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는 그냥 착한 사람이 되지 않기로 했다.
‘착한사람이 될 수 없어서 느낄 수 있었던 것’
3112 이도혁
‘죄와의 만남’
모두들 살면서 한 번씩은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나도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렇다면 착한 사람의 기준은 뭘까? 나는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듯이 나의 인생도 내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결국 나는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착한 일을 많이 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인 무죄가 나에게는 해당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자신의 죄를 숨기기에만 바쁜 죄가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나의 죄와 제대로 만나 보기로 하였다.
‘나는 색안경을 눈에 쓴 걸까? 마음에 쓴 걸까?’
내가 지은 첫 번째 죄는 바로 인간관계에서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마주 하는 것이다.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인간관계가 시작되는 단계 또는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심하다. 나와 방금 처음 본 사이인 사람에 대한 장점은 볼 수 없었고 내 눈에는 단점만 보이면서 상대방에 대한 나의 주관은 더 안 좋아졌다. 하지만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 사람은 내가 생각과 반대로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고 나와 친해지고 싶다와 같은 좋은 의미로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다수였다. 예를 들어 지금은 잘 지내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색안경을 끼고 봤지만 다들 좋은 의미로 나에게 다가온 친구들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품었던 나의 생각이 부끄러웠고 친구들이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이미 알고 있는 사이에서도 나는 색안경을 낄 때가 자주 있다. 그러면서 나는 처음 본 사람과 알고지낸 사람들을 나의 내면 안에서 나쁜 사람들로 만들어버렸다. 그 생각으로 인한 나의 극히 주관적인 판단들은 자연스럽게 나의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나에게 용기를 내어서 다가오거나 평소와 같이 행동한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차갑게 대하고 상처를 준거 같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용기를 내서 다가온 사람들의 노력을 무시한 거 같아서 후회스럽고 죄책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알아도 고쳐지지 않는 나의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을 해결 해보려고 생각을 해보니 색안경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나는 보는 게 문제일까? 아니면 생각하는 게 문제일까? 그렇다면 나는 색안경을 어디에 쓴 걸까? 질문의 답을 모르는 걸 보니 나는 색안경을 눈과 마음에 동시에 쓴 적도 있는 거 같다.
‘언젠가는 다시 이어질 무기력과 나태의 악순환’
나의 두 번째 죄는 무기력과 나태이다. 누군가는 무기력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나는 무기력이 충분히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기력 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중학교 때 정했던 나의 진로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나는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냥 태어나서 살게 되는 그런 무기력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흘러 가는대로 살자’라는 생각으로 노력도 하지 않고 나태해져 갔다. 자연스럽게 나의 성실함과 성적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결과로 나는 후회와 회의감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더 무기력 하게 되었고 지난날의 무기력은 해결 되지 않은 채로 내 속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인생에 대해 고민도 하지 않을 정도로 나태해져 갔다. 그 나태함은 내 속을 무기력으로 가득 채우는데 큰 도움을 줬고 그렇게 몸속에 가득 쌓여 있던 무기력은 나를 더 나태하게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이러다간 끝도 없게다 싶어 학년이 끝나갈 때 스스로에게 ‘그 시간을 낭비 했나?’, ‘그 시간을 통해서 얻은 게 있나?’ 이 두 질문을 했었다. 이 질문의 답은 어떤 누구 보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2년이라는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만 있던 건 명백한 사실이다. 잃어버린 2년 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통해서 얻은 것은 확실히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얻은 것은 무기력 하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문제를 해결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무기력 해지는 악순환이라는 나만의 진리를 몸소 느끼면서 깨달은 것이다. 또 나는 2년 이라는 시간 동안 나에게 나름 기대가 많았지만 내가 부담을 느낄까봐 표현 하지 않았던 부모님에게 죄송했고 부모님을 실망 시켰다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서있거나 누워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뭐가 나쁘든 좋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무기력과 나태함이 다시 찾아온다 하더라도.
