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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작전과 기적의 배
1. 6. 25 전쟁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04:00시 북한 인민군은 수십대의 전차를 앞세워 155마일 전 전선을 돌파 남쪽으로 총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 김일성은 전쟁 전에 수차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을 만나서 남침계획을 설명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공개된 구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당시 북한 인민군의 실력이 전쟁을 치를만한 전투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행사를 기피했으나 김일성과 모택동은 매우 적극적이 였다. 그러나 김일성의 수차에 걸친 설득에 중국이 지원하는 조건하에 스탈린은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김일성은 박현영의 말을 듣고 일단 전쟁이 터지면 남한내에 퍼져있는 좌익세력들이 일어나 북한을 도울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북한군은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이틀간 서울에서 재정비한 후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을 재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떠났고 한강다리는 6월28일 새벽 02:30시에 폭파되었다. 사전 경고도 없이 많은 시민들이 한강을 건너기도 전에 다리가 폭파되어 차량 50대와 500여명이 다리밑으로 떨어져 수장되고 말았다. 6.25당시 북한군의 전투력은 모든 면에서 국군을 압도했다. 북한은 소련제 T-34/85형 전차200여대를 비롯해 장갑차 대포는 물론 지상군 숫자도 13만5천 여명으로 국군 6만5천 여명에 비하여 7만명이나 많았다. 남쪽은 전차와 장갑차는 한대도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김일성은 남침을 위한 사전준비를 미리부터 차곡차곡 해왔고 남측은 미 군사 고문단의 감시와 미국정부의 견제로 무력증강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이승만은 말로만 북진통일을 외쳤지 실제 준비는 미약한 상태였다.
사실 6.25 이전에 육군본부 정보국은 북한군의 심상치 않은 동태 즉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를 수 차례 하였으나 국방부와 육군의 수뇌부는 이들 정보보고를 무시했다. 오히려 적의 기습공격을 조장하는듯한 조치를 하였으니 6.24일, 토요일에 전선의 비상경계를 해제하고 전방병력의 절반 이상을 외출 허용하였고 저녁에는 육본 장교클럽 낙성파티에 전방 사단장들까지 초청하는 믿기지 않는 일을 벌렸던 것이다. 그 외에도 의심스러운 조치가 많았는데 전쟁발발 1주일 전에 숙군작업 일환이라며 대부분의 지휘관을 교체시켰고 여 순 반란사건 여파의 일환으로 많은 전방부대의 위치를 변경 재조정 하는가하면 전방부대의 중화기와 차량 중 60%가량을 일제점검 목적으로 후방 기지창으로 후송시켜 버렸던 것이다.
당시 서울 시민 144만명 중 북한군이 서울 점령하기 전에 한강 남쪽으로 피난 간 사람은 40만명 정도 그 중 80%는 월남동포였으며 20%는 정부고관과 그가족 군인 및 경찰가족이 대부분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주미 한국대사 장면에게 훈령을 내려 UN안보리 소집을 요구하고 트루만(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에게 파병을 요청, 6월 26일 UN안보리가 소집되어 북한군의 전면철수를 결의 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계속 공격하여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와 부산을 제외하고는 남한 전역이 거의 김일성의 수중에 들어갔다. 북한군이 서울 점령한 직후인 6월 29일 맥아더(Douglas MacArthur) UN군 사령관은 한강 방어선을 시찰 후 와싱톤(Washington D.C.) 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 UN의 기치아래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에서 참전하게 되었다. 일본에 있던 UN군 첫 참전부대인 스미스(Charles B. Smith)특수임무부대가 7월1일에 부산 수영비행장을 통하여 북진하던 중 오산부근 죽미령고개에서 북한군 탱크부대와 접전 많은 피해를 보았고 그후 추가 투입되었던 미 24사단장 딘(William F. Dean)소장도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에 맥아더장군은 전세를 역전시킬 구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천상륙 작전이 였다. 군산과 울진도 상륙지점으로 고려되었으나 서울 탈환이 가장 용이한 인천을 선정한 것이다. 그러나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서 짧은 시간내에 작전을 종결 짖지 않으면 안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9월15일 05:00시 공격 준비사격과 동시에 한 미 해병부대를 주축으로 월미도를 점령하고 9월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상륙작전에 투입된 함선은 모두 260여척, 상륙 2단계작전까지 투입된 부대는 미 해병1사단 미 7사단과 한국군 해병 1연대와 보병 17연대 병력이 였다. 허리를 짤린 북한군은 북으로 패주하기 시작했고 10월 1일 한국군 3사단은 양양 속초를 거쳐 38선을 제일 먼저 넘었고 UN군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북진하기 시작했다. 미 1군단 예하 미 1기병사단과 미 24사단 그리고 한국군 2군단은 평양쪽 서부전선을, 알몬드(Edward M. Almond)장군이 지휘하는 미 10군단과 김백일장군이 지휘하는 한국군 1군단은 장진호부근의 개마고원 방향인 중동부 전선과 동해안을 담당했다.
10월10일에는 원산, 10월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고 10월26일에는 압록강변의 초산과 중부의 장진호와 혜산진 동부의 성진까지 진출하여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전쟁을 종결하고 한반도를 통일시키는 듯 했다. 그러나 상황은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반전된다.
2. 중공군의 한국전선 개입
1950년 10월15일에 트루만대통령은 맥아더장군을 웨이크(Wake)섬으로 불러 “중공군이나 소련군의 한국전 개입가능성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맥아더의 대답은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압록강변에 배치된 10만~12만5천명 중 5~6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올 수는 있어도 막강한 극동공군력으로 제압가능하다”고 답변했다. 트루만대통령은 처음부터 중공군이나 소련군의 개입에 대하여 무척이나 신경을 썼으나 맥아더의 말을 믿고 일단 1~2개월 내에는 중공군 개입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러나 이때 이미 중공군은 압록강변에서 모택동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10월19일에 중공군은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선에 투입되었다. 모택동은 만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뿐만 아니라 남쪽에 있던 부대들도 한 만 국경지역으로 이동시켜 무려 30만명이나 되는 대부대를 은밀히 침투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밤에만 이동하고 낮에는 산속에 숨어서 꼼작하지 않고 있어서 UN군의 항공정찰에도 전혀 탐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새벽 04:00시에는 일체 기동을 중지하고 05:00시 부터는 무조건 은폐된 숲속이나 바위밑에 숨어서 곰짝말고 주의를 기울이도록 지시받았던 것이다. 야간에만 이동하되 무전기사용을 금지시켰으며 최대한 은밀히 침투하되 일단 UN군과 국군이 배치된 접촉선부터는 도로나 개활지는 절대로 이용해서는 않되고 산 능선을 이용하여 아군의 측 후방으로 기동하여 고지와 중요거점을 확보케 하였다. 보급로와 유사시 아군에게 필요한 퇴로를 사전에 차단하는 작전이 였다. 중공군은 쌀과 옥수수 콩깨묵 미수가루 등의 개인 기본식량과 일제시대부터 사용하던 개인화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추후에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장비 및 군수품을 지원 받기 전까지는 중화기와 탱크는 거의 없는 상태였다.
1950년 10월3일 중국 수상 주은래는 북경주재 인도대사에게 “만약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 중국은 북한을 돕기위해 의용군을 파견하겠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실제로 실현된 것이다. 중공군 투입의 은폐 수단의 일환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중국은 1949년 7월에 이미 팔로군중에서 한인 출신들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하여 인민군 제 6사단으로 개편하여 북한에 투입시켰는데 그 인원이 무려 10,000여명 이였다.
전사가들은 한국전쟁을 크게 3단계로 구분하는데 제1단계는 1950, 6. 25 북한군의 남침으로 인한 개전과 인천상륙작전 제2단계는 38선을 돌파하여 압록강까지 진출, 거의 전쟁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던 시점 제3단계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UN군의 후퇴와 그 이후 휴전까지 전개되었던 밀고 밀리는 치열한 기형적인 전투가 지속되었던 시기이다.
