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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공 묘표(梅泉黃公墓表)
영해寧海 박문호朴文鎬
매천 황공이 순국(殉國)한 그 다음 해에 그의 아우 계방(季方)이 매천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멀리 강호(江湖)를 건너서 회인(懷仁)의 산중(山中)으로 나를 찾아와 묘문(墓文)을 부탁하고, 또 말하기를 “이것은 창강(滄江)의 뜻이다.” 하였으니, 창강은 바로 김우림 택영(金于霖澤榮)의 호이다.
내가 젊었을 때 한경(漢京)에서 매천과 처음 알게 되어 마침내 망형교(忘形交)로 삼고 3, 4년 동안 함께 술 마시고 시문 짓고 하는 사이에 거리낌 없이 노닐었다. 이윽고 나는 늙은 어버이 때문에 고향에 돌아왔다가 그 후로는 다시 과거(科擧)에 응시하려고 경성(京城)에 들어간 적이 없다. 그로부터 6, 7년 뒤에 매천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시사(時事)가 날로 글러져 가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진취(進取)할 뜻이 없어 집에 꼭 들어앉아 오직 글 읽는 것으로 스스로 즐기었으니, 나와는 서로 만나지 못한 햇수가 30년이 다 되어 간다. 이는 바로 내가 매천에 대하여 서로 아는 것이 고작 돈 구걸하던 손 수재(孫秀才)일 뿐, 태산(泰山)의 손명복(孫明復) 선생은 미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니, 지금 어떻게 그의 실상을 다 알고 기록하여 영원한 후세에 믿을 만한 증거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생(人生)의 현부(賢否)에 대한 평론은 관(棺) 뚜껑을 덮은 다음에 있는 것이거니와,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반드시 관찰해야 한다. 매천은 살신성인(殺身成仁) 한 가지 지절(志節)이 이미 저렇게 우뚝하니, 가령 30년 동안에 그가 백가(百家)를 드나들며 유희(遊戱)하고 해학(諧謔)하던 습관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모두 실지(實地)의 일과 유용(有用)한 학문이 되기에 해로울 것이 없으므로, 우선 이것을 믿고 그를 위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매천의 휘(諱)는 현(玹), 자는 운경(雲卿)이요 매천은 그의 별호(別號)이며 성은 황씨(黃氏)이다. 시조(始祖) 휘 경(瓊)은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벼슬은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그가 처음 남원(南原) 장수현(長水縣)에 적(籍)을 두었으므로 자손들이 이를 인하여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뒤에 휘 희(喜)는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세종(世宗)을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휘 진(進)은 벼슬이 병사(兵使)에 이르렀고 선조(宣祖) 26년(1593) 진주(晉州)에서 왜적(倭賊)과 싸워 천하에 위용(威勇)을 수립하고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시호는 무민(武愍)인데, 사적이 모두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또 그 후 2대(代)를 지나서 휘 위(暐)는 벼슬이 정언(正言)이고 호는 당촌(塘村)인데, 인조(仁祖) 15년(1637) 포의(布衣)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청군(淸軍)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니, 그가 바로 매천의 8세조이다. 고조(高祖) 휘는 전(銓)이고, 증조(曾祖) 휘는 달수(達洙)이며, 조(祖) 휘는 직(樴), 호는 죽계(竹溪)인데, 모두 향리(鄕里)에서 행의(行義)로 명성이 있었다. 고(考) 휘 시묵(時默)은 온화한 선인(善人)이었고, 비(妣) 풍천 노씨(豐川盧氏)는 휘 찬(穳)의 딸인데, 총명함이 뛰어났고 과감히 결단하는 성품은 남자의 풍도가 있었다.
매천은 철종(哲宗) 6년(1855) 12월 11일 경자에 호남(湖南) 광양현(光陽縣) 서석촌(西石村)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이 문덕봉(文德峯) 밑에 있었으므로, 옛날 지리(地理)에 밝은 이가 그 지역을 가리켜 말하기를 “후일에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칠 사람이 반드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논하는 이들이 매천을 일러 그 사람에 해당시킬 만하다고 하였다. 그는 막 나서부터 수척하여 병이 많았고, 사람됨이 조그마한 체구에 날래고 굳세며, 눈썹은 듬성하고 이마는 널찍한데, 총명하고 결단력이 강한 것은 노 부인(盧夫人)을 꼭 닮았다.
