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노인 전 기사년(1929) 〔成叟傳 己巳〕
성 노인은 본관이 창녕昌寧이고 이름이 재의(載儀)이다. 사람됨은 글을 깨치지 못하였으나 모습은 진실하고 가슴속은 기특한 기상이 있었다.
광무(光武) 말에 정치가 뇌물로 이루어져 수령은 돈으로 군(郡)을 얻어 군에 부임하면 백성들에게서 빼앗아 보상받아 그것을 통해 이득을 챙겼다. 창녕 수령 민병길(閔丙吉)은 젊은 나이에 왕실외척이라는 권세에 의지하여 더욱 심하게 기세를 부렸다.
이보다 10년 전에 나라의 부세를 가볍게 하기 위해 신화(新貨)를 사용하였는데, 신화 2전이 구화(舊貨) 1전의 가치였다. 토지에 세금을 거둘 때, 백부(百負)가 1결(結)이 되는데 결당 80냥이었으니, 구화로는 40냥이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신화를 사용하였으나 하읍(下邑)에서는 여전히 구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병길은 세금을 구화로 거두면서 80냥을 채워 취하였다. 성 노인은 간사함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하루는 관사에 이르러 종일토록 면전에서 따져 물었는데, 수령은 화를 내어 곤장을 치고 그를 가두었다. 이윽고 칠원(漆原)으로 이옥(移獄)시키고 또 의령(宜寧)으로 옮겼다가 마침내 진주부(晉州府)에 이르렀다. 고초를 두루 겪었으나 항변하며 굽히지 않자, 진주부에서는 부득이 석방하고 세금을 60냥으로 줄여 주었다.
그러나 성 노인은 뜻에 흡족하지 않아 행장을 꾸려 서울로 가서 그 실상을 캐내었다. 또 호포(戶布)는 신화로 호구당 30전(錢)인데 군(郡)에서 또한 구화로 거두었다. 이에 그 실상을 아울러 나열하여 법부(法部)에 소송하였으나 마침 나라에 일이 많아 오래도록 결과를 판결 받지 못하였다. 성 노인은 가지고 간 양식이 이미 다하여 밤에는 빈 집에 기숙하고 낮에는 조금의 쌀을 구하여 옹기에 스스로 밥을 지어 먹었다. 반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탁지부(度支部)의 지령(指令)을 얻어 두 가지 세금에 신화로 백성에게 거둘 것을 허락받았다. 또 여러 군의 잔호(殘戶)에 감세해 줄 것을 청하여 대읍(大邑)은 3천, 소읍은 2천으로 하도록 팔도에 반시(頒示)하였으니, 성 노인 덕분이었다.
슬산생(瑟山生)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나는 성 노인과 같은 고을 사람이다. 바야흐로 성 노인이 시끄럽게 따지며 곤액이 더욱 심해질 때, 고을 사람 중에 어떤 이는 괴이하게 비웃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장려하여 힘쓰도록 하였으니, 나는 직접 그 일을 보았다. 그 뒤 20여 년에 성 노인이 두 번이나 나의 우사(寓舍)로 찾아와 나의 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보게 해달라고 매우 부지런히 요구하기에, 내가 가엽게 여겨 그를 위하여 이와 같이 기록한다.
나는 일찍이 양씨(梁氏) 계초(啓超)의 〈세 선생의 전〔三先生傳〕〉을 읽고 기이하게 여겼다. 세 선생은 모두 글자를 모르는 사람인데, 능히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행복하게 한 사람들이다. 양씨가 그들을 선생이라 한 것은 세상에 책을 읽었으면서도 능히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을 부끄러워하도록 한 것이었다. 만일 성 노인이 양씨를 만났더라면 아마 네 선생이 되었을 것이다.
성 노인은 올해 나이가 78세인데 기운은 오히려 씩씩하고, 매우 가난하여 항상 떨어진 옷에 닳은 신발을 신고 다닌다. 아, 온 나라 사람들이 그의 덕택을 가만히 받고 있으면서도 덕택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것은 또 어찌 된 것인가.