3.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탈환
1950. 9. 15일 새벽 05:00시 공격 준비사격과 동시에 1단계 작전으로 월미도 확보 작전이 전개 되었다. 미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는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항공기의 폭격과 순양함과 구축함에서 퍼붓는 함포 사격속에 수척의 상륙정과 LST를 이용하여 해변에 상륙하여 탱크 9대와 105미리 포벙지원을 받으며 노도와 같이 진격하여 2시간만에 월미도를 완전 장악 했다. 이 작전에서 아군은 인민군 108명을 사살하고 105명을 포로로 획득했으며 미군 부상은 7명에 불과 했다.
2단계 작전으로 한국군 해병 1연대와 보병 17연대 미 해병1사단과 미 7사단을 주축으로 월미도 서쪽 적색해안(Red Beach)에는 미 해병 5전투단 한국 해병 3대대가 선발대의 뒤를 이어 월미도로 상륙하고 록색해안(Green Beach)에는 미해병 1사단 7연대 3대대 전차 1개대대 918포병연대 해병 226독립 연대가 불도저로 상륙지점 교두보를 확보 적 200명을 사살하고 130명을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고 청색해안(Blue Beach)에는 미 해병1사단 1연대가 미 해병1사단장 스미스(Oliver P. Smith)소장과 함께 상륙을 시도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항공기 폭격과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끈기있게 작전을 수행했다. 인천 상륙작전에 투입된 아군함정은 모두 260여척이 였으며 병력은 육 해 공군을 모두 합하면 7만 여명에 이른다. 이는 서울 수복작전까지 망라한 숫자이다. 최초 북한군 주력부대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있어서 인천 및 서울지역은 적의 저항이 약할 것으로 판단했으나 서울을 방어하고 있던 북한군 18사단을 주력으로한 그들의 병력은 상당히 많았고 저항 또한 의외로 강해서 서울을 탈환하는데 1주일이나 걸렸다. 인천 상륙작전시 UN군 전사자는 222명이 였고 부상자는 8백여명이며 북한군은 전사 1,350명에 수 백명이 부상 및 포로가 되었다.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무려 7m이상으로 미 합참에서는 인천 상륙을 처음에는 반대 했다. 짧은 시간내에 상륙을 완료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 확보가 곤란해 질 수 있으며 적에 의한 양개 전선에서의 각개격파 염려도 있었기 때문이 였다. 그러나 맥아더장군의 끈질긴 건의와 고집으로 인천상륙작전은 감행되었고 결국 6. 25전쟁의 전세를 대역전시킨 전사에 빛나는 성공적인 작전이 였다.
4. 38선 돌파와 압록강까지 진격
서울을 뺏긴지 3개월 1950년 9월 28일 드디어 서울이 수복되었고 10월 1일에는 한국군 3사단 23연대가 동부전선에서 제일먼저 38선을 돌파하였고, 아군은 전 전선에서 계속 북진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심장부인 평양을 점령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평양 탈환 기념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1군단과 한국군 2군단은 평양을 거쳐 청천강을 건너 신의주로 진격했다. 한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 선봉대는 10월 26일 초산을 지나 압록강변의 신도강에 도착해서 태극기를 계앙했다. 그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께 바쳤던 일화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때 미 8군 수색대가 중공군포로를 잡았는데 ‘북한군을 지원하는 의용군’이란 말에 정규부대가 참전한 사실을 확실히 포착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던차에 한국군 2군단 예하 백선엽장군의 1사단 15연대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평북 운산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았다. 중국어를 구사하는 백선엽장군은 포로를 직접 심문하여 중공군개입을 확인하고 미 1기병사단과 한국군 1사단을 작전통제하던 미 1군단장 밀번(Frank W. Milburn)장군에게 보고하여 밀번장군도 포로를 심문하고서는 중공군의 한국전개입을 도쿄의 UN군 사령부 맥아더장군에게 보고했으나 과소평가하는 가운데 운산전투에서 미 1기병사단 8연대 병력이 큰 손실을 보았고 평남 개천군 군우리에서는 미 2사단이 대패했고 그 동쪽에서 전진하던 한국군 2군단 7사단과 8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으나 맥아더사령관은 11월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Home-by-Christmas Offensive)를 밀어 붙였다. 맥아더사령관은 1950년 10월 4일 UN군의 공격 제한선을 한 만 국경선으로부터 40km 남쪽으로 정했다가 서부전선의 운산, 초산진격과 동부전선의 개마고원 및 혜산진진격을 보고서는 UN군의 국경선까지의 북진을 잠정적으로 승인하고 말았다. 병사들도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한반도를 통일 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희망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동부전선을 담당한 미 10군단은 미 1해병사단을 최전방 미 3사단이 후속하여 군단의 좌익으로 장진호로 공격하고, 이원에 상륙하여 갑산 혜산진으로 진격하는 미7사단을 중앙에서 개마고원으로 공격하고, 해안선을 따라 청진 나남으로 북진하는 한국군 1군단을 우익으로하여 북으로 진격해 갔다.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북한산 창령 뿐만아니라 함경남도 이원의 마운령 그리고 장진호부근의 황초령고개에 이미 1500여년전에 세워젔다는 역사적 사실속에 우리세대에 와서 UN군의 진격이 두 순수비가 세워진 준령을 넘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게 하는 현상이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현재 함흥시 본궁에 이전 보존되어 있으며 북한 국보문화유물 제110호 및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5.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 후 실시된 결정적인 전투다. 중공군 제 9병단은 한반도 동북부에 침투하여 장진호지역에서 미 10군단을 기습공격 했다. 매서운 혹한속에서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간 실시한 전투로서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의 3만 여명과 송시륜이 지휘하는 중공군 제 9병단의 12만 여명간에 전개된 치열한 전투다. 장진호 부근에 도착한 중공군 42군단은 송시륜으로부터 UN군의 전진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10월 25일 서부전선의 한국군 2군단이 처음 중공군과 접전했으나 미약한 상태였고 11월 2일에는 동부전선의 미 해병1사단이 중공군 124사단과 진흥리 부근 고지에서 조우 접전했고 이 전투에서는 아군이 오히려 중공군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있는 상태에서도 맥아더장군은 미 8군에 대하여 크리스마스 공세를 밀어 붙일것을 명령했다.
미 10군단은 장진호에서 만포진 강계쪽으로 공격하여 미 8군예하 미1군단과 연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는데 이는 바로 김일성이 쫓겨 와 있는 강계를 점령하므로써 적의 심장부를 장악하기 위함이 였다.
미 10군단은 미 해병1사단, 미 7사단, 미 3사단과 한국군 1군단예하 수도사단과 3사단을 작전통제하여 원산-함흥-개마고원 및 청진 방향으로 진격했다. 스미스(Oliver P. Smith)소장이 지휘하는 미 해병1사단은 함경남도 한복판에 위치한 장진호를 따라 압록강 중류 즉 강계 만포진쪽, 바(David G. Barr)소장이 지휘하는 미 7사단은 함경남북도 경계선을 따라 갑산 및 압록강 최 상류인 혜산진으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김백일장군이 지휘하는 한국군 1군단예하 수도사단과 3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청진 나남을 거쳐 두만강하류로 공격하게 하여 1950년 10월말 경에는 장진호와 혜산진 청진의 턱밑인 성진을 점령한 상태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공격은 멈추게 되고 중공군의 포위속에 그 유명한 장진호 전투가 전개되었다.
