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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sokook21/120158453251
최원현 평론가- 오차숙의 아방가르드 에세이 조명 아방가르드 에세이
2012.04.28. 12:40
http://blog.naver.com/sokook21/120158453251
현대수필>오차숙의 수필세계
날카롭게, 그러나 따뜻하게
- 오차숙의 아방가르드 수필을 중심으로 -
최원현<수필가.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어지러울 만큼 빠르게 변하는 시대요, 삶의 현장이다.
어제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늘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만도 벅찬 변화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각박한 시대의 우리이다.
팝의 본고장 유럽에서 우리 K팝이 그들의 혼을 빼앗아버렸다. 40년 전 영국 팝가수 ‘클리프 리처드’가 서울에 올 때 김포공항은 환호하는 팬들로 꽉 찼었는데 반대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프랑스 파리를 흔들어버린 것이다.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게 어디 음악뿐인가. 다른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피겨스케이팅에서 세계의 왕좌에 앉는가 하면, 여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유치했다. 문학이라고 못 할 게 없잖은가. 물론 여러 가지 이유, 환경조건상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들이 그걸 깨트렸다면 문학 또한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미 노벨평화상은 수상을 했고 노벨문학상 최종 후보로 거론된 작가도 여럿 있다. 우리 소설가의 작품이 미국 서점가를 지배한다는 반가운 소식도 있다. 변화의 바람, 우리의 잠재력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야흐로 수필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그 힘이 느껴지진 않는다. K팝의 성공을 보며 투자가 없었다는, 준비가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 시도도 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제자리, 제 밥그릇도 못 찾아간다는 말을 들을 만도 하다. 그냥 안주해 있어서가 아닐까. 작가는 모름지기 독자의 욕구를 채워줄 뿐 아니라 보다 욕구를 키워가게끔 충동하고 자극할 책임과 의무도 있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보다 앞서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보태줄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시도, 도전, 공감화, 감동유발, 모두가 작가의 몫이다.
수필가 오차숙의 수필을 만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 수필문학이 너무나도 점잖을 빼고 있었다는 자각과 함께 반성도 되었다. 변화는 가만히 있어서는 오지 않는다. 변화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 현상유지란 참으로 비참한 사태다. 차지도 덥지도 않다는 것은 식물인간과도 같은 상태가 아닌가.
이 시점에서 오차숙은 아방가르드 수필을 시도하고 지향한다.
그는 이미 ‘성(性)에세이’를 수필잡지에 연재 시도하였고 그걸 묶어 책으로도 낸 바 있다. 그러나 반응은 항상 나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도자는 늘 외롭고 힘들다. 하지만 문제는 작가 자신이다. 작가의 주관과 의지에 따라 작품이 세상에 남느냐 사라지고 마느냐다. 일단 작품으로 발표되고 책으로 나오기만 하면 남게 된다. 그리고 평가되고 또 그걸 통해 도전을 받는 자도 생긴다. 문제점이 발견되면 새로운 시도와 보완이 있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시도란 아무나 하진 못 한다.
이번에 접한 오차숙의 작품집「음음음음 음음음」은 작가 스스로가 아방가르드 수필이라고 정의하고 발표한 것들이다. 다분히 의도적인 시도인 셈이다. 실험이다. 도전이다. 기존에 대한 부정이기보단 반격이다. 좀 더 나은 그리고 더 넓고 높은 세계로의 욕심으로라기 보단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는 욕구요 욕망의 분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객기가 아닌 이 시대에 맞는 글을 써보겠다는 당찬 결의다.
그렇다면 그가 시도해보고자 하는 아방가르드 수필이란 무엇이며 그는 과연 그의 소망처럼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
2. 수필가 오차숙과 아방가르드 수필
오차숙은 제주에서 교사인 아버지와 해녀 어머니 사이에서 2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1974년 한국성서대학교 기독교교육과에 입학했지만 중퇴를 하고 결혼을 하여 4남매의 엄마가 된다.
그런 그가 중년의 나이, 1995년부터 2004년까지 9년간 맹렬히 문학과 관련된 공부를 한다. 그에겐 절대적 필요에 따른 공부였다. 1995년 창조문학 시부문 등단, 1997년 현대수필 수필부문 등단 후《콘크리트 속의 여자》(1998.세손)라는 수필집까지 내면서 진행된 일들이니 그의 문학적 포부와 열정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늠케 한다. 그는 다음 해에 수필집《오늘처럼 쓸쓸한 날엔 태풍이라도 불었으면》(세손)과 시집《레일 이탈을 꿈꾸고 싶은 날》(세손)을 내게 되며, 2001년엔 기도시집《아름다운 구속》(세손)을, 2003년엔《번홍화》(세손)라는 문화와 예술이 있는 에세이를 출간한다.