그는 두어 살이 되었을 때부터 항상 숯덩이 조각을 가지고 담벽에 무언가를 그리곤 하여 마치 글씨 쓰기를 학습하는 것 같았다. 서당(書堂)에 들어가 글을 배운 뒤로는 한번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아서 마치 스스로 아는 것 같았다. 11세에 이미 시(詩)에 능하여 당시 스승인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가 그의 시를 보고 대단히 놀라며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명가(名家)가 될 것이다.” 하였다.
그 후 점차 과거(科擧) 공부를 익히는 동안에 재명(才名)이 널리 알려져서, 마침내 호남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의 시장(試場)을 분주히 돌아다닐 적에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매천을 마치 상서로운 구름이나 별처럼 여겨 얼굴을 한번 보기 위해 서로 다투어 모여들었으며, 저잣거리의 아동들까지도 모두 광양(光陽)의 황동(黃童)이라는 걸 알았다. 20세 이후에는 경성(京城)에 올라가 노닐면서 당시의 명사(名士)들과 두루 사귀어 고환(古懽) 강위(姜瑋),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및 김창강(金滄江)과 서로 사우(師友)가 되었다. 이건창, 김택영(金澤榮)과 더욱 깊이 사귐으로써 문장이 크게 진취되어 명성이 국중(國中)에 드높았다.
태황제(太皇帝) 계미년(1883, 고종20)에 특별히 보거과(保擧科)를 설치함에 따라 도신(道臣)이 매천에게 응시(應試)를 권유했는데, 시장에 들어간 후 3일 동안 응시할 때마다 연달아 합격하였으나 끝내 궐정(闕庭)의 면시(面試)에서 낙제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구례군(求禮郡) 만수동(萬壽洞)으로 이거(移居)하여 과거(科擧)를 보지 않으려는 뜻을 가졌으나, 어버이가 허락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다시 과거 보는 일에 종사(從事)하였다. 태황제 무자년(1888)에는 생원 회시(生員會試)에 응시했는데, 고관(考官)이 그의 명성을 알고 1등으로 합격시켰다.
임진년(1892)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그다음 해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도 성시(城市)에 종적을 끊고 들어앉아서 실명(室名)을 구안(苟安)이라 하고 후진(後進) 교육만을 일삼았다. 임인년(1902, 광무6)에는 같은 군의 월곡리(月谷里)로 이거하였다. 을사년(1905) 10월의 변(變)이 일어나자 그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으며, 여러 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시국에 대하여 상심하였다. 또 〈십절도시(十節圖詩)〉를 써서 병풍을 만들어 ‘효효병(嘐嘐屛)’이라 일컬으며 좌석 옆에 세워 두고 자신을 견주었다. 융희(隆煕) 경술년(1910) 8월에 이르러 7월 25일의 소식을 듣고는 놀라 부르짖으며 비분(悲憤)을 견디지 못해 그로부터 식음을 전폐한 지 6일 만에 〈절명시(絶命詩)〉 4수를 짓고 마침내 음독(飮毒)하여 그다음 날 무인일 인시(寅時)에 졸(卒)하니, 향년 56세였다. 그해 10월 20일에 군(郡)의 유산촌(乳山村) 뒷산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세설신어(世說新語)》 1부를 광중(壙中)에 묻었으니, 이것은 유언(遺言)을 따른 것이다. 해주 오씨(海州吳氏) 현주(顯胄)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길렀다. 장남은 암현(巖顯)이고 차남은 위현(渭顯)인데, 위현은 중부(仲父) 연(璉)의 양자(養子)로 들어갔다. 딸은 안병란(安秉蘭)에게 시집갔다. 저서에 《매천집(梅泉集)》 10권이 있는데, 아직 간행하지 못하였다.