미 해병1사단 7연대는 11월 2일부터 중공군 124사단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는데 장진호 남쪽의 진흥리부근의 고지였다. 이미 장진호 남쪽까지 중공군이 침투했음을 알려주는 징후였다. 주간에는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는 UN군이 전선을 장악했으나 야간만 되면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 되었다. 중공군은 개활지보다는 고지나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능선 혹은 협곡의 중요지점을 사전에 은밀히 점령했다가 아군을 포위하거나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11월 6일 중공군 42군단은 UN군을 장진호 쪽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오히려 북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게된다. 11월 16일 미 해병1사단은 하갈우리를 점령하고 11월 24일에는 장진호 서북쪽마을 유담리를 점령했다. 이 지역은 개마고원 서쪽 해발 1000~2000m의 고산지대로 낭림산맥의 줄기이다. 스미스사단장은 중공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사단지휘소를 하갈우리에 정하고 바로 그날부터 야전활주로 공사에 들어갔다. 11월 27일 중공군과 인민군은 전 전선에 걸쳐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했다. 같은날 맥아더사령관은 알몬드소장에게 미 10군단예하 모든병력은 장진호에서 철수하여 흥남항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이리하여 장진호에서의 철수작전은 시작되었다. 장진호 전투는 “죽음의 계곡(Hell Fire Valley)"이라 명명된 유담리-덕동령-하갈우리-고토리 협곡통로를 따라 2중 3중으로 배치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한 전투이다. 1950년 11월 28일 맥아더장군은 미 8군 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장군과 미 10군단장 알몬드장군을 도쿄로 불러 회의를 실시한후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 했다. (We face an entirely new war.)’라고 선언하고 미 합참에 방어작전으로 전환할 것을 보고했다.
12월 9일 맥아더사령관은 알몬드소장에게 “미 10군단은 흥남에서 부산과 마산 및 울산으로 해상철수하여 부대를 집결시키고 미 제8군 사령관 지휘하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미 해병1사단은 해병1연대 5연대 7연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지원부대로 영국군 해병 로얄 코만도(Royal Commando)부대가 있었다. 장진호 서북쪽마을 유담리에서 남쪽하갈우리 및 고토리와 진흥리를 거쳐 흥남까지는 240km의 거리로 미 해병1사단은 이 길을 이용하여 흥남까지 철수해야만 했다.
○ 포위된 미 해병1사단
11월 28일에는 미 해병1사단의 주력인 5연대와 7연대가 유담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된 상태였고 장진호 남쪽아래 하갈우리 사단지휘소에는 2개대대 병력과 지원부대가 방어중이고 장진호 동쪽에는 미 7사단 일부 병력이 전개 중이며 하갈우리 남쪽 고토리의 예비연대인 1연대병력도 중공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였다. 고토리와 진흥리에는 1연대가 후방 방어중이였다.
11월 28일 중공군 58사단이 미 해병1사단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외곽선까지 접근하였고 이에 해병1연대 3대대장 리쮜(Thomas L. Ridge)중령은 야간에 적의 공격이 있을것임을 예상하고 비록 병력부족에 훈련상태가 미약한 후방지원 부대요원을 포함한 전경계부대에 비상을 걸고 전원 사주경계 배치토록 했다. 그날밤 중공군 172연대가 북쪽경계지역으로 173연대는 서쪽경계지역과 남쪽경계지역을 공격해왔다. 치열한 교전 끝에 중과부적인 경계부대는 결국 돌파당했다. 그러나 중공군들은 먹을것과 옷가지를 약탈하느라고 전과확대는 뒷전이 였다. 이에 대대장은 즉각 역습을 실시하여 중공군을 물리쳤고 중공군 2개연대간의 간격을 돌파 분리시키고 통신망을 파괴시킴으로 사단사령부저역을 다시 회복했다. 전투가 끝났을때 중공군은 북쪽 방어선상의 언덕 하나만 겨우 확보한 상태였다. 사단사령부 지휘소인 하갈우리의 경계병력이 점차 감소함에 따라 스미스사단장은 예비연대인 1연대장 풀러(Lewis B. Puller)대령에게 고토리로 부터 증원병력을 하갈우리로 투입시킬것을 명령했다. 선발된 부대는 제41영국왕립해병 코만도(Commando)부대의 드라이스데일(Douglas B. Drysdale)의 특수임무부대(Task Force)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극동군 수송사령관 터너(William H. Tunner)장군이 스미스사단장에게 “모든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이라도 공수철수할 것을 제의”했으나 스미스장군은 ”해병대 역사상 그와같은 불명예는 없었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로써 지상에서의 새로운 방향으로 진격 즉 철수가 개시된 것이다.
○ 중공군의 인해전술
1950년 10월 19일에 중공군은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에 투입되었고 11월 1일에는 서부전선에서 중공군 공격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으며 11월 2일 중국은 방송을 통해 한국전 개입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UN군측은 그들을 중국내 조선의용군으로 판단했다가 11월 6일 맥아더 특별성명으로 중공군개입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중공군의 전투방법은 북한군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였다. 압록강을 건너 전선까지 침투하는 동안 주간에는 아군 항공정찰에 띄지않게 은밀 기동하고 주로 야간에 기동하되 무전기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은밀히 침투하여 아군의 측 후방 중요지점을 점령하였다. 전투시에는 보급로나 도주로차단 제파식 정면공격을 끈질기게 실시하는가 하면 혹은 후방에서 불쑥 나타나기도 했으며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만되면 공격하되 진군할 때에는 나팔을 불거나 징을 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마치 대부대가 공격하는 것처럼 착각 및 혼란케 만들고 달 빛이 밝은 밤에는 피리와 나팔을 애잔하게 불어서 UN군 병사들의 마음을 심란케 만들고 또 위치가 폭로되면 주변 산에 불을 질러 연기가 온산을 뒤덮게 만들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말 그대로 사람을 마치 파도가 밀려 오듯이 제일 앞에서 돌격하던 병사들이 쓸어져 죽으면 똑 같은 방향으로 다시 제 2제파를 투입하고 그들이 또 죽으면 제 3제파를 같은 방향으로 다시 투입시켜 방어 부대가 아예 질리게 만드는 무모한 전투방법이 였다. 그들에게는 전술교리도 없었고 공격조와 지원조의 개념은 물론 상이한 축선에서의 병력투입 방법등은 아예 없는 듯 했다.
○ 장진호와 유담리, 하갈우리
장진호는 개마고원위를 흐르는 압록강의 지류인 장진강을 콘크리트 댐으로 막아서 조성한 2개의 유역변경식 발전용 인공호수로서 넓이는 54.16평방km 둘레는 124km 저수량은 10억5천만입방m이며 해발 1,410m의 고원에 위치해 있다.
유담리는 장진호 서북쪽 끝마을이고 하갈우리는 장진호 남쪽 끝에 위치한 마을로 거리는 약 22km로 차량이동이 가능한 유일한 도로로 연결되어 있는 지점이다. 1,500m고지 중간지점에는 덕동고개가 요충지로 자리잡고 있고 도로는 암석으로 된 일차선으로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넘어야 하는 험한 지형이다. 로면은 이미 동결된 상태였다. 미 해병1사단 1연대와 7연대는 유담리까지 진출했고 사단지휘소 하갈우리에는 2개 대대병력과 사단직할 및 근무지원부대가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삼수 갑산은 개마고원부근에 있는 마을이름이며 현재 이북5도 함경남도에는 삼수군수와 갑산군수가 각각 따로 보직되어 있다. 대통령 임명장과 공무원증도 받은 명예직이다. 삼수갑산과 산수갑산은 완전히 그 뜻이 다르다. 삼수갑산의 삼수는 한문으로 석삼자 물수 三水이고 산수갑산의 산수는 뫼산자 물수 山水로서 그뜻이 전혀 다르다. 장진강 부전강 허천강 세 개의 강물이 바로 삼수지역(三水地域)을 거쳐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삼수갑산(三水甲山)이다. 혹자는 삼수(三水)가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줄기라는 주장도 하나 첩첩산중의 작은 고을이름이 그렇게 광활한 지역을 망라한 것은 아닌 듯 하다.
