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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벽루기〔浮碧樓記〕
도읍에 누대가 있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도읍이 번성한데도 풍광을 관람할 장소가 없으면 빈객과 길손의 마음을 위로하고 답답한 회포를 펼 수 없다. 서도(西都)의 승경은 해동에서 으뜸인데, 이 누대의 승경은 또 서도에서 제일이다.
평양성을 나가 몇 리를 가면 금수산(錦繡山) 모란봉(牧丹峯) 아래 바위 벼랑의 빈터에 누대를 만들어 놓고 노니는 곳이 있으니 ‘부벽루’라고 한다. 그 누대가 위로는 산봉우리에 기대고 아래로는 강물을 굽어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데, 산빛과 물빛이 모두 연녹색〔嫩碧〕을 서로 비추어 그 빛이 밝은 공중에 떠서 아른거리기〔浮動〕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끊어진 모란봉 기슭이 벼랑을 이루어 푸른 절벽이 우뚝 솟았는데 기암이 웅장하고 그 발치에는 칡넝쿨이 얽히어 남향으로 서려 있다. 장성(長城)의 성가퀴는 구름에 덮인, 듬성하기도 하고 빽빽하기도 한 숲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맑은 강 한줄기가 누대 아래에 다다라 제비 꼬리처럼 갈라져 두 줄기를 이루고, 그 가운데 사람이 살 만한 모래톱을 능라도(綾羅島)라고 하는데 몇 리를 못 가서 다시 하나의 강물로 합쳐진다. 넘실넘실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흰 무지개와 같은데 구불구불 장성을 감싸고 흘러가서 남쪽으로 푸른 바다와 통하여 밀물과 썰물이 왕래한다. 이것이 이 누대가 산과 강의 승경을 얻은 것이다.
가까이로는, 평평한 모래톱과 깎아지른 절벽, 여기저기 자리 잡은 마을들, 제방을 따라 자라는 버드나무, 뽕나무로 뒤덮인 오솔길, 그리고 강물을 오르내리는 돛단배와 강물에 가라앉았다 떴다 하는 물새들, 이런 풍광이 모두 발아래에 펼쳐진다. 그리고 멀리로는, 교외 들판에 비단 무늬처럼 이랑과 고랑이 보이는 전답이며 우거진 숲과 무성한 풀이 아득하여 끝이 없고, 아스라이 보이는 여러 산봉우리는 마치 상투머리와도 같은데 띄엄띄엄 아름다운 모습으로 구름 밖에 반쯤 드러나 있다. 이런 광경을 모두 편안히 앉아서 다 감상할 수 있다. 그러니 무릇 멀고 가까우며 높고 낮은 장대하고 탁 트인 대지의 광경을 기뻐할 만하고 완상할 만한데, 누대를 둘러싸고 있는 동남 방향의 풍경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숲 속의 꽃이 붉게 피어 아롱지고 나무에 그늘이 지고 녹음이 우거지며 하늘은 높고 달은 밝으며 서리와 눈이 하얗게 쌓이는 등 사시(四時)의 풍경이 철 따라 달라지는 것과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가 다시 끼며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져서 어두움과 밝음이 서로 변화해 가고 광채가 찬연히 빛나는 등 아침저녁으로 경치가 달라지는 것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감상해도 다함이 없고 아무리 말해도 싫증이 나지 않으니, 비록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광경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술을 마시는 자는 왁자지껄 떠들썩하고 노래하는 자는 목청을 돋우어 격렬히 소리를 지르고 시를 읊조리는 자는 근심에 겨워 괴로워하고 활을 쏘는 자는 서로 읍하고 사양하는 등 즐거움에 빠져 머뭇거리고 상념에 젖어 방황하느라 미련이 남아 쉬이 떠나지를 못한다. 비록 고금의 호걸이 서로 느끼는 즐거움은 다를지 몰라도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는 것은 역시 각각 자신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세 번 경사(京師)에 사신을 갔고 두 번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모두 다섯 번 평양성에 들렀는데 이 누대에 올라온 것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난 을사년(1485, 성종16)에 또 천추 진하사(千秋進賀使)로 이곳에 왔었다. 그때 감사 박공 건(朴公楗), 서윤 안군 선(安君璿), 판관 정군 숙돈(鄭君叔墩)이 배 안으로 와서 맞이하였다. 그들은 누대가 있는 언덕을 손을 들어 가리키고 술잔을 잡고서 나에게 말하였다.
