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검은 숲에 내리는 비
인간이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부터 거대한 한 그루의 물푸레나무가 하늘까지 뻗어있었다.
이그드라실.
우주의 축인 그 나무의 뿌리는 땅속 깊숙이 박혀있었고 가지들은 천상에 닿아 있었다. 땅 속에 길어 올려진 물은 수액이 되고, 태양은 잎과 꽃 그리고 열매를 생겨나게 했다. 이 나무를 통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 나무는 구름들을 모아 엄청난 비를 내리게 하였다. 곧게 뻗은 나무가 천상과 지하의 심연 사이를 연결해줌으로써 우주는 영원히 재생될 수 있었다.
이 나무 근처에는 수액이 모여 생긴 샘이 하나 있었는데 신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이 샘에 모여 그 수액을 마셨다. 모든 시름을 잊게 만드는 그 샘은 인간들에게는 독약과 같은 것이었다. 이 샘물을 인간이 마시면 모든 과거를 잊어버린다고했다. 사람들은 그 샘을 '망각의 샘' 이라 불렀다.
-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의 신화.
2. 망각의 샘
2024년 봄
전쟁이 일어난 지 벌써 17년이 흘렀다. 뒤늦게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은 나의 연구가 끝을 매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다. 그리고 그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네트워크 전쟁의 진상을 왜곡하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07년에 벌어진 네트워크 전쟁.
바이오닉(인간과 컴퓨터의 메모리가 생체학적으로 접목된 신개체)들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던 그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21세기초까지 급속도로 진행된 전세계의 네트워크화는 바이오닉 양산과 맞물리면서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의 문명을 진일보시켜 놓았다. 하지만 그 네트워크가 문제였다. 클릭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거대한 재앙을 불러왔다.
벨라도나(Belladonna).
신개체 바이오닉들을 대상으로 제조된 약물로 환각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한 해커가 개발해낸 이 가공할 바이러스는 극점에 달해 있던 문명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렸다. 파일 형태의 이 바이러스는 네트워크를 타고 전파돼 바이오닉들을 감염시켰고 그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평범했던 바이오닉들은 살인무기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그들의 반란을 바이러스에 의해 이상변화를 일으킨 일부 바이오닉들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했지만 후에 그것은 바이러스에 의해 조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감염된 바이오닉은 약물 제조자에 의해 마음대로 조정되었다.
바이오닉들에 의해 파괴와 살상이 자행됐고, 전세계에는 이상기후가 빈발했다. 홍수와 가뭄, 때아닌 우박과 해일...기형아가 양산되고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질병에 죽어갔다. 그 즈음 네트워크에는 버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버그들의 증식은 곧바로 새로운 밀레니엄에 섣부른 종말론을 불러 일으켰다. 세븐사인. 종말론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재앙이 눈앞에서 하나씩 벌어졌던 것이다. 버그들은 모든 전산망을 파괴시켜 나갔다. 단 1년이 지옥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쟁은 1년이 지난 어느날 거짓말처럼 끝나버렸다. 바이오닉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던 것이다. 버그들도 모두 사멸해버렸다. 바이오닉들은 장난감처럼 거리 곳곳에서 쓰러져 갔다. 왜 갑자기 바이오닉들이 멈춰 섰는지 그 이유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미궁으로 남은 채 인류에게 영원한 숙제로 남았다.
완전히 파괴된 자연. 숲이 사라지자 도시는 사막화되어 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문명은 존재했다. 전쟁의 상흔을 빗겨간 22개의 도시는 사막 위에 군데군데 섬처럼 떠 있었다. 그들은 재건에 나섰지만 자원이 부족했다. 인간들에게 남은 자원으로 재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컴퓨터와 네트워크였다. 사막 위로 네트워크망이 건설되자 인간은 가상도시 건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불모의 땅인 현실을 잊고자 인간들은 가상도시 속에 빠져 과거의 찬란했던 문명을 그리워하며 살아갔다. 원시의 삶과 첨단의 삶이 기묘하게 공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사이버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사이버캅이 조직되었고 최초바이러스를 유포한 해커, 카프라는 체포되어 사형대에 올랐다. 사형대에 오른 카프라는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후 사지와 머리가 잘려나간 채 죽었다. 부활할 것이라는 그의 말이 영 불길했던 사이버캅들은 몸의 각 부분을 다른 지역으로 비밀리에 옮겨 묻어버리고 거대한 돌로 봉인해 버렸다.
내게 이상한 메일이 날아든 것은 이때였다. N이라는 이니셜을 쓰는 자가 내게 메일을 보낸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나의 연구주제를 상당히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만들려고 하는 스스로 성장하는 메모리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리고...에덴이라는 공간에서 그 메모리를 찾으라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난 그의 메일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 삼아 그가 던진 파일명 SKY를 통해 네트워크를 검색하던 중에 이상한 지역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은 모든 네트워크가 파괴된 그때의 상황에서 유독 전쟁의 상흔을 피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듯했다. 그가 말했듯 외부로부터 접근이 차단된 것이라는 말이 사실일까?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면 재발될지도 모르는 네트워크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어막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나는 그걸 증명하기 위해 연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벌써 17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렸다. 이제 포기하고 싶다. 그런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해가고 있었다.
- P 박사의 연구노트 중에서
네트워크 속에 떠 있는 가상계 에덴.
