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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예조 판서 신헌구(申獻求)
선생의 휘는 경준(景濬)이고, 자는 순민(舜民)이며, 여암(旅菴)은 그의 호이다. 우리 영천 신씨(靈川申氏)는 고려에서 검교(檢校)를 지낸 휘 성용(成用)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대대로 높은 관직을 이어 받았다.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낸 휘 덕린(德隣) 호 순은(醇隱)에 이르러서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ㆍ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벗으로 친하게 지내며 서로 존중하였다. 이분이 휘 포시(包翅)를 낳으니 대사간을 지냈고 호는 호촌(壺村)으로, 남원의 호촌에 은둔하여 명분과 절조를 붙들어 세웠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장(檣)을 낳으니 참판을 지냈고 호는 암헌(巖軒)으로, 집현전 학사(集贒殿學士)에 수석으로 뽑혀 문교(文敎)를 선양하였고 취미인 서예는 서예가들이 존숭하는 바가 되었으며 영의정 고령부원군(領議政高靈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말주(末舟)를 낳으니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고, 장릉(莊陵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할 때를 당해서는 좌명(佐命)의 원훈(元勳)인 숙주(叔舟)의 아우라고 해서 벼슬을 버리고 순창(淳昌)의 남산(南山)으로 돌아가 ‘귀래정(歸來亭)’을 짓고는 담담하고 곧게 스스로 보존하였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상 4대는 모두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이후로 자손들이 대대로 남산(南山)에서 살았다.
후손 중에 휘 공제(公濟)는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정민(貞敏)이고 호는 이계(伊溪)로, 청백리(淸白吏)에 뽑혔고 기묘제현(己卯諸贒)에게 신뢰를 받았다. 3대를 전해 내려와 주부(主簿)를 지낸 휘 색(𣽤)에 이르러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아 《삼강록(三綱錄)》에 실렸으니, 이분이 선생의 5세조이다. 고조의 휘는 극순(克淳)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증조의 휘는 운(澐)으로 집의(執義)에 추증되었으니 바로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유(濡)의 아우이며, 조부의 휘는 선영(善泳)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 음직으로 찰방(察訪)을 지냈고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니, 모두 문장과 덕행으로 그 집안을 이어 나갔다.
아버지의 휘는 뢰(洡)로, 선조의 미덕을 잘 이어 덕을 숨기며 벼슬하지 않았고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저명하였다.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진사 의홍(儀鴻)의 딸로서 정숙하고 단정하여 부덕(婦德)을 모두 갖추었으며, 숙묘(肅廟) 임진년(1712, 숙종38) 4월 15일에 남산의 옛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학생공(學生公)의 꿈에 커다란 붉은 호랑이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어떤 노인이 말하기를 “이는 추성(樞星)의 정기니, 반드시 그대 집안에 빼어난 남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태어난 지 겨우 8, 9개월 만에 벽에 문자가 있는 것을 알아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4세에는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千字文)》을 읽고 문득 그 글자를 따라서 의미를 이해하고 글을 지을 수 있었다. 5세에 《시경》을 배워 글 뜻을 크게 성취하였고, 7세에 〈용기부(龍旂賦)〉를 지었는데 “옛날 대우가 강을 건널 적에 배를 등으로 밀친 황룡인 듯하네. - 글자 빠짐 - 〔昔大禹之濟江, 疑負舟之黃龍.〕” 하였다. 뜰에 오랫동안 열매가 열리지 않는 늙은 살구나무가 있었다. 선생이 글을 지어 - 산일됨 - 꾸짖자 이해에 열매가 갑자기 많이 열리니, 고향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8세에 북으로 서울에 가서 배웠다. 9세에 서쪽으로 강화(江華)에 들어가니, 어버이와 700여 리나 떨어지게 되었다. 〈비사곡(悲思曲)〉 3절을 지어 산에 올라가 노래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슬픈 감회에 젖었다.
15세에 이미 문장을 성취하였다. 선생은 재주와 기량이 뛰어나고 마음과 기개가 호탕하며 침착하고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남에 천하의 일이 모두 내 직분이니, 하나의 사물이라도 궁구하지 못하면 부끄럽고 하나의 기예라도 능숙하지 못하면 병통이다. 성현이 되길 바라는 것은 깊이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학문은 도(道)를 보는 것이 귀하고 도는 스스로 터득하는 데에 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하였고, 관자(管子 관이오(管夷吾))가 말하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귀신이 깨우쳐 준다.’ 했으니, 이것이 스스로 터득하는 방법이다.” 하였다. 마침내 성현의 책에 마음을 집중해 심오한 진리를 탐구하였으며, 성명(性命)의 근원을 깊이 연구하고 구류백가(九流百家)를 두루 섭렵하여 그 옳고 그름을 논증하지 않음이 없었다.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성률(聲律)ㆍ의복(醫卜)의 학문과 역대 왕조의 헌장(憲章)이나 해외의 괴팍스런 책까지도 그 깊은 이치를 찾아내 그 요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산천ㆍ요충지ㆍ형승지에 대해서는 안중에 있는 것처럼 더욱 환하여 “무릇 장수 된 사람은 먼저 지세의 유리함을 알아야 한다.” 하였으니, 그 스스로 책임짐이 이와 같았다.
정사년(1737, 영조13)에 부친상을 당해서는 예법을 따르고 슬퍼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무오년(1738)에 소사(素沙)로 이사하고 〈소사문답(素沙問答)〉을 지었으며, 신유년(1741)에 직산(稷山)으로 이사하고 〈직서(稷書)〉를 지었다. 모두 사물을 관찰하여 이치를 깨친 내용인데 조예가 깊어 홀로 체득한 묘미가 많았다. 갑자년(1744)에 순창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무진년(1748)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몹시 슬퍼하며 상제를 극진히 하기를 한결같이 이전의 부친상 때처럼 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우연히 지리산을 유람하며 즐기느라 마침내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못하고, 갑술년(1754) 증광 향시(增廣鄕試)에 응시하였다. 당시에 태사(太史) 홍양호(洪良浩)가 호남(湖南)의 장시관(掌試官)이었고 본도(本道)의 두 수령이 부시관(副試官)이 되었다. 홍공이 두 부시관에게 본도(本道)에서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누구냐고 묻자, 모두 “순창에 신(申) 아무개라는 사람이 있는데 호남의 선비 중에 으뜸입니다. 이 한 사람을 얻으면 함께 합격한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책문(策問)으로 ‘거제(車制)’를 내자, 선생이 붓을 잡고 대책(對策)을 썼는데 글에 고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홍공이 시권을 살펴보고는 책상을 치며 말하기를 “내가 신 아무개라는 인재를 얻었도다.” 하였다. 두 부시관이 말하기를 “어떻게 그것을 알았습니까?” 하니, 홍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두고 보시오. 신 아무개가 아니면 이것을 지을 수 없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제1등에 뽑아 두었다. 밀봉한 이름을 뜯어보게 되었을 때 과연 그러하자 두 부시관이 모두 놀랐다. 여름에 회시에 응시하여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홍공이 즉시 서울 집으로 선생을 찾아가 만났고, 드디어 서로 교분을 맺었다.