“고구려의 삼양(三壤)은 모두 대읍이지만 그중에서도 평양이 가장 번성한 곳으로 단군(檀君)이 일어나신 곳이자 동명왕(東明王)이 거처하시던 곳입니다. 그 구제궁(九梯宮)의 터가 바로 지금의 영명사(永明寺)입니다. 바위 굴이 깊은데 기린마(麒麟馬)는 돌아오지 않고, 조천석(朝天石)이 강 가운데 드러나 있는데 조천하던 기린마의 발자국은 예전 그대로입니다.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가 동서에 있는데 선어(仙馭)가 노닌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 신이하고 허탄한 자취는 황홀하여 믿기 어렵습니다. 기자(箕子)가 구주(九疇)의 학문으로 팔조(八條)의 교화를 베풀어사람들이 예절과 의리를 알고 공경과 겸양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런 유풍과 여운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고려 때에는 서경(西京)을 두어 순행하는 데 대비하였으니 500년 문물의 영화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조(世祖)께서 이곳을 순행하시어 어가를 멈추고 이 누대에 납시어 과장을 열어 선비들을 뽑았으며 친히 아름다운 글을 쓰셨는데, 그 글이 찬연하고 낭랑하여 사람들의 귀와 눈에 밝게 빛난 것이 후세에 이르도록 없어지지 않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읍의 웅대함과 성곽의 장려함과 여염의 번성함이 신라와 백제의 유허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경사로 가는 대신과 중화의 선비들이 왕래하여 끊이지 않는데 그들은 반드시 이 누대에 오르곤 합니다. 그렇지만 누대가 오래되었는데도 수리하지 않아 동우(棟宇)가 장차 퇴락할 형세이므로 다시 영건하여 멋지고 아름답게 꾸미고 싶습니다. 그대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다음 해 병오년(1486, 성종17)에 박공이 체직되고 내가 이곳에 후임으로 오게 되었다. 나는 박공이 계획한 규모를 바탕으로 자금을 모으고 공력을 들여 몇 개월이 지나 누대를 완공하였다. 또 긴 회랑 몇 칸을 지어 그 아래에 날개를 펼친 듯이 이어 붙여, 낭료들이 거처할 방을 마련하고 목욕할 곳을 두었는데, 누대를 지어 놓은 것이 지극히 장려하여 비교할 데가 없었다. 이에 손님들이 왔을 때 크게 풍악을 울리고 낙성하였다. 마침내 그 형승과 사적을 자세히 서술한다.
정미년(1487, 성종18) 중추에 관찰사 성현은 기록한다.
< 출전: 한국고전번역원 db>
浮碧樓記
都之有樓臺。古也。以都邑之盛。而無觀覽之所。則無以慰賓旅而宣湮鬱之懷。西都之勝甲海東。而樓之勝。又甲於西都。出城數里。錦繡山牧丹峯之下。因崖窾構樓以遊。而名之曰浮碧。謂其仰憑峯巒。俯挹江瀨。山光水色。嫩碧相映。而浮動於空明中也。峯斷成崖。翠壁崢嶸。奇巖贔屭。支股轇葛而南蟠。長城雉堞。隱現於雲林叢薄之間。澄江一帶。觸樓之下。燕尾分爲二派。其中可居洲曰綾羅島。未數里復合爲一。溶漾演迤如白虹。蜿蜒抱長城而流。南通碧海。潮汐往來。此樓得山谿之勝也。近則平沙斷岸。籬落縱橫。楊柳連堤。桑柘蔭徑。與夫風帆雨楫。沙禽水鳥下上而浮沈者。皆出乎履舃之下。遠則平郊緬邈。田疇綺錯。茂林豐草。一望無際。遙岑群岫。如丫如䯻。點點脩姱。半露雲表者。皆在乎衽席之內。凡地之遠近高下。壯大宏廓。可喜可翫。環樓之東南者。悉莫逃於眼界。至如林花赬駁。樹陰綠縟。天高月白。霜雪縞積。而四時之景不同。雲煙開斂。日月出沒。晦明變化。光彩絢爛。而朝暮之景不一。探之無窮而討之不厭。雖有智者。不能窮其狀也。或飮者呼呶。歌者激裂。吟者愁苦。射者揖讓。留連彷徨。徙倚而不能去。雖古今豪傑。所遇之樂不同。而得之於目。寓之於心者。亦各適其適也。余嘗三赴京師。再爲宣慰使。凡五過城中而登陟玆 樓亦非一也。歲乙巳。又以千秋進賀使到此。時監司朴公楗,庶尹安君璿,判官鄭君叔墩來迓舟中。仰指樓崖。執盞謂余言曰。高句麗三壤皆大邑。而惟此平壤爲最阜。檀君之所起。東明之所居。九梯宮之基。卽今之永明寺。嵒窟深而獜馬不返。石出江心。而朝天馬跡如舊。靑雲白雲東西有橋。而仙馭之遊已遠。其神蹤誕蹟。恍惚難信。箕子以九疇之學。設八條之敎。人知禮義。俗尙敬讓。流風遺韻。猶有存者。高麗置爲西京。以備巡幸。五百年文物之縟。至于今不替。世 廟來巡。駐蹕登御。設科取士。親揮膚藻。炳炳琅琅。耀人耳目者。垂後世而不刋。然則都邑之雄。城郭之壯。閭閻之殷。非如羅濟之遺墟也。每歲赴京大臣與夫中華之士。往來而不絶。必登此樓。樓久不葺。棟宇將頹。擬欲改營而侈美之。於君意何如。明年丙午。朴公見遞。而余來代之。因朴公規模。鳩財僝功。閱數月而告成。又作長廡數間以翼其下。郞僚有室。泡湢有處。樓之制作。極壯無比。於是因客之至。大張絲竹而落之。遂書形勝事蹟而鋪敍之。丁未仲秋。觀察使成俔。記。