처음 매천이 젊었을 적에 일찍이 명첩(名帖)을 휴대하고 이웃 고을의 유림 노사(儒林老師)를 찾아뵙고 장차 수업(受業)할 것을 청하려다가, 그가 두 손을 벌려 화로를 끼고 불 쬐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유자(儒者)가 아무리 진솔함을 귀히 여긴다고는 하지만 어찌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되겠는가 생각하고 예물(禮物)을 바쳐 문제자(門弟子)가 되지 않고 물러 나와 버렸다. 그 후로는 유자의 진부(陳腐)한 학문을 싫어하여 추구하지 않고 오직 문장을 익히고 짓는 공부에 전력(專力)하였다. 가산(家産)을 기울여서 3000권의 서적을 구입하여 쌓아 놓고 그 가운데 거처하면서 밤낮으로 열람하여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간혹 새벽까지 잠을 안 자고 책만 보기도 하였으며, 남의 집에 기이한 문자나 서책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수백 리 길도 멀다 않고 가서 빌려다 읽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구류(九流),백씨(百氏)를 두루 통효(通曉)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되, 역사, 병(兵), 형(刑), 전(錢), 곡(穀)에 관한 글에 능하였고, 명청(明淸) 시대 사람들의 문집(文集)에 더욱 익숙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시문(詩文)은 성정에서 나오는 것인데, 사람의 습성(習性)은 고금(古今)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후세(後世)에 태어나서 전고(前古)의 것만을 억지로 본받는다면 결코 이루어질 리가 없다.” 하였다. 시(詩)는 소식(蘇軾), 육유(陸游)를 본받고, 문(文)은 위희(魏禧),후방역(侯方域)에 아주 가까웠다.
평생에 기절(氣節)을 숭상하여 경제(經濟)를 자기의 책무인 것처럼 여겼고, 호 충간(胡忠簡),진동보(陳同甫),방손지(方遜志)의 됨됨이를 사모하여 전야(田野)에 은거하면서도 마음속으로 세상을 잊지 않아서 애군 우국(愛君憂國)의 충정이 얼굴과 말에 넘쳐흘렀다. 시무(時務)에 꽤나 마음을 두었고 겸하여 외국(外國)의 일까지도 강론하였으니, 그의 뜻이 공연한 게 아니었다. 교만 부리는 귀현(貴顯)한 사람을 보면 말로 범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과실을 용서하지 못하고 반드시 대면하여 질책하곤 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도 엄격한 법도가 있어 집안이 정숙하기가 마치 조정(朝廷) 같았다. 종족(宗族) 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사랑하였으며, 친구 간의 교정(交情)은 더욱 돈독하여 귀양 간 친구는 반드시 가서 만나 보고, 죽은 친구에게는 반드시 가서 곡(哭)하여 천리(千里)를 멀게 여기지 않았다.
15세가 되었을 때 지방의 도적 떼가 광양(光陽)을 함몰시켜서 집안이 마침 텅 비었으므로, 매천이 집에 있는 도끼와 가래 등의 연장을 가지고 칼과 창 수십 자루를 만들어 도적 떼를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얼마 안 가서 도적이 평정되어 그 창과 칼을 써 보지는 못했으나, 그 과감함과 용맹스러운 결단력이 어려서부터 이미 그러했던 것이다. 노 유인(盧孺人)이 항상 계방(季方)에게 이르기를 “네 형은 성질이 강하고 엄격하여 뛰어난 절개를 좋아하니, 만일 난세(亂世)를 만나면 반드시 목숨을 바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아, 선비의 신분으로 불행하여 사옥(社屋)의 세상을 만났을 경우, 비록 얻은 땅은 없을지라도 타고난 양심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이 꼭 죽어야 할 책임은 없지만 몸은 의당 죽어야 할 의리가 있는 것이니, 이것은 유독 선비만이 아니라 하천(下賤)한 사람으로부터 하늘로 머리 쳐들고 땅을 밟고 다니는 모든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 같은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의리를 매천과 같이 능히 실천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생각건대 나같이 못난 사람은 영재(寧齋)처럼 편안하게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온전히 돌아가지 못했고, 창강(滄江)처럼 고상하게 기미를 보고 멀리 떠나 버리지도 못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매천처럼 용감하게 일을 당하여 스스로 결단하지도 못한 채 구질구질하게 살기를 탐하여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을 스스로 받고 살면서 그 부끄러운 낯으로 이 글을 짓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말만 할 줄 아는 앵무새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부끄러울 뿐이다.