마법사 노튼이 설계한 중세 고딕양식의 가옥들이 들어선 거대한 도시. 마을 중앙의 광장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상점들과 외곽으로 둥그렇게 분포된 목조가옥들, 그리고 도시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숲. 에덴은 마치 숲의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섬처럼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도시였다. 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숲. 미로 같은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아직까지 단 한번도 외부인이 들어온 적이 없고 이 숲을 빠져나간 사람도 없다. 그들은 에덴 밖의 세상은 없다고 믿고 있었고 자연이 제공하는 천연의 혜택들- 사시사철 열리는 과일들과 비옥한 땅-을 누리며 살았다. 그들은 숲에 정령이 살아있다고 믿고 있었고 자신들의 창조주가 그 숲 어딘가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숲은 하나의 터부가 되어버렸다.
'숲을 노하게 하지 말라. 숲에 들어가는 것은 신성함을 파괴하는 행위일지니.'
그러나 이곳에도 숲을 빠져나가려는 여행자들이 존재했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들은 바로 연금술사들이었다. 금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던 <마테라아 프리마(최초의 물질)>를 찾기 위해 이들은 숲을 여행했다.
'망각의 샘'
숲에 존재한다는 이 샘 근처에 마테라아 프리마를 틔우는 나무가 있다는 전설을 입증하기 위해.
에덴의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 롤랑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롤랑이 숲으로 들어가려 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숲이 노할 것이라며 그를 막아섰다. 하지만 이 호기심 많은 연금술사는 막무가내였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걱정하며 하루빨리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숲에서 길을 잃었을 거라는 사람도 있었고 망각의 샘에 도달했지만 과거의 기억을 다 잊어 버려 돌아오지 못했을 거라고도 했다.
에덴의 북쪽 숲 리포레스트.
후드를 뒤집어 쓴 한 노인이 천천히 숲속을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오랜 여행에 지친 듯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숲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위용을 뽐내듯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었다. 길조차 없는 수 속. 노인은 나무들 사이의 풀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노쇠하여 기력이 없는 듯했지만 그의 발걸음에는 조급함이 엿보였다. 아까부터 노인은 한쪽 방향으로 급히 가고 있었다.. 숨이 차 오르자 그는 잠시 멈춰서 한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기대감 같은 것이 어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황금빛 잎들이 햇볕은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온통 녹색의 천지인 숲속에서 유독 누런 황금빛을 보이고 있는 나무는 금방 눈에 띄었다. 노인이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걸음을 재촉해했다. 한 백장 정도를 걸었을까? 숲 가운데 작은 공지가 따스한 햇살에 맨살을 드러냈다.
"아 -."
노인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공지 한 켠에서 둘래가 족히 삼십 자는 될 것 같은 나무가 바람이 불 때마다 황금색 잎들을 반짝거리며 서 있었다. 노인이 그 나무로 다가갔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잎을 손으로 주워들었다. 손에 쥐여진 마른 잎들은 부시식 소리를 내며 부서져 바람에 날렸다. 햇볕에 반사된 그 알갱이들은 황금색 홀씨처럼 허공을 날아다녔다.
"마테라아 프리마 --."
긴장감이 풀린 노인은 나무둥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가 후드를 벗었다.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는 하얀 수염과 흰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고집스런 코와 입, 그리고 호기심에 빛나는 눈빛이 희열을 넘어서 노인을 감회에 젖게 만들었다.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것을 찾기 위해 1년간 숲을 헤맸던 여정이 떠올랐다. 그는 바로 1년 전 마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망각의 샘'을 찾아 숲으로 들어왔던 연금술사 롤랑이었다.
롤랑은 떨리는 손을 뻗어 잎을 하나 떼어냈다. 그러나 놀랍게도 떨어진 잎은 황금빛을 잃어버리고 말라 죽어갔다. 또 하나를 떼어내도 마찬가지였다.
'과연...,이 잎은 완전히 자라서 떨어져야 최초의 물질 마테라아 프리마로 돌아가는군.'
바닥에 떨어진 잎들을 줍던 롤랑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의 발자국 같은 것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롤랑은 덜컥 겁이 났다.
'숲의 사제가 아닐까? 그래. 이 숲의 황금가지는 밤낮 없이 사제가 서성댄다고 했으니.... 아니겠지. 설마.'
단지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롤랑은 다시 잎을 주웠다.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모은 잎들을 그는 작은 보자기에 넣고 싸서 어깨에 걸쳐 맸다.
'가만있자. 그런데 망각의 샘은 보이지 않으니. 어디 있는걸까? 혹시 전설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닐 테지."
롤랑은 의심스럽게 바닥을 살폈다. 뿌리가 뻗어나간 자리들이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황금가지에서 나온 수액이 망각의 샘을 만든다고 했으니 뿌리를 따라가면 되겠군.'
롤랑은 뿌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끔 흙 속으로 들어 갔다가도 다시 표면으로 울퉁불퉁 솟아있는 뿌리는 숲속으로 뻗어 있었다. 하지만 뿌리 색깔이 금빛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롤랑은 뿌리 끝을 찾아 계속 걸었다. 뿌리는 엄청나게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 시간이 넘게 롤랑은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득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그를 긴장시켰다.