○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 전방 돌파작전
미 해병1사단장 스미스소장은 고토리와 하갈우리사이 도로룰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을 격퇴하여 보급로를 확보하고 경게병력증원을 위해 후방병력일부를 하갈우리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1 연대장 풀러(Lewis B. Puller)대령은 1개 중대를 투입했으나 실패 후 철수하고 말았고 다시 북상중이던 영국해병 41코만도부대와 1연대 G중대 미7사단 B중대로서 임시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 두 번째 시도가 개시되었다. 지휘관은 41 코만도부대의 드라이스데일(Drysdale)중령이 였다. 12월29일 09:45시에 전차 23대 일반차량 141대에 총 900명의 병력을 차량에 분승하여 전차 호위아래 하갈우리로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 60사단이 집중사격을 가해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4시간 동안에 겨우 4km를 전진했을 뿐이였다. 이에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는데 전진을 계속해야 합니까?”
라고 드라이스데일중령이 스미스사단장에게 무전기를 첬을때 사단장은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중간지점에서 빗발치는 중공군 총탄앞에 부대는 다시 정지해야 했고 동시에 중간쯤에서 진격하던 탄약을 가득 실은 차량이 적 포탄에 명중되자 큰 폭발과 함께 도로에 전복되고 말았다. 후속부대가 따라 올 것이라 생각하고 선두부대는 적의 화망을 벗어나기 위하여 속력을 높여 앞으로 전진을 계속했지만 후속부대들은 전복된 차량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전진못하고 중공군의 총탄세례를 계속 받아야만 했다. 결국 후속부대는 고토리로 철수하거나 포로 신세가 되어야 했고 드라이스데일중령도 부관과 함께 부상당한 상태에서 19:15시에 선두부대가 가까스로 하갈우리 사단지휘소에 도착했다. 큰 손실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수임무부대는 하갈우리 방어에 극히 필요한 병력 300명을 데려올 수 있었다. 훗날 드라이스데일중령이 돌파했던 이 계곡을 ’죽음의 계곡(Hell Fire Valley)‘라 불렀다.
○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철수로 돌파작전
1950년 11월 27일 중공군은 장진호동쪽 신흥리부근의 미 7사단 31연대를 공격 연대장 맥클린(Allan D. McClean)이 부상당한채 포로가 되었다가 나흘뒤 전사했다. 그는 한국전쟁중 전투중에 전사한 최고급 장교였다. 12월 1일 중공군은 다시 장진호 동쪽 신흥리부근의 미7사단 31연대를 야간공격하여 3대대 방어선을 자정경에 돌파함에 따라 09:00시경 2대대장 페이스(Don C. Faith)중령은 약30대의 트럭과 3,000여명의 병력을 하갈우리로 철수키로 하고 13:00시경 출발하였으나 출발과 동시 도로 좌우에 은폐하고 있던 중공군의 기습사격을 받았다. 이에 아군 해병항공단 전투기의 지원을 요청하여 출격했으나 네이팜탄 공격을 너무 빨리 터트려 아군 행군대열에서 폭발하여 부대통제가 무너졌고 퇴각도중에 밤이 되어 항공지원이 끊기자 페이스중령을 포함한 부대원 대부분이 사살 당했다. 차량은 거의 파괴되었고 도로와 계곡에서 기습받은 병사들은 꽁꽁 얼어붙은 장진호 빙판위를 걸어서 탈출하기도 했다. 대대장이 전사하자 이에 해병 전방항공통제관 스탬포드(Stamford)대위가 대대 병력 1,000여명을 이끌고 하갈우리에 겨우 도착했다. 이 돌파작전에서 병력의 3분의2 손실을 보았으나 31연대의 희생으로 중공군의 대병력을 장진호 동쪽으로 유인하는 효과로 서쪽 유담리의 해병 5 7연대가 하갈우리로 보다 용이하게 철수 할 수 있었고 하갈우리의 해병 1사단사령부도 적의 압력을 덜 받게 되었던 것이다.
○ 거점확보를 위한 F중대의 혈전
장진호 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미 해병1사단 7연대 2대대 F중대가 중공군 대병력의 포위망 속에서 6박5일간 끈질기게 싸웠던 혈투로서 11월 28일에서 12월 2일까지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눈 덮힌 덕동령 1,500고지에서 중공군 59사단 예하부대에 포위되어 혈전이 감행되었다. 미 해병1사단 5 및 7연대가 1연대를 예비로하여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철수하고 있을 때 11월 28일 바버(William E. Barber)대위가 지휘하는 F중대는 적의 후방기습 방지를 위해서 전방 2개연대가 위치한 유담리와 후방 지원부대가 위치한 하갈우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덕동고개 방어임무를 부여받았다. 도착과 동시에 병사들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21:00시까지 개인호와 화기엄체호를 구축하고 야간전투에 대비, 예상대로 야음을 타서 연대규모의 중공군이 공격 해 왔으나 중대는 준비된 진지에서 밤새도록 싸워 중공군은 450여구의 시체를 유기한채 퇴각하고 말았다. 29일 아침 바버대위가 전투결과보고와 함께 공중보급을 요청했을 때 대대장으로부터 “중대는 즉시 현위치에서 철수하여 유담리남쪽으로 철수하게 될 2대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바버대위는 F중대가 지금 빠지면 전방에 진출해 있는 2개연대와 지원병력 8,000여명은 꼼작없이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당하고 후방에 있는 예비 1연대와 지원병력까지도 위험에 처함을 느끼고 대대장에게 철수명령을 변경할 것을 건의하기 위하여 무전기를 틀었으나 불통, 차후에 처벌받더라도 덕동고개를 사수하기로 독단 결심했다.
그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유담리의 2개연대는 중공군 79, 89사단의 강력한 압력에 봉착하였으며 중대는 고지에서 완전히 적의 포위망속에 갇히고 말았다. 중대장 바버자신도 왼쪽무릎에 관통상을 입고 앉은채로 지휘하거나 들것에 실린채로 진지를 순회하면서 중대원들을 격려했다. 그의 강인한 의지와 용기에 감동한 중대원들은 영웅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우세한 적의 포위망속에서도 5일간이나 덕동통로를 확보했다. 계속되는 육박전 후 06:30시경에 전투는 거의 끝났는데 중대피해는 전사 26명 부상89명 행방불명 3명으로 47%의 손실을 보았으며 중공군의 시체유기는 450구 였다. 아침이 되어 헬(Helicopter)기와 항공기 공중투하로 씨레이손(C-Ration)과 박격포탄 수류탄 모포 들것등을 지원받았다. 12월 2일 유담리에서 포위망을 돌파하여 천신만고 끝에 F중대와 연결에 성공한 7연대 1대대가 11:25시에 도착했을 때에는 지원부대요원을 포함 240명의 병력중 겨우 87명만이 피로 물든 덕동고개를 걸어나왔다. 특히 장교 7명중 부상당하지 않은 장교는 1명뿐이 였다. 바버대위는 철수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나 사단전체에 기여한 전공이 인정되어 후일 미국 최고명예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er)을 받았다. 바버대위는 중대장으로 보직된지 겨우 20일이 지나지않은 신임중대장이 였다. 그는 1940년 3월에 해병대에 입대하여 공정부대의 병사로 2년간 근무한 후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운 경험이 있고 1943년 11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유황도 전공으로 은성훈장(Silver Star Medal)을 받은 전투경험있는 단련된 베테랑 장교였다.
한편 덕동고개 서북쪽 무명고지에는 7연대 1대대 C중대의 1개 소대가 점령방어하고 있었는데 11월 28일 02:30시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 15명 부상 44명 당하고 1,419고지의 중공군으로부터 완전 감제당하고 있었다. 7연대 1대대장은 C중대와 11월 28일 오후에 연결하였다.
F중대의 덕동고개 전투는 미 10군단이 성공적으로 흥남 철수작전을 실시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중요한 산악도로를 끝까지 확보하여 아군의 퇴로를 확보한 전투였다.