‘용기 부족은 눈덩이 같이 점점 커져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의 세 번째 죄는 용기 부족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용기가 부족하여 소심한 아이로 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심함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나는 발표나 많은 주목을 받는 상황을 싫어했고 이런 용기 부족은 나 자신에 대한 일에서도 항상 용기가 부족했다. 앞에 말했던 나태함과 무기력 또한 나는 그 시간들이 반복 될 때조차 용기가 부족하여 빨리 끝내지 못 했다. 그래서 나의 잃어버린 2년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짧아 질수 있었지만 현실로는 이어지 못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용기 내어 엄마한테 뭘 사주라 했었는데 엄마와 작은 말 다툼이 생겼다. 거기에 작은누나도 오면서 자연스럽게 엄마와 누나, 나 이렇게 셋이서 언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소리를 듣고 오신 아버지가 왜 그러냐고 물으셨다. 아버지는 가족끼리 싸우는 게 싫으셨는지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말씀하시고 언쟁을 끝내셨다. 지금에 나는 내가 뭘 어떻게 원하는지 말 할 용기가 부족해서 일이 커진 거 같다고 생각한다. 부모님과 누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더 올바른 선택을 하길 원해서 그러셨겠지만 나는 항상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조차도 말 할 용기가 없는 모자란 놈이었다. 옛날에 나는 가족들이 나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해서 큰 죄책감을 느끼고 그만 그 자리에서 울어 버린 모자란 아이였다. 왜 우는지 물으시는 엄마의 물음에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서 말을 하면 모든 게 핑계와 어리광 그리고 투정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쓰디쓴 추억은 찝찝한 성취와 약간의 쓸쓸함과 함께 끝났고 내 기억 속 어딘가로 숨었다. 가끔 이때의 기억이 은은하게 올라오면서 내가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말 하는 것은 투정이자 어리광 그리고 핑계라는 나만의 사고가 굳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와 같은 사회와 상호작용 하면서 외부적인 용기는 어느 정도 해결 되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내면 안에 용기는 자라나지 못해 속마음 표현에 관한 어려움을 더 크게 만들었다. 그 어려움은 결국 나를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되게 했다. 그래서 ‘인생은 혼자다’라는 생각이 신념이 되어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 왜냐하면 모두 다 언젠가 떠날 것이고 영원한 것은 존재 하지 않으며 나의 곁에 항상 나 자신만이 남아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내가 속마음을 표현 하지 못 하게 무의식의 내가 나에게 채찍질을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나는 무의식의 이도혁인 나 자신에게 싸움조차 걸 수 없는 모자란 놈이다.
‘죄책감이란?’
글을 주위 깊게 읽었다면 내가 지은 죄와 관련하여 항상 느낀 감정이 뭔지 알 것이다. 난 이 감정을 고통스럽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것은 뭐가 있을까? 사랑, 재활치료, 이별 등 생각나는 게 많은 사람도 있고 생각나는 게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것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죄책감이 뇌리에 스친다. 왜냐하면 죄책감은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지만 이 죄책감으로 모든 사람들은 성장하고 깨닫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인지하고 의도적으로 했던 일이나 인지하지 못 하고 비의도적으로 했던 일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쓴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모두가 죄책감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죄책감이란 신이 내려준 벌이자 인간이 될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죄와의 이별’
남들이 내 글을 읽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죄라고 크게 만들어 놓는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을 읽은 여러분도 한번 자신의 내면 안에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작은 것들과 마주 한다면 그것들이 그 누구의 잘못 보다 크고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각자 내면 안에 있는 죄와의 만남을 통해 죄책감을 느끼고 죄라는 인생의 무게를 덜어 착한 사람이 아닌 새로운 인간으로써 살아가자.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착한 사람이길 포기 했다.
첫댓글 도혁이 글 좀 쓰네? 어디서 퍼왔어ㅋㅋ
내면의 작은 죄들과 자신의 서사사이에 인과관계과 빛나도록 아름답기에 빛이 바래어 버린 죄책김이리는 단어
별점 4.5/5
죄책김(x)
죄책감(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