'혹시 망각의 샘이란 이렇게 찾아 들어 갔다간 나올 수 없는 공간을 말하는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두려움도 그의 호기심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일찍 밤이 찾아오는 숲이 어둑어둑해져 왔고 롤랑은 발길을 하나 떼어놓을 때마다 점점 두려움이 짙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많이 걸었을까? 어디선가 수군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롤랑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만히 다가갔다.
그 곳에는 직경 50센티 정도 크기의 작은 샘이 있었고 한 사내와 여자가 그 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현란한 보석으로 장식된 마법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여자는 그의 시종인 듯 가슴이 다 들여다보이는 벨벳상의에 긴치마를 입고 다소곳이 서 있었다. 사내는 날카로운 눈매와 구부러진 코가 어딘지 음산한 느낌을 풍겨냈고 여자는 어딘지 마녀 같은 인상을 자아냈다.
"이 샘이 망각의 샘인가요? 제가 보기엔 평범한 샘물 같은데."
"라나. 이건 신들만의 새이야. 숲의 신들만이 가지는 영원한 생명의 비밀이지."
"라울 마법사님. 그러면 이 샘물을 마시면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라울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라나의 눈에 욕망이 꿈틀거렸다.
"어때? 한번 마셔보겠어?"
라나는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영원한 젊음을 가질 수 있다니. 라울이 주머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 샘에 집어넣었다. 호리병 속으로 샘물이 들어가며 뽀글뽀글 방울을 만들었다. 라나가 눈을 깜박였다.
"자--."
라울이 호리병을 라나 앞에 내밀었다. 그녀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호리병을 살피며 물었다.
"이런 귀한 걸 제가 먼저 마셔도 돼요?"
"어차피 샘은 많아. 이 샘물은 끊이지 않고 솟아나지. 이그드라실의 뿌리로부터 빠져나온 수액이 만들어낸 샘이니까."
"그래도..."
라나는 망설였다. 사실은 두려운 것이다.
"괜찮아. 마셔보라니까?"
"그러면 우리 같이 마셔요. 저 혼자 젊음을 유지하기는 싫어요. 전 라울님과 영원히 함께 할거니까요."
라나가 그렇게 말하자 라울도 어쩔 수 없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라울은 라나에게 그 호리병을 건넨 뒤 다른 호리병을 꺼내 다시 샘물을 받았다.
"자 그럼 우리의 영원한 젊음을 위해!"
라울과 라나는 호리병을 건배하듯 마주 들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라울이 먼저 호리병을 입가에 가져갔다. 라나가 그걸 확인한 후, 호리병의 물을 마셨다.
"아--. 시원하다. 정말 금방 젊어지는 것 같아."
그러나 다음 순간 라울은 입안에 든 샘물을 뱉었다. 라나가 깜짝 놀라 라울을 바라보았다.
"무슨 짓예요?"
"글세, 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어서...후후."
"아, 기분 좋아...온 몸이 날아갈 것 같아..."
라나는 그러나 금새 두려움을 잊어버린 듯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라울이 얼굴을 굳히고 라나를 살펴보았다. 엑스터시에 빠진 듯 라나의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었다. 라나의 얼굴이 조금씩 변형되어갔다. 라울은 놀라운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왜 그래요?"
"아...아니야. 얼굴이..."
"제 얼굴이요? 하! 힘이 솟는 것 같아요..아아..."
라나가 약간 어지러운 듯 옆에 서 있는 나무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손이 닿은 부위가 스스슥 소리를 내며 썩어들어 가더니 이내 나무가 거짓말처럼 툭 부러져 버린 것이다. 라나는 자신의 힘에 놀라 부러진 나무를 바라보았다.
"아...더워....갈증이 나요.. 너무 더워..."
그녀는 몸 속에 태양이 들어간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녀는 조금씩 옷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가슴이 다 드러나도 여전히 그녀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몽롱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울의 얼굴은 더욱 놀라움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숨어서 이들을 엿보고 있는 롤랑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더 마셔야겠어. 더.."
그녀는 샘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손바닥에 샘물을 받았다. 물방울이 만들어내는 일렁거림으로 샘의 표면이 흔들렸다. 그러나 잠시 후 그 흔들림이 멈추었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앉았다.
"아니 이건?"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샘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얼굴. 거기엔 미세한 돌기 같은 것이 솟아 나와 있었고 그것들을 붉고 푸른 반점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라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살기어린 눈으로 라울을 바라봤다.
"라울! 이게 어떻게 된거지?"
"후후.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이건 인간이 마시면 독약이 되는 거였어."
라나가 라울에게 달려들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 그녀는 순식간에 라울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것은 악마의 얼굴이었다. 라울은 그녀의 빠른 동작에 놀랐다. 하지만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힘이었다 살짝 쥐고 있는 정도였지만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악력이 느껴졌다. 두려움에 부들부들 떠는 라울에게 라나가 아귀 같은 손을 들어올렸다. 라울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라나는 자신의 머리를 쥐고 물러났다.
"하아. 하아. 더워. 뜨거워..."
그녀의 눈빛이 붉은 색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곳으로 달려가 머리를 샘에 푹 집어넣었다.
꾸르르르--.
샘에서 물방울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라울이 그녀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샘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푸우우--.
그녀는 단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샘 속으로 가라앉았다.
