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영가옥 (趙海英家屋)
▶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73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안채 1동과 별채 1동, 문간채가 남아 있는데 원래 안채를 비롯하여 여러 채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건물에 기록된 글로 미루어 1918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안채와 별채는 둘 다 남북으로 길게 평행을 이루어 자리 잡고 있다. 안채는 남쪽을 향하여 있고 별채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안채와 별채에 둘러 쌓인 지역을 빼고는 담도 없이 거의 텃밭을 경작하고 있다.
함라면 함열리 473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조해영 가옥은 지방문화재자료 제121호(1986. 9. 8)로 지정되어 있다.
함열리 수동의 김안균 가옥과 함라노소 아래에 배치한 조해영 가옥은 사랑채, 부속채, 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는 원래 화단자리에 있었으나 철거되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누마루가 더해진 乙자형 평면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방주를 세워 소로수장집을 꾸몄다. 방과 대청으로 실들이 구성되어 있으며 각 실들은 툇마루에 의해 연결되며 마루 밑은 붉은 벽돌로 고막이를 하였다. 또한 주간의 치수를 일정하게 하여 계획의 합리성을 도모하였고 서쪽 툇마루에 부설된 포치로 근대 한옥에서 보이는 새로운 경향이다.
부속채는 대청, 방, 광으로 이루어진 고패집이다. 회첨부에 부엌이 있으며 부엌 안에 부엌방과 고방을 만들었다. 부엌 상부에는 다락을 설치하였다.
별채는 완전히 일본식 건물이다. 외관은 정면 4칸, 측면 2칸 크기이나, 내부는 외부 기둥열과 관계없이 두리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방 한 켠을 구획하고 주위에 툇마루가 돌려있는 평면형태이다. 방과 마루방 주위는 미서기문을 시설하여 내ㆍ외진을 구분하였고, 툇마루 주위에도 마루 끝에 미서기 유리문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모야(몸채)를 모코시(툇간)로 둘러싸는 일식건출의 모습이며 지붕도 내진의 지붕을 외진보다 한단 높게 구성한 2중의 우진각 지붕을 함으로써 완전히 일식 건축의 모습을 갖추었다.
상량문에 대정(大正) 7년이라 명기되어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은 한 때 만석꾼의 집답게 ‘열두대문집’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건물과 문이 있었으며 각 채들은 담장과 부속사들로 구획되어 각각의 공간을 해체되어 팔리고 현재는 몸채, 부속채, 별채만이 남아있다. 본래 대문은 지금과 반대편에 있었다.
별채는 1937년에 건립되었다. 이 곳은 주로 손님들을 접대하는 사랑채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별채 동편 울 밖에 김육의 선정비가 서 있고 울안에 ‘관찰사조한국영세불망비’ ‘조용규불망비’ 2개의 비가 가로집 가까이에 비석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한국불망비는 1903년 6월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 127cm, 폭 42cm, 두께 12cm의 대리석으로 된 호패석 비석이다.
이 가옥의 집주인 조해영은 도평의원을 역임하였다. 조해영의 부친은 참봉을 수직한 조용규로 일제시기 함열리에 ‘조용규농장’을 운영했던 함열리의 3대 부호 중 하나였다. 조용규의 조부인 조한기가 1900년 사천군수, 1902년에 정읍군수를 지내 현지 수동마을에서는 ‘조해영가옥’을 ‘조정읍댁’이라 칭한다. 정읍군수 재직시 가뭄과 기근에 사재를 털어 군민을 도와주었다해 현재 태인 피향정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조해영가는 임천조씨로 조선중기 함라지역에 정착해 일문을 이뤄 임천조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임천조씨’보다는 ‘함라조씨’로 지역사회에서는 더 통용된다.
시청 문화관광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