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이씨족보 서龍仁李氏族譜序
우리 이씨李氏의 족보를 지금 상고하고 바로잡아 여덟 편을 만들고, 남은 파波를 모아 하나의 편을 만들어서 뒤에 부록으로 붙였다. 판각板刻이 끝남에, 나는 삼가 다음과 같이 서敍한다.
우리 이씨가 용인龍仁에 관적貫籍을 둔 것은 태사공太師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태사공은 고려 태조太祖의 공신이셨는데, 지금으로부터 8백여 년 전이니, 오래되었다고 이를 만하다. 태사공으로부터 전하여 14대에 이르러서 부원군공府院君公이 나셨고, 부원군공의 한 아우와 세 아드님이 모두 각각 자손이 있어서 뻗어나가 30여 대에 이르러 끊임없이 이어졌으니, 번성하다고 이를 만하다.
효도와 우애로써 근본을 세우고, 충성과 후덕함으로써 덕德을 높이고, 청렴과 정직으로써 조행操行을 삼갔으며, 효도와 우애를 미루어서 친족 간에 화목하고 외척 간에 친애하며 붕우 간에 미덥게 하고 환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휼하였으며, 충성과 후덕함이 쌓여서 인자하고 은혜롭고 조용하고 편안하였으며, 청렴과 정직함에서 나와 부지런하고 삼가고 소탈하고 검소하였다. 이것은 바로 태사공 이하 대대로 전해온 법도이니, 그렇다면 아, 아름다움이 돈독하다고 이를 만하다.
내 일찍이 고가 세족故家世族들을 살펴보니, 선조들이 선善을 쌓아 후손들에게 넉넉한 복을 남겨주어 끝내 유명한 집안이 되었으나, 후손에 이르러 선대의 가업을 이어 지키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계승한 경우는 매우 적어서, 황폐하고 실추하여 가업이 끊긴 자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오직 우리 집안만은 조심하고 태만하지 않아서 세대를 더할수록 더욱 돈독하였고, 우리 선군자(先君子 선친)에 이르러는 높은 덕과 곧은 충절로 왕가王家의 주석柱石이 되어서 더욱 넓혀 키우셨다.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파宗派와 지파支派로 말하면, 비록 각각 현달顯達하고 현달하지 못한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몸을 삼가고 행실을 닦아서 졸렬할지언정 구차하지 아니하여, 스스로 한 집안의 풍도風度를 이루어서 명망 있는 집안이라는 칭찬을 거의 잃지 않았으니, 아, 이 어찌 우리 선조께서 터전을 세움에 순수하고 깊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돈독한 아름다움을 욕되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어느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오래된 것이 더욱 오래 이어지고 번성한 것이 더욱 번성해질 것임을 따라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족보가 이미 완성되었다. 족보라는 것은 세대를 멀리 기록하고 집안을 널리 기록하는 것이니, 세대가 오래되고 집안이 번성함을 이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움을 이루게 된 이유를 그 오래됨과 번성함에서 또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알면 어찌할 것인가? 또한 그 실제를 채우고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려고 힘쓰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족보를 간행하게 된 지극한 뜻인 것이다.
이 족보를 찬수纂修하게 된 전말顚末의 내용은 범례凡例의 첫머리에 자세히 말하였다. 우리 선군자께서는 족숙族叔이신 우윤공右尹公과 함께 이미 한 질帙을 편집하여 큰 유감이 없었는데도, 지방의 단자單子를 다 수합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널리 고정考訂하지 못하셨다는 이유로 일단 출간하는 일을 연기하셨으니, 이는 삼감이 지극하신 것이다.
이제 세상의 연고가 더욱 변하여 사람의 일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간행하는 일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그런데 당질堂姪인 보혁普赫이 마침 관동關東 지방에 관찰사로 나가서 개연히 이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는 녹봉을 털어 목재를 모아서 몇 달이 못 되어 완성시키니,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선군자께서 족보를 편수하실 적에 불초인 내가 실로 붓과 벼루를 잡고 일하였으니, 이 일이 끝남에 어찌 기꺼이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써서 서문에 대신하노라.