"휴우 --. 큰일 나라 뻔했군. 하지마 정말 대단하나 샘이야."
순간 라울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호리병들을 모두 꺼내 안의 내용물들을 버리고 그 샘물을 받기 시작했다. 호리병들이 전부 채워지자 그는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흐흐흐! 숲의 사제가 거느리던 시대는 끝났다. 이 호리병 하나로 이제 숲은 병들고 사람들은 나 라울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다."
롤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감히 숲의 사제 운운하다니.
라울은 의심스런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나뭇가지를 꺾어 샘을 덮어버렸다. 그리곤 나뭇가지로 황금빛 뿌리를 덮어가며 숲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롤랑은 급히 샘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샘을 덮어놓은 나뭇가지를 치워나갔다.
'샘을 폐쇄해버려야 한다. 이것은 악마의 샘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뭇가지로 흙을 퍼 샘에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흙은 계속해서 샘속으로 떨어져 내리기만 할 뿐 메꿔지지 않고 있었다. 롤랑은 절망적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를 어떡한단 말인가? 저 자를 막아야 한다. 자지만 이 샘은 어떡하지?'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던 롤랑은 문득 샘 주변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50센티 정도의 샘 주변으로 자그마한 틀이 보였다. 흙을 팔 때 드러났던 것이 분명했다.롤랑은 맨손으로 흙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롤랑의 경악에 찬 얼굴이 샘 위에 떠올랐다. 샘 주변의 틀은 샘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고 롤랑이 그 틀을 잡아 올리자 샘 전체가 거울처럼 떠올려졌던 것이다.
'이건 거울이잖아?'
그러나 손가락을 거울의 표면에 대자 롤랑의 손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여전히 샘이었다. 롤랑은 그 거울을 다른 보자기에 싸서 등에 단단히 동여맸다.
그는 서둘러 사라져버린 라울을 쫓아갔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사내가 지나가며 숨겨버린 황금색 뿌리들을 놓쳐버린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숲 속. 빛조차 잘 스미지 않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서 롤랑은 숲을 빠져 나오려고 헤매고 있었다.
17년 후. 에덴의 북쪽 성벽에 위치한 마을 리포레스트.
깡 --! 깡--!
차가운 금속성은 성벽을 뚫고 고목들만이 유령처럼 서 있는 숲에까지 울려 퍼졌다. 검은 새 몇 마리가 푸드득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소리는 마을 어귀에 세워진 도검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겨워."
풀무질을 하던 아담은 손을 멈추었다. 풀무질에 발갛게 달아오른 금속이 집게에 집혀 꺼내졌다.
"쓸데없는 생각 마라. 넌 이 일을 배워야만 해."
고구가 해머를 들고 열기를 확확 내뿜고 있는 금속을 내리치며 말했다. 그는 여러 차례 금속을 돌려가며 때리고는 그것을 물 속에 푹 담궜다. 치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가 도검소 안을 가득 채웠다. 활활 타오르는 불과 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 고구는 다시 금속을 불 속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아담은 풀무질할 생각은 않고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고구가 아담의 뒤통수를 쳤다.
"아야야!"
"정신 못 차려! 조금만 딴 생각해도 금속에는 기포가 생기는 거야! 그딴 재료로는 좋은 칼을 만들 수가 없단 말야!"
"그런 건 만들면 뭐해. 난 이런 일 싫단 말야."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들어? 이 애비 하는 말이 말 같지 않아?"
또 한차례 그의 뒤통수를 때릴 기세여서 아담은 억지로 풀무질을 계속 했다.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아담의 나이 열 일곱. 그가 아주 어렸을 적 고구는 생활용구나 농기구 등을 만드는 평범한 대장장이였다. 하지만 이제 고구는 무기 만드는 일을 했다. 그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에덴을 북쪽 리포레스트부터 남쪽의 옴무까지, 그리고 동쪽의 바이쿠에서부터 서쪽의 메이블까지 순식간에 장악해버린 크롬웰이 영주로 추대된 후 기사들을 위한 무기가 필요했고 에덴에서 대장장이로 이름나 있던 고구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고구는 그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맞섰다.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도리어 합법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데 자신의 칼이 쓰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숲에 반기를 들었다는 누명을 씌워 고구를 잡아들였다. 갖은 고문과 협박, 그리고 회유 속에서도 끝끝내 거부하던 고구에게 그들은 최후의 방법을 사용했다. 미유를 같은 죄로 잡아들인 것이다. 고구의 눈앞에서 그들은 불에 달구어진 인두를 가져와 미유의 눈을 지져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고구는 승복하려 했지만 미유가 그것을 말렸다.
"저 때문에 당신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해요. 당신이 뜻을 져버리고 칼을 만들게 되면 전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고구는 피눈물을 흘리며 미유의 눈에 인두질이 가해지는 것을 보아야 했다. 미유는 비명소리 하나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잔인함을 끝이 없었다. 고구를 회유하기 위해 미유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게되자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였던 아담을 잡아왔다. 천진하게 웃는 아담의 눈에 인두질이 가해지려 할 때, 고구는 결국 자신의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눈먼 미유와 어린 아담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고구는 그날부터 기사들의 칼과 갑옷, 방패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슴속의 맺힌 응어리를 풀어버리겠다는 듯이 그는 이 일에 집착했다. 그것이 미유와 그의 아들 아담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는 점점 말수가 줄어갔고 내면 속으로 침잠해 갔다.