이해에 괴원(槐院 승문원)에 배속되어 자주 당후(堂后)에 들어갔는데 기록〔記注〕한 것이 임금의 뜻에 맞았다. 정축년(1757)에 휘릉 별검(徽陵別檢)에 임명되었으며, 임기를 채우고 6품에 오르자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으로 전보(轉補)되었다. 경진년(1760)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고 얼마 있다가 이조의 정랑이 되었으며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전임(轉任)되었다.
임오년(1762) 봄에 서산 군수(瑞山郡守)로 나갔다. 큰 기근을 당하자 봉록을 떼어내 진휼에 대비하고 소금을 구워 조〔粟〕로 바꾸니 온 경내에 굶주려 죽은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농사를 짓는 것은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에 요사스런 기운을 바라보고 재앙과 상서를 살펴 백성들이 미리 대비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 가을 곡식이 익었으나 아직 벼를 수확하지 않았는데 급히 경내에 영(令)을 내려 벼를 베어 쌓아두게 하였다. 3일 뒤에 크게 우박이 내려 지나는 곳마다 벼와 기장을 손상시켰지만 그 고을만 아무 탈이 없자 백성들이 모두 춤을 추며 칭송하였다. 계미년(1763)에 소환(召還)되자 군의 남녀노소가 울부짖으며 도로를 에워싸고 옷을 남겨서 제사하기를 바랐으나 선생이 웃으면서 그러지 못하게 하였다.
중도에 충청 도사(忠淸都事)로 옮겨서 시사(試士)를 관장하였다. 이때 호서(湖西)에 사형수 세 명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유예하고 결정짓지 못했다. 임금이 관찰사에게 명하여 유능하다는 평판을 듣는 수령(守令) 7, 8명을 모아 함께 평의(評議)하게 하였으나 또 결정짓지 못했다. 관찰사가 선생에게 결정짓도록 하고 장계를 만들어 아뢰자, 임금이 장려하여 관찰사가 드러내 상을 주었다.
갑신년(1764)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운(漕運)을 감독하고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왔다. 두 번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시골에 있다는 이유로 체차되었다. 그해 겨울에 또 장연 현감(長淵縣監)으로 나갔으며, 임금의 유지(諭旨)에 응하여 〈민은시(民隱詩)〉를 올렸는데 임금이 그 문장을 매우 칭찬하였다.
선생이 백성을 다스릴 때에 바깥으로는 관대하고 안으로는 밝아 숨어있는 간악함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일찍이 관아에 앉아 군교(軍校)에게 명하기를 “아무 방향 몇 리의 아무 숲에서 강도질하는 놈이 있으니 내일 아침까지 잡아오라.” 하였다. 군교가 즉시 가서 도둑을 잡고 보니 선생의 말과 같았다. 근년에 이곳의 현감이 된 사람 중에 죄를 얻어 쫓겨난 자가 많았다. 전하는 말에, 관아의 뒤에 몰래 매장한 무덤이 있기 때문에 벼슬아치에게 불리한데 끝내 그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선생이 하루는 뒷산을 산보하며 놀다가 아전에게 그 왼쪽으로 몇 걸음 되는 곳을 파도록 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다음 날 밤에 또 그 오른쪽으로 몇 걸음 되는 곳을 파도록 했지만 또한 소득이 없었다. 사흘째 되던 날 밤에 군교를 나누어 산길을 엿보게 하며 말하기를 “관을 들고 지나가는 자가 있거든 묻지 말고 그가 누구인지만 염탐해 오라.” 하였다. 그날 밤에 과연 관을 들고 지나가는 자가 있었는데 바로 고을의 교활한 아전이었다. 그 무덤이 양쪽으로 판 곳의 사이였던 것을 보고 고을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여 신령하다고 하였다.
해서(海西)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마침 초당(草堂)이 비에 무너졌다. 이웃에 사는 벗인 진사 한치명(韓致明)이 부친 시에,
파직하고 돌아와 이웃집 빌려 지낸 것은 罷官歸稅借隣居
남산의 허름한 집이 비에 무너져서지 雨毁南山舊弊廬
부서진 집에서 하늘 보는 건 해롭지 않나니 破屋看天非害事
선생이 장차 배 속의 서책을 말리리라 先生將曬腹中書
하였으니, 대개 선생의 맑은 덕을 칭송한 것이다.
을유년(1765)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소환되었고 얼마 있다가 통례(通禮)에 임명되었다. 정해년(1767)에 사간(司諫)에 올랐으나 마침 간관으로 지방에 있는 사람이 많아 선생이 면천(沔川)으로 귀양을 갔다가 다음 해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기축년(1769)에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임명되어 명을 받들고 강도(江都 강화도)에 가서 선원각(璿源閣)을 수리하였으며, 일을 마치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선생의 명성을 듣고 넌지시 서울로 들어오게 하였으나 선생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임금에게 말하기를 “신 아무개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할 인재이니 불러서 비국(備局)의 낭관(郞官)으로 삼으십시오.” 하니, 임금이 급히 불러들여 《여지편람(輿地便覽)》을 감수(監修)하게 하였다. 경인년(1770)에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뽑혔으며 예전대로 비국의 낭관을 겸했다.
이에 임금이 또 대궐에 찬집청(簒輯廳)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 8명을 선발하여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였다. 선생은 〈여지고(輿地考)〉를 담당하였으며, 임금이 자주 입시(入侍)해 낱낱이 진술하여 응대하게 하여 항상 한밤중에 이르렀다. 임금이 기특하게 여겨서 자주 술과 안주를 하사하고, 특명으로 호조와 선혜청에서 돈과 쌀을 지급하고 양군문(兩軍門 어영청(御營廳)과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땔감과 숯을 계속 대주어 객지생활의 곤란함을 도와주었으나, 선생이 굳이 사양하자 두어 달 만에야 중지하였다. 이해에 책이 완성되자 임금이 책머리에 친히 쓰기를 “이 책을 편집하는 데에 아무개의 공이 컸다.” 하고, 특별히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려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했다가 얼마 후에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옮겼다.
임금이 또 명하여 《팔도지도(八道地圖)》를 감수하였고, 이미 완성되자 족자를 만들어 전각의 벽에 걸어두었다. 이로써 임금이 새삼 선생이 견문이 많고 재주가 많음을 알았다. 또 승지에 임명되어 일찍이 조용히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한숨짓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만나는 게 늦었는고. 승지는 머리가 하얗고 나는 나이가 여든에 가까우니, 군신간의 만남이 너무 늦은 것이 한스럽도다.” 하였다. 또 묻기를 “승지는 어버이가 살아 계신가?” 하자, 대답하기를 “부모님이 다 계시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선생을 위해 측은해하였다. 그로 인해 타이르기를 “이제 그대가 섬기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니 나를 버려두고 멀리가지 말라.” 하였다.
