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재선생집 서문慕齋先生集序
고(故) 찬성(贊成) 문경공(文敬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은 이학(理學)의 큰 선비요, 세상에 명경(名卿)이 된다. 비록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순탄하지 않아 일생동안 간직하고 있던 경륜을 다 펴지 못하였지만, 선(善)을 좋아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귀신에게 물을 수 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아 학문이 넓고 정일하여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였다. 중종(中宗)을 만나 유악(帷幄)에 출입하면서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어 백성이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등 여러 군자들과 도(道)를 함께하고 뜻을 같이하여 임금을 바르게 하고 의견을 건의하는 일이 많았으며, 사특하고 옳지 않은 일을 용납하지 않았다.
관직에서 폐출(廢黜)되어 전원으로 돌아온 지 20년 동안 한가한 가운데 옛일을 상고하고 이치를 연구하여 날마다 알지 못한 바를 알아가니 원근의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선생은 어리석음을 계도하는데 간곡한 정성을 기울여 가르침이 미친 곳에 잘 알려진 인사들이 매우 많이 배출되었다. 뒤늦게 조정의 부름을 받고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저궁(儲宮 왕세자를 가리킴)을 보도(輔導)하는 직책까지 겸하여 간담(肝膽)을 다 바쳐서 반복하며 숨기는 일이 없었다. 또 기묘사림(己卯士林)의 원통한 일을 풀어주는 일에 더욱 정성을 다하여 혐의(嫌疑)를 피하지 않았다.
선생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고, 언제나 부모를 일찍 여읜 것을 애석해 하며, ‘모(慕)’로써 그의 서재(書齋) 이름을 지어 선조를 받들었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아우 사재공(思齋公 김정국(金正國))과 화목하게 지내며,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하루같이 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예(禮)로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친구에게는 급한 일을 도와주며, 어리고 아비 없는 고아를 긍휼히 여기니, 고인(古人)의 기풍이 있었다. 아, 선생은 참으로 근본이 세워진 군자라고 일컬을 만하다. 저술한 문자는 사실을 거짓으로 부풀리거나 염일(艶逸)한 작태를 부리지 아니하고, 순수한 인의의 예법에 바탕을 두었으니, 어찌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인묵객(詞人墨客)과 함께 말할 수 있겠는가.
희춘은 바다 한 모퉁이에 사는 선비로 일찍이 문하에 노닐며 의문스러운 점을 물었는데, 선생은 비천(卑賤)하게 여기지 않고 이끌어 주고, 또 권장해 주었다. 갈옷을 벗고 조정에 올라서는 하위직의 말을 듣고 더욱 언론과 풍지(風旨)의 자상함을 들었다. 대개 그의 선(善)을 좋아함은 마치 굶주림과 목마른 사람이 음식을 갈구하듯 하였고, 나라를 근심하고 염려함은 잠시도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다. 이리하여 전하의 은혜에 보답하고 문풍(文風)을 떨치며 일생을 마치니, 이것은 옛날에도 드문 일로 후생들이 당연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다만, 그의 평생 저술이 아직도 집의 상자(箱子) 속에 간직되어 오랫동안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니, 문헌에 일대 흠이 되었다.
희춘은 지난해 호남의 안렴사(按廉使)로 있으면서 그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했으나 손도 대지 못하고 체직되어 조정으로 돌아오게 되니 항상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지금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 현령인 허충길(許忠吉)도 선생의 문하생인지라 자신을 개발(開發)시켜 준 은혜를 추념하여 개연히 이 일에 뜻을 두어 유고(遺稿)를 모으고 심력(心力)을 다하여 간행하였다. 전(前) 감사(監司) 노진(盧禛)이 듣고 권장하였고, 나도 그 일에 협조하였으며, 훗날 감사 김계휘(金繼輝)가 그 일을 감독하여 간행을 마쳤다. 의성(義城)은 선생의 관향(貫鄕)으로 그 고을 현령 노종원(盧從元)이 개간(開刊)을 주선하여 서원에 보관하였으니, 그곳은 선생의 사당을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사방의 선비들이 경사스럽고 다행으로 여기어 사문(斯文)의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더욱이 그 문하의 선비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선생의 자손들이 희춘에게 서문을 부탁하니, 옛날 소위 삼불후(三不朽)를 생각할 때 선생은 그보다 원대(遠大)하여 어찌 후학의 덧붙이는 말을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희춘의 마음은 그만둘 수가 없어서 감히 글솜씨가 없다고 사양하지 않고, 삼가 평소에 경앙(景仰)하고 탄복(歎伏)한 대강을 기록하였다.
만력(萬歷) 갑술년(1574, 선조7) 3월 상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 유희춘은 두 번 절하고 삼가 서문을 쓰노라.