梅泉黃公墓表[寧海朴文鎬]
梅泉黃公殉國之明年。其弟季方狀梅泉行事。遠涉江湖。訪余于懷仁山中。見託以墓文。且曰是滄江意也。滄江。金于霖澤榮號也。始余少時。與梅泉於漢京中相識。遂定爲忘形之交。放浪文酒間者三四年。旣而余以親老决歸。不復應擧入京。後六七年。梅泉乃得小成。見時事日非。不復有意於進取。杜門讀書以自娛。與余不相見者且三十年。是則余於梅泉。其所相知者。只是索遊孫秀才耳。未及識泰山孫明復先生。今何足以盡得其實。而徵信於久遠哉。雖然。人生論定。在盖棺後。且必觀其所以盖棺。而梅泉之成仁一節。旣如彼卓卓。借使三十年間。其遊戱調諧。出入百家。無改於昔時。是皆不害爲實地之事。有用之學。姑信此而爲之書。梅泉諱玹。字雲卿。梅泉其別號也。姓黃氏。始祖諱瓊。尙新羅敬順王女。官侍中。始籍南原之長水縣。子孫因貫焉。後有諱喜。官政丞。佐世宗致太平。謚翼成。諱進。官兵使。 宣祖癸巳。立慬晉州。謚武愍。事俱在國史。又再世而諱暐。官正言。號塘村。仁祖丁丑。以布衣勤王。實其八世祖也。高祖諱銓。曾祖諱達洙。祖諱樴。號竹溪。俱以行義有聲鄕里中。考諱時默。溫然善人也。妣豐川盧氏。諱穳女。聰明絶人。剛决有男子風。梅泉以哲宗乙卯十二月十一日庚子。生于湖南之光陽縣西石村。村在文德峯下。昔有精堪輿術者。指其地曰。異日當有文章名世者出。論者謂梅泉可以當之云。生而羸瘠多病。爲人短小精悍。疎眉廣顙。其聦明剛决。酷類盧夫人。數歲時。常持炭片畫墻壁。若習書狀。旣入學。凡一過耳一寓目者。至終身不忘。殆若自知。十一歲能詩。塾師王川社大驚異之曰。異日必爲名家。稍習擧子業。才名大噪。遂馳騖湖左右塲屋。所至人爭聚觀。如慶雲景星。雖街豎市童。亦皆知光陽黃童。弱冠後出遊京城。遍交一世名士。與姜古懽瑋,李甯齋建昌及金滄江相師友。尤以李,金託爲神交。自是文章大進。聞于國中。太皇帝癸未。特設保擧科。道臣以梅泉應選。旣赴三日。連試連捷。竟於闕庭面試下第。遂移居于求禮郡萬壽洞。有廢擧之意。以親不許。黽勉復從事。戊子。應生員會試。考官知其名。擢寘一等。壬辰。遭外艱。翌年。遭內艱。旣免喪。猶絶迹城市。名其室曰苟安。以敎育後進爲事。壬寅。又移居於郡之月谷里。乙巳十月之變。聞而痛哭。不食者累日。乃作五哀詩以傷時。又爲十節圖詩列爲屛。謂之嘐嘐屛。置坐隅以自况。及隆煕庚戌八月。聞七月二十五日之報。驚號悲憤。却食六日。作絶命詩四首。遂仰藥。明日戊寅寅時乃卒。得年五十六。以其十月二十日。葬於郡之乳山村後艮坐之原。殉以世說一部。從遺意也。娶海州吳氏顯胄之女。育二男一女。男長巖顯。次渭顯出後仲父璉。女適安秉蘭。所著有梅泉集十卷。尙未刊行。始梅泉之少也。嘗齎刺候隣鄕之儒林老師將請業。見其展兩手夾挑爐火。心竊以爲儒者雖貴眞率。何至於是。不委贄而退。遂厭儒者陳腐之學而不之求。惟專力於文章之業。傾家貲儲書三千卷。身處其中。晝夜披閱。手不暫釋。或達曉不寐。聞人家有奇文異書。不遠數百里。必借讀乃已。九流百氏。靡不通貫。長於歷史兵刑錢穀之書。尤熟明淸人文集。常曰。詩文出於性。人之習性。古今殊異。生乎後世而强效前古。則决無能成之理。爲詩法蘇,陸。文則逼魏禧,侯方域。平生尙氣節。以經濟自任。慕胡忠簡,陳同甫,方遜志之爲人。雖隱處田野。心不忘世。愛君憂國。溢於色辭。頗留意時務。兼講外國之事。其志非徒然也。見驕貴人則好以言侵之。不能容人之過。必面質責之。處家嚴有法。閨門斬斬如朝廷。敦宗族仁鄰里。尤篤於朋交。謫必往見。沒必赴哭。不以千里爲遠。在成童時。土寇陷光陽。家適一空。梅泉取家中斧鍤之屬。作刀鎗數十。謀設計禦之。賊尋平。不果試。其敢毅勇决。自幼已然矣。盧孺人常語季方曰。汝兄性剛峭好奇節。若遇板蕩之世。必殺身。至是果騐。噫。爲士者不幸値社屋之世。雖無所得之地。而有所受之天。是以人無必死之責。而身有當死之義。此則非惟士也。自皁隷廝賤。凡頂天足地之類。莫不皆然。然而能實踐其義如梅泉者。能幾人哉。顧余無狀。旣不得先事全歸。如寧齋之爲安。又不果見幾遐擧。如滄江之爲高。今幷不能臨事自裁。如梅泉之勇烈。淟涊偸生。自取 困苦於此世。而乃靦顔以爲此文。是豈免乎能言之鸚鵡也哉可愧已。
[주1] 박문호(朴文鎬) : 1846~1918. 충북 보은(報恩) 사람으로, 호는 호산(瓠山) 또는 호산(壺山)이다. 매천, 김택영(金澤榮)과 교유(交遊)하였고, 문장에 뛰어났다.
