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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1장 6-14절. 디모데에게 성령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고자 함
6절.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this reason I remind you to kindle afresh the gift of God which is in you through the laying on of my hands.
그러므로 내가---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Δι’ ἣν αἰτίαν ἀναμιμνῄσκω σε ἀναζωπυρεῖν τὸ χάρισμα τοῦ Θεοῦ,
for this reason I remind you to kindle afresh the gift of the God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ἀναζωπυρεῖ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kindle afresh) 현재 다시 불 붙게 하는 하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ἀναζωπυρέω)은 ‘다시’(ἀνά:again)라는 접두어와 ‘불’(πῦρ:fire)이라는 명사의 합성어로 된 말입니다.
‘생각하게 하노니’(ἀναμιμνῄσκω)는 현재형으로서(I remind) 현재 생각하게 하는 것을 가리키며, ‘다시’(ἀνά:again)라는 접두어와 ‘다시 생각하다, 기억하다’(μιμνήσκομαι: remind, remember)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ὅ ἐστιν ἐν σοὶ διὰ τῆς ἐπιθέσεως τῶν χειρῶν μου.
which is in you by the laying on of the hands of me
직역하면 ‘나의 손들을 올려놓음으로써 네 안에 있는 그것(하나님의 은사)’이란 뜻입니다.
‘있는’(ἐστιν)이란 동사는 현재형으로서(is) 하나님의 은사가 디모데 안에 현재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그러므로’는 ‘외조모와 어머니로부터 거짓이 없는 믿음을 전수받았으므로’란 뜻입니다.
‘나의 안수함으로’란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 장로의 회에서 디모데를 안수했을 때,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 자신도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아서 눈병이 치료되었고(행 9:17), 안디옥 교회에서 안수받고 선교사로 출발했습니다( 행 13:3).
2.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한다’는 것은 디모데가 안수로 임직을 받을 때, 성령의 은사를 받았는데, 다시 불 일 듯하게 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8장 17절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지방 성도들에게 가서 안수할 때,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9장 6절에는 바울이 에베소 교인 12명에게 안수할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성령으로 거듭나는데, 직분자가 사역을 감당하려면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4-10절에는 성령의 은사로서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 7-12절에는 주님이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의 직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예수 믿을 때 받은 성령님은 영원토록 성도 안에 내재하시지만, 이 성령의 은사는 마치 장작불이나 숯불이 활활 타오르다가도 사그라들 듯이 약해질 때가 있는데,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다시 안수함으로 성령의 은사를 불 일 듯하게 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사가 다시 불 일 듯하게 되는 것은 성령 충만한 다른 사람의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본인 자신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은사가 불 일 듯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7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God has not given us a spirit of timidity, but of power and love and discipline.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οὐ γὰρ ἔδωκεν ἡμῖν ὁ Θεὸς πνεῦμα δειλίας,
not for gave us the God spirit of cowardice
직역하면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주신’(ἔδωκεν)이라는 동사는 부정과거형으로서(gave) 과거에 확실히 주신 사실을 가리키고, 하나님께서 과거에 두려워하는 영을 절대 주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두려움’(δειλίας)이란 ‘두려움’(cowardice)만이 아니라 ‘소심하고 겁이 많음’(timidity)을 뜻합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ἀλλὰ δυνάμεως καὶ ἀγάπης καὶ σωφρονισμοῦ.
but of power and of love and of prudence
‘절제’로 번역된 단어(σωφρονισμός)는 ‘자기 절제, 자기 훈련, 신중한 분별력’(self-control, self-discipline, prudence)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주신 영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1. ‘두려움’(δειλίας)이란 ‘두려움’(cowardice)만이 아니라 ‘소심하고 겁이 많음’(timidity)을 뜻하는데, 디모데는 나이도 어리고, 위장병이 있어서(딤전 5:23) 두려워하고 소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πνεῦμα: spirit)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성령님이십니다.
즉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소심하고 병약한 사람도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되고, 이기적인 사람도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도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사려분별이 있는 건전한 사람이 됩니다.
2. ‘능력’( δύναμις)이란 원문 그대로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성령의 폭발적인 힘을 가리키고, ‘사랑’(ἀγάπη)이란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과 성령님의 지대한 사랑을 가리키며, ‘절제’(σωφρονισμός)란 사려분별력이 있는 건전함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무분별하고 죽게 만드는 이단과 사탄의 영과 대조적인 것을 뜻합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이 사려분별력이 마비되고, 건전하고 신중함을 잃어버리고, 마귀에게 붙잡혀서 이단자에게 포로가 된 것입니다.