그때에 대신(臺臣) 최익남(崔益男)이 상소하여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을 논척(論斥)한 일이 있었다. 임금이 선생을 불러 옳고 그름을 물었는데 선생이 ‘예예’ 하면서 3번을 물어도 모두 대답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상소문 속의 말하기 어려운 것을 선생이 지적해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임금이 묵묵히 조회를 파하고 선생을 호서(湖西)의 연안으로 유배를 보내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은진(恩津)으로 정배(定配)하였다가 임금이 호남과 가깝냐고 묻고는 신 아무개가 이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갈까 걱정이라고 하며 수원(水原)으로 바꾸었으며,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용서하였다. 선생이 이로부터 서울 남쪽에서 셋방살이를 하였고 감히 돌아갈 뜻을 지니지 못했다.
임금이 선생을 지우(知遇)함이 깊어 장차 크게 쓰려고 했기 때문에 먼저 이치(吏治)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신묘년(1771) 봄에 다시 승지(承旨)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북청 부사(北靑府使)에 임명되었다. 북청의 풍속은 너무 질박하여 문식(文飾)이 없었다. 선생이 향교에 우수한 백성들을 모아 친히 향사례(鄕射禮)와 향음례(鄕飮禮)를 강의하니, 선비와 백성들이 둘러싸고 구경하여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의리를 대강 알게 되었다.
계사년(1773)에 체직되어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가 좌승지(左承旨)로 서승(序陞)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강계는 서쪽 변방의 큰 고을이다. 선생을 시샘하는 자가 탄핵하기를 “학문과 식견은 풍부하나 사무에는 서툽니다.” 하자, 선생이 의리를 내세워 체직되었다. 그해 가을에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나가 순천부의 소련치(小鍊峙)에 당도하였는데 어떤 여인이 길가의 무덤에서 곡을 하고 있었다. 선생이 수레 위에서 소리를 듣고 기색을 살펴보고는 거기에 속임수가 있음을 알았다. 아전과 군교(軍校)에게 잡아 가두게 하고 3일이 지나서 조사해보니, 죽은 남편을 곡한 것이라고 하는데 명확하지 않은 말이 많았다. 이에 그 시신을 파내 검시하여 배꼽 위의 쇠못을 찾아냈다. 마침내 엄중히 심문하자 여인이 비로소 자백하였는데, 샛서방〔間夫〕과 함께 본 남편을 살해한 것이었다. 옥사(獄事)가 이미 이루어지자 온 고을이 모두 선생의 명철함에 감복하였고 감히 속임수를 쓰지 못했다.
또 순천은 순창 지역과 서로 인접하여 친척과 벗들이 날마다 찾아왔다. 선생이 물품을 줄 때에는 난처한 기색이 없었으나 일을 만나 재결(裁决)하는 것은 모두 법에 맡겼다. 몸가짐이 검약하여 가재도구가 변변찮았다. 일찍이 순천부에서 질솥〔瓦釜〕 하나를 사서 고향 집으로 보냈으나 심부름꾼이 10리를 채 못 가서 질솥이 돌에 떨어져 깨지고 말았는데, 주민들이 그 바위를 ‘파부암(破釜巖)’이라고 하며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갑오년(1774) 여름에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옮겼는데, 그때 선생의 연세가 63세였다. 천 리 바닷길에 거센 파도 위의 돛배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선생은 태연히 길을 떠나면서 말하기를 “임금의 명령에 감히 험난함을 말하겠는가.” 하고는 곧장 제주부에 도착하였으며, 치적은 순천부에 있을 때와 같았다. 일찍이 조천관(朝天館)에 앉아 있다가 문득 운기(雲氣)가 서쪽에서 포차(砲車)처럼 오는 것을 보고 조수(潮水) 끝의 물을 가져오라고 하여 맛을 보고는 아전과 군교(軍校)에게 명하기를 “여기에서 수백 리 떨어진 바깥 바다에 반드시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사이에서 표류한 배가 있을 것이니 빨리 가서 구조하라.” 하였다. 즉시 뛰어난 사공 10여 명을 뽑아 빈 배에 식량을 실어 보냈더니 과연 먼 바다에 부러진 노와 부서진 배가 거센 파도 속에서 들락날락하였다. 살려낸 사람이 아주 많았는데 바로 절동(浙東)의 상선(商船)이었다. 상인들이 배에 남아있는 보화로 다시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은 터럭만큼도 가까이하는 것이 없었다. 제주를 다스린 지 1년 만에 어사 홍상성(洪相聖)과 백성을 다스리는 일 때문에 다투었으며, 어사가 선생을 파직하고 잡아다 처리하도록 요청하였다. 임금이 그 정상을 살펴보고 즉시 용서해주었으니, 하늘이 굽어보는 것은 사람이 이간질할 수 없다.
병신년(1776)에 영조가 승하(昇遐)하였다. 인산(因山 임금의 장례)을 마쳤으나 선생은 여전히 소식(素食)을 하였고, 영조 때의 일을 말할 때마다 문득 눈물을 흘렸다. 기해년(1779, 정조3)이 되자 선생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선왕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자주 은혜로운 말씀을 받들었기에 차마 떠날 수 없었는데, 이제 삼년상을 마쳤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하고, 마침내 물러나 남산의 옛집에서 살았다. 경자년(1780)에 세 차례 승선(承宣)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리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신축년(1781) 여름에 문득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요사이 기운이 피로함을 느끼니 아마 오래가지 못할 것 같구나.” 하고, 평생의 일을 아주 자세하게 낱낱이 말해주었다. 다음 날 손님과 바둑을 두다가 조금 어지러워 침상에 나아가 누웠다가 잠시 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5월 21일이었다.
선생이 말년에 마을 뒤 반룡강(盤龍崗)에 수장(壽藏)을 잡아놓고서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오르내리며 마을 사람에게 말하기를 “여기에 매장하면 저 압각수(鴨脚樹)가 말라버릴 것이네. 그러나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게.” 하였다. 그해 7월에 이곳에 매장하였는데 나무가 과연 말라버렸다. 몇 년이 지나 묘법리(妙法里)의 선영 밑으로 이장하자 은행나무에 다시 움이 돋았으니 기이한 일이다. 60년이 지난 임신년(1872, 고종9) 8월 일에 순창(淳昌) 화산원(華山院) 유좌(酉坐)의 언덕에 완폄(完窆)하였다.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음사(蔭仕)로 낭관을 지낸 형만(亨晩)의 딸로서 충정공(忠正公) 준경(浚慶)의 후손인데 자식이 없었다. 묘소는 노촌(老村) 찰방공(察訪公)의 묘소 아래 임좌(壬坐)에 있다. 계배(繼配) 강릉 최씨(江陵崔氏)는 학생(學生) 돈오(惇五)의 딸이며, 묘소는 묘법리 남쪽의 장고등(長鼓嶝) 건좌(乾坐)에 있다. 계배 평창 이씨(平昌李氏)는 음사로 낭관을 지낸 광집(光潗)의 딸이며, 선생의 무덤에 부좌(祔左)하였다. 모두 현숙한 자질과 지극한 행실이 있어 육친(六親)이 다 칭송하였다.
