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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중용(中庸)》의 분절(分節)은, 독법(讀法)에서는 여섯 개의 큰 마디로 나누었고 《장구(章句)》에서는 네 개의 큰 마디로 나누었는데, 요씨(饒氏)는 독법을 위주로 삼았고 왕씨(王氏)는 장구를 위주로 삼았다. 모르겠다만, 장구를 위주로 해야 옳은가? 요씨와 왕씨 이후에 또 다섯 마디로 나누는 의논이 있었는데, 대개 그 분절은, 12장 이후는 《장구》와 같고, 첫 장을 하나의 마디로 삼고 2장부터 11장까지를 하나의 마디로 삼은 것은 독법과 같다. 이것을 독법과 《장구》의 사이에서 이것과 저것을 서로 참고하여 그 중도를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석하가 대답하였다.]
독법은 장(章)의 대의(大義)를 가지고 가려낸 것이고, 《장구》는 부자의 가르침과 자사(子思)의 말씀을 가지고 문단을 나눈 것입니다. 그러나 33개의 문장이 서로 섞여서 번갈아 나오며 맥락이 관통되어 있으니, 6절(節)로 나누든지 4지(支)로 나누든지 본디 서로 걸림이 없는데, 요씨와 왕씨의 의논은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말한 아쉬움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문림(文林)》이나 《관지(貫旨)》 등의 책에는 또 다섯 마디로 나누는 의논을 가지고 마치 요씨와 왕씨의 말을 절충한 듯한 학설이 있지만 또한 억지로 나누어 붙인 병통을 면할 수 없습니다.
중용의 중(中) 자를 주자가 풀이하기를,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으며,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것이다.[不偏不倚 無過不及]”라고 하였다. 과불급(過不及)이라는 석 자는 본디 《중용》의 본문이지만, 불편불의(不偏不倚)라는 넉 자는, 《중용》의 본문에는 불의(不倚)라는 두 글자만 있고 불편(不偏)이라는 두 글자는 원래 없다. 주자가 굳이 이 넉 자를 합하여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미발(未發)의 불편불의를 이발(已發)의 무과불급(無過不及)과 서로 대응시켜 말했다면 편의(偏倚)라는 두 글자는 반드시 각기 가리키는 바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 각기 가리키는 바를 밝혀서 말이 겹치지 않게 할 수가 있겠는가?
[홍이건이 대답하였다.]
편의(偏倚)라는 두 글자는 대략 분별이 있습니다. 편(偏)은 처한[處] 바의 지경을 가지고 말함이고 의(倚)는 서는[立] 바의 몸을 가지고 말함입니다. 입(立) 자가 처(處) 자보다 말이 조금 더 무거우니, 편이라는 것은 의의 처음이고 의라는 것은 편의 완성입니다. 제10장과 같은 경우에도 비록 불의(不倚)라는 두 글자가 있지만 이것은 곧 이발(已發)에 나아가 말함이니, 여기서 말한 불의라는 것은 또한 본문의 불의를 빌려다가 말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찌 본문에 불편이라는 두 글자가 없다고 해서, 이것이 새로 만든 말일 것이라고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천명지성(天命之性)에 대해 주자가 풀이하기를, “하늘이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만물(萬物)을 만들어냄에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理)도 부여하였다.”라고 하였다.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도 부여하였다.”라고 하였고 보면 여기의 성(性) 자는 마땅히 기질(氣質)을 겸하여 보아야 하는가?
[이노춘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명하여 부여하는 처음을 논하자면 기질을 끌어다 말할 수가 없지만 인물이 품부받은 뒤를 논하자면 기질을 겸하여 말할 수가 있습니다. 천명에 있어서는 비록 기질을 함께 이야기할 수 없으나,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도 부여하였다면 성(性)과 기질은 어느 때이고 간에 서로 떨어질 수 있는 때가 없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성은 저대로 성이고 기는 저대로 기여서 또한 서로 섞일 수 없습니다. 기질 안에서 이 성(性)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괜찮겠으나, 아마도 이 성(性) 자를 가지고 기질을 겸하여 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솔성(率性)의 솔(率) 자에 대해서, 주자는 이미 순(循) 자로 풀이하였고, 또 《혹문(或問)》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학설을 논박하여, 수위(修爲)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님을 밝혔으니, 이것은 참으로 바꿀 수 없는 의논이다. 그러나 수도(修道)의 수(修) 자도 수위(修爲)로 풀지 않고 품절(品節)이라고 하였고 아래 글에 이른바 예악형정(禮樂刑政) 같은 것이 곧 품절의 뜻을 밝혀 설명해 주는 것이니, 수도(修道)도 스스로 닦는 공부가 될 수 없는가? 수위라고 하지 않고 품절이라고 한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상세히 듣고 싶다.