하지만 아담은 이 일이 싫었다. 이 후끈거리는 도검소가 싫었고 흘러내리는 땀 냄새와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울려대는 해머질 소리가 싫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보아와서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도무지 이런 일을 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구는 완강했고 아담에게 자신의 일을 전수시키려 하였다.
"잘 때려!"
고구는 불에 달구어진 금속이 집혀진 집게를 꺼내들고 쇠판에 올려놓았다. 아담은 더욱 큰 해머를 들고 금속을 때리기 시작했다 고구는 아담이 해머질을 할 때마다 미세하게 금속을 움직여가며 칼의 현대를 조금씩 잡아갔다. 조금 마른 체구였지만 아담의 몸은 잘 단련된 금속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해머를 때리는 폼이 이젠 여실 없는 대장장이의 그것이었다.
"좀 쉬어가며 하세요."
정오가 지났을 무렵 미유가 먹을 것을 들고 도검소에 들어섰다. 앞이 보이지 않아 손을 더듬거렸지만 그 내부구조가 익숙한 듯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고구가 집게에 잡힌 금속을 물 속에 집어넣자 아담은 해머를 내려놓았다. 아담이 미유가 들고온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힘들지?"
"아니."
고구에게는 그렇게 반항하는 아담이었지만 미유 앞에서 그는 그걸 내색하지 않았다. 고구는 아무말 없이 점심을 먹었다. 미유는 도검소 밖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 고구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픔이라는 걸 잘 아는 미유. 아담도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담은 먹을 것을 들고 미유 옆에 앉아 그녀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
"괜찮아. 엄마는 벌써 먹었는걸."
"안 먹은 거 다 알아."
아담은 행복한 얼굴로 음식을 먹는 미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억지로 일을 배우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적도 많았다. 특히 어머니의 눈을ㅇ 멀게 한 기사들에게 아버지가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일 때면 더욱 그랬다.
그럴 때면 어린 아담은 성벽에 올라 숲을 바라보았다. 숲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 같은 다른 마을도 있을까? 아니면 그저 끝까지 숲일까? 그런 상상들을 하며 아담은 언젠가 저 숲을 여행하고 싶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미유에게 숲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숲 바깥에는 뭐가 잇어?"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 저편으로 흘러가는 끔찍한 과거를 떠올리듯 몸서리치며 말했다.
"거기엔 아이들만을 해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산단다. 절대 근처에 가면 안돼."
하지만 열 살이 되었을 때, 아담은 미유의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숲은 그저 숲일 뿐 그 안에 괴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은 아담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여섯 살 연상의 여기사 테라가 말해주었다.
"그런 건 없어. 다 어른들이 꾸며낸 이야기란 말야. 숲에 들어가는 사람은 화형에 처한다고 하잖아."
마을 주민들은 집단무의식에 빠져버린 사람들처럼 숲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사실 크롬웰의 칼이 두려워서였다.
"옛날에 숲에서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들었어. 뭔지는 잘 모르지만..."
테라는 그러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담에게 그 이상을 얘기하는 걸 꺼려했다. 그녀 자신도 두려웠던 것이다. 그날 아담은 숲에서 비밀스런 일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처음 감지할 수 있었다. 아담은 고구에게 그것을 물어보았지만 고구는 굳게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것이 자신이 해야할 유일한 일인 양 해머로 금속을 두드리는 일에만 열중했다.
"오늘 오후에 일이 있어요."
"무슨 일?"
입에 음식을 마구 집어넣던 고구가 손을 멈추고 생뚱맞게 되물었다.
"테라랑 광장에 가기로 했단 말예요."
"안돼. 오늘은 저 칼을 완성해야 된다."
"내일 할께요. 급하게 한다고 좋은 칼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데..."
"뭐야? 네가 지금 날 가르치려고 하는 거야?
고구의 언성이 높아지자 미유가 나섰다.
"여보. 오늘 하루만 하고 싶은 거 하도록 내버려두세요."
"매일 하고 싶은 것만 하면 언제 일을 한단 말이오?"
그렇게 말했지만 고구의 목소리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고집스럽고 완강한 고구였지만 미유의 말에는 쉽게 굴복하는 그였다. 미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이다."
"정말? 정말 내일부터는 열심히 할께."
아담은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쏜살같이 도검소를 빠져나갔다. 도검소에 남은 고구와 미유는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여보! 저렇게 하기 싫어하는데 저 애 뜻대로 하고 싶은 것 시키는 건 어때요?"
"미유.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이게 우리가 타고난 운명인걸 어떡해."
"미안해요. 여보."
"그런 소리하지 마. 미유! 당신이 있어서 그래도 이렇게 내가 살아가는 거야."
고구는 부드럽게 미유를 뒤에서 안아주었다. 햇살이 두 사람의 어깨에 가볍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테라를 만나기로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아담은 그 길로 바로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아담이 숲의 비밀을 알게된 것은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연금술사 고골을 만나고 나서였다. 고구와 도검소 일을 가지고 말다툼을 했던 아담은 그날도 숲이 보이는 성벽에 앉아 있었다. 숲은 변함이 없었다. 한때는 황폐했으나 새롭게 생명을 싹 틔우고 있는 숲. 간혹 새들이 날아오르고 맑은 노래를 불러대는 숲. 그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아담은 늘 거기에 앉아 숲속을 상상하곤 했다. 그 상상은 늘 새로운 세계로 그를 이끌어가곤 했다. 그렇게 정적 속에 한참을 앉아 있던 아담이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성벽에서 멀리 L떨어진 숲에서 무언가 섬광이 번뜩였다.