선생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재권(在權)과 차남 두권(斗權)은 이씨가 낳았다. 진사 이영갑(李永甲)에게 시집간 장녀는 최씨가 낳았고, 이호연(李浩淵)에게 시집간 차녀와 진사 윤치정(尹致鼎)에게 시집간 막내딸은 모두 이씨가 낳았다. 재권은 여산(礪山) 송로(宋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하록(夏祿)이고 차남 중렴(重濂)은 종숙(從叔) 익권(翼權)에게 양자로 들어갔으며 사위는 이서봉(李瑞鳳)이다. 두권은 남원(南原) 윤우혁(尹羽㷜)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규(湀)이고 차남은 연(演)이며 사위는 이진번(李鎭蕃)ㆍ이기필(李基弼)ㆍ황수선(黃秀璿)이다. 하록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직모(稷模)로 구경(九卿)이 추천하여 참봉에 임명되었으며 사위는 권엽(權曄)이다. 규는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성모(聖模)이고 사위는 허준(許浚)이다. 연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경모(敬模)이고 차남은 병모(秉模)이며 사위는 노일현(盧逸鉉)이다.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선생은 하늘이 낸 호걸의 재주로 널리 배우고 신중히 생각하는 공부를 이루어 식견이 백가(百家)보다 높고 지혜가 만물에 두루 미쳤다. 평소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뜻을 두고 고금의 제도를 잘 참작하였으며, 가슴에 쌓은 것을 다 펴지 못해도 스스로 몸가짐을 겸손하게 하였다.
효성을 하늘에서 타고나 뜻을 받들고 물건으로 봉양하는 데에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항상 봉록으로 미처 봉양하지 못한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씀씀이를 검박하게 하기를 오히려 어버이가 살아계시던 날보다 지나치게 하였다. 어버이의 기일(忌日)을 당할 때마다 초상 때처럼 부여잡고 울부짖었으며 평생 어린애가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을 지녔다.
조상을 받드는 데에 정성을 다하여, 제전(祭田)을 두고 석물(石物)을 갖추어 묘도(墓道)를 꾸몄다. 마음으로부터 우애하여 집안일을 아우인 진사공 경문(景汶)에게 맡겼는데 훈지(塤篪)처럼 서로 잘 맞아 가정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아들과 조카들을 바른 도리로 가르치되 항상 옛 성현들의 언행을 인용하여 정성스레 깨우쳤다. 〈정훈록(庭訓錄)〉을 지어 능히 선대의 미덕을 찬술했으며 그것으로써 권면하고 경계하였다. 종족(宗族)들과 화목하게 지내 정의(情誼)가 골고루 흡족하였으며, 곤궁함을 구휼하고 급한 사정을 구제하는 데에는 친소(親疎)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사양하거나 받는 절차는 더욱더 신중하여 오직 의리에 맞는가를 살폈지 조금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다섯 번 고을 수령을 맡았으나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아 집이 부서지고 밭이 거칠어 나물밥도 잇기 어려웠지만 느긋하게 처신하였다.
장년이 되어 처음 벼슬에 나아가서는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로 임금을 섬겼으며, 분수나 의리로 헤아려보아 나아가기는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였다. 성군의 시대를 만나 자주 은혜로운 유시(諭示)를 받들어 거의 크게 쓰일 수 있었으나 모함을 당하기도 한데다가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였다. 마침내 스스로 산림에 은둔하여 도서(圖書)를 다시 익히고 연구하며 담담하게 세상을 잊었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하루라도 가슴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영조의 기일만 되면 재소(齋素)하고 조용히 앉아 밤새도록 슬픈 기색으로 임금을 다시 뵙는 듯한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갑술년(1694, 숙종20)이나 기사년(1689)에 태어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선왕〔영조〕 및 선고(先考 돌아가신 아버지)의 옛 동갑내기로 여겨 하인이나 미천한 백성이라도 반드시 더 우대하여 잘못이 있어도 용서해주고 음식이 있으면 대접하였으니, 선생이 충성과 효도에 마음을 미루어 나아간 것이 지극하다. 교유를 신중히 하여 조정에 있은 지 20여 년 동안 권문세가에 발길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조그마한 벼슬이 모두 임금의 선발을 거쳤다. 그러나 문학으로 깊이 교유한 사람은 홍 태사(洪太史) 한 사람뿐이었다.
선생이 문장을 지을 때에는 경전과 역사서를 바탕으로 하여 그 근원에 이르렀고, 구삭(丘索)을 참고하여 그 마음을 넓혔으며, 〈단전(彖傳)〉과 〈상전(象傳)〉을 살펴보아 그 이치를 통달하였다. 저술한 것이 상당히 많은데, 가령 〈의표도(儀表圖)〉와 〈부앙도(頫仰圖)〉는 《한서(漢書)》의 〈천문지(天文志)〉와 같고, 《강계지(疆界誌)》ㆍ〈산수경(山水經)〉ㆍ《도로고(道路考)》는 《주관(周官)》의 〈직방도(職方圖)〉를 본받았고, 〈일본증운(日本證韻)〉ㆍ〈언서음해(諺書音解)〉ㆍ〈오성운해(五聲韻解)〉는 축씨(祝氏)의 글이나 사전〔字書〕과 같다. 〈소사문답(素沙問答)〉에서 말한 도(道)는 형기(形器)에 분리되지 않고 섞이지 않는데, 바로 ‘기도 도이고 도도 기이다.〔器亦道道亦器〕’라는 의론이다. 비록 저술이 방대하지만 모두 탁월하게 시행할 만한 내용들이다.
선생은 지기(志氣)가 청명하고 가슴속이 초탈하여 초연히 세상을 버린 것처럼 한 점도 세속의 얽매임이 없었다. 일찍이 9월 보름이 되어 옥우(玉宇)가 맑고 달빛이 휘영청 밝았는데, 선생이 깊은 밤에 마루를 걷다가 시동에게 모래 언덕이 무너져 내린 곳을 한 자 남짓 파게 하니 유리항아리처럼 둥글고 투명한 물건이 하나 나타났다. 선생이 잠깐 어루만지다가 도로 묻게 하고 돌아왔다. 다음 날 밤에 시동이 그 무리와 함께 그 땅을 파헤치고 이리저리 찾아보았으나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에 조용히 여쭙자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실제의 형상이 아니고 달빛이 곧장 비치는 곳에 잠깐 어렸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이니 바로 태음의 정기〔陰精〕다.” 하였다. 아, 옛날에 이른바 “탐내지 않으니 밤에 금은의 기운을 알아본다.〔不貪夜識金銀氣〕”라는 것이 또한 이러한 것인가.
선생 같은 분은 참으로 산하의 간기(間氣)요, 천하의 선비이다. 대저 선생의 재주와 덕과 훌륭함으로, 지식은 밝은 조정에 시귀(蓍龜)로 충분했으며, 문장은 임금의 계책을 보불(黼黻)하기에 충분했으며, 이익과 혜택은 백성들을 윤택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큰 물고기와 기러기털이 끝내 큰 바다를 휘젓고 순풍을 만나지 못한 것은 운명 때문이니, 선생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대개 생전에 성군의 세상에 드문 은우(恩遇)를 만났으나 풍기(風期)가 너무 늦어 평소의 포부를 다 펴지 못했으니, 이는 영조가 경연에서 슬피 탄식한 까닭이고 또한 선생이 끝없이 한스러워한 것이다.
