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음기(碑陰記)
신흠(申欽) 찬
오음(梧陰) 윤 상국(尹相國)께서 작고하자, 그의 아우 월정공(月汀公)이 행장(行狀)을 짓고, 간이(簡易) 최공 립(崔公岦)이 명(銘)을 지었으며, 선원(仙源) 김공 상용(金公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그로부터 20년 뒤에는 황조(皇朝)의 학사(學士) 왕공 휘(汪公煇)가 비문을 썼다. 당시에 동양(東陽) 신흠(申欽)은 시골에 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 이르기를, “이 일이야말로 성대하구나. 공의 큰 공렬은 저절로 불후하여 전해질 터인데, 그 찬양하고 기록하는 것을 일국에서 선발되고, 또 천하에서 선발된 사람이 했음에랴.” 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공의 막내아들인 부윤군(府尹君) 훤(暄)씨가 나에게 그의 백형(伯兄)인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대체로 나에게 비음기를 청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회답하기를, “글로 말하자면 월정과 간이의 것이 극히 훌륭한데, 더 많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곧이어 해창군의 편지가 또 이르렀다. 나는 공경히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상국께서 의정부에 앉아서 변방의 일을 주획(籌劃)할 적에는 내가 그 낭관(郎官)으로 있었고, 상국께서 의정(議政)을 사임하고 분수에 자족하며 벼슬을 그만둔 뒤로는 댁에 찾아가 문안 인사를 드릴 수 있었으니, 내가 공을 모르는 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 세계(世系), 이력, 업적, 덕행에 대해서는 이미 행장과 비명에 들어 있으니, 여기서는 당세의 독실한 논자의 입에서 들은 한두 가지만을 싣고자 한다.
대체로 공(功)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고 공을 수립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데, 공은 수립하였으되 이루지는 못하는 경우가 세상에는 열에 일고여덟은 되니, 아아, 진실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리라.
일찍이 풍신수길(豐臣秀吉)이 호시탐탐 서쪽을 넘볼 적에 조정에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찌 조정에서만 알아차리지 못했으랴. 그때 통신사가 왜국에 다녀와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곧바로 상국을 범하려는 의도가 서계(書契)에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상국에 이 사실을 상주하려 하지 않았으니, 공의 말 한마디가 아니었더라면 군신의 대의가 문란해졌을 것이다.
공이 조정을 떠난 다음 해에 풍신수길이 마침내 준동하자, 팔도가 잔폐해지고 종묘를 옮기게 되었으며, 어가가 도성을 나서자 대궐이 무너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져서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은 이때 유배된 죄인의 몸으로 갑자기 교지(敎旨)를 받고 기용되었는데, 계획하고 조치하는 것이 마치 품속에 있는 것을 꺼내어 놓는 것처럼 하였다. 인재를 선발하여 인심을 수습하니 국가의 원기가 신장되었고, 임금이 자신에게 죄를 돌리는 교서를 내려 선비들에게 사과하니 백성들의 뜻이 면려되었으며, 의병을 모집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하니 국가의 위엄이 진작되었다. 이것은 모두 공이 처음 재상에 임명되었을 때 즉일로 청하여 시행했던 것들이다.
계속해서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행재소로 따라 오게 할 것을 청하였고, 각 주현(州縣)의 창고에 저장된 곡식을 백성들에게 흩어줄 것을 청하였으며, 평양(平壤)을 굳게 지켜 진취(進取)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고, 함흥(咸興)으로 가지 말고 천조(天朝) 가까운 곳으로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기에 편리하도록 하기를 청하였으며, 요하(遼河)를 건너가지 말아서 국가의 회복을 도모할 것을 청하였고, 임금을 버리고 도망친 자의 죄를 바로잡아서 신하의 절의를 밝힐 것을 청하였으며, 옛 도읍으로 돌아가서 근본을 튼튼히 할 것을 청함으로써, 중흥의 업적이 마침내 성취되었으니, 공을 세우고 공을 이루었으며 거기다 이것들이 가능한 임금의 지우를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공이 여러 재신(宰臣)들과 상의하던 일을 보았는데, 부득이 상의 뜻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다른 재상들은 문득 머뭇거리며 둘 다 좋다고 하면서 바르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은 홀로 소속 서리에게 쓰도록 명하여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빠짐없이 말하였으며, 더러 상의 진노를 사더라도 피하지 않았다. 몰래 살펴보니, 다른 재상들은 얼굴이 붉어진 자도 있었는데, 공의 안색은 태연하였다. 의견이 분분하여 결정할 수 없는 것은 결국 공의 말 한마디에 의해 결정되었으니, 위대하도다, 수립한 바가 있어서이리라. 공의 공렬이 이미 이루어졌을 때는 공은 이미 배척을 당하였다. 재상을 내어놓고 집으로 돌아가 천연에 맡기고 마음을 지키면서 기무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나라에 큰 의논이 있으면 간언하는 것이 더욱 힘이 있었다.