○ 포병 및 차량종대 철수
미 해병 1사단 포병연대 3개대대의 장비는 포 48문 차량 400여대였다. 12월 2일 중공군은 야간에 포병 3대대를 공격하여 105mm 1문과 차량 여러대를 파괴했다. 12월 3일 전선에 눈이 내려 약 13cm 적설량을 기록했다. 동일 13:00시경에 해병 5연대 3대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7연대 1대대와 합류했다. 11월 30일부터 시작된 작전으로 전위대대는 56% 병력손실을 입었다.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까지는 항공지원의 엄호를 받으며 7연대 1대대를 선두로 20:00시경에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12월 4일 14:00시경 후미부대 7연대 2대대도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 22km돌파에 77시간
미 해병 1사단예하 5연대와 7연대 병력 전부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22km를 돌파하는데 선두는 55시간(만 2일 7시간) 후미는 77시간(만 3일 5시간)소요 되었다. 1시간에 286m~370m 즉 1km 전진하는데 평균 2시간 40분 걸린 셈이다.
하갈우리에서는 12월 1일부터 야전활주로를 개통 C-47수송기를 이용하여 밤까지 약 4,000여명의 부상자가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전사자 시신 173구도 포함되었다. 이때 미 언론사 기자들이 수송기편으로 하갈우리 활주로에 도착 그중 뉴욕 헤럴드 트리분(New York Herald Tribune)지의 미모의 여기자 히긴스(Margaret Higgins)의 도착은 전투에 지친 미군병사들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다. 한국전당시 전쟁터를 종횡무진 누볐던 진설같은 여성 종군기자로 수많은 특종과 기사로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퓨리처(Pulitzer)상 국제부문상을 1951년도에 탔던 미국 언론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기자였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그의딸을 청와대로 초청 격려한 바 있다. 그녀가 스미스사단장에게 묻기를 “후퇴작전이냐?” 스미스사단장 대답하기를 “후퇴라니 빌어먹을 우리는 다른쪽으로 진격 중 이라오”라고 호기있게 대답했다. 이말은 지상을 통해 세계각국으로 보도됐다. 미해병대의 불굴의 투지를 알리는 사단장의 이 말이 장병들에게 까지 전파되어 사기앙양된 장병들을 끝까지 분투하게 만들었다.
12월 4일 항공기 후송외의 부상자는 사단전체 약 1,500명 이중 약 600명은 들것에 실려야 하는 중상자였는데 미 해병대의 전통에 따라 1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 수송했으며 그중 3분의 1은 동상환자 였다. 155mm 야포 9문 105mm 1문과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 찦차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비를 철수 시킬 수 있었다.
12월 6일 18:00에 야전활주로는 폐쇄 되었다. 하갈우리의 야전활주로를 이용한 전투지원은 일주일 정도였지만 전투 필수장비지원 보급품수송 부상자후송등 엄청난 기여를 했으며 이는 스미스사단장의 예리한 전술판단의 결과였다.
한편 서부전선 미 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 했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 까지는 차량 1,000여대를 이용하여 철수가 가능했다. 12월 7일 10,000여명 병력과 1,000대 이상의 차량이 40시간 만에 고토리에 모두 도착했다. 지상의 해병부대와 해군 및 해병항공단의 대지공격 전투기들간의 효율적인협조는 전방항공 통제장교와 전투기 조종사간의 유기적인 교신으로 이루어젔고 실제 장진호 철수작전은 이들 조종사들의 헌신적인 공중지원사격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12월 10일 06:00시 미 해병 1사단선두가 함흥에 도착했고 11일 저녁에는 후미부대도 함흥에 도착했다.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 해병 1사단은 전사 718명 부상자는 3,504명 행방불명 192명이였고 비전투사상자는 3,657명이 였다. 비전투사상자는 거의 대부분이 동상이 였다. 중공군 제 9병단은 10월 19일부터 12월 15일까지 전사 25,000명 부상 90,000여명으로 이들 절반이상이 동상이 였다.
○ 동장군과의 싸움
11월 14일 눈이내린 다음날 시베리아 찬 기단 즉 영하 37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이 엄습했다. 땅은 꽁꽁 얼어버렸고 동상환자가 속출했으며 도로는 몽땅 얼어버렸고 소총을 비롯한 무기들도 얼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1,000m이상의 산악지형에 낮에는 영하20도 밤에는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 속에서의 전투는 그야말로 동장군과의 싸움이 였다. 손이 시려고 고와서 소총사격이 힘들었고 M1소총 윤활유는 얼어 붙지않게 엷게 바르고 중기관총은 필히 물대신 부동액을 채우고 경기관총은 불발방지를 위해서 주기적으로 사격을 실시하고 차량도 일정간격으로 시동을 걸어야 했다. 땅 표면이 꽁꽁 얼어붙어서 개인호 공용화기진지 구축도 힘들었고 공중투여 보급품 중 깨지는 것은 온전한 것이 거의 없었고 탄약도 25%정도만이 사용가능한 상태였다. 가장 큰 문제는 전투나 행군후에 땀을 앃지 않으면 바로 얼어버려 동상에 걸리는 문제였고 부상자를 위한 수혈관도 몰핀도 얼어버려 위생병이 입속에 앰플을 물고 다녀야 했으며 붕대도 함부로 감아줄 수가 없었다. 전투식량도 녹여 먹을 수 없어서 그대로 먹어 전투내내 장염과 설사에 시달렸으며 침낭속에서 자더라도 지퍼를 잠그는 것은 금지되었다. 중상자는 잠시만 눈위에 두어도 바로 동사했고 발은 금방 새카맣게 변해갔다. 이와같은 문제는 아군뿐만 아니라 겨울준비가 부족했던 중공군에게는 더 큰 문제였다. 특히 중공군은 열악한 방한장비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멍하니 웅크리고 있다가 포로로 잡히기도하고 집단투항도 비일비재였다. 중공군은 양말대신 발싸개를 하고 목화솜 누런잠바와 바지 운동화 방한모가 전부였다.
○ 장진호 전투에 대한 평가
미군 전사에는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 되어있으나 대부분의 전사가들은 만일 미 해병1사단이 무너젔다면 UN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 해병1사단의 선전은 “한국을 구한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될 수 있다. 장진호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이 벌인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 전투이자 한국전 10대전투의 하나로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간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했던 한국군과 UN군 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 이어 흥남철수 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중공군 9병단은 막대한 인원 손실을 입고 궤멸상태에 이르게 됨으로써 함흥일대에서 4개월 동안 정비한 후에야 차후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때 입은 피해로 1951년 2월에 실시된 중공군 3차 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3차 공세는 후속병력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한강 남쪽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반면 국군과 UN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후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한 미 제8군의 철수작전을 엄호하는 결과를 얻었다.
○ 초신 퓨 (Chosin Few)
초신(Chosin)이란 말은 장진호를 일컽는 말로 일본에서 제작된 지도명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때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지도가 없었다. 일본에서 제작한 지도에 장진호를 영문으로 Chosin Reservoir로 표시했기 때문에 장진호 전투를 Chosin Reservoir Battle이라고 하고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전우들이 모여 1984년도에 만든 단체를 Chosin Few라고 칭하고 있다. 여기서 영문자 ‘Few’는 ‘몇명 살아 남지않았다’는 뜻이다. 미국 캐나다 호주에 살고있는 회원들은 세계 52개지역의 당시 생존자들과 그들가족을 위한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회원 5,000여명으로 결성되었으며 초대회장은 데이비스(Raymond G. Davis)장군(예 대장)으로 당시에는 중령으로 해병 7연대 1대대장직을 수행했으며 2003년 88세로 사망했다. 그는 그의 회고록 「자유 향유의 대가」에서 “평화란 진실로 힘을 통해서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미국에서는 장진호 전투에 대한 수기가 12종류나 출판되었고 그중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길버트(Bill Gilbert)저 「Ship of Miracles」로 안재철씨의 번역으로 2004연도에 「기적의 배」로 출판되었다.