아, 선생은 나의 선조인 어은(漁隱)에게 현손(玄孫)이 되고 나는 선생에게 또 현손의 항렬이 된다. 50년 뒤에 태어나 후손들이 모이는 대열에서 미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그저 숭고한 덕행을 아득히 우러러보기만 한 것도 나의 한이다. 선생의 증손 병모(秉模)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왔으며, 5세손 기휴(冀休)가 선생의 만사(輓詞)와 묘문(墓文)을 주워 모으고 집안의 옛 기록을 참고하여 나에게 행장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이에 감히 참람하고 외람됨을 잊고 삼가 그 대강을 기술하였으며, 터럭만큼도 과장된 말을 하지 않고서 말을 아는 군자를 기다린다.
[주1] 신헌구(申獻求) : 1823~1902.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계문(季文), 호는 백파(白波)이다. 1862년(철종13)에 정시 병과에 합격하여 출사(出仕)한 뒤 이조 참판ㆍ형조 판서ㆍ한성부 판윤ㆍ예조 판서ㆍ경기 관찰사ㆍ중추원 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ㆍ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을 역임하였다.
[주2] 영천 신씨(靈川申氏) : 영천은 경상북도 고령군의 옛 별호이다.
[주3] 좌명(佐命)의 원훈(元勳) : 좌명 공신(佐命功臣)은 정종 2년(1400) 왕자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할 때 박포(朴苞) 등을 죽인 공으로 이저(李佇) 등 40여 인에게 녹훈(錄勳)한 것이니, ‘좌명의 원훈’이라고 한 것은 착오이다. 세조는 1455년 9월 왕위를 잇는 데 공을 세운 신하 44명을 좌익 공신(佐翼功臣)으로 책정하였는데, 신숙주는 좌익 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주4] 기묘제현(己卯諸賢) :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ㆍ기준(奇遵) 등과, 유배ㆍ파직을 당한 김구(金絿)ㆍ박세희(朴世熹)ㆍ이자(李耔)ㆍ유인숙(柳仁淑)ㆍ홍언필(洪彦弼), 사림(士林)을 두둔한 안당(安瑭)ㆍ김정국(金正國)ㆍ김안국(金安國) 등을 일컫는 말이다.
[주5]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 : 원문의 ‘서사(筮仕)’는 처음으로 관직을 얻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필만(畢萬)이 시초점(蓍草占)을 쳐서 진(晉)나라에 출사(出仕)하는 데 따른 길흉을 알아 본 결과, 둔괘(屯卦)가 비괘(比卦)로 변한다는 둔지비(屯之比)의 점사(占辭)를 얻었는데, 신료(申廖)가 이를 풀이해 보고는 길(吉)하다고 판정을 내린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閔公元年》
[주6] 추성(樞星) : 천추성(天樞星)이다.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로, 북두칠성의 자루에 해당한다. 황제(黃帝)의 모친인 부보(附寶)가 기(祁) 땅 들판에 있을 때 번개가 크게 치며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을 휘감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잉태한 뒤 24개월이 지나서 황제를 낳았다고 한다. 《史記 卷1 五帝本紀)》
[주7] 주흥사(周興嗣) : 468~521. 중국 남조 시대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천자문(千字文)을 지었다고 한다.
[주8] 옛날 …… 듯하네〔昔大禹之濟江, 疑負舟之黃龍.〕 : 하(夏)나라 우(禹) 임금이 남쪽을 순시하려고 강을 건너갈 적에 황룡이 등으로 배를 떠밀자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색이 되었다. 우 임금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탄식하기를 “내가 하늘의 명을 받아 힘을 다 쏟아 백성을 기르고 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내가 용을 걱정할 것이 뭐 있겠는가.”라고 하니, 용이 귀를 숙이고 떠났다. 《呂氏春秋 卷20》
[ 주9] 마음의 …… 못한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10] 구류백가(九流百家) : 구류는 아홉 가지 학파로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를 말하고, 백가는 유가 이외에 일가一家의 설을 세운 수많은 학파와 학자를 가리킨다.
[주11] 태사(太史) 홍양호(洪良浩) : 1724~1802.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747년(영조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54년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가 되었기에 ‘태사’라고 한 것이다.
[주12] 당후(堂后) : 주로 승정원의 7품관인 주서(注書)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들의 처소를 가리킨다.
[주13] 임기를 채우고 : 원문의 ‘개만(箇滿)’은 개월법(箇月法)에 의하여 천전(遷轉) 또는 거관(去官)하는 관원이 그 근무 일수가 차던 것을 말한다. 대개 외관(外官)은 30개월, 경관(京官)은 15개월이었다.
[주14] 요사스런 …… 살펴 : 〈영대〉 제1장의 주에 “나라에서 대를 둠은 요사스런 기운을 관망하여 상서와 재앙을 살피고 때로 구경하고 놀아 수고로움과 편안함을 조절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詩經集傳》
[주15] 민은시(民隱詩) : 백성들의 괴로움을 읊은 시를 말한다. 저자는 영조의 명으로 1765년(영조41) 2월에 이 시를 지어 바쳤으며, 《여암유고》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주16] 한치명(韓致明) : 1703~1788.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일승(日昇), 호는 지산(芝山)이다.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갑동(甲洞)에서 태어났다. 1740년(영조16)에 증광시에 합격, 이듬해 성균관으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나,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1760년에 조정에서 읍지를 만들어 올리라는 명이 있자, 순창 군수 이휘지(李徽之)의 요청으로 양응수(楊應秀, 1700~1767)ㆍ한종악(韓宗岳)과 함께 《옥천군지(玉川郡誌)》를 편찬하고 서문을 짓기도 하였다. 문집으로 《지산유집(芝山遺集)》이 있다.
[주17] 남산의 …… 무너져서지 : 원문의 ‘雨毁南山舊弊’ 6글자는 저본에 ‘결자(缺字)’로 되어 있으나, 《지산유집》 권1 〈증신우순민(贈申友舜民)〉시를 참조하여 보충해 번역하였다.
[주18] 강도(江都) : 저본(底本)에 ‘강릉(江陵)’으로 되어 있으나 《승정원일기》 영조 45년 8월 4일 기사를 참조하여 바로잡았다.
[주19] 홍봉한(洪鳳漢) : 1713~1778.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으로 평안도 관찰사ㆍ좌참찬 등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특히 당쟁(黨爭)의 폐해, 인재의 발탁 등 시무(時務) 6조로 당면정책을 건의 시행케 하고,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환곡(還穀)의 폐단을 엄금, 은결(隱結)의 재조사 등을 단행하게 하였으며, 1770년 영조의 명으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하였다. 저서에는 《익익재만록(翼翼齋漫錄)》ㆍ《정사휘감(正史彙鑑)》 등이 있다.