[주1] 부벽루기(浮碧樓記) : 1487년(성종18) 8월 평양에 있는 부벽루의 중건 시말을 적은 기문이다. 전임 관찰사 박건(朴楗)의 뒤를 이어 성현이 완성하였는데, 저자는 누각에서 조망하는 자연 경관에 대한 묘사와 역사적 고사의 인용을 통하여 부벽루의 영건 의의를 강조하였다. 특히 구양수(歐陽脩)의 〈취옹정기(醉翁亭記)〉와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사용된 표현 방법과 문자를 자유롭게 응용하여 그 흥취를 풍부하게 한 것이 인상 깊다.
[주2] 서도(西都) : 평양의 옛 이름이다. 평양을 서경(西京)이나 서도, 호경(鎬京) 등으로 부른 것은 도읍을 개경(開京)으로 정한 고려 시대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고려 광종(光宗) 11년(960)에 서경을 서도로 개칭하였다.
[주3] 이 누대의 …… 제일이다 : 이만수(李晩秀)의 《극원유고(屐園遺稿)》 〈부벽루중수기(浮碧樓重修記)〉에서도 “기성(箕城)을 둘러싸고 10보에 누각이 하나 5보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연광정과 부벽루가 으뜸을 차지한다.〔環箕都十步一樓五步一亭, 練光浮碧, 居其最.〕”라고 하여 부벽루가 누대의 제일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주4] 장성(長城)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0 〈신라본기(新羅本紀) 헌덕왕(憲德王)〉에 “18년 가을 7월에 우잠 태수(牛岑太守) 백영(白永)에게 명하여 한산(漢山) 북쪽 여러 주군(州郡)의 거주인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浿江)에 장성 300리를 쌓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주5] 맑은 …… 합쳐진다 : 1910년대의 사진과 현재 북한의 축척 5만분의 1 지도를 상고해 보면, 능라도가 부벽루보다 훨씬 상류에서 시작되고 있다. 아마도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퇴적물이 능라도의 앞쪽에 더 많이 쌓인 것으로 추정된다.
[주6] 아스라이 …… 같은데 : 원문은 ‘요잠군수(遙岑群岫) 여아여계(如丫如䯻)’이다. 아계(丫髻)는 주로 송나라 시대에 처녀와 총각이 송아지 뿔처럼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 올려 묶은 머리를 말한다. 여기서 산을 아계에 비유한 것은 산이 멀어 상투머리처럼 작고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주7] 각각 …… 것 : 《장자》 〈대종사(大宗師)〉의 “이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할 일을 대신 처리하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여겨 자기의 즐거움을 스스로 즐거워하지 못하는 자들이다.〔是役人之役, 適人之適, 而不自適其適者也.〕”라는 대목에 나오는 말이다. 소식이 〈이담육마도찬(李潭六馬圖贊)〉에서 “저 가려워하는 말을 보건대 입술을 들고 목구멍을 드러내 보이네. 그 가려울 때는 비빌 수 있는 마른 나무의 등걸도 만전의 값어치가 있어 금옥을 메달아 주어도 말이 편안한 것이 아니라네. 오호, 각각 자신에게 알맞은 것을 알맞게 해서 자신의 천성을 보존하는 법이네.〔相彼癢者, 舉唇見咽. 方其癢時, 槁木萬錢. 絡以金玉, 非爲所便. 烏乎! 各適其適, 以全吾天乎.〕”라고 하였다.
