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절두산 성지코스 – 서울시 도보관광
코스 : 합정역 – 망원정 – 한강 – 양화나루터 – 잠두봉 유적 – 절두산 순교성지 –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
1. 합정동[合井洞 ]
유래 : 옛날 이 마을에 ‘조개우물'로 불려지는 우물이 있어 합정동(蛤井洞)이라 하였는데,
뒤에 ‘합(蛤)’이 ‘합(合)’으로 바뀐 데서 유래됨.
합정동은 조선 전기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하였다.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북부 연희방(성외) 합정리계였으며,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성외) 합정리계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합정리계 본동이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연희면 합정리로 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합정리가 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와 경기도고시 제32호에 의해 경성부의 구역확장이 될 때 경성부 합정정이 되었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구제도(區制度)가 실시됨에 따라 서대문구 합정정이 되었으며, 1944년 10월 23일 조선총독부령 제350호로 마포구가 신설되어 마포구 합정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마포구 합정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 도성삼군문분계총록(1751년), 육전조례(1867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합정동 [合井洞]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합정동 주변 관광정보 키워드
홍대, 신촌, 연남동
2. 망원정
2-1. 망원동 지명 유래
망원동[望遠洞] 유래 : 한강변의 명소인 망원정(望遠亭)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망원동은 조선 전기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하였다.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성외) 망원정1계 · 망원정2계 · 망원정3계로 하였다가,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망원정계 월사동, 정자동계 정자동이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망원동이 되었다가,
1914년에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망원리가 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와 경기도고시 제32호에 의해 경성부 행정구역이 확장될 때 경성부 망원정이 되었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도(區制度)가 실시됨에 따라 서대문구 망원정이 되었다가,
1944년 10월 23일 조선총독부령 제350호에 의해 마포구가 신설되어 마포구 망원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마포구 망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망원동 [望遠洞]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망원동[望遠洞, Mangwon-dong]
....... 서울특별시 마포구의 남서쪽에 위치한 동이다. 행정동은 망원1동과 망원2동으로 분리되어 있다. 망원동(望遠洞)이라는 이름은 한강변의 명소인 망원정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 17년 8월 서교에서 관가하고 망원정에 올라 술자리를 베풀다.
연산 5년 5월 망원정에서 수전을 보고, 농사 상황을 관람하다.
연산 12년 8월 2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망원정을 넓히게 하다." 등의 망원정에서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성 10리 안을 묘사할 때 망원정이 나오며 양화도(楊花渡)의 세금을 거두는 관내의 하나로 망원정일이계가 나온다. 또한, 양화도 동쪽 언덕에 망원정이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광여도』, 『동여도』, 『여지도』, 『대동여지도』에도 망원정이 표기되어 있다.
망원정은 성종이 지은 이름으로, 정자에 오르면 멀리 산과 강을 잇는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음을 뜻한다. 『호구총수』에는 연희방(延禧坊)이 서술되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망원동 [望遠洞, Mangwon-dong]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망원동 관련 관광정보 키워드
망원시장, 망리단길, 육중완 살던 동네, 수요미식회 98회 동네특집 망원동
2-2. 망원정
망원정[望遠亭]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던 정자로, 원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희우정(喜雨亭)이었음.
성종 갑진년(1484)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고쳐 짓고 망원정이라 함.
희우정이란 세종이 내린 이름임.
용례
답하기를, “요사이 날씨를 보건대 과연 가물 징조가 있으니 법사가 아뢴 말이 지당하다. 다만 내가 일찍이 ≪동국여지승람≫을 보니, 망원정기에 ‘세종조에 비가 흡족하지 못하므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야흐로 깊었었는데 망원정에 행행하여 관가하던 중 비가 쏟아졌다. 즐거운 나머지 정자 이름을 희우정이라 내렸다.’고 했었다. 이로 본다면 관가하는 것도 역시 백성을 위하는 일이기에 조금 가물 기미가 있다 하더라도 더러는 했던 것이다. 또한 가까운 날에 비가 내린다면 가물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 答曰 近觀日候 果有旱徵 法司所啓至當 但予嘗觀輿地勝覽 望遠亭記曰 世宗朝 有雨澤未洽 戒懼方深 而幸望遠亭觀稼 作雨霈然 因賜亭名曰喜雨 由此觀之 觀稼 亦是爲民之事 故雖稍有旱徵 猶或爲之也 且近若下雨 則不至於旱也 [중종실록 권제84, 30장 앞쪽, 중종 32년 4월 9일(정사)]
[네이버 지식백과] 망원정 [望遠亭]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망원정[望遠亭] 터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8안길 23(합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의 옛터.