마귀와 이단이 횡횡한 이 세상에서는 성령님이 주시는 이 사려분별력과 신중하고 건전한 마음을 늘 간직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요한1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는 성령의 은사 중에 영들 분별함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8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refore do not be ashamed of the testimony of our Lord or of me His prisoner, but join with me in suffering for the gospel according to the power of God,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부끄러워하지 말고
Μὴ οὖν ἐπαισχυνθῇς τὸ μαρτύριον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not therefore you should be ashamed of the testimony of the Lord of us
원문에는 ‘내가’라는 말은 없고 단지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의 증언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에서 동사(ἐπαισχυνθῇς)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you should be ashamed) ‘금지’(prohibition)를 나타내므로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μηδὲ ἐμὲ τὸν δέσμιον αὐτοῦ,
not of me the prisoner of Him
직역하면 ‘그 분의 죄수인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로마 황제의 죄수가 아니라, ‘그 분(예수님)의 죄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는 말이며, 한편 바울 자신이 과거에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핍박한 데 대한 형벌로 인식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의 죄수가 되어서 로마 황제의 형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달게 받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ἀλλὰ συνκακοπάθησον τῷ εὐαγγελίῳ, κατὰ δύναμιν Θεοῦ,
but suffer together for the gospel, according to power of God
직역하면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위하여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함께 고난을 받으라’(συνκακοπάθησον)는 단어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suffer together) 반드시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원형(συγκακοπαθέω)은 ‘함께’라는 접두어(σύν)와 ‘고난을 당하다’(κακοπαθέω)는 동사(suffer evil, endure affliction)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감옥 형벌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디모데도 병약한 소심함을 버리고,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단지 그 고난은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1. ‘주를 증언함’은 복음 증거를 가리키고, ‘주를 위해 갇힌 나’는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당시에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오히려 디모데는 복음을 자랑하고 바울을 자랑해야 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롬 1:16)
그러나 당시 사회적 평가로 유대인들은 십자가 복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했고, 헬라인들은 십자가의 희생적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고전 1:18-24)
2. 디모데가 복음과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 사역을 하고, 고난을 감수하려면, 인간적 결심으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δύναμιν Θεοῦ: power of God)을 힘입어야 합니다.
즉 성령님이 충만하게 함께 하시고 역사해주셔서, 귀신이 쫓겨 나가고 병자가 고쳐지는 역사들이 일어나야 불신자의 조롱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행 1:8)
그리고 또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막 16:15-18).
이처럼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핍박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o has saved us and called us with a holy calling, not according to our works, but according to His own purpose and grace which was granted us in Christ Jesus from all eternity,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τοῦ σώσαντος ἡμᾶς, καὶ καλέσαντος κλήσει ἁγίᾳ,
the (One) having saved us, having called with calling holy
본 문에 ‘하나님’이란 단어가 없고 단지 ‘그 분’(τοῦ:the One)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하사’(σώσαντ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aved) 과거에 단번에 구원하신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부르심은’(καλέσαντος)도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called) 과거에 단번에 부르신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은혜대로 하심이라
οὐ κατὰ τὰ ἔργα ἡμῶν, ἀλλὰ κατὰ ἰδίαν πρόθεσιν καὶ χάριν,
not according to the works of us, but according to His own purpose and grace
동사가 없으나 적절한 번역입니다.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τὴν δοθεῖσαν ἡμῖν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πρὸ χρόνων αἰωνίων,
that having been given us in Christ Jesus before time eternal
직역하면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이란 뜻입니다.
‘주신’(δοθεῖσαν)은 부정과거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given) 과거에 단번에 주어진(하나님께서 주신)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우리를 구원하사’(σώσαντος ἡμᾶς)와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심’(καλέσαντος κλήσει ἁγίᾳ)은 둘 다 부정과거 분사형이므로(having saved us, having called with calling holy) 선후 관계를 말씀한 것이 아니고, 동격으로서 동등하게 설명해주고 보충해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거룩한 삶을 위해 부르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우리의 선행에 대한 댓가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말씀합니다.