[주8] 숲 속의 …… 것이다 : 이 부분은 부벽루에서 사시와 조석으로 변하는 자연 경관을 감상하는 것과 누각 안에서 다양하게 회포를 푸는 광경을 서술한 것인데, 문장의 기축(機軸)과 작법이 구양수(歐陽脩)의 〈취옹정기(醉翁亭記)〉와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를 차용하거나 변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9] 경사(京師) : 한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명나라의 도읍인 북경(北京)을 의미한다. 경사는 본래 《시경》 〈대아(大雅) 공류(公劉)〉의 “이에 높은 언덕을 보시니, 높고 사람이 많이 살 만한 들이기에, 거처할 만한 곳에 거처하게 하였다.〔乃覯于京, 京師之野, 於時處處.〕”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처음에는 지대가 높고도 평평하여 사람이 많이 살 만한 곳이라는 뜻이었지만, 점차 천자가 거주하는 도읍, 한 나라의 국도를 뜻하는 말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주10] 삼양(三壤) : 고구려의 중요한 근거지와 요충지였던 요양(遼陽), 평양(平壤), 한성(漢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37 〈잡지(雜誌) 백제(百濟)〉에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취하여 한성을 도읍으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동사강목(東史綱目)》 제2 하에도 “고구려 북한산군(北漢山郡)을 혹은 남평양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한양(漢陽)이다.”라는 안정복(安鼎福)의 주석이 보인다. 그리고 김경선(金景善, 1788~1853)의 《연원직지(燕轅直指)》 권1 〈봉황성기(鳳凰城記)〉에 “살펴보건대 《당서》에 ‘안시성은 평양과의 거리가 500리이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며, 《지지》에는 또한 ‘봉황성을 평양이라 한다.’ 하였다.〔按唐書, 安市城, 距平壤五百里, 鳳凰城, 亦稱王儉城. 地誌, 又以鳳凰城稱平壤.〕”라고 하고, 그 아래에 평양과 패수(浿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평양은 수도를 뜻하고 패수는 그 근처에 있는 강이라고 언급한 다음, 당시 요양현(遼陽縣)을 예전의 평양으로 비정하였다.
[주11] 구제궁(九梯宮)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1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에 “동명왕(東明王)의 궁으로 예전에 영명사(永明寺) 안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 권29 〈궁실지(宮室志) 성궐(城闕)〉 등 다수의 문헌에 관련 사실이 보인다.
[주12] 바위 …… 그대로입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1 〈평안도 평양부〉에,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에 대하여 서술하기를 “기린굴은 구제궁 안 부벽루 아래에 있다. 동명왕이 이곳에서 기린마를 길렀다고 하는데, 뒷사람이 비석을 세워 기념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왕이 기린마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가 땅속에서 조천석으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그 말발굽 자국이 지금까지 돌 위에 있다.”라고 하였다. 영조 때 제작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군현지도집인 《해동지도(海東地圖)》와 1872년에 발간된 지방지도인 《평양지도(平壤地圖)》에 능라도 아래 조천석이 표시되어 있다.
[주13] 청운교(靑雲橋)와 …… 있는데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1 〈평안도 평양부〉에 “모두 구제궁의 터 안에 있는데, 동명왕 때의 돌계단이다.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지 인간의 솜씨를 빌린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에 “부벽정의 남쪽에 돌을 다듬어 만든 계단이 있는데 왼쪽에는 청운제(靑雲梯), 오른쪽에는 백운제(白雲梯)라고 돌에 새겨 화주(華柱)를 만들어 놓아 호사자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홍생(洪生)이 배를 타고 부벽정 아래에 와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간 것을 보면, 부벽루와 대동강 연안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14] 선어(仙馭)가 …… 오래되었습니다 : 선어는 학을 타고 신선처럼 노닌다는 뜻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동명왕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주15] 기자(箕子)가 …… 베풀어 : 구주(九疇)의 학문은 《서경》에 전해 오는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의미한다. 홍범구주는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린 뒤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새겨진 무늬를 보고 만든,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조항의 대법(大法)을 말한다. 은나라가 망하게 되자 기자가 이것을 주 무왕에게 전해 주었고, 기자는 또 조선에 봉해져서 교화를 널리 폈다고 한다. 그 아홉 조항은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및 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이다. 《書經 周書 洪範》 팔조(八條)의 교화는 기자가 지었다고 하는 고조선의 법률을 말하는 것으로, 팔조금법(八條禁法)이라고도 한다. 그 가운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목숨으로 배상한다〔相殺償以命〕,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곡물로 보상한다〔相傷以穀償〕,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相盜者沒爲其家奴婢〕는 3개 조항 등이다. 《增補文獻備考 卷127 刑考 刑制》 팔조지교(八條之敎)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이설이 있다.
[주16] 세조(世祖)께서 …… 쓰셨는데 : 관련 내용이 《세조실록》 6년(1460) 10월 16일 기사에 자세하다. 세조는 이날 문과(文科) 전시(殿試)를 설행하게 하고 부벽루에 올라 무거 사후(武擧射帿)에 친림하였다. 그리고 고려 의종(毅宗)의 시를 보고 감회가 일어 칠언시 한 수를 써서 판에 새겨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