[주20] 대신(臺臣) …… 일 : 1770년(영조46)에 최익남(崔益男, 1724~1770)이 세손으로 하여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사(墓祠)에 참배하게 할 것을 청하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김치인(金致仁, 1716~1790)의 죄가 큼을 논한 것을 말한다. 《英祖實錄 46年 11月 10日》
[주21] 이치(吏治) : 지방관의 치적(治績)을 말한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순(舜) 임금의 동생인 상(象)이 자기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여 “천자가 관리를 파견하여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天子使吏治其國.]”라는 말에서 나온 의미이다.
[주22] 향사례(鄕射禮)와 향음례(鄕飮禮) : 향사례는 향교에서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어 유학 도덕의 풍기를 배양하던 의식의 하나이며, 향음례는 양풍(良風)과 미속(美俗)을 교도(敎導)하는 의식으로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예의(禮儀)를 지키기 위해 서약하는 술을 마시는 예식이다.
[주23] 서승(序陞) : 관직에 있는 햇수를 따라서 품계나 벼슬이 오르는 것을 말한다.
[주24] 조천관(朝天館) : 육지를 왕래하는 명사나 귀빈들이 머무르거나, 제주산 마필 등 조공품 또는 생필품을 육지로 보낼 때 공무를 보던 곳으로 부산ㆍ인천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관(三館)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주25] 소식(素食) : 죽음을 애통해하는 의미에서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을 먹는 것을 말한다.
[주26] 수장(壽藏) :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자기의 무덤이나 남의 무덤을 이르는 말로 수총(壽摠) 또는 수릉(壽陵)이라고도 한다. 후한(後漢) 때에 시작된 관습으로, 수(壽)는 구원(久遠)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後漢書 卷64 趙岐列傳》 《書言故事 墳墓類》
[주27] 압각수(鴨脚樹) : 은행나무의 별칭이다. 잎 모양이 오리류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과 나무뿌리가 물오리 발처럼 발가락 사이가 붙어 있어 생겼다는 설이 있다.
[주28] 육친(六親) : 여섯 가지 친족으로 부모와 형제, 처자식을 이른다.
[주29] 구경(九卿) : 조선 시대에 삼정승 다음가는 아홉 관직으로서, 의정부의 좌ㆍ우 참찬, 육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을 이른다.
[주30] 마음으로부터 : 원문의 ‘인심(因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황의(皇矣)〉에 “이 왕계가 마음으로부터 우애한다.[維此王季, 因心則友.]”라고 하였다.
[주31] 훈지(塤篪) : 질나팔과 저라는 악기를 말하는데, 형제가 서로 화목한 것을 비유한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형님이 질나팔을 불면 아우가 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32] 처음 벼슬에 나아가서는 : 원문의 ‘석갈(釋褐)’은 입고 있던 베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주33] 재소(齋素) :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며 육식을 피하고 소찬을 먹는 것을 말한다.
[주34] 갑술년이나 기사년 : 갑술년(1694)은 영조가 태어난 해이고, 기사년(1689)은 신경준의 부친인 신뢰(申洡)가 태어난 해이다.
[주35] 구삭(丘索) : 상고 시대의 서책인 팔삭(八索)과 구구(九丘)를 말한다. 팔삭은 팔괘(八卦)의 설(說)에 관한 책이라고도 하고, 팔왕(八王)의 법(法)에 관한 책이라고도 한다. 구구는 구주(九州)의 지(志)라고 한다.
[주36] 축씨(祝氏)의 글 : 남송 축목(祝穆, ?~1225)이 편찬한 유서(類書)인 《사문유취(事文類聚)》를 말한다. 이 책은 천도ㆍ지리ㆍ인륜으로부터 초목ㆍ충어(蟲魚)ㆍ예악ㆍ문물ㆍ제도ㆍ관직ㆍ음식ㆍ기용(器用)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주37] 기도 …… 기이다〔器亦道道亦器〕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라는 말을 명도 정호(程顥)가 해설하면서 “기도 도이고 도도 기이다.[器亦道道亦器.]”라고 하고, 또 “원래 다만 이것이 바로 도이다.[元來只此是道.]”라고 해설하였다. 《二程遺書 卷1, 卷11》 도(道)는 무형(無形)의 추상적인 도리를 뜻하고 기(器)는 유형(有形)의 구체적인 사물을 뜻하는 중국 철학 용어인데, 여기서는 도와 기 즉 이(理)와 기(氣)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정호가 해석한 것이다.
[주38] 옥우(玉宇) : 옥으로 지은 하늘나라의 신선들이 사는 궁전을 가리키기도 하고 넓은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
[주39] 탐내지 …… 알아본다〔不貪夜識金銀氣〕 : 두보(杜甫)의 〈제장씨은거(題張氏隱居)〉에 나오는 시구이다.
[주40] 간기(間氣) : 세상에 드문 빼어난 기운으로, 영웅 위인들은 위로 성상(星象)의 정기에 응하여 천지간의 특수한 기를 받아 태어나는데, 세대를 격하여 어쩌다가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일컫는다. 《춘추연공도(春秋演孔圖)》에 “정기(正氣)는 제(帝)가 되고, 간기는 신(臣)이 되고, 수기(秀氣)는 인(人)이 된다.”라고 하였다.
[주41] 시귀(蓍龜) : 점을 칠 때 쓰이는 시초(蓍草)와 거북 껍질을 말한다. 옛날에는 국가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점을 쳤는데, 거북의 껍질로 점치는 것은 복(卜)이고, 시초(蓍草)로 점치는 것은 서(筮)이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의 자문 역할을 하던 학자나 신하들을 비유한다.
[주42] 보불(黼黻) : 옛날에 임금의 대례복(大禮服)인 곤복(袞服)에 수놓았던 화려한 문양을 말한다. 보(黼)는 흰색과 검은색으로 자루 없는 도끼 모양을, 불(黻)은 검은색과 푸른색으로 ‘아(亞)’자 모양을 수놓은 것으로, 전하여 유려하고 찬란한 문장(文章)을 비유한다.
[주43] 큰 물고기와 …… 것 : 신경준이 실력을 마음껏 발휘함으로써 큰일을 성취할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왕포(王褒, ?~기원전 61)의 〈성군이 어진 신하를 얻음에 대하여[聖主得賢臣頌]〉에 “마치 기러기털이 순풍을 만나서 나는 듯하고 거대한 물고기가 큰 바다에서 마음대로 노니는 듯하다.[翼乎如鴻毛遇順風, 沛乎若巨魚縱大壑.]”라는 말이 나온다.
[주44] 풍기(風期) : 임금과 신하 사이의 뜻이 서로 통한다는 말이다.