더구나 이 구원의 은혜는 ‘영원 전부터’ 예정하사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은 후에 우리가 혹 범죄한 잘못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단지 이 구원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선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삶마저도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고,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아갈 때,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따라 살아갈 때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이 된다고 했습니다. (롬 8:4)
2.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도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결정에 따라 된 것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천국 구원은 확실한 것이고, 중간에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교만하거나 범죄 하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극히 감사하면서, 겸손히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면 성도의 삶을 살 수 없는 줄 알고, 날마다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도움심과 인도를 받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롬 1-8:14)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육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살아가면, 이것은 이미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서, 악한 열매들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갈 5:19-23)
3. 이 구원의 은혜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영원 전에 예정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영원’이란 창조 이후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의 영원한 세계를 가리킵니다.
물론 ‘영원’이 창조 이전의 시간을 가리키므로 ‘영원 전’이란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창조 이전에 예정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엡 1:4-11, 3:11)
4. 본 절의 내용은 에베소서 2장 8-10절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에베소서 2:8-10.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0절.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now has been revealed by the appearing of our Savior Christ Jesus, who abolished death and brought life and immortality to light through the gospel,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φανερωθεῖσαν δὲ νῦν διὰ τῆς ἐπιφανείας τοῦ Σωτῆρος ἡμῶν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having been made manifest but now by the appearing of the Savior of us, Christ Jesus
‘그러나’(δὲ: but)가 본문에 나옵니다.
즉 구원의 은혜가 영원 전에 계획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초림으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나타났으니’(φανερωθεῖσαν)는 부정과거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made manifest) 역사적으로 과거에 확실히 나타난 것을 가리키고, 주어는 앞 절의 ‘은혜’로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그 은혜가 분명하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καταργήσαντος μὲν τὸν θάνατον
having abolished indeed the death
‘폐하시고’(καταργήσαντ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abolished) 역사적으로 단번에 확실히 폐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φωτίσαντος δὲ ζωὴν καὶ ἀφθαρσίαν διὰ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having brought to light now life and immortality through the gospel
‘드러내신지라’(φωτίσαντ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rought to light) 역사적으로 단번에 확실히 드러내신 것을 가리킵니다.
1. 본 절에는 원문에 ‘그러나’(δὲ: but)가 있어서 앞 절에서 구원의 은혜가 영원전에 예정하신 것지만,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초림으로 나타난 것을 가리킵니다.
앞 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를 말씀하고, 본 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성육신을 가리킵니다.
‘나타나심’(ἐπιφάνεια: appearing)이란 대개 예수님의 재림을 표현하는 말이나(살후 2:8, 딤전 6:14, 딤후 4:1,8, 딛 1:13), 본 절에서는 예수님의 초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는 ‘구주 하나님’( θεοῦ σωτῆρος ἡμῶν)이라고 표현했는데(1:1, 2:3, 4:10), 본 절에서는 ‘구주 예수님’( Σωτῆρος ἡμῶν Χριστοῦ Ἰησοῦ)이라고 호칭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망을 철폐하시고, 생명과 영생불멸을 드러내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사망에 지배를 당하고 있으며, 죽음이 무서워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죄를 모두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의 형벌을 당하심으로써, 예수님을 믿고 모신 사람은 마귀를 물리치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된다고 했습니다.
본 절과 비슷한 내용이 히브리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리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우리들도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과 영생불멸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셨는데( 롬 6:23), 아담이 뱀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 말씀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어서 인류는 죽음에 종노릇하고, 마귀에게 종노릇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성령님)을 늘 마음에 모시고 살면, 마귀와 사망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 때는 사망을 영원히 철폐 하실 것입니다. (고전 15:54-55)
4. 성경에 ‘사망’이 폭군과 같은 인격체로 표현되었는데(롬 5:14, 고전 15:55, 히 2:14), 이것은 아담 이후로 사망이 전 인류를 지배해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의 형벌을 대신 모두 당하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불멸 천국을 얻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덕분에 영생 불멸을 얻은 우리들은 복음 전파에 따른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절제를 가지고 복음 전도사역에 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7-8절)
11절.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which I was appointed a preacher and an apostle and a teacher.