"저게 뭐지?"
아담은 오랜동안 한결같은 모습이었던 숲에 일어난 자그마한 변화에 호기심을 느꼈다. 잠시 망설이던 아담은 결심한 듯 성벽을 타고 숲가로 내려갔다. 숲 앞에 서서 다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그는 결국 숲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질렀다는 두려움과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일이 벌어질 거라는 기대감 속에서 아담은 그 섬광이 뿜어져 나온 곳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걸어가자 그 곳에는 돌로 지어진 자그마한 집이 있었다. 그 집의 창으로부터 연기가 빠져 나오고 있었고 문 앞에는 후드차림의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노인의 옷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담은 노인에게 다가갔다.
"할아범 괜찮아?"
노인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아담이 손으로 흔들어보고 발로 툭툭 쳐봐도 노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담이 노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후드를 벗기려는 순간, 노인의 손이 아담의 양팔을 붙잡았다.
"히히, 날 잡으러 왔어? 안되지. 날 잡겠다구?"
노인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떠들어대며 얼굴을 아담에게 들이밀었다. 노인의 흉측한 얼굴이 아담의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얼굴 전체에 미세한 돌기 같은 것이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었고 입가에는 화상을 입은 듯한 검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순간 아담은 숲속에 사는 아이만을 해치는 괴물 이야기를 떠올렸지만 이 노인이 그 괴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노인의 눈빛. 그 눈빛은 평범한 노인의 선량함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담이 별로 놀라지 않고 노인의 눈을 빤히 쳐다보자 노인은 무안한 듯 아담의 양팔을 놓고는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진 누구야?"
"나? 난 너희같이 아이들만 잡아먹는 괴물이다! 히히히!"
노인이 그렇게 말했지만 아담은 오히려 히죽히죽 웃어댔다.
"뭐가 우습니?"
"얼굴의 얼룩."
"응? 내 얼굴이 어때서?"
"얼룩이 씰룩씰룩거려"
노인이 웃을 때마다 입가의 얼룩이 늘어나면서 얼굴에 선을 긋고 있었다. 그것은 입과 연결되어 언뜻 보면 커다란 입이 사선으로 웃는 듯한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노인은 이 엉뚱한 아이에게 당황했다. 지금까지 자기 얼굴을 보고 웃어대는 아이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까 그 빛은 뭐야?"
"음... 그건 말야. 말하자면 백색화 단계에 이른...아참! 내가 왜 이런 설명을 해야 돼지? 이놈. 난 무서운 사람이야. 그러니 얼른 도망가는 게 좋아."
"하나도 안 무서워."
노인이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괴물처럼 포즈를 취해 보기도 했지만 아담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담은 무시하듯 노인을 지나쳐 반쯤 열려있는 문을 확 열어제쳤다. 노인이 급히 아담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긴 안돼!"
"왜?"
"여긴 말야....그러니까...내 집이란 말야! 그러니까 넌 안돼!"
왜라는 질문에 노인은 옹색한 변명을 해댔다. 아담은 노인의 팔꿈치 밑으로 얼굴을 불쑥 집어넣어 안을 바라보았다.
"야아! 굉장하다!"
아담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 집안에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 색색의 액체들이 담겨진 갖가지 모양의 용기들이 있었고 그 용기들은 도관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몇 개의 용기들이 깨져 있었고 아직도 거기서는 미세한 연기들이 풀풀 피어올랐다. 이상한 냄새가 아담의 코를 간지럽혔다.
"이게 무슨 냄새야?"
아담은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노인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와 아담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누구 맘대로 들어와? 여긴 내 집이란 말야. 나가!"
하지만 아담은 여전히 개의치 않고 용기들을 만져보기도 하고 살펴보기도 하면서 물었다.
"뭘 만들어?"
"그래. 뭘 좀 만들고 있었어. 됐지? 이젠 가봐."
"뭔데? 나도 보여줘."
이제 노인은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무지 자신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있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지금 까지는 외부 사람들에게 얼굴만 드러내도 쉽게 일이 해결되곤 했는데....
아담이 바닥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모래알같이 부서져 있는 알갱이가 손가락에 묻어 났다. 아담은 눈을 빛내며 노인을 쳐다봤다.
"이게 뭐야?"
"응?"
순간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엉? 이게 뭐야? 이건?"
노인은 바닥에 떨어진 반짝이는 물체들을 보며 환호했다. 거의 미치광이처럼 광분하던 노인이 갑자기 뚝 멈춰 섰다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담 때문이었다.
"흠흠....이젠 돌아가도록 해라."
"이게 뭔지 말해주면."
"이건 말야. 흐흐. 이건 바로 금이야. 금! 내가 드디어 만들었단 말야."
"금?"
"그래. 난 부자가 된거야. 이게 다 돈이란 말야! 흐흐흐!"
"이걸 어떻게 만들었어?"