[주2] 계방(季方) : 매천의 아우인 황원(黃瑗)의 자이다.
[주3] 망형교(忘形交) : 형적(形迹)에 얽매이지 않고 의기(意氣)가 투합(投合)한 절친한 친구 사이를 말한다.
[주4] 내가 …… 실정이니 : 손명복(孫明復) 선생은 북송(北宋) 시대의 경학자(經學者)인 손복(孫復)을 가리킨다. 명복은 그의 자이다. 그는 일찍이 태산(泰山)에 살면서 제자들에게 《춘추(春秋)》를 가르쳤고, 뒤에 범중엄(范仲淹), 부필(富弼) 등의 천거로 국자감 직강(國子監直講), 전중승(殿中丞) 등을 역임하였다. 범중엄이 일찍이 수양(睢陽)에서 학교(學校)를 관장하고 있을 때, 손 수재(孫秀才)라는 사람이 범중엄을 찾아뵙고 돈을 구걸하므로 범중엄이 1000전(錢)을 선뜻 내주었다. 그다음 해에 또 왔으므로 역시 전과 같이 1000전을 내주면서 그에게 묻기를 “왜 이렇게 자주 요구하느냐?”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루에 100전씩만 얻는다면 좋은 음식을 봉양해 드릴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범중엄이 말하기를 “그대의 사기(詞氣)를 관찰해 보니 걸객(乞客)은 아니로구나.” 하고, 그에게 학직(學職)을 맡겨 매월 3000전씩을 주면서 《춘추》를 가르쳤다. 그는 불철주야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그다음 해에 범중엄이 수양을 떠나게 되자 그 역시 그곳을 떠나 버렸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태산 아래 손명복 선생이란 분이 《춘추》를 학자들에게 가르치는데 도덕(道德)이 아주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러다가 만나 보니 바로 옛날 범중엄에게 돈을 구걸하던 손 수재였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明臣言行錄 前集 卷10》 전하여 여기서는 곧 박문호(朴文鎬)가 매천에 대하여 젊었을 때만을 알 뿐, 그 후의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뜻으로 비유한 것이다.
[주5] 인생(人生)의 …… 것이거니와 : 관(棺) 뚜껑을 덮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한다. 진(晉)나라 유의(劉毅)의 말에 “장부의 종적은 군소배들과 한데 섞일 수 없는 것이니, 관 뚜껑이 덮인 다음에야 일생 사업의 시비가 정해진다.〔丈夫蹤跡 不可尋常混群小中 蓋棺事方定〕”라고 하였다.
[주6] 왕석보(王錫輔) : 1816~1868. 구례(求禮) 출신으로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윤국(胤國), 호는 천사(川社)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아 학문이 일찍 성취되었는데, 일찍이 과거(科擧)를 보러 갔다가 잡된 선비와 탐관오리들의 추잡한 작태를 보고는 즉시 과거를 포기하고 하향(下鄕)하여 일생을 후진(後進) 교육에 힘썼다. 특히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주7] 강위(姜瑋) : 1820~1884. 조선 말기의 시인(詩人)으로 자는 중무(仲武), 호는 추금(秋琴), 고환자(古懽子)이다. 김택영(金澤榮), 매천과 함께 한말(韓末) 3대 시인으로 일컬어졌다. 특히 율시(律詩)에 능했는데, 김택영과 매천이 그의 시풍(詩風)에 영향을 입었다고도 한다. 벼슬은 감역(監役)에 그쳤다.