[이석하가 대답하였다.]
솔성의 솔 자를 주자가 순(循)으로 풀이한 것은 성(性)은 수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이 이미 수위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이 도(道) 자는 곧 솔성의 도이니 또 어떻게 수위하는 공력을 붙일 수가 있겠습니까. 도는 천명(天命)의 본연(本然)으로서 인력(人力)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성인의 가르침은 그 각기 다른 기품(氣稟)에 따라 재제(裁制)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구에서 품절이라는 두 글자로 수(修) 자를 풀이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취지는 교(敎) 자에 무게를 둔 것이니, 아마 스스로를 닦는 공부로 보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계구(戒懼) 한 구절은 오로지 정(靜)으로만 보아야 마땅한가? 아니면 동(動)과 정(靜)을 통괄하여 보아야 하는가? 본문(本文)을 가지고 말하자면 오로지 정으로만 보아야 할 듯한데, 주자가 여자약(呂子約)에게 답한 편지에는 동과 정을 통괄하여 보았다. 모르겠다만, 《장구》 안에도 통괄하여 보는 뜻을 띠고 있는가?
[홍이건이 대답하였다.]
계구 한 구절은 그것 한 가지만 말하면 동과 정을 겸한 것이고 신독(愼獨)과 대응시켜 말하면 오로지 정에만 속하는 것입니다. 대개 미발(未發)일 때에는 사려(思慮)는 비록 형상이 아직 없지만 지각(知覺)은 어둡지 아니하니, 정자가 말하기를, “이미 지각이 있으면 곧 이것은 동(動)이다. 어찌 정(靜)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주자가 여자약에게 답한 편지는 대개 이런 뜻으로 한 것인데, 《장구》에 이른바 ‘늘 경외하는 마음을 지닌다[常存敬畏]’라는 것도 이미 그러한 뜻을 띠고 있습니다.
미발(未發)에 대한 말이 《주자대전(朱子大全)》 및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것이 각각 다르다. 혹은 “요순으로부터 도인(塗人)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이다.”라느니 혹은 “시역(厮役)에게도 미발이 있다.”라느니 하고, 혹은 “중인(衆人)은 미발일 때에도 이미 스스로 혼란스럽다.”라느니 혹은 “그 미발일 때에는 한 덩어리 둔탁한 돌과 같다.”라느니 하였다. 앞의 두 가지로 보자면 뒤의 둘은 정론(定論)이 될 수 없을 듯한데, 또 임택지(林擇之)에게 답한 편지에는, “그것을 미발이라고 하면 주(主)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만약 그 미발의 경계를 논하여 완전히 끝까지 가자면 마땅히 어느 학설을 위주로 삼아야 하겠는가?
[이석하가 대답하였다.]
미발을 논하는 데에서,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이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 본연(本然)으로써 말하는 것이고, 성인과 광인(狂人)이 완전히 구분된다고 하는 것은 그 기질(氣質)로써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부여함이 현우(賢愚)에 차별을 두지 않으니 도인이나 시역 같은 자들에게도 본디 본연의 중(中)이 없지 않겠지만, 인심(人心)이 이미 사욕(私慾)에 가리어지고 나면 혼란스럽고 완고한 무리들에게 어찌 미발의 중이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자의 여러 의논은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어그러짐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발은 곧 성성(惺惺)하게 절로 있음이니 ‘주(主)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마도 의미를 충분히 다한 말일 것입니다.
