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실동 연중 6주일 강론
2025.02.16 일 오전 10:57 ~ 9분 17초
박정원 요한 주임신부님
1. 인사말
찬미 예수님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도 잘 지내셨어요.
제가 웬만하면 마스크를 안 쓰고 답답하시죠? 그렇죠 잘 들리세요.
마스크를 안 쓰고 하고 싶은데 마스크를 안 쓰면 이렇게 자꾸 여기 콧물이 맺혀가지고 이렇게 뚝뚝 떨어지니까 지저분하실까 봐 마스크를 쓰고 합니다.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습니다. 모든 생명이 온 겨울을 뚫고 새 봄을 맞이하게 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 각자가 겪고 있는 겨울 잘 나셔서 봄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복음 다시 보기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좀 의심을 갖고, 의구심을 갖고, 좀 다시 봤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 가난하면 행복합니까? 가난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혹여 훗날 하느님 나라가 우리 치지가 된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가난하면 서러울 일이 너무 많습니다.
굶주려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배부를 거야라는 그 약속이 지금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우는 사람에게 행복하다고 너는 나중에 웃게 될 것이라는 말은 위로되지 않는 입에 발린 말처럼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미움, 우리 그거 결코 못 견딥니다.
신앙의 확신이 나조차 들지 않아서 가족들에게 갈등이 빚어질까 염려돼서 성당 가자는 말도 잘 못하는 판국에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을까 그것을 이렇게 쉽사리 감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100번 양보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내 삶에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나에게 돌아오는 게 만약 돌아오는 게 사람들의 미움, 상처, 모욕이라면 그 갈등과 부딪힘. 과정에서 생기는 감정선 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의 보상이 아무리 크고, 설령 그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차라리 지금 이 땅에서 내 주변 사람들하고 잘 지내면서 그곳에서 인정받고 싶지, 또 그 인정을 받아서 가족들하고 잘 지내고 이웃들과 잘 지내고 싶지 하늘나라에서 받을 보상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3. 참 행복의 이해
(사도 바오로의 행복에 대한 가르침)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참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는 그 답을 제2독서에서 찾고 싶습니다. 제 이독서의 사도 바오로는 이런 말을 해요.
여러분들 조금 이 부분의 말을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한번 들어봐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을 뒤집어서 해석하면 우리가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가 거는 그리스도의 희망은 이 현세가 아닌 저 하늘 위를 지향해야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 희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는 것입니다.
다시 여러분들 질문을 제가 아까 처음 문제 제기했던 것으로 원점을 돌려서 우리 바라보고 싶어요.
복음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했던 참 행복의 가르침 그것은 결국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 나는 행복해질 거야 라는 이 세상에서의 역전이라는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습니다.
다시 쉽게 말해서 나 지금 가난하지만 성당 다녀와서 열심히 기도하면 나중 돼서 나 부자 될 거야.
아니요. 나 지금 울고 있어. 너무 슬퍼. 하지만 하느님 믿으면 웃게 될 거야.
세상에서 복을 받을 거야. 아니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거는 희망은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셨다는 것 즉 죽음 그리고 죽음 그 너머의 희망 부활이라는 참 말이 안 되는 그 희망의 행복이 있음을 우리는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부유하고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고 있고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그런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행복의 정점을 세상적인 가치에만 두고 자신의 모든 삶을 메어놓게 되면 그들에게는 죽음 너머의 희망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진정한 행복으로 건너갈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은 다시 오늘 제1독서의 말씀과도 연결이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 그리고 곧 쓰러질 즉 사라지고 없어질 그 몸을 자신의 힘이 전부인 양 여기는 이의 마음은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4. 행복의 근원은 하느님
(주임신부님의 행복론)
사실 여러분들 종교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여러 체험 가운데서 가장 힘겹고 조금은 고된 시간 안에서 고독을 맞이한 이에게 평화를 추구하고자 찾는 현상이라고 보여지면은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잘 나갈 때 아쉬운 거 하나 없을 때 하느님 찾기란 쉽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그게 인간의 얄팍한 마음이지만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 나갈 때는 내가 아쉬운 바는 없을 때는 행복의 근원이 자신의 생명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영원할 거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1독서에 우리 자신이 잘 나갈 때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의 마음은 어떤 비유를 써서 표현하냐면 광야에 메마른 고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즉 영원한 생명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자신만의 바벨탑으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쌓아 올린 그 끝의 결과는 구원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5.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분께 희망을 두는 사람
그러나 오늘 제1 독서의 표현 그대로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무더위가 닥쳐와도 생명을 뽑아낼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희망은 죽음 너머의 생명 부활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을 여러분들 다시 보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가운데서도 부활이라는 희망을 지향한다면 참 행복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된다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본당 교우여러분 내 삶에서 오는 여러 행복의 가치를 이 세상 것을 취하면서 올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양 그 소멸될 목숨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는 세상이 주는 잠시면 지나갈 행복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진정한 행복은 아닐 겁니다.
오늘 화답송을 후렴구로 강론 마치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