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나무, 산초나무 각종 잡목이 무성하여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며 뚫고 나가는데 개고생 한다.
▲분기점에서 내려온 방향을 뒤돌아본다.
▲감우재 가기 전 잡목과 산초나무가 무성하여 뚫고 나가는데 개고생이다.
▲잡목을 헤치며 37번국도 옛 2차선도로에 내려 우측으로 간다.
▲감우재(甘雨崎) : 음성군 음성읍 감우리와 소여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금왕에서 음성으로 이어지는 舊37번 국도와 새로 생긴 4차선의 37번 국도가 나란히 달리고 있으며 고개가 있는 마을 이름을 따 감우재라고 하였다. 감우재는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이를 기념한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감우재는 일명 기름고개라고도 하여 한자로 질음치(叱音峙)라 쓰인다. 『여지도서』(음성지도)에도 질음치(叱音峙)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이 고개를 넘어 충원현(지금의 충주)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1872년지방지도』에도 관아에서 보현산 동쪽으로 충주로 가는 길이 그려져 있고 도중에 질음치점(叱音峙店) 주막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에는 질음치점 뿐만 아니라 고을의 남서쪽에 위치한 근서면의 주기에 감우치라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질음치점의 북쪽으로 가면 사정리를 통해 충추로 가는 길과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 사정리점(沙丁里店) 주막도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조선지지자료』에는 음성면 감우리에 감우치가 있는데 한글로 '감우 '라 기록되어 있다.『조선지형도』에는 보현산 북동쪽에 위치한 감우리와 서우리를 연결하는 길목에 감우재의 또 다른 이름으로 전해지는 유현(油峴)이 나타난다. 또한, 유현은 일본어로 'キル一コケ(기름고개)'라 기록하고 있다. 한편, 고개이름을 따온 감우리는 예로부터 마을에 단비가 많이 내려 감우리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감우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영남의 소장수 한사람이 한양의 소전에 가는 길에 이 고개에 와서 쉬는 참에 소 신발을 만들어 놓은 짚신이 갑자기 소낙비에 떠내려가서 한 짝은 우측 소여리로 떠내려 음성 소이, 괴산 불정, 달래강 목계 여주 벽절 앞 바위틈에 멈추어 있고, 또 한짝은 좌측의 감우리쪽으로 떠내려 가서, 금왕, 생극, 장호원, 여주의 큰 하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곳에서 소장수가 기다리고 있다가 벽절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짚신 짝을 소장수가 건져서 하느님이 내려주신 짚신이라 크게 감동하여 소 장터에 소문을 내어 짚신을 많은 돈을 받고 팔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 고개 떨어지는 빗방울은 반쪽으로 갈라져, 좌. 우로 간다고 하여 이별의 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37번 국도에 내려 뒤돌아본다.
▲37번 국도를 무단 횡단하여 주유소 뒤 감우재 전승기념관으로 진입 하고자 하였으나 차량 흐름이 너무 많아 우측 도로 따라간다.
▲37번국도 옛날 2차선 도로에 내려서고 우측 소요교차로 방향으로 간다.
▲소요교차로에서 좌측 음성로 방향으로 간다.
▲37번 국도를 지하통로를 지나 좌측 도로 따라 무극전적관광지로 간다.
▲감우재 전승 기념관 : 1950년 7월 4일부터 7월 10일까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전쟁을 도발하여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장호원에서 충청북도 음성군 방향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제15사단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7월 4일, 음성군 방면으로 이동하여 방어망을 구축하고 북한군에 대비하게 되었다. 1950년 7월 5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부근에서 북한군을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7월 6일과 7일, 국군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 있던 북한군을 공격하여 무극리를 탈환하고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하여 부용산과 무극리 남쪽 백야리 351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일전에 대비하였다. 7월 8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서부에서 이동해 온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북한군 15사단 병력이 남하해 오자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감우재(기름고개)에서 적 1개 중대를 섬멸하고, 또 다시 공격해 오는 2개 중대도 격퇴하였다. 7월 9일, 북한군 1개 대대 병력이 재차 공격해 오자 제11연대 제2대대는 감우재에서 적을 격퇴하였다. 6·25전쟁 당시 감우재에서는 4차의 전투가 벌어졌다. 감우재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 2,707명을 사살하였고, 17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각종 포 24문, 박격포 7문, 차량 65대, 장갑차 7대, 기관총 55정, 소총 1,187정, 무전기 4대를 노획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감우재 전투에서 국군은 71명이 전사하였고, 113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식수대에서 물보충을 하고 쉬어간다.
▲감우재 전투를 포함한 음성지구 전투는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켜 낙동강 방어선 구축의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군과 국민들에게 승리에 대한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현재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산1-1 일대에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무극전적국민관광지가 조성되었고, 2003년 11월에는 감우재 전승기념관을 개관하여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전승기념관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음성타임캡슐 2000
▲충혼탑 뒤로 나가면 임도길이 나오고.
▲임도 따라 올라가면 고개 정상에 올라서게 되는데 연농원 간판 앞이다.
▲임도에서 우측임도 따라 올라간다. 이곳 좌측으로 조경 농원이 있다.
▲우회길과 합류한 마루금, 연 농원 삼거리를 뒤돌아본다.
▲임도는 묘지가 나오면서 없어지고 묘지 우측 절개지 능선으로
올라간다.
▲잡목 숲을 헤치며 올라서니 희미한 길이 이어지고...
▲진행방향 좌측으로 한남금북정맥 능선과 그 아래 감우리와 멀리 무극저수지가 보인다.
▲벌목지에서 지나온 분기점을 뒤돌아보고
▲거의 북동으로 가는 마루금 따라 거친 산길을 오르내리고.
▲마루금은 우측 낙엽 덮인 경사면으로 올라야 하나 좌측 사면 등로 따라 우회한다.
▲갈림길에서 우측 방향으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