[주8] 이건창(李建昌) : 1852~1898. 문신(文臣)이고, 학자이며 자는 봉조(鳳朝), 호는 영재(寧齋)이다. 1866년(고종3)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1874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가서 여러 문장가들과 교유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그다음 해에는 충청 우도 암행 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로 나갔으며,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에는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특히 고문(古文)에 능했다.
[주9] 태황제(太皇帝) : 이미 선위(禪位)한 고종황제(高宗皇帝)를 일컫는 말이다.
[주10] 을사년 10월의 변(變) : 1905년(광무9) 10월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조약(條約)을 체결한 사건을 말한다. 이 조약의 원명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며,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주11] 오애시(五哀詩) : 두보(杜甫)의 〈팔애시(八哀詩)〉를 모방하여 지은 시이다. 즉 을사년(1905, 광무9) 음력 10월, 왜인(倭人)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어 나라를 빼앗기자, 보국(輔國) 민영환(閔泳煥), 판서(判書) 홍만식(洪萬植), 정승 조병세(趙秉世)가 잇달아 자결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던바, 이들 3인과 그 밖에 아직 자결하지 않은 최익현(崔益顯), 그리고 이미 작고한 이건창(李建昌)을 더하여 다섯 사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오애시〉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을사년 10월의 변고 때에 조 정승 이하 3인이 자결하였으므로, 내가 그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사모한 나머지, 고인의 〈팔애시〉를 모방하여 애도의 시를 지으면서 여기에 최면암을 언급한 것은 그에게도 바라는 뜻이 있어서이고, 이영재를 언급한 것은 지금 인물들이 너무 보잘것없어 그를 추모한 것이다.〔乙巳十月之變 趙相以下三公死之 余聞而感慕 倣古人八哀以作詩 其泛及崔勉菴者 望之也 及李寧齋者 以今人物之眇少而追慕之也〕”라고 하였다. 〈오애시〉는 《매천집(梅泉集)》 권4 〈을사고(乙巳稿)〉에 나온다.
[주12] 십절도시(十節圖詩) : 매천이 일찍이 역대 은사(隱士)와 충신(忠臣) 10인의 행적을 각각 절구(絶句) 1수씩 읊고 또 10인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려서 10폭의 화병(畫屛)을 만들고 이를 효효병(嘐嘐屛)이라 일컬으며 항상 좌석 한쪽에 펼쳐 놓고 보았던바, 각 절구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한(漢)나라 매복(梅福)을 읊은 〈옥사채약(玉笥採藥)〉, 위(魏)나라 관녕(管寧)을 읊은 〈요동천탑(遼東穿榻)〉, 진(晉)나라 장한(張翰)을 읊은 〈고향순로(故鄕蓴鱸)〉, 동진(東晉)의 도잠(陶潛)을 읊은 〈황경송국(荒徑松菊)〉, 당(唐)나라 사공도(司空圖)를 읊은 〈왕관추홀(王官墜笏)〉, 오대(五代) 시대 당(唐)의 양진(梁震)을 읊은 〈형저기우(荊渚騎牛)〉, 송(宋)나라 가현옹(家鉉翁)을 읊은 〈하간교수(河間敎授)〉, 송나라 사고(謝翶)를 읊은 〈서대통곡(西臺慟哭)〉, 명(明)나라 고염무(顧炎武)를 읊은 〈정림재서(亭林載書)〉, 명나라 위희(魏禧)를 읊은 〈취미결사(翠微結社)〉이다. 여기서 특히 십절(十節)이라고 한 것은 곧 10인의 절행(節行)을 의미한다. 《梅泉集 卷4 題畫屛十絶》
[주13] 7월 25일의 소식 : 이해 양력 8월 22일에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이 조인(調印)되었고, 29일에 한일합병조약의 발표와 함께 순종(純宗)이 양국 조서(讓國詔書)를 내린 사건을 가리키는바, 여기서 말한 음력 7월 25일은 바로 양력 8월 29일에 해당한다. 이로써 한국이 망한 것이다.