내가 간간이 공을 따르면서 그 말씀을 들었는데, 크고 넓은 도량은 높은 산악이나 깊은 연못과 같이 바라볼수록 높고 깊어서, 물러 나와 스스로 헤아려 보면 놀라 흠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옛날의 상신(相臣)들 중에 충심을 간직하고 덕을 실천하면서 밝게 힘써 왕을 보필한 자를 살펴볼 것 같으면, 그 처한 여건이 같지 않았는데, 정사가 위에서 맑고 풍속이 아래에서 아름다우며, 사방의 오랑캐를 막아내고 관료들이 직분을 잘 수행한 경우는 재상 노릇 하는 것이 또한 무엇이 어려웠겠는가. 그러나 저 임진년의 변란 같은 것은 진실로 사서(史書)에 없던 바이니, 만약 다른 사람이 갑자기 기용되어 감당하였더라면 지혜로운 자도 그 식견을 잃어버리고 용기 있는 자도 그 지킴을 잃어버릴 것이니, 전도되고 착란되지 않을 자가 드물었을 것이다. 그러한 때에 묘당에 계시면서 백관을 이끌자 그 엄연한 모습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의지할 수 있었던 분이 공이었고, 그러한 때에 임금의 잘잘못에 대해 간언하며 전폐(殿陛)의 아래에서 국가의 큰 계책을 논의하자 그 의연한 풍도를 임금이 의지하여 마음 든든하게 여길 수 있었던 분이 공이었다. 그러한 때에 매사를 잘 판단하여 공정하게 처리하고 넉넉한 도량이 있어 인재를 등용할 때 여유가 있을 수 있었던 분이 공이었고, 그러한 때에 총애를 받아도 영화롭게 여기지 않고 곤욕을 받아도 꺾이지 않아서 휴척(休戚)의 사이에 대범할 수 있었던 분이 공이었다.
공이 한창 나이로 높은 벼슬을 할 적에는 비난과 칭찬을 아울러 받았고, 공이 중년에 폄척(貶斥)을 받았을 때는 유배되는 지경에 있었으므로, 비록 공을 아는 자라고 하더라도 공이 말년의 사업을 반드시 이와 같이 우뚝하고 찬란하게 수립하리라는 것을 알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오직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모든 사람이 배척하는 가운데 공을 발탁하여 온 나라를 공에게 맡김으로써 막중한 200년 종묘사직이 하루아침에 복구되었으니, 여기에서 충분히 군신 사이를 살필 수 있으리라. 진(晉)나라에서 한 사람을 얻는다면 왕무홍(王茂弘 왕도(王導) )이요, 송(宋)나라에서 한 사람을 얻는다면 이백기(李伯紀 이강(李綱) )요, 고려에서 한 사람을 얻는다면 강감찬(姜邯贊)일 것이니, 공이 바로 그들과 짝이 되지 않겠는가.
선비는 임금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가령 공이 배척을 받지 않고 일찍 정승의 자리에 올랐더라면 임진년의 변고를 미연에 막을 수 있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변고가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공을 얻어 이를 막았는데, 수레가 견고하고 말이 좋아 천리를 가더라도 겁낼 것이 없는 듯하였다. 도대체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끝에 가서 받아들여진 것은 어째서인가. 그러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경우가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참으로 임금의 지우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지처럼 다하지 않고 일월처럼 항상 밝은 곳이라면, 바로 오음 윤 상국의 묘일 것이다.