1. 흥남항으로의 집결
고토리까지 간신히 철수한 미 해병1사단은 미해군과 해병대의 근접항공지원을 받으면서 차량 및 도보로 황초령을 지나 수동, 마전을 거쳐 12월 10일에 함흥을 거쳐 흥남항에 선두가 도착했다. 물론 행군중에 전위에는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도로의 좌우 중요고지는 사전에 경계병을 축차적으로 배치하면서 철수했다. 철수하는 부대뒤를 따라 피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부대의 행군장경이 엄청나게 길어서 피난민들이 행군대열 속으로 끼어 들기도 했다. 피난민 대열속에 중공군과 인민군이 끼어드는 것이 큰 문제였다. 미 해병1사단의 철수를 가능하게 한 것은 7함대사령관 스트러블(A. D. Struble) 제독(해군중장)의 77기동부대 소속 항모에서 발진한 항공기의 근접 항공지원을 해병사단에 집중한 결과였다. 우선 지상군과 조종사간에 영어통화가 가능해서 그때 그때 즉각 지원이 가능했다. 흥남도착시까지 지원된 항공기는 고속항모전단 소속 128기 호송항모전단 34기 연포기지 해병항공기 77기등 모두 239기가 효과적으로 지원했다. 함재기들의 폭격은 흥남하늘에 방패를 치듯 공중방패(Aerial Canopy)를 첬고 15척의 군함에 의한 함포사격 철의장벽(Steel Curtain)으로 적의 공격을 차단했다. 미국측 전사에 의하면 12월 7일부터 24일까지 함포사격에 사용된 포탄이 16인치 162발 8인치 2,932발 5인치 1만8,637발 3인치 71발 4미리 185발 로켓 1,462발 도합 23,449발로 인천 상륙작전보댜 1만 3천여발을 더 사용한 것으로 나와있다.
알몬드군단장은 흥남항을 중심으로 3개의 저지선을 선정하고 미 3사단장에게 방어임무를 부여했다. 미 3사단장은 함흥을 연하는 외각선인 제 1저지선에 1개연대 그후방 제 2저지선 그리고 흥남항 가까이 제 3저지선에 각각 1개연대씩 배치하여 중공군진격을 끝까지 저지 했다.
흥남항에는 이미 수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들어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12월 10일부터 흥남부두 철수작전은 시작 되었다. 알몬드장군은 미 해병 1사단부터 철수시키기 위하여 승선 시켰다. 해안에는 미조리함을 비롯한 미 해군 주력부대가 집결 흥남외곽을 둥글게 화망을 구성하여 함포사격을 계속 퍼붇고 함재기들은 쉴새없이 압축해 들어오는 중공군에게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10만 여명의 군인과 탱크 장갑차 대포 및 각종차량이 1만 7천대 탄약 및 화약 9천여톤 연료 2만 9천드럼등 군수물자가 35만톤으로 이것만해도 적재 및 수송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였다. 함흥서쪽에 위치한 연포 비행장을 통하여 우선적으로 병력 3,600명 차량 196대 기타 군수물자 1,300톤을 항공수송했다.
2. 피난민 철수 결정과정
알몬드장군은 “군이 우선이요. 민간인 철수는 불가한 일이요”라며 최초에는 완강히 반대했다. 이에 미 10군단 민사담당 고문관인 현봉학은 평소 절친했던 부참모장 포니(Edward Forney)대령과 상의하고 계속해서 알몬드소장을 설득했다. 알몬드 소장은 10군단병력 10만여명의 군대를 수송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고 상황은 급박했으며 게다가 민간인을 구출할 권한도 상부로부터 받은 지시도 없었고 수송수단도 불충분 했다. 김백일 장군도 알몬드군단장에게 ”피난민을 배로 철수 시키지 않으면 한국군 단독으로 육로로 피난민을 엄호하면서 남쪽으로 후퇴하갰다.“라고 압력을 가했다. 계속되는 현봉학의 설득과 철수 작전의 실질적인 책임자 포니대령의 우호적인 건의에 알몬드장군은 며칠 후 김백일소장 부참모장 포니대령 민사참모 무어(Moore)대령과 회의 끝난 후 현봉학을 호출하여 "UN군을 도와준 한국인과 기독교인들을 흥남으로 철수 시킨다. 오늘밤 12시전까지 4,000명의 한국인을 기차에 태워 흥남으로 데려올테니 함흥역으로 나오게하라.“ 사실 이때 알몬드소장은 UN군 사령관 맥아더장군으로부터 UN군에 적극 협조한 사람들만 철수시켜도 좋다는 말을 들은 상태였다.
문제는 너무 짧은 시간이 였다. 현봉학은 미국인 군목 클러레이신부에게 카톨릭 신자들을 밤 12시까지 함흥역으로 나오라고 연락을 부탁하고 자신은 개신교 군목 옥호열 목사의 찦차를 타고 시청 도청 및 함흥시내 교회를 돌며 “오늘밤 12시까지 함흥역으로 나오라”고 소리치고 다녔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현봉학의 외침은 날개단 듯 퍼저나갔고 그날밤 수 많은 시민이 함흥역으로 모였다. 새벽 2~3시 5,000여명을 기차지붕까지 빼곡이 태우고 30리(13km) 기차길을 3시간이나 걸려서 흥남에 도착했다. 기차 못탄 사람들은 미군헌병의 통제를 피해 논길과 밭뚝을 타고 걸어서 흥남항으로 모여 들었다. 부두에는 이미 도착 해있던 주민들과 함께 수 만명이 모였다. 알몬드 군단장의 요청에 따라 전차 상륙용 대형주정인 LST 11척과 일본에서 급송한 미국 상선과 일부 일본배도 동원되었다. 당시 일본은 미 군정하에 있었기 때문에 맥아더사령부는 일본 상선과 LST도 동원 할 수 있었으며 민간인 인부 1,200명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은 용선 시나노마루(信農丸)에 기거하며 물자와 장비를 배에 싣는 작업을 맡았다. 12월 19일부터 민간인들의 승선이 시작되었다. 1,000명이 타도록 설계된 LST상륙정들은 5,000명까지 승선시켰다. 흥남 철수작전에 동원된배는 모두 193척이였으나 이는 거의 대부분 군사용이 였다.
3. 기적의 배 메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
12월 19일 부산에서 올라온 Meredith Victory호가 흥남항으로 들어왔다. 건조된지 5년된 10,600톤급 미국 국적의 화물 수송선이 였다. 12월 20일 흥남부두에 도착해 쌍안경으로 부두를 살피던 36세의 선장 라루(Leonard P. LaRue)는 깜짝 놀랐다. 군인과 화물만 있어야할 부두에 수 십만의 민간인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 였다. 이때 Meredith Victory호는 아래층 화물칸에 52가론짜리 드럼통 항공유(Jet油) 300톤을 싣고 왔으나 하역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살을 에는 바람찬 부두가에서 서로 먼저 배를 탈려고 아우성치는 장면 울부짓는소리 보따리를 이고 메고 든사람 애기를 등에 업은여인들 부모의 손에 끌려다니는 병아리같은 어린이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 였다. Meredith Victory호가 닻을 내리자 미 10군단 차일드(John Childs)대령을 포함한 영관장교 4~5명이 승선하여 “우리가 선장에게 피난민을 태우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선장께서 자원하여 저 지친 피난민 몇천명만 태울 수 있는지 묻고 싶소. 상급선원과 의논하여 결정을 내려줄 것을 부탁하오”라고 말했다. 이말을 들은 라루선장은 누구와 상의도 하지않고 배를 부두에 댈 것을 명령했다. 임시 사다리를 설치하고 승선 연결장치를 설치함으로써 12월 22일 21:00시부터 피난민 승선이 시작되었다. 라루선장은 일등항해사 러니(J. Robert Lunney 당시 22세)에게 “피난민을 승선 시키시오. 10,000명이 되면 나에게 보고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자정 무렵 5,000명이 승선했는데 갑판위에는 더 이상 태울 공간이 없었다. LaRue 선장은 아래층 화물칸을 포함한 모든공간에 사람을 태우라고 지시했다. 승선은 다음날 오전 11:10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무려 14시간 동안의 승선이 였다. 최종 승선을 마쳤을 때 14,000명이 타고 있었다. 갑판에 빼곡이 타서 서로 어깨를 맞대고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배를 탄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귀를 때리는 함포소리속에 불타는 시가지와 아직도 배를 못타고 부둣가에 운집해 있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 였다.