[주14] 절명시(絶命詩) : 매천이 1910년 8월 한일합병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한 것을 통분(痛憤)하여 음독 자결(飮毒自決)하기 직전에 지은 시이다. 모두 절구 4수로 되어 있다. 《梅泉集 卷5》
[주15] 구류(九流) : 한대(漢代)의 아홉 학파(學派), 즉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를 말한다.
[주16] 백씨(百氏) :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같은 뜻이다.
[주17] 위희(魏禧) :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문인(文人)으로 자는 숙자(叔子), 호는 유재(裕齋)이다. 명나라 말기에 제생(諸生)의 업(業)을 그만두고 취미봉(翠微峯)에 들어가 집을 짓고 은거했는데, 형 위제서(魏際瑞), 아우 위례(魏禮)와 함께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청 성조(淸聖祖) 연간에는 박학홍사(博學鴻詞)로 천거되었으나 병을 칭탁하여 거절하였다. 저서에 《위숙자문집(魏叔子文集)》, 시집(詩集), 일록(日錄), 《좌전경세초(左傳經世鈔)》 등이 있다. 《淸史稿 卷489》
[주18] 후방역(侯方域) : 명말 청초의 문인으로 자는 조종(朝宗)이다. 특히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의 고문(古文)과 시(詩)를 열심히 배워 익혀서 당대에 명성이 높았다. 저서에 《장회당문집(壯悔堂文集)》, 《사억당시집(四憶堂詩集)》이 있다. 《淸史稿 卷489》
[주19] 호 충간(胡忠簡) : 남송(南宋) 시대의 직신(直臣) 호전(胡銓)을 가리킨다. 자는 방형(邦衡), 호는 담암(澹庵), 충간은 그의 시호이다. 고종(高宗) 연간에 진사(進士)가 되고 이어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금(金)나라와의 주화파(主和派)인 왕륜(王倫), 진회(秦檜), 손근(孫近) 등을 참수(斬首)하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진회의 노염을 사서 원지(遠地)에 유배되었다가 진회가 죽은 뒤에 풀려나와 복관(復官)되었고, 뒤에 벼슬이 공부 시랑(工部侍郞)에 이르렀다. 저서에 《담암집(澹庵集)》이 있다. 《宋史 卷374 胡銓列傳》
[주20] 진동보(陳同甫) : 남송(南宋) 시대의 학자 진량(陳亮)을 가리킨다. 자는 동보, 호는 용천(龍川),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일찍이 효종(孝宗) 연간에 중흥 오론(中興五論)을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물러가 학문에만 전념하여 많은 글을 저술하다가, 뒤에 다시 상서(上書)하여 시사(時事)를 극력 논변하였다. 광종(光宗) 때에 진사 제일(進士第一)로 뽑혔고, 벼슬은 첨서건강부판관(簽書建康府判官)을 지냈다. 주희(朱熹)와는 교의(交誼)가 깊었다. 저서에 《삼국기년(三國紀年)》, 《구양문수(歐陽文粹)》, 《용천문집(龍川文集)》 등이 있다. 《宋史 卷436 儒林列傳 陳亮》
[주21] 방손지(方遜志) : 명(明)나라 학자인 방효유(方孝孺)를 가리킨다. 자는 희고(希古), 호는 손지,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태조(太祖) 연간에 한중부 교수(漢中府敎授)가 되어 제생(諸生)을 가르쳤고, 촉 헌왕(蜀獻王)의 초빙을 받아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는데, 그의 집을 정학(正學)이라 불러서 제자들이 그를 정학 선생이라 불렀다. 혜제(惠帝) 때에 시강학사(侍講學士)가 되었는데, 후일의 성조(成祖), 즉 연왕(燕王)이 모반(謀叛)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도성(都城)을 함락하고 방효유를 체포하여 성조의 등극(登極)을 반포하는 조서(詔書)를 초하도록 강요하였으나 이를 끝까지 거부하여 책형(磔刑)을 당하였다. 저서에 《손지재고(遜志齋稿)》, 《후성집(侯成集)》, 《희고당고(希古堂稿)》 등이 있다. 《明史 卷141 方孝儒列傳》
[주22] 사옥(社屋) : 토지신(土地神)을 제사 지내는 곳에 지붕을 덮는다는 뜻으로, 전하여 망국(亡國)을 의미한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망국의 사에는 지붕을 만들어 덮어서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喪國之社 屋之 不受天陽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