[주1] 부원군공(府院君公) : 부원군은 왕비의 친아버지나 정1품 공신에게 내리던 작호(爵號)로, 여기서는 고려조 구성부원군(駒城府院君)에 봉해진 이중인(李中仁, 1315~?)을 가리킨 것이다. 이중인은 호가 진초(秦楚)로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주2] 부원군공의 …… 아드님 : 이중인의 막내 아우인 판서공(判書公) 이중순(李中順)과 유후공(留後公) 이사위(李士渭)ㆍ전서공(典書公) 이사영(李士穎)ㆍ지주사공(知州事公) 이사이(李士彝)의 세 아들을 이른다.
[주3] 친족 …… 구휼하였으며 :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지방에서 세 가지 일로써 백성들을 가르쳐서 우수한 자를 빈객(賓客)으로 높여 천거하였으니, …… 둘째는 여섯 가지 행실로, 효(孝)와 우애, 친족과의 화목과 외척과의 화합, 믿음과 구휼함이다.〔以鄕三物, 敎萬民而賓興之, …… 二曰六行, 孝友睦婣任恤.〕”라고 보이는데, 《집해》에 “목(睦)은 동성(同姓)의 친족 간에 화목함이요, 인(婣)은 모족(母族)과 처족(妻族)을 포함한 외친 간에 친함이요, 임(任)은 붕우 간에 미덥게 함이요, 휼(恤)은 우환과 가난을 구제함이다.”라고 하였다.
[주4] 왕가(王家)의 주석(柱石) : 왕가는 국가와 같은 말이고, 주석은 원래 주춧돌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도곡의 부친인 이세백(李世白)이 정승을 지냈으므로 말한 것이다.
[주5] 우윤공(右尹公) : 이세백의 아우인 이세성(李世晟, 1642~1721)으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이세성은 자가 숙기(叔器), 호가 이지당(二知堂)으로 주로 외직에 있으면서 선정(善政)과 청빈(淸貧)으로 명성이 높았다.
[주6] 보혁(普赫) : 1684~1762. 도곡의 삼종질(三從姪)로, 자는 성원(聲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음서(蔭敍)로 관직에 올라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1728년(영조4)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재임 중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 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고 인평군(仁平君)에 봉해졌으며, 1731년에 강원 감사에 제수되었다.
龍仁李氏族譜序
我李族譜。今考定爲八編。輯餘派爲一編。附諸末。剞劂訖。宜顯謹叙之曰。吾氏之系籍龍仁。盖自太師公始。太師公爲麗祖功臣。距今八百餘禩。可謂久矣。自太師公。傳至十四世。爲府院公。府院公一弟三子。俱各有子孫。衍至卅餘世而綿綿未艾。可謂盛矣。孝友以立其本。忠厚以崇其德。廉正以飭其操。而孝友之推。爲睦婣任恤。忠厚之積。爲仁惠靖恬。廉正之出。爲勤愨簡儉。斯乃太師公以下世世傳承之遺矩也。則嗚呼。其可謂篤休已矣。嘗觀故家世族。厥祖先毓祉垂羨。訖爲名胄。而洎後孫。鮮或嗣守前業。克繩徽跡。以至荒墜泯絶者多有焉。惟吾宗斤斤弗怠。愈遠彌摯。遹至我先君子。以重德諒節。柱石王家。益廓而大之。爰及諸宗支之散處中外者。雖不免顯晦之各自殊塗。大較謹身修行。寧拙毋婾。自成一家風。庶幾不失譽髦之稱。噫。玆豈非吾先樹基純深。有以致之歟。其於無忝乎我世傳篤休者。夫誰曰不然。而久者益久。盛者益盛。從可以卜矣。今吾譜旣成矣。夫譜者。譜其世譜其族也。而世之久族之盛。因亦可見。則於其久於其盛而所以臻玆休者。又可以推而知之矣。知之如何。盍亦勉夫充其實而述其美矣乎。此又刊譜之至意也。是譜纂修終始。凡例之首詳之。我先君子與叔氏右尹公旣編成一帙。無遺憾矣。猶以鄕牒之未盡收。傍訂之不甚廣。姑延刊役。盖謹之至也。見今世故轉嬗。人事難期。刊役不可以復延。而堂姪普赫適按察關東。慨然以此事爲己任。捐俸鳩材。不數月告功。其亦幸矣夫。當先君子之修譜。不肖實執筆硏。於斯役之訖。敢不樂爲之。書是爲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