미발일 때에도 하는 공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공부를 말할 수 없는가? 정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發)하기 전에 중(中)을 구(求)한다.”라고 하였고, 주자는 “사람은 모름지기 미발일 때에 공부가 있어야[有] 제대로 된다.”라고 하고, 또, “미발일 때에는 공부를 할[著] 수가 없다. 대개 공부를 시작하기만 하면 곧 이발(已發)에 속한다.”라고 하였는데, 정자와 주자의 앞뒤의 의논이 이렇게 다르니, 장차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
[홍인호가 대답하였다.]
정자가 이른바 ‘발하기 전에 중을 구(求)한다’는 것은 다만 하나의 구(求) 자가 이미 이발에 속하고, 주자가 이른바 ‘공부를 할[著] 수가 없다’는 것은 하나의 착(著) 자가 이미 이발에 속합니다. 그러나 계구(戒懼)의 공부는 동(動)일 때에나 정(靜)일 때에나 끊어짐이 없음이니, 미발일 때에도 참으로 공부가 있는 것입니다. 대개 구 자와 착 자는 비록 이발에 속하지만, 유(有) 자는 곧 고유(固有)라는 말과 같아서 미발에 조금도 걸림이 없으니, 앞뒤의 학설이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주자가 미발을 논하면서 혹 복괘(復卦)를 해당시키기도 하고 혹 곤괘(坤卦)를 해당시키기도 했는데, 두 학설 가운데에서 어느 학설을 정론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노춘이 대답하였다.]
지허지정(至虛至靜)하면서도 능지능각(能知能覺)의 오묘함이 있는 것이 미발의 경계가 됩니다. 순곤(純坤)은 무양(無陽)이 되지 않는 상(象)입니다. 일양(一陽)이 이미 동(動)한 복괘(復卦)인 경우는 비록 밖으로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지는 않더라도 대개 이미 속에서는 동(動)이 드러남이니 어찌 이것을 미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의 학설 가운데 복괘를 해당시킨 것은 초년의 학설이니 곤괘를 해당시킨 학설이 아마 정론이 될 듯합니다.
미발(未發)이라는 두 글자는 본디 이전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한 것인데, 자사 이전에는 과연 미발의 뜻을 언급한 자가 없었는가?
[이노춘이 대답하였다.]
미발이라는 두 글자는 본디 자사가 이전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한 것이지만, 이전의 성인들의 말씀에도 또한 일찍이 미발의 뜻에까지 미친 것이 있었습니다. 《주역》에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함’이라고 하였는데 ‘고요함’이 또한 미발이며, 《맹자》에 ‘평조지기(平朝之氣)’라고 한 것을 주자가 “물(物)과 더불어 접촉하기 이전이다.”라고 하였으니, ‘물과 더불어 접촉하기 이전’도 또한 미발입니다. 그렇다면 미발에 대한 학설은 비록 자사로부터 나왔지만, 그 뜻은 자사도 또한 물려받은 곳이 있었던 것입니다.
