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암(來庵) 정인홍 鄭仁弘
1536년(중종 31) ~ 1623년(인조 1)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합천(陜川) 출신. 정희(鄭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언우(鄭彦佑)이고, 아버지는 정건(鄭健)이다. 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우옹(金宇顒)·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581년(선조 14) 장령에 제수되었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편에 서서 서인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을 탄핵하였으나 삭탈관직 등의 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주저 없이 낙향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領首)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고,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고령·함안 등지를 방어했으며, 의병 활동을 통해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하였다. 1602년 대사헌에 승진, 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洪汝諄)·남이공(南以恭)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이어 유성룡과 함께 화의를 주장했던 성혼(成渾) 등 서인을 탄핵하였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과 대북을 영도하였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항하여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1607년 선조가 광해군에 양위하고자 할 때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반대하자 탄핵했다가 이듬해 소북 이효원(李效元)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되었다.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도중 풀려나와 대사헌에 기용되어 소북일당을 추방하고 대북정권을 수립하였다.
대북정권의 고문 내지 산림(山林)의 위치에 있던 그는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방하는 소를 올려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서인 성균관 재임 김육(金堉) 등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襟錄: 儒籍)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12년(광해군 4)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 등이 계축옥사를 일으켰을 때, 영창대군 지지세력 제거에는 찬성했으나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에는 반대하였으며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좌의정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618년(광해군 10)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었다. 1908년 4월 30일 관작이 회복되는 등 신원되었다. 이이(李珥)는 일찍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정인홍(鄭仁弘)을 청렴강직(淸廉剛直)한 인물로 칭찬하였으나, 정인홍이 서인 정철 등을 탄핵하려 하자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병에 비유한다면 돌격장이 적격이다”라고 평가를 달리하기도 하였다.
강경한 지조, 강려(剛戾)한 성품, 그리고 지나치게 경의(敬義)를 내세우는 행동으로 좌충우돌하는 대인관계를 맺어 물의를 일으켰다는 서인 집권세력의 인물평이 있는가 하면, 매천 황현(黃玹)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정인홍의 국난극복을 위한 우국충정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단재 신채호는 을지문덕·이순신·최영과 함께 정인홍을 우리나라 4대 영웅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내암집(來庵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