Meredith Victory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로스안젤리스(LosAngeles)에서 건조되어 1945년 6월 23일 취역한 무어 맥코맥 회사(Moore-McCormack Liner)의 화물선이다. 길이139m 폭19m 흘수선7.6m포함 높이가 19.1m 10만6백58톤의 비교적 큰배에 속하며 SS Meredith Victory라는 이름은 북부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의 작은 대학(College) 이름을 따서 지어젔다. 배 이름뒤에 “Victory"라는 단어가 붙은 일련의 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화물과 장비를 실어 나르는 화물선에 붙인 명칭이다. 배의 정원은 선원35명 간부12명과 승객12명을 포함해서 모두 59명인데 당시에는 47명의 승무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배에는 화물칸(Cargo)이 다섯개 있었는데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아 아래 화물칸으로 내려가 수용되었으나 갑판위에도 피난민으로 꽉꽉 차고 말았다. 상갑판을 포함하여 6개 장소에 14,000명이 탔으니 한칸에 평균 2,300명이상 탄 셈이다. 배에는 먹을 것도 없었고 물도 없었으며 화장실도 없었고 의료진도 통역관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 한군데 바싹 붙어 모여 앉아서 희미하게 비치는 전등불빛만 바라다 볼 뿐이였다. 가장 큰 문제는 대 소변 처리와 음료수 해결이 였다. 먹는 것은 생쌀이라도 씹어 먹거나 그것도 없으면 굷으면 며칠은 버틸 수 있지만 물은 마시지 않고서는 갈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으며 특히 대변과 소변은 참는것도 한계가 있는법 화물칸 한쪽에서 대 소변을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였다. 상상해 보라! 그 악취를! 그래도 피난민들은 불평 한마디 않고 잘도 견뎌 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5명의 신생아가 태어났으니 사람들은 ”생명의 기운이 전쟁의 참상을 이겨 냈다“고 기뻐했고 미국인 선원들은 Oh! My god!를 외치며 이들에게 김치1 김치2 김치3 김치4 김치5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들 중 한명은 Catholic 신부가 되었고 다른 1명 이명철씨는 거제도 장승포에서 가축병원 원장을 하고 있으며 현재 거제도 흥남철수 작전기념 사업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흥남부두를 떠난 Meredith Victory호는 느린 속도로 항해하여 크리스마스 이브(Christmas Eve)에 부산항에 입항할려고 했으나 이미 많은 배들과 피난민들로 꽉 차 있어서 입항하지 못하고 기수를 다시 남쪽으로 돌려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으나 배가 커서 바로 접안 못하고 LST에 옮겨 탄 후에 12월 26일 밤에 육지에 내렸다. 기뢰와 짙은안개 깜깜한 어두움을 뚫고 단 한명의 희생도 없이 다섯명의 신생아를 탄생 시키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이 배를 일명 크리스마스 카고(Christmas Cargo)라고 부르며 이배를 타고온 사람들을 크리스마스 카고의 영웅들이라고 부른다. 피난민들은 장승포 국민학교 운동장에 수용되었는데 남쪽지방이여서 흥남 부두보다는 따뜻한 편이 였다. 아침에는 원주민들이 주먹밥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후 Meredith Victory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퇴역했다가 월남전에 다시 동원되어 작은임무를 수행했고 1993년 영국회사에 고철로 팔려 중국의 어느 항구에서 해체되었다. 우리 나라는 이런 기적의 배 하나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 모형물 보다는 실물을 전시하여 세계전쟁사에 가장 인도적이고 기록적인 역사를 지닌 배를 정부가 구입하여 후계세대에 보여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없을 텐데... Meredith Victory호는 1960년 미국 의회로부터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대통령이 서명한 “용감한 배 (Gallant Ship)”상을 받았고 같은해 한국 정부로 부터도 상을 받은바 있으며 미국 교통부로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실현한 배”로 선포되었다. 2004년 9월 21일에 “한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세계기록”으로 기네스 북(Guiness Book)에 등재되었다. 이는 월드피스 자유연합의 대표이며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기적의 배’ 번역자인 안재철씨와 당시 일등항해사 러니씨의 노력의 결과였다. 라루선장과 일등항해사 러니를 비롯한 모든선원의 일사불란한 팀웍(Team Work)과 생명 희망 자유 사랑에 대한 열정이 일만 사천명의 생명을 구해낸 것이다.
4.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당시 현봉학은 28세의 숙련된 청년으로 미 10군단장 알몬드소장의 민사담당 고문관이 였다. 구름같이 몰려든 흥남부두의 피난민들을 처다보며 고향 함흥에 있는 친척과 친지 그리고 함께 교회 다니던 모든 사람들을 생각 하면서 이대로 공산치하에 저 사람들을 두고 가서는 않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알몬드장군을 설득하는 일 뿐이였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그를 알몬드소장도 무척 좋아했으나 군사작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일에는 쉽게 동의 할 리가 없었다. 현봉학은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부참모장 포니대령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그에게 모든 사정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그는 철수작전의 실질적인 책임자 였으며 이해력도 많고 자비심도 풍부했으며 완고한 군단장을 차근 차근 잘 이해시켰고 현봉학 자신도 계속해서 군단장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UN군을 환영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던 우호적인 사람들이 공산치하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는 알몬드소장도 드디어 마음을 바꿔 처음에는 4,000명만 데리고 철수 할려고 했으나 실제상황은 가능한 한 최대로 승선시키는 방향으로 바뀌고 말았다.
현봉학은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낸 현원국(玄垣國)목사와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申愛均)여사 사이에 5남1여 중 2남으로 태어나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평양 기독병원 인턴을 끝낼즈음 광복을 맞이하여 의사생활을 위해 함흥으로 갔으나 소련군과 공산당의 박해로 의업활동이 불가함을 깨닫고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1947년부터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근무했으며 당시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미국인 윌리암스(Williams)부인 주선으로 미국 리치몬드(Richmond) 버지니아(Virginia) 주립대에 유학 2년 후 임상병리학 Fellowship을 획득한 후 1950년 3월에 귀국하여 세브란스병원 근무중 6. 25전쟁을 맞았다. 공산군의 서울 점령으로 집에도 못 들리고 친구 2명과 함께 한강을 조각배를 타고 건너서 대구에 피난갔던 현봉학은 그곳에서 지인인 2대 국회의원 황성수 목사를 만났는데 황의원이 국방장관 신성모씨에게 영어 잘하는 현봉학을 소개 며칠 후 미 25사단장 킨(William B. Kean)소장의 통역관 명령을 받아들고 미 25사단으로 가던길에 부산에서 손원일 제독을 인사차 방문했더니 인사 끝난 후 해병대 백남표소령 찦차를 탔는데 미 25사단을 지나 마산남쪽 진동리에 있는 한국 해병 김성은중령 부대로 가서는 “당신같은 사람은 한국 해병대에서 일해야 한다”며 그날부터 해병대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김성은중령은 영어 잘하는 현봉학을 데리고 인근 미25사단에 가서 무기와 탄약을 잔뜩 얻어오기도 했다. 김성은중령은 한국전쟁 당시 통영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주역이며 후에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그후 김중령과 현봉학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북진 중 강원도 고성지구 해병부대에서 미 10군단장주재 전술회의중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현봉학을 보고 알몬드소장은 “고향이 어디냐?”라고 묻길래 함흥이라고 대답했더니 며칠 후 함흥에서 이승만대통령을 모시고 행사를 개최하는데 함께 가자고 하면서 그곳으로 초청했다. 행사 끝난 후 알몬드군단장 전속부관 헤이그(Alexander Haig)대위가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임명한다는 영문 명령서를 내 밀었다. 헤이그는 그후 대장으로 전역 후 미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날부터 현봉학은 미 10군단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흥남철수작전에서 한국의 쉰들러가 되었다.