[주45] 어은(漁隱) : 신기한(申起漢, 1588~1644)으로, 자는 응시(應時), 호는 어은이다. 순창의 남산대(南山坮)에서 출생하였다. 1624년(인조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인조조(仁祖朝)에 음직으로 출사하여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주46] 숭고한 덕행 : 원문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은 높은 산과 큰 길처럼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를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 길을 따라가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行狀[禮曹判書申獻求敬撰]
先生諱景濬。字舜民。旅菴其號也。我靈川之申。肇自高麗檢校諱成用。世襲簪組。至禮儀判書諱德隣號醇隱。友善圃,牧。相與推重。是生諱包翅大司諫號壺村。遯于南原之壺村。扶植名節。贈左贊成。生諱檣參判號巖軒。首選集贒殿學士。對揚文敎。餘事字書。爲筆苑所宗。贈領議政高靈府院君。生諱末舟全州府尹。當莊陵遜位。以佐命元勳叔舟之弟。棄官歸淳昌之南山。有亭曰歸來。恬貞自葆。贈吏曹參判。以上四世並院享。自後子孫世家南山。有孫諱公濟吏曹判書。謚貞敏號伊溪。選淸白吏。爲己卯諸贒所倚重。三傳至主簿諱𣽤。孝行蒙旌。入三綱錄。寔先生之五世祖也。高祖諱克淳參奉。曾祖諱澐贈執義。卽副提學濡之弟。大父諱善泳筮仕蔭察訪。贈吏曹參議。皆以文行世其家。考諱洡克趾先美。隱德不仕。以善書著。妣韓山李氏。進士儀鴻女。貞淑端莊。婦德咸備。以肅廟壬辰四月十五日。生先生于南山之舊第。學生公夢。一大赤虎自天而降。有一老人云。是樞星之精。必爲奇男於君家。生纔八九月。能知壁上之有文字者而指示於人。四歲讀周興嗣千字文。輒隨其字。能會意而作字。五歲受詩經。文義大就。七歲作龍旂賦。有昔大禹之濟江。疑負舟之黃龍。缺 庭有老杏久無實。爲文 逸 責之。是歲子忽繁。鄕人異之。八歲北學于洛。九歲西入于沁。離親闈七百餘里。作悲思曲三闋。登山而謠。聞者莫不悲感。十五歲。文章已成。先生才器俊偉。意氣豪邁沈深有大志。嘗曰。大丈夫生斯世。天下事皆吾職。一物未格耻也。一藝不能病也。希聖希賢。在深思力行而已。學貴見道。道在自得。孟子曰。心之官思。思則得之。不思則不得。管子曰。思之思之。鬼神其通之。是自得之法也。遂自聖贒之書。潛心探賾。深究乎性命之原。汎濫乎九流百家。莫不證印其是非。以至天文地理聲律醫卜之學。歷代憲章海外奇僻之書。靡不鉤其奧而絜其要。於本國山川關隘形勝處。尤瞭然如在目中。曰凡爲將者。須先識地利。其自任如此。丁巳。丁外艱。易戚備至。戊午。移家素沙。著素沙問答。辛酉。移稷山。著稷書。皆觀物悟理之言。而多深造獨得之妙也。甲子。還淳昌舊第。戊辰。丁內難。哀毁盡制。一如前喪。甞應擧發解。偶遊智異山樂之。遂不赴會。甲戌。應增廣鄕試。時洪太史良浩掌湖南試。本道二守令爲副。洪公問二副以本道知名士。僉曰。淳昌有申某者。南士之。得此一人。足侈一榜矣。乃發策問車制。先生操筆對策。文不加點。洪公覽券擊案曰。吾得申某矣。二副曰。何以知之。洪公笑曰。第觀之。非申某。不能作此。遂擢置第一。及柝名果然。二副皆驚。夏赴會試。又中高選。洪公卽就見先生于京邸。遂與定交。是歲隷槐院。屢入堂后。記注穪旨。丁丑。拜徽陵別檢。箇滿陞六。例付成均館典籍。轉禮兵曹郞。庚辰。除司諫院正言。尋爲吏曹郞。遷司憲府掌令。壬午春。出知瑞山郡。丁大饑。削廩備賑。煮塩易粟。闔境無遺瘠。嘗以爲耕農。民命攸係。故望氛祲察災祥。使民豫備。時當秋熟。禾未登塲。急令境內銍刈而庤之。居三日大雨雹。所經無不傷禾黍。一境獨晏如。民皆蹈舞穪頌。癸未召還。郡男女老穉啼號擁路。願留衣以祠之。先生笑而却之道。移忠淸都事掌試士。時湖西有死囚三。久疑未决。 上命道臣會以能名者守令七八共讞。又未决。道伯要先生决之。狀成以聞。上褒道伯明賞之。甲申。留監漕運。期滿歸。再除掌令。皆以在鄕遞。其冬。又出監長淵縣。應旨進民隱詩。上亟穪其文辭。先生爲治。外寬內明。能折伏姦隱。甞坐衙令軍校曰。某方幾里某林中。有盜禦人。期明朝捉來。校卽往得盜如先生言。近歲爲是縣者。多以罪去。傳言衙後有隱瘞者。以是不利於官。而終莫知其處云。先生一日散步遊後山。令吏掘其左若干步無所得。後夜又令掘其右若干步。又無所得。第三夜。乃令部校伺山路曰。有舁棺過者勿問。但詗其爲誰。其夜果有舁棺而過者。乃縣之猾吏也。視其壙當兩掘之間。邑人皆伏以爲神。自海西歸家。適草堂爲雨所頹。鄰友韓進士致明寄詩曰。罷官歸稅借隣居。六字缺 廬。破屋看天非害事。先生將曬腹中書。盖頌其淸德也。乙酉。以司諫院獻納召還。尋拜通禮。丁亥。陞司諫。會諫官在外者多。先生坐謫沔川。翌年宥還。己丑。拜宗簿寺正。奉命往修璿源閣於江陵。竣還鄕廬。領相洪鳳漢聞先生名。諷使入京。先生不動。乃言于上曰。申某經濟之才也。辟爲備局郞。上命馳馹召之。監修輿地便覽。庚寅。擇掌樂正。兼備郞如故。於是上又設簒輯廳于闕下。選文學之士八人。撰文獻備考。先生則雖掌輿地考。上數命入侍。指陳應對。常至夜分。上奇之。頻賜酒饌。特命地部惠廳給錢米。兩軍門繼薪炭。以周旅食之艱。先生固辭數月乃止。是歲書成。上親書卷首。乃曰是書之輯。某也功爲多。特陞通政階。擢同副承旨。旋移兵曹參知。上又命監修八道地圖。旣成。作障揭殿壁上。以是上益知先生多聞多才也。