서울특별시기념물 제9호. (1990년 06월 18일 지정)
망원정은 조선 태종 임금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세운 정자로 제천정과 함께 외국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당시 망원동 주변에는 청운정(淸雲亭), 수일루(水一樓), 평초정(平楚亭), 낙수정(樂水亭), 호인정(好仁亭), 탁영정(濯瓔亭), 안류정(岸柳亭), 팔관정(八觀亭) 등 많은 정자가 있었으며 한강변에서는 조선왕조 개국이래 수군(水軍)들이 훈련을 하였는데 세종 임금은 종종 이곳에 행차하여 수군의 훈련을 살피고 겸하여 백성들의 농사를 시찰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세종 임금이 이 정자에 행차하였는데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마침 그 해는 유난히 가뭄이 심하던 터라 모두들 비오기를 고대하고 있던 차에 임금의 행차와 함께 많은 비가 내렸으므로 임금은 이를 흡족히 여겨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 후 성종 때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이 정자의 이름을 망원정으로 바꾸었다.
현재 한강변의 망원정 옛 터는 보수 정화되어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참고문헌
『서울문화재대관』(서울특별시, 1988)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서울명소고적』(김영상, 동아출판사, 1958)
[네이버 지식백과] 망원정터 [望遠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망원정
1990년 6월 18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9호 지정되었다. 1424년(세종 6) 태종의 2남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1396~1486)의 별서(別墅)로 지은 것인데 이듬해 세종이 농정을 살피러 왔다가 이곳에 들렀을 때 마침 단비가 내려 희우정(喜雨亭)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당시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작자 미상의 희우정 그림으로 옛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데 강기슭 낭떠러기의 암반 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마루 가장자리를 따라 난간(欄干)이 돌려져 있다.
1484년(성종 15)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9)의 소유로 바뀌면서 희우정을 대폭 수리하고 ‘경치를 멀리 내다볼 수 있다’는 뜻에서 망원정(望遠亭)으로 개칭하였다. 성종은 정기적으로 농정을 살피거나 명사들과 시주(詩酒)를 즐기기 위해 이 곳을 이용했고 명(明)에서 온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연회장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마포구에 있는 망원동의 지명도 이 망원정에서 유래했다.
1506년(연산군 12) 7월 1천여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수려정(秀麗亭)으로 개칭되었으나 그해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공사는 중단되고 다시 망원정으로 복칭되어 원래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을축년대홍수(1925)와 한강개발 등으로 원래의 정자는 완전히 소실(消失)되었고 한강변 문화유적 복원계획의 일환으로 1988년 6월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1989년 10월에 완성,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망원정지 [望遠亭址] (두산백과)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김영숙 리디아 강사의 강의자료(2017.6.12.)에서 망원정
망원정은 서울특별서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1990년 6월 18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다. 지금 양화대교 북단, 즉 양화진 서쪽 강변북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망원정은 한강의 수려한 경치를 굽어보는 얕은 언덕위에 서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조선시대의 많은 선비들이 즐겨찾던 명소 중의 하나였다. 인근의 양화진은 조선시대에 한강을 건너 양천 김포 방향으로 나가는 큰 나루터로 수상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군사상 요충지였다.
망원정 자리는 원래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 약간의 농사도 지으며 즐기던 곳이었다. <궁궐지>에 의하면, 세종 7년(1425)에 가뭄이 계속되자 농민의 삶을 살피기 위해 서쪽 교외로 나왔다가 효령대군의 새 정자에 올랐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니 매우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성종 15년(1484)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퇴락한 희우정을 효령대군으로부터 얻어 교쳐 짓자 성종이 ‘망원정’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망원정은 정자에 오르면 멀리 산과 강을 잇는 겨치를 잘 바라 볼 수 있음을 뜻한다. 월산대군은 눈 덮인 양화벌의 겨울 경치를 <양화답설>이라 하여 <한양십영>의 한 곳으로 손꼽았다.
연산군 12년(1506) 7월 연산군이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공사를 하던 중 그 해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망원정도 다시 옛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망원정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망원정지 앞은 지금 강변북로가 되었으며, 주변 일대에는 주택가가 조성되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1987년에 정자터를 발굴하고, 1989년 7월 정자를 재건하였다.