또한《현대수필》(발행인 윤재천) 편집위원, 서초수필문학회 회장(2003), 현대수필문인회 7대(2004) 및 8대(2007) 회장을 역임하고, 2004년부터는 4년에 걸쳐《현대수필》에 ‘성 에세이’를 연재하여 2006년《가면축제》(문학관)로 묶어내는가 하면, 2007년부턴《현대수필》편집장까지 맡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2007년엔 문학 스승인 운정 윤재천 교수와 함께 한《수필문학의 르네상스》(문학관)와 제3회 구름카페문학상 수상 기념 선집《장르를 뛰어넘어》(문학관)를 출간 하게 되고, 2010년엔 아방가르드 에세이《음음음음 음음음》(문학관)과 《감성에 말을 걸다》(소소리)를 출간한다.
한국수필 문단에 이만한 문학적 열정을 갖고 또 그만큼 열정을 펼쳐낸 작가가 오차숙 말고 얼마나 될까 놀랍고 부럽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보가 편편한 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 먼저였겠지만 ‘남과 다르게’ ‘기존의 것과는 다르게’라는 그의 문학적 행동에는 따뜻한 눈길보다는 그렇지 못한 눈길도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의 문학적 행보에 ‘아방가르드’는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 같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란 군대 중에 맨 앞에 서서 가는 ‘선발대’(Vanguard)의 의미로 옛(과거) 문학의 뿌리는 건드리지 않고 존중하면서 새로운 것을 접목한다는 문학사조이다. 하지만 제도예술로 정착하는 게 아니라 실천적 예술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삶과 예술 사이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예술을 실제생활에서 지양코자 한다.
이런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수단의 보편화를 가져왔고 비판에 대한 의식도 바꾸게 된다. 오차숙은 이러한 의식 속에서 수필을 종합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다원주의 시대에 문학은 장르 해체가 되고 있으며, 작가들의 자유로운 의식과 독특한 몸짓만이 무한한 창의력을 발산한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잠재된 무의식의 앵글(angle)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고, 독자의 영혼을 위로시킬 수 있다면 수필문학이 아닌가 한다.
<수필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색하는 더듬이> 중
오차숙에게 수필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다. 숙명이고 영혼의 호흡이며 맨발로 나아가야 할 그만의 영혼 구하기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먼저 구제해야만 독자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는 그의 사고(思考)는 어떻게 잠재해 있는 마음속의 무의식을 창의력으로 건져 올려 독자에게 보여 주는 가로 온 정신이 집중된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능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고, 해서 그는 손끝문학이 아닌 온몸의 춤사위며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리는 신음소리에 자신만의 독특한 몸짓까지 동원한 종합문학으로 독자에게 나아가고자 한다.
말하자면 오차숙은 문학 곧 수필의 정형화된 틀을 거부함으로써 자기만의 새로운 영역을 확보코자 한다. 그런 수필에 대한 그의 사랑은 실험수필을 통한 영역확장과 개척자적 자세로 열정을 더한다. 특히 그의 삶속에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면서 수필이 그의 삶의 중심이 되고 그렇게 그의 생(生)은 수필이라는 한 판 춤사위로 새롭게 펼쳐진다.
한 번 몸이 달아오른 그에게선 잠재되어있던 그만의 한(限)이 춤사위가 시작되고, 그는 자신을 떨림과 흔들림에 온전히 내맡기면서 자신이 아닌 또 하나의 자신으로 수필의 춤사위를 펼친다. 말하자면 보여주는 수필까지 시도한 셈이다. 그런 그에게 ‘아방가르드’는 하나의 도구이며 계기가 된다. 문학을 향한 그의 질주는 그렇게 시작된다.
3. 오차숙의 보여주기, 삭히기, 풀기
폴 발레리는 ‘문학의 목적은 인생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부정(否定)이다’라고 했다. 부정은 수리 논리학에선 명제의 참과 거짓을 반전하는 논리 연산이다. 곧 부정이란 변화의 출발이고 새로움의 추구다. 현실에의 안주가 아니라 도전이고 저항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도 자유를 생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자유는 ‘정중동(靜中動)’으로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조용해 보이나 거대한 움직임을 품고 있다. 문학도 그처럼 조용하나 큰 움직임이요 그 큰 움직임은 자유와 부정을 동반하게 된다.