又除承旨。甞從容入侍。上喟然嘆曰。何相見之晩也。承旨髮白。予則大耋。君臣遭遇遲暮可恨。又問承旨有親乎。對曰。父母俱不在。上爲之戚然。因兪之曰。今爾所事。惟予一人。毋捨予以遠也。時有臺臣崔益男疏論領相金致仁。上召問先生是非。先生唯唯。三問而三不對。蓋疏中有難言者。先生不欲斥言之也。上默然罷朝。命竄先生湖沿。初配恩津。上問地近湖南耶。恐申某從此歸矣。改以水原。未幾旋宥。先生自是僦舍干京城之南。不敢有歸意。上知先生深。將爲大用。故欲先試吏治。辛卯春。復除承旨。旋拜北靑府使。北俗樸甚無文。先生聚秀民于校宮。親自講授鄕射,鄕飮禮。士民環觀。粗知親上敬長之義。癸巳。遞入銀臺。序陞左承旨。未幾除江界府使。江界西塞雄府也。有媢先生者劾之曰。文識略而事務疎。先生引義遞。其秋出知順天府。到本府小鍊峙。有女哭於路傍塚。先生從車上聞聲察色。知其有陰詐。令吏校押囚。過三日而査究。以謂哭故夫。而語多隱晦。乃掘其尸。撿得臍上鐵釘。遂嚴覈之。女始自服。與間夫戕殺本夫也。獄旣成。一府皆服其明。莫敢欺詐。且順與淳地相接。親戚故舊日扶携而至。先生資給無難色。而臨事裁决則一任法焉。持身儉約。家什寥落。甞自順府買一瓦釜。以送于本第。使人未及十里。瓦釜墜石而破。居人名其巖以破釜。至今穪之。申午夏。移濟州牧使。時先生年已六十有三。海路千里。鯨濤風楫。人多愍之。先生怡然就道曰。君命敢言夷險耶。卽到府。治績一如在順時。嘗坐朝天館。忽見雲氣從西來如砲車。命取潮頭水嘗之。令吏校曰。此去外洋幾百里。必有江浙間漂船。速往救之。卽擇善梢手十數人。駕虛舟賚糇以遣。果有遠洋摧楫破蓬。出沒驚濤。所救活甚多。乃浙東商舶也。適人願以船中餘寶。仰報再生之恩。先生毫無所近。治濟一年。與御史洪相聖以民事爭。請罷拿。上察其狀。卽原之。天之所監。人無得以間也。丙申。英廟上賓。旣因山。先生猶素食。每說先朝事。輒言淚俱下。至己亥。先生告人曰。余受知先王。屢奉恩言。不忍離違。今三年已畢。可以歸矣。遂退居南山舊廬。庚子。三除承宣。進疏終不就。辛丑夏。忽語二子曰。余近覺氣憊。殆不久乎。因歷敍平生事甚悉。翌日與客碁微眩。就床臥移時。翛然而逝。時五月二十一日也。先生晩年。占壽藏于村後盤龍崗。杖屨登臨。謂里人曰。葬於此則惟彼鴨脚樹當枯。然勿剪勿伐也。是年七月。葬于此地。樹果枯矣。越數年。遷兆于妙法先塋下。杏樹復ㅇ孽。异哉。後六十年壬申八月日。完窆于淳昌華山院酉坐原。配廣州李氏。蔭郞亨晩女。忠正公浚慶后。無育。墓在老村察訪公墓下壬坐。繼配江陵崔氏。學生惇五女。墓在妙法南長鼓嶝乾坐。繼配平昌李氏。蔭郞光潗女。祔先生墓左。俱有淑質至行。六親咸頌。有二男三女。男長曰在權。次曰斗權。李氏出也。女長歸進士李永甲。崔氏出也。次適李浩淵。季適進士尹致鼎。幷李氏出也。在權娶礪山宋璐女。生二男一女。男長夏祿。次重濂系從叔翼權后。女李瑞鳳。斗權娶南原尹羽㷜女。生二男三女。男長湀,次演。女李鎭蕃,李基弼,黃秀璿。夏祿有一男一女。男稷模。九卿薦除參奉。女權曄。湀生一男一女。男聖模。女許浚。演有二男一女。男長敬模。次秉模。女盧逸鉉。玄孫以下不盡錄。先生以天挺人豪之才。濟以博學愼思之功。識高乎百氏。知周于萬物。雅意經濟。斟酌古今。有蘊莫施。謙約自持。孝性根天。志物之養。靡不用極。恒以祿不及養。至痛在心。自奉菲薄。猶過於親在之日。每當忌辰。攀號如袒括。終身抱孺子慕。奉先殫誠。置田具石。以餙墓道。因心則友。家事聽弟進土公景汶。塤箎相洽。庭無間言。敎子姪以義方。恒引前言往 行。諄諄警誨。作庭訓錄。克述前懿。以之勉戒。敦睦宗族。情誼周洽。恤窮濟急。無間親疎。辭受之節。尤加審愼。惟義是視。少不放過。五典州府。不營家私。破屋荒田。蔬糲不繼。處之裕如也。壯而釋褐。以所以事親者事君。揆分度義。難進易退。際遇聖明。屢承恩兪。庶可大用。至有貝錦之傷。而龍御遽已賓天矣。遂自斂藏林樊。溫繹圖書。澹若忘世。而其愛君憂國之誠。未甞一日忘諸懷也。每當英廟諱辰。齋素靜坐。竟宵以致愀然復見之誠。至於若見。甲戌己巳生人。則以爲先王及先考舊甲人。雖下隷賤甿。必加優待。有過而貰。有饌而饋。其所以推心於忠孝者至矣。愼交遊。立朝二十餘年。足不近權貴之門。一資半級。皆由上簡。而以文學深交者。惟洪太史一人而已。先生之爲文章。本諸經史。以達其原。參諸丘索。以廣其心。觀諸彖象。以通其理。所著述頗多。而若儀表圖,頫仰圖。如漢書之天文志也。疆界誌,山水經,道路考。倣周官之職方圖也。日本證韻,諺書音解,五聲韻解。若祝文與字書也。素沙問答所謂道者不離不雜乎形器。而卽器亦道道亦器之論也。雖其汗漫著述。皆卓然有可行之實。先生志氣淸明。胷懷脫灑。若超然遺世。無一点塵累。嘗値九秋之望。玉宇澄淸。月色虛明。 先生夜深步堂。命侍童登岸沙崩汰處。鑿地尺餘。見一物團圓澄澈。如琉璃缸。先生摩挲有頃。還使掩埋而歸。翌夜。侍童與其徒疏其土。左右摸索。不見形迹。乃從容仰問。先生笑曰。此非眞形。月光直射處。暫凝旋消。卽太陰精也。噫。古所謂不貪夜識金銀氣者。亦如是也耶。若先生者。儘乎山河之間氣。天下之士也。夫以先生之才之德之美。知識足以蓍龜乎明廷。文章足以黼黻乎皇猷。利澤可以膏潤乎生靈。而巨魚鴻毛。終不得縱大壑遇順風者。抑由命焉。於先生何有哉。盖生逢聖主不世之恩遇。而風期遲暮。未盡素蘊。此英廟所以臨筵悲歎。而亦先生之所以齎恨未已者也。噫。先生於我祖漁隱。玄孫也。小子於先生。又玄孫行也。生於五十載後。未及摳衣於雲仍花樹之列。待自緬仰於高山景行。亦小子之恨也。先生曾孫秉模緘書屢回。五世孫冀休採摭先生之誄輓及墓文。參以家庭舊錄。諗余以狀德之文。玆敢忘其僭猥。謹述其梗槩。不敢爲分毫溢辭。用俟知言之君子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