아담이 그렇게 물어오자 노인은 자기 자랑에 빠져 이성을 잃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연금술은 말이지...음. 그러니까 이건 정말 심오한 일이야. 첫 단계는 흑색화 단계로 <마테라아 프리마(최초의 물질)>을 구해서 흙을 넣은 다음에 열을 가하면 까맣게 탄 고체가 나오고 여기에 더 열을 가하면 액체가 되지. 이걸 백색화 단계라고 하는데 이걸 한번 더 끓여서 적색화 단계를 거치면 바로 금가루가 남는 거야. 하하하!"
아담은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담에게 노인은 다시 설명을 해댔다.
"메를랭(멀린: 아더를 키워낸 마법사)이라는 마법사가 썼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 거야. 아직까지 성공한 연금술사는 나 고골밖에 없지 이 고골이 처음으로 해냈단 말야!"
"고골? 그게 할아버지 이름이야? 난 아담이라고 해."
아담이 손을 내밀자 얼떨결에 고골이 그 손을 잡았다 아담이 손을 흔들어대며 웃었다. 고골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얼굴을 굳히고 인상을 찌푸렸다.
"참. 내가 왜 너랑 악수를 하지? 우린 모르는 사이잖아."
"나랑 친구해. 아담은 친구 별로 없어."
그 후로 아담과 고골은 친구가 되었다. 그에게 고골은 자신만의 은밀한 비밀이었고 고골의 집은 자신만의 아지트였다. 고골은 친할아버지처럼 아담을 반겨주었다. 조금 괴팍스럽기는 해도.
아담은 틈날 때마다 고골을 찾아와 이것저것 묻곤 했다. 어느날 고골은 자신의 스승 롤랑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테라아 프리마..."
"응?"
"금을 만드는 데 그게 가장 중요한 재료야. 스승님이 언제나 말씀하셨지."
"스승님?"
"롤랑. 이름이 롤랑이야. 망각의 샘이라고 있어. 저 숲속에 말야. 그 샘을 보는 사람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하지. 하지만 말야. 그 샘 근처에는 특이한 물질이 있어. 그것이 바로 연금술의 재료가 되는 '마테라아 프리마'야 롤랑은 그 샘을 찾아갔지."
17년 전, 롤랑이 숲으로 들어가려 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숲이 노할 것이라며 그를 막아섰다 하지만 이 호기심 낳은 연금술사는 막무가내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걱정하며 하루빨리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숲에서 길을 잃었을 거라는 사람도 있었고 망각의 샘에 도달했지만 과거의 기억을 다 잊어버려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때 라울이라는 마법사가 마을에 나타났다. 그는 당시 숲을 모시던 마을의 대표인 크롬웰을 찾아가 롤랑 때문에 숲이 노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라울의 예언들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실로 무언가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기운이 하늘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을에 이상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어. 그것은 마을의 우물에서부터 시작됐는데...내 얼굴을 봐. 이건 그때 내가 얻은 괴질 때문에 생긴 거야. 이 괴질은 얼굴에 이상한 돌기 같은 게 생기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키지. 그리고 계속해서 그 우물을 찾는 거야. 마치 마시지 못하며 죽을 것처럼. 괴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그러나 용케 우물의 유혹을 참고 살아남은 사람도 나같이 돼서 마을 밖으로 쫓겨났지. 그 즈음, 숲 근처에서 놀던 마을의 한 소년이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곤충 하나를 잡아왔어...."
50센티 정도 크기의 그 흉칙한 곤충은 딱딱한 각질의 피부에 털이 숭숭 올라있는 10개의 다리를 가졌고 머리 쪽은 투구모양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각질 위의 피부는 소름이 끼칠 정도의 미세한 돌기들로 덮여 있었다. 그건 괴질의 증상과 너무나 흡사했다. 사람들은 이 곤충이 괴질의 모든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라울은 이것이 재앙의 전조라고 말했다. 숲을 향해 제를 올리고 그 곤충을 희생양으로 잡아 숲의 신에게 바쳐야 이 모든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앙이 닥쳤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 그 곤충들은 순식간에 마을을 뒤덮었고 숲을 갉아먹기 시작했지. 건물들이 파괴되고 비옥하던 땅은 황폐해져 갔어. 사람들은 전염병에 죽어갔고 숲은 파괴됐어. 한번도 내리지 않던 비가 한달 간이나 계속 내렸고 화살처럼 꽂히는 번개에 맞은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
주민들은 실의에 빠져 매일같이 음습한 곳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장나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비가 그친 후 먹구름을 뚫고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곤충들이 햇볕에 노출되면서 타 죽어갔고 그와 동시에 전염병도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숲은 다시 생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둠속에 숨어 지내던 주민들이 햇살 아래 모여들었다.
"라울과 크롬웰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말했지. 이 모든 재앙은 숲을 경배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예배당을 만들고 주기적으로 제를 올려야 한다고. 그리고 앞으로 숲으로 들어가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처단될 것이라고 했어."
미로같던 숲은 이미 황폐해져버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어 있었지만 이 강력한 법에 의해 주민들은 마을 밖을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두려움에 가득 찬 마을사람들을 동원해 성벽을 쌓고 기사를 양성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고골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왜 숲을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숲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리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아담은 비로소 숲에 그런 비밀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정작 아담의 호기심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롤랑이 찾아간 그 샘 말야. 망각의 샘. 그 샘에 가면 마테라아 프리마가 있다는 게 사실이야?"