碑陰記[申欽撰]
梧陰尹相國之卒也。其弟月汀公狀其簡易崔公岦撰其銘。仙源金公尙容篆其額。後二十年。皇朝學士汪公煇書其碑。時東陽申欽在田間聞之曰。是擧也盛矣乎夫。公大烈自不朽。而其所揄揚紀載。選於一國。又選於天下乎。俄而。公季胤府尹君暄氏。畀余以其伯海昌君牘。蓋要余以碑陰之辭。欽復曰。以文則月汀簡易已侈。奚多乎哉。俄而。海昌牘又至。欽寅念曰。欽當相國坐中書籌晝壃事。忝爲郞吏矣。逮相國謝樞機。推分卽閑。得拜牀下矣。不可謂不知公者也。顧公之系歷事行。已有狀 若銘矣。肆揭欽得一二於當世篤論者之口者焉。夫成功自天。樹功自人。得乎人而不得乎天者。世居什七八。噫其亶繫遭逢哉。當秀酋之耽耽西伺也。朝廷莫覺。豈惟朝廷莫覺。其時泛使之廻。亦莫覺其欲。直犯上國者著於書契。而猶不欲聞奏。微公一言。則君臣大義紊矣。公去之翌年。秀酋遂動。而八路殘。五廟遷。車駕出。城闕夷。而國殆不可復立矣。公以鞮屨纍迹。猝然承尺一起。猷爲注措。若取諸懷中而發之者然。甄拔人才以收人心。則元氣張矣。下罪已敎。以謝士心。則民志礪矣。召聚義旅。以激軍心。則國威振矣。玆皆公爰立之始。卽日設施者也。繼以請奉廟社主。追迴行在。請許州縣倉貯。散給群氓。請堅守平壤。以圖進取。請勿往咸興。就近天朝。以便請兵。請勿渡遼河。以圖恢復。請正棄君之罪。以昭臣節。請旋蹕奮都。以固根本。而中興之績。遂就焉。其得人得天。又得遭逢者非耶。欽嘗見公與諸宰相議事。事有不可已而戾於上旨者。卽他宰相輒逡巡兩可。不正言。公獨命椽吏筆。惟所欲言而必盡言。或被上震怒不顧也。竊瞷視之。則他宰相有面赤者。而公色怡如也。其紛不可定者。竟賴公一言而定。偉哉其有所樹之也乎。公功旣成而公已見擠矣。解相歸第。任眞守沖。無預機務。 而國有大議。言之愈力。欽間從公聆罄欬。宏量洪度。嶽聳淵渟。望之崇深。退而自揆。未嘗不失匕箸也。若稽古昔相臣。含忠履德明勖偶王者。其所遇不同。政淸於上。俗美於下。守在四裔。官不易方。則爲相者。亦何難哉。乃若壬辰之變。固載籍所未有。使他人暴起而當之。則智者失其見。勇者喪其守。其不顚沛錯亂者希矣。於是而能垂紳整笏。立於百僚之上。儼然人仰而恃之者公也。於是而能獻可替否。謨於殿陛之下。毅然君倚以爲重者公也。於是而能宰物平施。休休有容。綽然於進退之間者公也。於是而能寵不加榮。辱不加挫。恢然於休戚之際者公也。方公之盛年顯宦。公在毁譽之中曁公之中年貶斥。公在坎困之會。雖識公者。未必識公能樹立末年事業如是之卓犖炳烺。而唯宣祖大王。拔公於衆斥之中。擧國而委之公。而二百年宗社之重。一朝而復其奮焉。足以觀君臣矣。於晉得一人焉。曰王茂弘。於宋得一人焉。曰李伯紀。於麗得一人焉。曰姜邯贊。公非其流匹耶。士有合不合。假公而不斥。早位巖廊則安知可以弭壬辰之變。而變作而後。始得公弭之。而車緻馬良。千里而無契需。其不合於始而合於末。抑何歟。然其終不合者。亦何限。信乎其繫遭逢哉。穹壤不敝。日月常鮮。斯其爲梧陰尹相國之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