寶 龍光射斗牛之墟 人傑地靈 徐孺下陳蕃之榻〕”라고 하였다.
[주5] 백월서운탑비(白月棲雲塔碑) : 경북 봉화군(奉化郡) 태자산(太子山) 태자사(太子寺)에 있는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朗空大師白月棲雲塔碑)를 말한다. 고려 광종(光宗) 때에 승려 단목(端目)이 신라의 국사(國師)였던 낭공대사의 위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김생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주6] 비해당(匪懈堂) :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로,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뛰어났다.
[주7] 창려(昌黎)의 박아(博雅) : 창려는 당나라의 문장가인 한유(韓愈)로, 뒤에 창려백(昌黎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자는 퇴지(退之)이고 시호는 문공(文公)으로, 한대(漢代) 이후 사부(辭賦)가 유행하면서 모든 문체가 변려문(騈儷文) 일색으로 변하자, 한유는 육경(六經)과 《맹자(孟子)》, 《장자(莊子)》, 사마천(司馬遷) 등의 고문체(古文體)를 쓸 것을 주장하여 문체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박아는 학식이 넓고 품행이 단정함을 이른다.
[주8] 기산(岐山)의 석고(石鼓) : 기산은 섬서성(陝西省) 기산현(岐山縣)에 있는 산으로 주나라의 도성 뒷산이며, 석고는 주나라 선왕(宣王) 때에 사주(史籒)가 선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서 새겨 놓은 돌인데, 그 모양이 북과 비슷하다 하여 석고라 한 것이다. 처음에 기양현(岐陽縣)에 세웠는데, 당나라 때 정여경(鄭餘慶)이 섬서성 진창산(陳倉山)에 흩어져 있던 것을 봉상현(鳳翔縣)에 있는 공자묘(孔子廟)로 옮겼는바, 이 사실을 읊은 한유의 〈석고가(石鼓歌)〉가 유명하다.
[주9] 지배(地排) : 땅에 까는 자리를 이른다.
[주10] 장의(張儀)가……맞고 : 장의는 전국 시대 유세가로 소진(蘇秦)의 합종설(合從說)에 반대하고 연횡책(連橫策)을 주장하였는데, 일찍이 초나라에 가서 초나라 정승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정승의 옥돌이 없어지자 장의를 의심하여 붙잡아 두고 수백 대나 매질을 한 다음 풀어 주었는데, 장의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 혀가 아직 남아 있는지 살펴보시오.” 하였다. 그의 아내가 웃으면서 “혀가 남아 있습니다.” 하니, 장의는 “이것으로 족하오.” 하였다. 《史記 卷70 張儀列傳》
[주11] 범수(范睢)가……부러지고 : 범수는 전국 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수가(須賈)의 참소에 의해 위나라 승상 위제(魏齊)에게 매를 맞아 갈빗대와 이빨이 부러졌다. 이때 위제는 범수가 죽은 줄 알고 그를 갈대자리에 싸서 측간에다 버리게 하였는데, 범수는 문지기를 통하여 그곳을 빠져나와 성명을 장록(張祿)이라 바꾸고 진(秦)나라로 망명하여 진 소왕(秦昭王)을 섬겨 끝내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주12] 손자(孫子)가……잘렸으니 : 손자는 전국 시대 제나라 병략가인 손빈(孫臏)으로, 빈은 그의 이름이 아니고 발을 잘리는 빈형(臏刑)을 당했으므로 그렇게 이른 것이다. 손빈은 동문수학했던 위나라의 장수 방연(龐涓)에게 발을 잘리는 혹형을 당한 뒤 제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어 수레 안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방연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였다. 《史記 卷65 孫子吳起列傳》
[주13] 소릉(昭陵)의……훼손되었고 : 소릉은 당 태종(唐太宗)의 능이고 난정첩(蘭亭帖)은 진(晉)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353)에 당대의 명필가인 왕희지(王羲之)가 쓴 〈난정서(蘭亭序)〉를 말한다. 당 태종은 이 서첩을 몹시 좋아한 나머지 순장(殉葬)하게 하였는데, 후당(後唐) 시대 온도(溫韜)가 소릉을 도굴하여 금옥만 훔쳐 가고 이 서첩은 버렸다 한다.
[주14] 광명(廣明)의……불태워졌으나 : 광명은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로 이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다. 장안(長安)에 있던 장경감(藏經龕)의 문에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보살상과 천왕상(天王像) 16개가 있었는데, 황소의 난에 적에게 불타게 되자, 어떤 승려가 그중 두 화판(畵板)을 뽑아 가지고 기주(岐州)의 오아 승방(烏牙僧房)에 의탁하였는바, 이 내용이 소식(蘇軾)의 〈사보살각기(四菩薩閣記)〉에 자세히 보인다.
[주15] 문소(聞韶)의 공관(公舘) : 문소는 의성(義城)의 옛 이름이며, 공관은 군청에 딸린 객사 따위를 이른다.
[주16] 용황(龍荒)의……갑지랑(甲枝郞) : 용황은 흉노(匈奴)의 근거지인 용성(龍城)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팔이 부러졌다는 것은 절비삼공(折臂三公)의 고사로 고관이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짐을 일컫는다. 진(晉)나라 때 양호(羊祜)가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는데 마침내 삼공(三公)의 지위에 이른 일을 가리킨다. 《晉書 卷34 羊祜列傳》 갑지랑은 계수나무의 가지를 꺾은 사람이란 뜻으로,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자신을 일컬은 것으로 보인다.
[주17] 선생안(先生案) : 각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 직명, 생년월일, 본관 따위를 기록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