εἰς ὃ ἐτέθην ἐγὼ κήρυξ καὶ ἀπόστολος καὶ διδάσκαλος·
to which I was appointed I preacher and apostle and teacher
직역하면 ‘그것을 위해서 바로 내가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내가’(ἐγὼ: I)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세움을 입었노라’(ἐτέθην)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ἐτέθην) 과거에 확실히 세움을 입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선포자’(κήρυξ:preacher)는 복음을 선포하는 자이고, ‘사도’(ἀπόστολος:apostle)는 주님이 대리자로 보낸 사람이고, ‘교사’(διδάσκαλος:teacher)는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본(Byzantine, Greek Orthox, Texuts Receptus)에는 ‘이방인의 교사’(διδάσκαλος ἐθνῶν)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원래 예수님의 원수였으나, 예수님에게서 용서를 체험하고, 그 복음에 감격하여,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복음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자신의 노력과 공의로 구원받으려는 것에 식상해서 이방 죄인도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많은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
또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행 22:21, 갈 2:8, 롬 11:3).
12절.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this reason I also suffer these things, but I am not ashamed; for I know whom I have believed and I am convinced that He is able to guard what I have entrusted to Him until that day.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δι’ ἣν αἰτίαν καὶ ταῦτα πάσχω,
for this reason also these I suffer
직역하면 ‘이런 이유로 또한 이것들(이 고난들)을 내가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고난을 받되’에서 동사(πάσχω)는 현재형으로서(I suffer) 현재 고난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ἀλλ’ οὐκ ἐπαισχύνομαι,
but not I am ashamed
직역하면 ‘그러나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에서 동사(ἐπαισχύνομαι)는 현재형으로서(I am ashamed) 현재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οἶδα γὰρ ᾧ πεπίστευκα,
I have known for whom I have believed
직역하면 ‘왜냐하면, 내가 믿는 그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믿는’(πεπίστευκα)은 완료형으로서(I have believed) 과거에 믿었는데 지금까지 믿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알고’(οἶδα)는 완료형으로서(I have known) 과거부터 현재까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καὶ πέπεισμαι ὅτι δυνατός ἐστιν τὴν παραθήκην μου φυλάξαι εἰς ἐκείνην τὴν ἡμέραν.
and I have been persuaded that able He is deposit entrusted of me to guard for that the day
직역하면 ‘그리고 그날까지 나의 의탁을 그분이 지키실 수 있다는 것을 내가 확신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지키실’(φυλάξ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guard) 확고하게 반드시 지키시는 것을 가리키고, ‘그분이 하실 수 있다’(δυνατός ἐστιν)에서 동사(ἐστιν)는 현재형이고, ‘내가 확신한다’(πέπεισμαι)는 완료형으로서(I have been persuaded) 이미 확신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이로 말미암아 내가 고난을 받되’란 바울이 복음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로 활동하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많은 고난들을 받았습니다(고후 11:23-27. 25가지 고난들).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면, 사탄과 불신자들이 미워해서 고난을 줍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면 사탄이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인간들이 사탄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 불신자들의 죄악이 드러나고 찔림을 받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복음과 성령의 감동을 악마처럼 미워합니다.
복음 전파는 세상을 정죄하기 때문에, 세상이 복음 전파자와 교회를 미워합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2.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롬 1:16).
그런데 여기서는 바울이 복음 전도자로서 당하고 있는 로마 감옥이란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3. 첫째 바울은 주님을 믿은 후로 지금까지 주님이 모든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 건져주신 것을 체험해 왔기 때문에, 주님이 구원자이심을 알고 안심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는’(πεπίστευκα)이란 단어도 완료형으로서(I have believed) 과거에 믿었는데 지금까지 믿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알고’(οἶδα)라는 단어도 완료형으로서(I have known) 과거부터 현재까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어도 주님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하게 해주셨고,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어도 다소로 피신시키셨고,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었어도 주님이 다시 살아나게 해주셨고,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혀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지진을 통해서 살려주셨고,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어도 피신하게 하셨고,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이 총독에게 죽여달라고 고소했으나 하나님이 살려주셨고, 에베소에서 2만 명이 데모해서 죽이려고 했어도 살려주셨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 40명 결사부대가 바울을 암살하려고 했어도 주님이 살려주셨고, 가이사랴에서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어도 살려주셨고, 지중해에서 유라굴로 광풍에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살려주셨고, 로마 1차 투옥에서도 황제의 재판에서 주님이 살려주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주님이 바울을 지켜주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실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순교를 앞두고 있으나, 이 순교조차도 성령님이 감당하게 해주실 것을 믿고 안다는 것입니다.
3.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는 것에서 ‘내가 의탁한 것’(παραθήκην μου)은 직역하면 ‘나의 의탁물’(deposit of me)인데, 이것은 바울이 주님께 의탁하는 영혼과 생명과 건강과 복음 전도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날까지’란 바울이 순교할 날(4:6-8)이나, 주님의 재림의 날(살후 1:8)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자신의 순교의 날까지 주님이 자신의 영혼과 믿음과 생명과 건강을 지켜주실 것을 확신했고,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복음 전파와 교회들과 성도들을 지켜주실 것도 확신했습니다.
