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현남부 79동기 제군들에게
1976년 3월 1일
3번째 임지를 향해
신혼의 단봇짐을 싣고
풍기를 거쳐 잔설이 두터운 히트재 넘어
미지의 고장 노좌로 가는 길목에서서
나를 기다려주는 아이들이 있음에 행복한 길이었고
서울을 오가며 소백산 풍광에 감탄했던 나는
풍기 서편에 이름 모를(히트재) 산 넘어 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첩첩 산중인줄 알았건만
히트재를 넘어 끝없이 뻗어 내린 골짜기 저편 아래
올망졸망 정겨운 촌락을 바라보며 순수의 동심이 뛰노는
더벅머리 눈이 큰 아이들을 떠 올리며 청년 교사로서
상록수의 꿈을 심어야겠다고 다짐을 했었지.
덜컹되는 신작로를 따라 노좌 마을에 도착하니
열악한 환경에 신혼살림을 차릴 집이 없어도
고맙게도 선뜻 내어주시는 권순걸네 집 방 한 칸
임시로 만든 부엌에 가마니 거적으로 부엌문을 달았으니
영락없는 걸인의 거처였다네.
그 당시 봉현남부는 벽지의 혜택이 주어지지 않은 학교였기에
철새처럼 왔다 떠나가는 교사들이 학교였기에
장기근속을 하는 교사들이 더 이상하게 비쳐지는 학교였다네.
떠나려는 동료 교사를 붙잡아도 보았지만
동료가 떠난 허전한 뒷자리를 홀로 지켰어도
해 맑은 동심에 꿈을 키워주는 교육의 보람과
후덕했던 이웃들의 인심 속에 봉현남부 만기 근무
5년의 세월은 보람의 그 자체였다네.
봉현남부 5년 미약한 가르침이었지만
교육자로서의 보람이었고.
내 40년 교직 생활에 열정을 다한 학교였다네.
그 당시 봉현남부초등은 12학급으로
청장년 교사들이 조화를 이루어 근무했지만
1977년 학교 형편상 내 나이 28세에
영주교육청 관내 학교 최연소 교무주임이 되어
그 소임을 다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네.
부임 첫해 1976년 6학년 담임을 했지만
이듬해 1학년 담임을 맞게 된 것도 학교 교무 주임을 맞게 되어
고학년 담임을 할 수 없어 1학년 담임을 맡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1학년 담임으로서 교직생활에 좋은 경험이었다네.
학교 업무를 오직 수기로만 처리해야 하는 그 시절
교무일은 물론 교육 자료 준비에 밤을 지새웠어도
마냥 즐겁기만 했으니 그게 바로 보람이었고 젊음이었나 보네.
5년이 지난 1981년 2월 28일
평은 초등학교 발령으로 안동 집으로 떠나든 날
환송 나온 30여명의 노좌 이웃들과 작별의 아쉬움에 통곡했었고
이삿짐 차를 가로 막아 차에 탔다가 내리기를 몇 번
3남매를 키우며 살아온 봉현남부 생활 5년은
내 교직 생활은 물론 생애 잊을 수 없는 소중했던 세월이었다네.
금년 4월 이덕영 군을 통해
우연히 제군들의 소식을 접하고 보니
부족했던 내 가르침이 부끄러워도
이 사회의 주인으로 우뚝 선 제군들의 모습을 떠 올리며
마치 이산가족이 혈육의 소식을 접한 듯 내 가슴은 뛰었고
32년 전의 추억들이 내 삶에 교직생활에 한 부분을
소중하게 다시 엮어 갈 수 있음에 행복한 오늘
봉현남부 5년의 삶에 조각들을 엮어
우정과 추억과 낭만이 넘치는 봉현남부79 카페의 창에
소식을 실어 본다네.
행복하시게 건승을 기원하며
어제 같은 30세월
보슬비 내리는 창가에
내 사랑하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천사의 찬미로 들려오는 교정에서
30년 전 봉현남부의 제군들을 그리는
주름진 내 얼굴에 하얀 미소가 피어나는 구나.
어제 같은 30세월 세월의 강 건너
지워지지 않은 엷어지지도 않은 인연
세월의 나이테에 고이 새긴 흔적들
더 아름답고 소중하게 한 것을
내 젊은 날에는 미처 몰랐었네.
먼 훗날 황혼이 저물고
인연의 끈을 접어야 하는 그 날
우리는 하늘이 주신 인연에 더욱 감사하며
영원한 인연이기를 갈구 한다 했었지
내게 주어진 오늘
내 생애 최고의 날인 걸
오늘의 삶이 어이 소중하지 않으리.
오늘이 있기에
내일의 행복이 있는 것을
하늘이 맺어준 오직 한 사람께
뜨거운 사랑과 감사하는
남편과 아내 되기를 …….
2010. 5. 26.
김 춘 식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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