한강변 동호에 낙천정이 유일한 정자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면 서호에는 망원정이 좀 더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3. 한강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김영숙 리디아 강사의 강의자료(2017.6.12)에서
‘ <한서 지리지>에는 대수로 표기되어 있으며, 광개토왕릉비에는 아리수, <삼국사기>의 백제건국설화에는 한수로 되어 있다. 한반도 중앙부의 평야지대를 흐르는 한강 하류 지역은 고대부터 문화발달의 터전이었으며, 한반도의 중부지방을 관류하기 때문에 고대에는 삼국간의 분쟁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조선이 한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한강은 내륙수로로서 일반 산물의 수송에도 중요하게 이용되었지만 세곡의 수송로로서의 경제적 기능을 크게 발휘하게 되었으며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왔다.
남한에서 가장 많은 수량을 갖는 강으로 한강의 명칭에 ‘漢’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중국 문화를 도입한 이후의 일이며 ‘아리’, 즉 크다거나 신성하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한’도 이와 비슷한 뜻이다.
본류의 길이는 514km로 유역면적은 26,018km2로 한반도에서 압록강 두만강 다음으로 넓고,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다음으로 길다. 한강의 본류는 경기도 양평군의 양수리에서 비슷한 크기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서 이루어진다.
남한강은 태백시의 금대봉 계곡에서 발원해 골지천 오대천을 거쳐 본류를 이루는데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에서 섬강 등의 주요지류와 합류한다. 북한강은 강원도 옥밭봉에서 발원해 금강천 사동천 등과 합류하여 본류를 이룬다. 춘천에서 소양강, 가평 남쪽에서 홍천강 등의 주요지류와 합류한다.
양수리에서 시작되는 한강본류는 왕숙천 탄천 중랑천 안양천 굴포천 등의 지류를 합치며, 김포평야를 지나며 하구에서 임진강과 만나 경기만에 흘러든다.
한강은 하폭이 좁았고, 곳곳에 모래톱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으며, 여울이 마포부근까지 나타났었다. 그러나, 특히 1970년대부터 골재가 엄청나게 채굴되고, 1981년부터 한강종합개발계획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이 넓어지는 한편 양안에 고수부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1980년대말까지 서울의 건물은 주로 한강의 모래와 자갈로 지어졌다.
4. 양화나루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김영숙 리디아 강사의 강의자료(2017.6.12)에서
양화나루 또는 양화진은 양화대교 북단 잠두봉과 그 주변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이라고 일컫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정자도 강변에 많이 세워져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화진 일대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할 수 있는 시장이 되었다.
고려때부터 중요한 도선장의 하나였으며 조선 초에 이미 동승이 배치되었다. 양천을 거쳐 강화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강화가 교통 관방상으로 중요시되던 당시에 있어서 그 비중은 매우 컸다. 양화도에서 보유한 진선은 10척 내외의 관선과 이와 별도로 사선의 나룻배도 있었다. 연산군때는 노랴도 외의 모든 진도를 금하고 진선은 모두 동원되어 국왕의 뱃놀이에 사용되어 양화도 역시 쇠퇴하였다. 중종 초기의 기록에 의하면 나루를 건너고자 하는 사람은 많고 진선은 단지 2척 뿐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먼저 건너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갖고 한꺼번에 승선하기 때문에 자주 침몰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는 어영청으로 하여금 이곳에 별장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때 양화진에 비치된 진선은 10척이었다. 1754년(영조 30)에는 한강 수로와 한성 방어의 요충지로 지정되어 어영청 관할의 양화진이 설치되면서 군사 100명이 주둔하게 되었다. 양화진 별장은 인근의 공암진, 철곶진까지 관장하였다. 양화도 일대 역시 경치가 좋아서 중국의 사신이 오면 종종 이곳에서 선유를 베풀었으며, 사대부들의 별장도 많았다고 한다.
5. 잠두봉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김영숙 리디아 강사의 강의자료(2017.6.12)에서 잠두봉
양화나루 위쪽의 잠두봉은 봉우리 모양이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고, 용두봉 또는 들머리[가을두]라고도 불리었다. 이곳은 한강 연안 중에서도 양화나루 아래에 있던 망원정과 함께 빼어난 절경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양화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에 대한 시는 한도십영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애상하였다.
원래 이곳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6. 절두산 순교성지 =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은 1997년 11월 국가 사적 제 399호로 지정된 천주교 사적지를 말한다.
절두산 순교성지 일원의 사적 명칭이 ‘절두산 성지’가 아니라 ‘양화나루 잠두봉’으로 지정된 이유는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은 원상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는 문화재 보호법 제1장 총칙 제2조 2항에 따른 것이다.