13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Retain the standard of sound words which you have heard from me, in the faith and love which are in Christ Jesus.
너는---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ὑποτύπωσιν ἔχε ὑγιαινόντων λόγων
pattern have of sound words
직역하면 ‘바른 말들의 모범을 가지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지키라’(ἔχ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have) 항상 가지고 있으면서 보존하라는 뜻입니다.
내게 들은 바
ὧν παρ’ ἐμοῦ ἤκουσας
which from me you heard
직역하면 ‘내게 네가 들었던 그것’이란 뜻입니다.
‘들은’(ἤκουσας)은 부정과거로서(you heard) 과거에 확실히 들었던 틀림없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ἐν πίστει καὶ ἀγάπῃ τῇ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in faith and love that in Christ Jesus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사랑을 가리킵니다.
어떤 이는 이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석하지만, ‘인간에 대한’이란 단서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진정한 믿음과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진정한 믿음과 사랑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속에서 날마다 성령님의 은혜와 인도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이란 디모데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전수받은 바른 교훈과 바른 신앙을 가리키며(딤전 1:10), 이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의 잘못된 이단 사상과 대조되는 정통 신앙을 가리킵니다.
3. ‘본’(ὑποτύπωσιν: pattern)이라는 단어는 디모데전서 1장 16절에도 똑같이 나오는데, 건축자의 설계도나 화가의 스케치나 밑그림이나 부모의 유훈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신앙의 모범을 뜻합니다.
즉 초대교회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교리나 신앙고백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과 사도들에게서 계승된 전통 신앙의 모범을 갖고 있었는데, 디모데가 신앙적 부모와 같은 바울 사도의 유훈을 잘 전수받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신앙적인 유훈을 바울과 디모데 간의 인간적인 유대관계 속에서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그리고 14절에 말씀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4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Guard, through the Holy Spirit who dwells in us, the treasure which has been entrusted to you.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τὴν καλὴν παραθήκην φύλαξον
the good deposit (entrusted to you) guard
직역하면 ‘그 아름다운 부탁을 지키라’는 뜻인데, 한글 성경을 풀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부탁한 것’(παραθήκην)이란 12절에서 ‘의탁한 것’이라고 번역했는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교훈과 전통 신앙을 가리킵니다.
‘지키라’(φύλαξον)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guard) 철저하게 엄숙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διὰ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τοῦ ἐνοικοῦντος ἐν ἡμῖν.
by Spirit Holy the (One) dwelling in us
‘거하시는’(ἐνοικοῦντος)은 현재분사로서(dwelling) 항상 거하고 계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으로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는 것을 가리킵니다(롬 8:9-11).
즉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임하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들인 교회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고전 3:16, 6:19)
이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베드로나 바울 안에 계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쳤고, 죽었던(행 9:33-34) 도르가를 살렸으며(행 9:40), 바울은 앞치마만 병자에게 얹어도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나았으며(행 19:12), 삼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드고를 살리기도 했습니다(행 20:9-10).
즉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셨던 사역을 지금도 우리 안에 계셔서 복음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 (히 13:8)
2.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τὴν καλὴν παραθήκην)이란 문자 그대로는 ‘그 아름다운 부탁’(the good deposit)인데, ‘부탁’(παραθήκην:deposit)이란 단어는 12절의 의탁한 것(παραθήκην)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한다는 것이고, 여기서는 바울이 바른 교훈과 전통 신앙을 디모데에게 부탁한다는 뜻입니다.
3. ‘지키라’(φύλαξον)는 것은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guard) 파수꾼이 적군의 침투를 경계하면서 철저하게 지키라는 것인데, 영지주의 이단이 횡횡한 가운데서 디모데가 바울에게 전승받은 교훈과 전통 신앙을 영지주의 이단으로부터 철저하게 지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복음 신앙과 전통 교리를 지키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지식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님만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오직 성령님만이 예수님을 증거하시고, 오직 성령님만이 귀신을 물리치고, 복음 신앙에 따른 표적(병자 치료, 죽은 자 살림)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으시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전통 신앙을 잘 지키시고, 이 아름다운 전통 신앙을 자녀들과 제자들에게 잘 전수해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