成叟傳 己巳
成叟者昌寧人。名載儀。爲人不曉書。貌恂恂而胷中有奇氣。光武末。政以賄成。守令以錢得郡。到郡則剝民以償之。因以爲利。昌寧守閔丙吉年少倚戚援尤張甚。先是十年。輕國賦用新貨。新貨二値舊貨一。田稅百負爲一結。結八十兩。則舊貨四十兩也。時京中用新貨。而下邑猶用舊貨。丙吉徵稅以舊貨。取盈八十兩。叟疑其有奸。一日至官舍面詰之終日。守怒予之杖而囚之。旣而移獄漆原。又移宜寧。卒至晉州府。備甞苦毒。抗言不屈。府不得已釋之。而稅减至六十兩。然叟意未慊也。束裝如京。鉤得其實。又戶布。新貨戶三十錢。而郡亦以舊貨斂之。於是並列其狀訴于法部。會國中多事。久未得題。叟橐饘已竭。夜則寄宿空舍。晝求少米。以土缸自爨以食。積半歲始得度支部指令。二稅許以新貨斂於民。又請减列郡殘戶。大邑三千小邑二千。頒示八路。叟之力也。瑟山生曰余與叟同鄕。方叟之强聒上下。出困愈厲也。鄕人或恠笑。或奬勖。余親覩其事。後廿餘年。叟再訪余寓舍。求見其名於余文甚勤。余愍然爲錄之如此。余甞讀梁氏啓超三先生傳而奇之。三先生者皆不識字人。而能犧牲其身。以幸福人者也。梁氏之先生之所以愧世之讀書而不能爲利人之事者也。如叟而遇梁氏。其爲四先生乎。叟今年七十八。氣尙矍鑠。而貧甚常刓衣缺屨以行。噫一邦之人。陰受其賜而莫之德。此又何也。
[주1] 이보다 …… 사용하였는데 : 화폐 정리 사업을 말한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일제의 주도로 대한제국 내의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고 상업은행인 일본 제일은행(第一銀行)이 발행한 화폐로 대체한 것을 말한다. 화폐 정리 사업의 결과로 대한제국의 화폐에 대한 일체의 지배권은 일본제국에 의해 금융지배를 받게 되었다.
[주2] 호포(戶布) : 호(戶)를 단위로 면포(綿布)나 저포(紵布)를 징수하던 세제이다. 조선조 때에는 서민의 각호(各戶)에 대하여 요역(徭役) 대신으로 포를 징수하였는데, 충청ㆍ황해ㆍ강원ㆍ경상ㆍ전라도 등의 민호(民戶)에 부과하였다.
[주3] 탁지부(度支部) : 조선조 말엽 정부의 재무(財務)를 총할하는 관아인데, 고종 32년(1895)에 탁지아문(度支衙門)을 이 이름으로 고쳤다.
[주4] 슬산생(瑟山生) : 조긍섭 자신을 말한다. 조긍섭이 42세 때인 1914년 이후로 창녕에서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鼎垈里) 비슬산 아래에 이사하여 은거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를 일컬은 것이다.
[주5] 양씨(梁氏) 계초(啓超) : 양계초(梁啓超, 1873~1929)를 말한다. 자는 탁여(卓如)ㆍ임보(任甫), 호는 임공(任公), 별호는 음빙실주인(飮冰室主人)이다. 광동성(廣東省) 신회현(新會縣) 사람이다. 스승 강유위(康有爲, 1858~1927)와 함께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귀구 후에는 민족혁명을 고취하였고 공화제(共和制)를 선전하였다. 민국 초기에 진보당수ㆍ사법총장을 역임하고, 원세개(遠世凱, 1859~1916)의 제제帝制에 반대했다. 경학, 사학, 불교학에 능통하였다. 저서로는 《음빙실합집(飮冰室合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