慕齋先生集序
故贊成文敬公慕齋先生。以理學鉅儒。爲世名卿。雖升沈不一。一生藴抱。未能展盡。而好善憂國之心。則可以質諸神明也。蓋先生自少嗜學不倦。博洽精勤。擢巍科。遭遇中廟。出入帷幄。惓惓以致君澤民爲己任。與趙文正諸君子。道同志協。多有所匡建。尋爲邪枉所不容。廢黜歸田園者垂二十年。閒居中益稽古閱理。日知所未知。遠近學者聞風來集。先生啓發昏蒙。懇惻傾倒。敎誨所及。蔚然爲知名士者甚衆。晩被環召。昵侍前席。職兼輔導儲宮。莫不罄竭肝膽。反覆無隱。而於申雪己卯士林之冤。尤懇懇不避嫌。先生有孝友至性。常痛早失怙恃。以慕名其齋。奉先追遠之誠。老而彌篤。與弟思齋公怡怡誾誾。自髫至耆如一日。居家以禮率下。於親舊。周其急而恤其孤。有古人風。噫。先生眞可謂本立之君子矣。所著文字。不爲浮夸艶逸之態。而根於仁義禮法之粹然。是豈可與詞人墨客之名世者同日語哉。希春以海隅章甫。嘗游門而質疑。先生不鄙而提撕之。又從而獎勸之。曁釋褐登朝。聽於下風。益聞言論風旨之詳。蓋其好善也。若飢渴之於飮食。其憂國也。未嘗頃刻而忘于懷。以之而報主恩振文風終其身。此古昔之所罕有。而後生之所當取法者也。顧其平生述作。尙淹家篋。久未流布于世。爲文獻一大欠。希春頃年按廉湖南。思欲鋟梓。未及措辦。而經遞還朝。常以爲恨。今榮川宰許君忠吉。亦先生門徒也。追念開發之恩。慨然有志於斯。裒輯遺藁。盡心力而經營之。前監司盧公禛聞而獎。予助其役。後監司金公繼輝董其役而訖于成。義城。先生貫也。縣令盧公從元。周旋開刋。藏諸書院。爲先生立廟地也。四方儒林。莫不慶幸。以爲斯文之光。況門下士乎。先生子孫以序文屬希春。竊惟古之所謂不朽者三。而先生實有其遠且大者。夫豈有待於後學之贅言哉。然在希春情有所不能已。不敢以文下爲辭。謹書平日景仰歎伏之梗槪云。萬曆甲戌三月上旬。嘉善大夫行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柳希春。再拜謹序。
[주1] 모재선생집 : 모재(慕齋)는 김안국(金安國)의 호이다. 저자의 시문을 유희춘이 그의 아들 김재부(金在孚)에게서 얻어 간행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그 후 저자의 문인 허충길(許忠吉)이 영천(榮川) 군수로 부임하여 전임 감사 노진(盧禛)과 후임 감사 김계휘(金繼輝)의 도움을 받아 1574년(선조7) 영천에서 판각하였다. 이것을 저자의 관향인 의성(義城)에서 현령 노종원(盧從元)이 개간하고, 각판을 의성 서원(義城書院)에 보관하였다. 《초간본》은 아들 김여부(金汝孚)의 부탁으로 허엽(許曄)이 교정을 보고 발을 지었으며, 또한 유희춘이 서문을 지어 권 머리에 각각 붙였다. 이 본은 현재 완본이 전하지 않고 고려대 만송문고(晩松文庫)에 6책(文集 권1, 3, 4, 詩集 권3~5)이 소장되어 있다. 그 후 박세채(朴世采)가 초간본을 증보ㆍ재편하고, 1687년 현령 김구(金構)가 용강(龍岡)에서 15권 7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중간본》은 서울대 규장각,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주2] 김안국(金安國) : 1478~1543.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또는 은일(恩逸),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참봉 김련(金連)의 아들로, 참판(參判) 김정국(金正國)의 형이다. 1501년(연산군7) 생진과에 합격하고 1503년 별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했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하였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이천(利川)으로 물러났다. 조광조가 화를 당한 뒤로는 아무도 성리학을 말하는 이가 없었으나 그는 여주에 있으면서 선비들에게 성리학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ㆍ주역ㆍ농사ㆍ국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여주 기천서원(沂川書院)ㆍ이천 설봉서원(雪峰書院)ㆍ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모재집(慕齋集)》ㆍ《모재가훈(慕齋家訓)》ㆍ《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이 있다.
[주3] 유악(帷幄) : 유(帷)와 악(幄)은 모두 진영(陣營)에 쓰이는 막을 의미한다. 또는 ‘유막(帷幕)’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작전(作戰) 계획을 짜는 곳, 참모부(參謀部)를 가리킨다.
[주4] 갈옷을 벗고〔釋褐〕 :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하게 됨을 말한다.
[주5] 허충길(許忠吉) : 1516~? 자는 국선(國善),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양천(楊川)으로, 경자년(1540, 중종35)에 진사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간과 영천 군수를 지냈다.
[주6] 노종원(盧從元) : 1535~1583. 자는 순백(順伯), 호는 매헌(梅軒),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1561년(명종16)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의성 현령과 지평(持平)을 지냈다.
[주7] 삼불후(三不朽) : 입덕(立德)ㆍ입공(立功)ㆍ입언(立言)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 24년 조에 “최상은 입덕이요, 그다음은 입공이요, 그다음은 입언이니,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는 이것을 불후라고 하는 것이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