[第一章]
中庸分節。讀法則作六大節。章句則爲四大節。而饒氏則主讀法。王氏則主章句。未知當以章句爲主歟。饒王以後又有五節之論。蓋其分節。十二章以後則與章句同。而首章爲一大節。自第二章至十一章爲一大節。則與讀法同。此於讀法章句之間。可謂參互彼此而得其中耶。錫夏對。讀法則以諸章大義而拈出者也。章句則就夫子之訓子思之言而分段者也。然而三十三章。互見錯出。脈絡貫通。則六節四支之分。固無所相礙。而饒王之說。似不無偏言之歎。至如文林貫旨等書。又以五節之論。有若參互饒王之說。而亦未免強分排之病矣。中庸之中字。朱子釋之曰不偏不倚無過不及。過不及三字固是中庸本文。而至於不偏不倚四字。中庸本文但有不倚二字。元無不偏二字。朱子之必以此四字合而言之者何也。以未發之不偏不倚。與已發之無過不及相對說。則偏倚二字。必各有所指。何以則可明其各有所指而語不架疊耶。履健對。偏倚二字。略有分別。偏則以所處之地而言。倚則以所立之體而言。夫立字比處字下語差重。則偏者倚之始也。倚者偏之成也。至若第十章雖有不倚二字。而此乃就已發而言。則此所云不倚者。亦非借本文不倚而爲言也。又烏可以本文之無不偏二字。疑此之刱說乎。天命之性。朱子釋之曰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氣以成形。理亦賦焉。旣曰氣以成形。理亦賦焉。此性字當兼氣質看耶。魯春對。論天命賦與之初則不可拖言氣質。論人物稟賦之後則可以兼言氣質。天命上雖不可帶說氣質。而氣以成形理亦賦焉。則性與氣質。自無時而可離矣。雖然性自性氣自氣。亦不可相混。謂其就氣質中看得是性則可也。而恐不可以此性字兼論氣質矣。率性之率字。朱子旣以循字釋之。又於或問駁論諸家之說。以明其非指修爲而言。此誠不易之論也。然修道之修字。亦不以修爲釋之。謂之以品節。而下文所謂禮樂刑政之屬。卽所以發明品節之意。則修道又不得爲自修之工耶。不曰修爲而謂以品節者。必有所以然之故。願聞其詳。錫夏對。率性之率字。朱子釋之以循者。蓋以性不可修爲故也。性旣不可修爲。則此道字卽率性之道。又安可著修爲之力耶。蓋道是天命之本然。而不容人力。故聖人立敎。不過因其氣稟之異而爲之裁制。章句之以品節二字釋修字者此也。且此句歸趣重在敎字。則恐不當看作自修之工矣。戒懼一節。當專以靜看耶。抑通動靜看耶。以本文言之則似當專以靜看。而朱子答呂子約書。通動靜看。未知章句中亦帶得通看之意耶。履健對。戒懼一節。單言之則兼動靜。與愼獨對言則專屬靜。蓋未發之時。思慮雖未形。知覺則不昧。程子曰旣有知覺。却是動也。怎生言靜。朱子之答子約書者蓋以此也。而章句所云常存敬畏四字。亦已帶得這意矣。未發說之見於朱子大全及語類者。各自不同。或曰自堯舜至於塗人一也。或曰廝役亦有未發。或曰衆人未發時已自汩亂了。或曰其未發時。塊然如頑石。以前二段觀之。則後二段恐未爲定論。而又於答林擇之書曰謂之未發則不可言無主也。若論其未發界至十分盡頭處則當以何說爲主耶。錫夏對。未發之論。謂之聖凡之無間者。以其本然而言也。謂之聖狂之判焉者。以其氣質而言也。天賦無間於賢愚則塗人廝役之屬。固不無本然之中也。人心已蔽於私慾則汩亂頑然之類。何可謂有未發之中也。朱子之論。可謂竝行不悖。而且未發卽惺惺自在。則不可言無主者。恐得十分盡頭也。未發時有工夫之可言歟。抑不可言工夫歟。程子言求中於喜怒哀樂未發之前。朱子曰人須是於未發時有工夫是得。又曰未發時著不得工夫。蓋纔著工夫則便屬已發。而程朱前後之論。若是不同。將何適從耶。仁浩對。程子所云求中於未發者。只一求字已屬已發。朱子所云著不得工夫者。只一著字亦屬已發。然而戒懼之工。通動靜未嘗間斷。則未發時儘有工夫。蓋求字著字雖屬已發。而有字則便是合下固有。無少礙於未發。前後立說。恐不必矛盾。朱子論未發。或以復卦當之。或以坤卦當之。兩說之中。當以何說爲定論耶。魯春對。至虛至靜而有能知能覺之妙者。爲未發境界。在純坤爲不爲無陽之象。復之一陽已動則雖未著見於外。蓋已動著於中。安得以是爲未發乎。朱子復卦之說。在於初年。則坤卦恐爲定論。未發二字。固是發前人所未發。而子思以前果無言及未發之意者耶。魯春對。未發二字。固是子思發前人未發之言。而前聖之言。亦嘗有及於未發之意者。易曰寂然不動。寂然亦未發也。孟子曰平朝之氣。朱子謂之以未與物接。未與物接亦未發也。然則未發之說。雖出自子思。而其意則子思亦有所受者矣。以上第一章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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