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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봉산 ♣ ☞ 홍천강 중간 지점의 강변에 솟은 여덟 봉우리가 팔봉산이다. 팔봉산은 여름철 피서로 인기있는 홍천강과 함께 알려진 산으로 해발 309m에 불과하지만 크고 작은 여덟 봉우리가 팔짱 낀 8형제처럼 이어진 자태가 아름답다. 더욱이 숲 사이로 뾰족뾰족 솟은 암벽 및 기암괴석이 굽이굽이 감도는 홍천강의 맑은 물줄기와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할 만큼 주위 경관이 수려한 산이기도 하다. 8개의 봉우리들이 험준하게 솟아 있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산으로 초심자들은 산 높이가 낮은 것에 자신을 갖고 오르다가 대부분 중턱에서 한숨을 내쉬며 후회하는 산으로도 유명하다. 팔봉산은 여덟 개의 봉우리가 대부분 암봉으로 되어 있고 로프를 잡고 암릉을 오르거나 수직에 가까운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구간이 있어 등산화를 반드시 착용하고 올라야 한다. 홍천강에 물놀이를 하다 준비도 없이 오르기는 무리이다. 팔봉교를 건너면 다리 끝에 매표소가 있는데 매표소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35분 정도면 1봉을 오르고 8봉까지 다음 봉우리를 오르는데 10-20분 정도 소요된다. 총 산행시간은 3-4시간. 8봉은 오르는 코스가 가파른 암름이지만 요즘은 철제사다리가 설치되어 도움을 준다. ♣ 최 승 희 선생의 생애 및 활동사항 ♣ ▶1911년 강원도 홍천에서 출생했다. 최준현(崔濬鉉)의 딸이며, 어머니는 박용자(朴容子)이다. 영화제작자 최승일(崔承一)의 동생이다.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최승일의 권유로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도일했다. 1926년 5월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위해 도쿄로 건너간 뒤 약 3년 만에 주역급 무용수로 발탁되었고, 수석대교(首席代敎)로 후진을 지도할 만큼 급성장했다. 1927년과 1928년 이시이바쿠의 조선공연에 참가하여 호평을 받았다. 1929년 귀국하여 경성에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이해 12월 찬영회가 주최하는 ‘무용·극·영화 밤’에 출연했다. 1930년부터 본격적인 무용공연을 시작했다. 이해 2월 개성에서 무용대회, 3월 창작무용공연회, 10월 제2회 공연회, 11월 대전에서 무용대회를 각각 가졌다. 1931년 문학가 안막(安漠)과 결혼했다. 이외에 「파우스트」·「광상곡」·「그들의 로맨스」·「그들의 행진곡」·「흙을 그리워하는 무리」 등 가극과 창작극을 발표, 공연했다. 이 시기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문사 애독자 공연, 동정금 모금 공연 등 다채로운 공연을 했다. 1933년 3월 이시이 문하로 재입문하여 약 1년 만에 청년회관에서 전통과 현대무용의 접목을 접목한 창작극 「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했으며, 이해 말부터 4년간 세계무대로 진출하여 유럽에서는 「초립동」·「화랑무」·「신로심불로」·「장구춤」·「춘향애사」·「즉흥무」·「옥저의 곡」·「보현보살」·「천하대장군」 등 공연했다. 1938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심사위원을 맡았다. 1930년 미국 뉴욕에서는 당시 흥행계의 제왕으로 불리던 휴록(Hurok,S.)의 기획 아래 NBC전국체인과 제휴하면서 미국은 물론,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공연했다. 특히, 뉴욕 공연 후 ‘세계 10대 무용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기가 형성되면서 일제에 협력했다. 1941년 10월 일본 오사카(大阪)관에서 협화회원을 위로하는 공연을 했으며, 11월에는 도쿄극장에서 조선군 보도부가 내선일체와 지원병을 선전하는 영화 「그대와 나」 시사회에서 「화랑의 춤」 등을 공연했다. 이해 11월 도쿄에서 공연한 수익금을 일본 육군성 휼병부(恤兵部)에 헌금했다. 1942년에는 조선군사보급협회에서 주최하는 무용공연에서 수익금 전액을 조선군사보급협회에 기부했다. 1944년에는 도쿄에서 24회 연속 독무공연을 했다. 이외에 일본의 전통예능인 노(能)·가부끼(歌舞伎) 등에서 소재를 얻어 「부콘(武魂)」·「오이와케(追分)」·「이케니에(生贄)」·「시즈고젠(靜御前)」 등을 발표했다. 해방 직전 중국에서 위문공연을 하다 베이징에서 해방을 맞고, 1946년 5월 귀국했다.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어 남편 안막, 오빠 최승일과 함께 7월 20일 월북했다. 월북 후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반야월성곡」·「춘향전」 등 2편의 무용극과 소품 「노사공」 1편을 공연하는 등 창작활동을 했다. 1950년 베이징에 중앙희극원 무용반을 설립해 학생을 지도했다. 1950년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1952년 공훈배우·1955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1958년까지 최승희무용학교에서 안무가로 활동했으나 남편 안막이 반당종파분자 혐의로 체포되자, 그 영향을 받아 최승희무용연구소도 폐쇄되었다. 1년간 자숙 후 1959년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을 창작해 조선무용가동맹위원장으로 복귀, 1967년까지 활동했다. 1967년 숙청되어 가택연금의 처벌을 받았으며, 1969년 8월 8일 사망했다.<출처 : 다음백과> |
첫댓글 사랑하는 아우님들 당시 모습을 보니 시방보다 엄청 젊었구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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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 승 희 생가를 탐방할 수 있었던 점이 의외의 보너스로 기억됩니다.
마지막 구간에서 사나이 아우가 죽어도 더는 못 간다고 업구가라고 생떼를 쓰는 바람에 애를 먹었었쥬
이날 두 번째 사용했던 노란색 양은냄비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구먼
지금은 색이 바래고 찌그러진 추억을 간직한 채 잘 보존중이랍니다.
앞으로 오지회 유물 제1호로 지정하여 관리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