오스카 쉰들러(Oskar Shindler)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Poland)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이자 학살장소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을 돈과 뇌물 기타 모든수단을 동원하여 유대인 한사람 한사람을 돈으로 사서 자신이 경영하던 군납 그릇공장 일꾼으로 고용하여 1,100명의 유대인을 구출해 낸 인간애와 휴머니즘을 몸소 실현한 독일인 실존 인물로 스필버그(Steven A. Spielberg) 감독의 Shindler‘s List 제목의 영화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젔다.
현봉학은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펜실버니아 장로교대학 메디칼센터 에서 레지던트를 마쳤고 펜실버니아 의과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에서 62년까지 뉴저지주 플레인필드(Plain Field)의 뮐렌버그(Mylenberg) 메디칼센터의 병리학자로 근무했으며 1967년까지는 센터의 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그후 버지니아의대 컬럼비아의대 토마스제퍼슨대 펜실버니아의대 등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로 재직했다. 연세대의대 객원교수였으며 미국 임상심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병리학회 회원 및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이 였으며 말년에는 아주대 의과대학 임상병리학 과장으로 근무했다. 2007년 11월 25일 미국 뮐렌버그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 향년 만 85세였다. 형제들이 모두 곱게 성장하여 형 현영학씨는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바로 밑에 동생 현시학은 6.25전쟁때 해군장교로 전공을 많이 세워 전쟁영웅으로 전쟁기념관에 그의 사진이 전시돼 있으며 해군사관학교 교장을거쳐 1966년에 소장으로 예편하여 이란 멕시코대사를 지냈고 1989년에 타계했다. 2010년 7월 28일에는 그의 이름을 딴 유도탄고속함 진수식이 있었다. 넷째 동생 현웅은 피터 현(Peter Hyun)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작가겸 저널리스트로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일어등 5개국어에 능통한 사람이다.
5. 라루 선장과 러니 일등항해사(간부장)
라루(Leonard P. LaRue) 선장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14년에 태어났으며 흥남철수작전 이후 미국 씨애틀로 돌아가 1952년 Meredith Victory호가 임무 종료시까지 그 배를 지휘하다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1954년 22년간의 바다생활을 마감하고 미국 뉴저지주 뉴톤(Newton)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가 베네딕도 수사가 되었으며 마리너스(Brother Marinus)라는 영세명으로 평생을 봉헌했다. 마리너스는 성모 마리아의 Mary에서 따온것이며 영문자 marine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그는 1960년 미국 상선협회에서 수여한 공로훈장(The Merchant Marine Meritorious Service Medal)을 받기 위하여 워싱톤에 한번 나왔을 뿐 평생을 수도원안에서 지내다가 2001년에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일등항해사 러니씨가 아들과 함께 라루선장을 찿아가 어떻게해서 무슨 동기로 그 많은 위험속에 피난민들을 구출 할 것을 결심했는지 아들에게 말해줄 것을 부탁했더니 "특별한 일이 아니다. 바른일을 했을 뿐이다. 신의 손이 우리배를 인도했음이 틀림없다. 답은 성스러운 성경속에 있도다.” (“Not extraordinary, right thing only. God's own hand was at the helm of my ship. Answer is in the Holy Bible.”)라고 말하면서 그가 만족한 것은 철수작전이 성공하고 피난민들이 공산치하를 벗어나 자유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였다. 47년 동안 오직 수도원 안에서 기도생활을 하면서 수사로 봉직한 거룩한 그의 일생에 머리숙인다.
러니(J. Robert Lunney) 일등항해사는 22살의 나이에 Meredith Victory호의 간부장으로 활약했고 2010년 현재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분이다. 그는 해군에 입대하여 태평양전쟁에 참전했고 미국 코넬(Connel)대 로스쿨을 거쳐 현재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비역으로 복무하여 해군 소장까지 진급했다. 2006년 2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 재향군인회로부터 ‘향군대휘장’을 받았고 우석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2006년 5월 27일에 거제도에서 열린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제막식에 직접 참석했고.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취임식에 초청받아 참석했다. 1997년과 98년에는 미국무부 요청을 받아 ‘미군실종자 유해발굴작업’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안재철씨와 함께 Meredith Victory호의 기네스북 등재를 실현시켰으며 등재직후 소감에서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 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 였다”고 말했다.
12. 흥남 철수작전 기념비
경상남도 거제시 신현읍에는 6. 25 전쟁때 아군에게 붙잡혔던 인민군과 중공군을 수용했던 포로 수용소가 있다. 거제시 당국에서는 이 포로수용소를 유적공원으로 개발하여 일반국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는데 공원 입구 왼쪽 능선 밑에 흥남철수작전 기념비가 Meredith Victory호와 당시 피난민들의 승선모습을 조각한 조형물과 함께 웅장하게 세워져 있으며 그 어려운 시절에 함경도 피난민들을 따뜻한 동포애로 감싸준 거제시민에게 바치는 은덕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2006년 5월 27일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제막식이 조형물개막과 함께 현장에서 열렸다. 국가보훈처장 거제시장 미국정부대표 현봉학박사 Meredith Victory호의 일등항해사였던 러니부부 알몬드장군 외손자 토마스퍼거슨(Thomas Ferguson) 예비역대령 백선엽장군 이상훈 재향군인회장 백성학 회장 및 이북5도 합경남도 관계자 및 도민 200여멍이 참석 했다.
2003년 백성학 회장(주 영안구릅)의 제안으로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을 전개할 것을 합의하여 백회장과 함남중앙도민회장을 포함한 공동위원장 몇분과 사무총장으로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건립장소와 기념탑의 규모 및 개략적인 예산을 산정 하기로 하고 수차레의 회의 결과 장소는 속초와 파주경모공원 및 거제도가 거론되었으나 피난의 첫발을 디딘 거제도로 결정했고 예산은 최초 5억에서 10억 그후에 공사를 진척시키다보니 16억원으로 불어났다. 부지는 거제시에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내의 임야를 제공하고 사업회는 토목공사와 기념조형물을 완공하여 거제시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로부터 함경도민의 불같은 호응이 이어지고 관계기관에 대한 지원활동도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1,400여명의 도민이 모금에 참여했으나 3억일천만원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임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행자부에서 5억 국가보훈처 6억 거제시 2억원등 도합 16억1천만원을 마련하여 드디어 흥남철수작전기념탑은 웅장한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 기념탑과 함께 각인된 얼굴
○ Edward M. Almond 장군
○ 현봉학 교수
○ Edward Forney 대령
○ Douglas MacArthur 장군
○ Leonard P. LaRue 선장
○ J, Robert Lunney 간부장
○ Raymond G. Davis 중령
○ Alexander Haig 대위
○ 김백일 장군
○ 박시창 대령
○ 유원식 소령
그 외에 巨濟市民에 대한 恩德碑와 기념비 건립에 특별히 공적이 많았던 분들을 기리는 공적비 그리고 기념탑을 둘러싼 까만 대리석 벽면에 1,400명의 기부자명단이 새겨져 있고 모형물 앞 연못안의 한반도 모형에는 동전을 던져 넣으면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 나오는 장치가 되어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