또 양화진이 아니라 양화나루로 정하게 된 것은 한자식 기록보다 당시 조선신들이 순 우리말 표현인 양화나루로 불러온 데 따른 것이다.
절두산 그 이름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김영숙 리디아 강사의 강의자료(2017.6.12.)에서
우리말로 별 뜻 없는 산 이름처럼 들리지만 한자를 풀이해보면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머리를 자르는 산'이라니...
무슨 곡절이 있어 그토록 사나운 이름이 붙었을까.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올라왔다가 돌아갔다.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이 양화나루 옆의 봉우리인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여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그 뒤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며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절두산이라 이름은 그렇게 천주교 순교자들의 혼과 넋을 담은 곳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천주교의 성지가 되기까지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김영숙 리디아 강사의 강의자료(2017.6.12.)에서
1866년 (고종 3)에 제 1차 병인양요가 일어나면서 양화나루와 잠두봉의 역사는 일변하게 되었다.
이해 로즈가 이끄는 프랑스 극동 함대가 조선원정을 시도한 끝에
8월 18일(양력 9월 26일)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올라왔다 중국으로 돌아갔고
9월에 다시 강화를 침략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조선정부는 이 일련의 사건이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프랑스 함대가 정박한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대원군은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박해의 칼을 휘둘렀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이는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묻고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잠두봉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칼에 목이 떨어졌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병인년 10월 22일 부인 김 이쁜 마리아와 아들 이붕익 베드로가 함께 참수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렇듯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는 22명과 단지 이름만 알려진 2명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5명을 합해 29명외에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1868년 남연군묘 도굴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7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병인박해 전후 8년의 기록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김영숙 리디아 강사의 강의(2017.6.12.)를 정리
1865년 러시아의 남하정책
러시아 견제를 위해 프랑스를 생각한 대원군
부대부인 민씨 등이 프랑스 신부 등과 접촉할 것을 권요
중국에서 선교사 살해사건 발생
프랑스의 국력에 의문을 갖게 된 대원군, 프랑스와의 연합을 포기하다
당시 천주교 신자 약 23,000명 추정
1866년 2월 23일 포고령 선포
천주교 신부에 대한 체포령, 12명 체포, 그중 3명이 탈출,
병인 박해 기간중 조선 전국에서 약 13,000명이 순교한 것으로 추정
병인양요
남연군묘 도굴사건, 1868년
천주교 신부가 길안내를 맡았다.
오가작통법, 선참후계
신미양요, 1871년
현재의 절두산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김영숙 리디아 강사의 강의자료(2017.6.12.)에서
천주교회에서는 1966년 병인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 일대를 매입한 뒤 잠두봉을 중심으로 성당과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고 사적지로 조성하였으며, 1976년 이래로 한국 성인들의 유해를 옮겨와 안치하였다.
2000년에 절두산 순교 박물관으로 개명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부터 서 있는 수직의 벽 종탑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성지는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순교자박물관의 전시관으로 나누어져있다.
초대 교회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자료들 오천여점이 소장돼 있다.
관련 자료 찾아보기에 필요한 키워드
1801년 신유박해
정하상
그레고리우스 16세
프랑스 외방정교회
조선대목구(조선교구) 설치
1839년 기해박해
7.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김영숙 리디아 강사의 강의자료(2017.6.12.)에서
조선에서 사망한 외국인들을 안장하기 위한 것으로 “외국인 선교사의 분묘를 보전하고 관리하여 우리나라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고인들의 사랑과 희생정신을 기림을 목적”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1890년 7월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요청으로 조선 정부는 양화진 언덕 일대를 외국인 매장지로 정하였다. 이곳에 처음으로 매장된 사람은 의료선교사로 1885년에 내한하여 제중원 원장이었던 헤론이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묘지는 아니다. 1883년 인천에 외국인 묘지가 마련됐다. 하지만 J.W.헤론이 죽었을 때는 한여름이었다.
인천까지 시신을 운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에 미국공사가 고종에게 묘지를 부탁해 양화진에 터를 마련했다.
병인양요와 병인박해가 있은 지 34년 후였다. 짧지 않은 시간에 조선의 변화를 가늠케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폐허로 방치됐던 것을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사업협의회에서 선교사 묘원으로 꾸몄다. 1986년 선교기념관의 완공과 더불어 경성 구미인 묘지라 불리던 이름도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변경했다. 지금은 묘역의 공식 명칭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양화진 Foreign Missionary Cemerery)’으로 개칭하였다.
묘원의 면적은 13,224m2, 안장자 수는 15개국 417명이다. 또한 가족을 포함한 선교사 수는 145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