"있어. 확실해. 사람들은 롤랑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돌아왔거든."
"돌아왔다구?"
"그래...그 모든 재앙이 끝났던 해에 나를 찾아왔어. 나는 마을 밖으로 쫓겨나 있었지. 바로 이 곳에 말야. 그리고 그 물질을 내게 건네줬어."
"롤랑은 어떻게 됐어?"
"글쎄....잘은 몰라도 그 망각의 샘 근처에 집을 지어 살고 있다고 하지 아마."
"그 곳이 어디 있는데?"
"그건 말야, 확실하게 얘기해줄 순 없지만 멀지 않아."
"그걸 어떻게 알아? 망각의 샘은 모든 걸 잊게 만든다면서?"
"그건 거짓말이야. 그곳을 찾아가지 못하게 그런 말들을 퍼뜨린 거지. 숲속에 괴물이 있다는 이야기처럼."
"그건 사실이잖아. 고골, 할아버지가 괴물이잖아. 하하"
"예끼. 이놈. 이 잘생긴 할애비가 어떻게 괴물이야?"
"할아버지 처음엔 정말 이상했다? 진짜 괴물 같았다구."
고골은 좀 괴팍스럽긴 했지만 친근감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숲에 대하나 이야기들을 늘어놓길 좋아했고 그걸 들어주는 아담을 고마워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 어린 시절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그 괴물같이 생기고 이상하게 웃는 고골과 친구가 될 줄이야 누가 예상했겠는가.
이제 아담은 성벽을 넘어서 막 숲에 들어서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며 아담은 피식 웃었다. 고골을 생각하면 언제나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고골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처음 금기사항을 어기고 숲에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두려움은 이제 설렘으로 바뀌었다. 매일같이 새로운 고골의 이야기에 아담의 매료됐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망각의 샘'에 대한 이야기는 늘 아담의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고골의 집을 향해 가는 아담은 발길을 재촉했다. 그날은 고골에게'망각의 샘'이 있는 곳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그 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고골이었지만 그럴수록 아담의 호기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도대체 그 샘은 실제로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디에? 그리고 어떤 곳일까? 아담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고 결국 고골은 조금씩 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절대 밝히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샘의 위치였다.
파괴되었던 숲은 이제 다시 생명이 넘치는 나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성벽을 넘어서 숲으로 들어설수록 온통 짙은 녹음이 묻어 났다. 아담의 긴 머리결이 바람에 경쾌하게 흩날렸다. 아담은 콧노래에 보폭을 맞춰가며 걸었다. 아담은 하루중 이 시간이 가장 좋았다. 고골을 찾아가는 시간. 그 시간은 아담에겐 자유 그 자체였다. 긴 속박에서 빠져 나와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곳을 향해 가는 설렘. 아담은 그 자유를 마음껏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고골의 집에 말라붙은 나무들 사이로 조금씩 형체를 드러냈다.
"고골!"
집 앞에 도착한 아담은 언제나 그렇듯 큰 소리로 고골을 불렀다. 그러면 꾸부정하게 웅크린 고골이 문을 열고 '왜 왔어?'하고 심퉁맞게 말하며 아담을 맞아주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아무리 불러도 고골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병이 났나?"
아담은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고골, 어디 아파?"
안쪽은 예전과 다름없이 잘 정돈된 상태로 테이블 위에 용기들이 놓여있었고 한 켠에는 커다란 거울이 놓여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테이블 앞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고골이 '왔냐?'는 표정으로 아담을 쳐다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 듯 아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안을 살폈다.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다만 그가 신주단지처럼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이 사라진 것만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었다. 아담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디 갔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아담의 눈에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작은 종이가 하나 들어왔다.
"이게 뭐지?"
아담은 종이를 집어 펼쳐 보았다. 깨알같은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아담. 난 이제 먼 곳으로 떠난다. 아니 도망치는 것이지. 더 이상은 참아내기가 어려워.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오던 것을 이제 실행으로 옮기는 것뿐이니까. 난 집시의 기질을 타고 났나봐. 새로운 것이 없는 세상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거든.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다르다.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그게 의문이다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난 너를 알아보지 못할지도 몰라. 모든 과거를 잊어버릴지도. 그땐 네가 나의 과거를 가르쳐 주겠지.
'망각의 샘'. 그 위치를 알려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거야.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도.
- 괴물 늙은이 고골이
아담은 잠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고골은 어딜 간 거지?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니...고골이 누구인지도? 아담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해야 할지도 난감했다.
멀리 여행을 떠났다면 흔적이라도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 집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l 급히 짐을 챙긴 흔적도 없고 여행을 하려면 가져갔어야 할 모포도 그대로 침상에 놓여진 채였다.
"돌아오겠지. 멀리 안 갔을 거야."
그리고 그는 창 밖으로 무심히 시선을 옮겼다. 창 밖에선 검은 새의 음산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고 숲은 푸르게 아지랑이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도대체 고골은 어딜 간 것일까?
가상계 에덴에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둠은 숲에서부터 에덴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열 일곱 살 아담은 가상계 에덴에서의 어느 고단한 하루를 그렇게 마감했다. 현실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여정을 어렴풋이 느끼며, 창 밖에 어두워질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고골은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