문학의 기본 바탕은 삶이다. 삶의 진실성이 없다면 문학이 아니다. 그 진실성으로 삶의 본질을 파악하고 의미를 발견하며 현실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창조해 낸다. 고로 문학은 삶을 일깨워주는 진실한 가치를 지향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오차숙의 문학, 오차숙 수필은 이러한 삶을 일깨워 주는 진실한 가치의 실현을 보여주기-삭히기-풀어내기로 시도한다. 그리고 그 시도의 시작에 한(限)과 신명(神明)을 둔다.
인간의 감정은 다양할 뿐 아니라 변화무쌍하다. 한과 신명은 감정의 양극을 이룬다. 한은 비통한 감정이요 신명은 환희의 감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둘은 늘 비밀스레 손을 잡는다. 한은 신명에, 신명은 한에 손을 내밀면서도 빛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한(恨)의 사전적 의미는 “차별적인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 속에 쌓이는 심리적인 복합상태”로 억울함· 원통함· 원망· 뉘우침 등의 감정과 관련해 맺힌 마음이다. 곧 한은 한국적인 슬픔의 정서로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다.
한은 한국 문화 속에서 주로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정치적· 사회적 약자로서의 한으로 끊임없는 외침과 내란의 역사 속에서 수난의 삶을 살아야 했던 민족적 비원과, 양반·상민·천민 구조의 뛰어넘을 수 없는 뿌리 깊은 계층의식이 깊은 한의 원인이 되었고, 또 하나는 남존여비 사상과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한으로 남성의 횡포, 시집살이의 고달픔,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 등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애환이다.
그러한 한을 서민 생활 속에서 속담·설화·민요로, 또 마당극·판소리로, 시가와 이야기(소설)로 보여주고 삭히고 풀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한(恨)의 정서 못지않게 흥과 신명 또한 우리민족의 정서다. 바로 한을 보복이나 복수로가 아니라 흥과 신명으로 풀어낸 것이다. 너무 슬퍼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입에선 웃음이 나오고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되는 이 해학과 신명이 바로 우리의 한인 것이다. 한국인의 신명은 바로 이런 슬픔의 극에서 낙천을 얻고 불행의 끝에서 낙관을 얻는다.
그런데 오차숙의 한(限)은 좀 다르다. 촛불 같은 한, 누에가 나비의 부활을 꿈꾸며 옹골지게 누에고치를 지어 갇히는 것처럼 숙명의 날갯짓을 해대는 아름다운 슬픔의 모습이다. 만남을 위한 이별, 이룸을 위한 부서짐, 비상을 위한 추락, 그래서 그만이 가야 하는 외롭고 고독한 행보가 되고 홀로 추는 춤사위가 된다. 그게 한의 모습으로 신명의 모습으로 비쳐 보인다.
그렇다면 오차숙의 한은 우리 민족의 한과는 다른 한이다. 기독교 사고(思考)와 무속(巫俗)의 끼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내면의 엄청난 회오리가 한처럼 보인다. 동화될 수 없는 두 개의 기류를 양 손에 하나씩 붙들고 놓아버리지도, 그렇다고 붙잡고 있을 수만도 없는 상황으로 가슴이 탄다. 자신이 알몸으로 온전히 드러나도록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벗어버리면 좀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또 하나의 그를 붙들고 있는 기류가 그런 그를 억압한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나와 사랑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로 갈등하며 가위에 눌린다. 오차숙은 그 가위눌림에서 벗어나는 길로 아방가르드 수필을 시도한다. 그것은 그의 문학적 소망, 곧 문학적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소망과도 일치하게 된다. 수많은 얽매임 속에서 그가 추는 춤, 하지만 추면 출수록 사람들은 신명을 느끼지만 자신은 더욱 슬퍼지는 춤을 그가 추게 된다.
그렇다면 오차숙이 그런 한과 신명을 엮어 자칭 아방가르드 수필로 짜낸 베는 어떤가.
가벼운 영혼으로 노래 부르고 싶다.
춤을 추는 삶이 아니라 광기에 찬 삶이 아니라, 쓰레기 같은 꿈틀거림 전부 내려놓고 올레길 같은 영혼의 소유자가 되어 그 어떤 한적함과 접선(接線)하고 싶다.
영혼을 맑게 씻어주는 정체 모를 햇살,
나는 그 햇살아래서‘삶이라는 괴물’과 타협하는 나무이고 싶다. 대(大) 평화를 제공해주는 나무가 되어,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이들과, 나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그 남자 사이에서 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생은 한 판 춤사위로세> 중
그는 ‘가벼운 영혼으로 노래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엄마와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해선 기꺼이 ‘삶이라는 괴물과 타협하는 나무’가 되겠다고 한다. 그의 삶이 ‘연옥(煉獄)의 세계’에 있을지라도 엄마와 아내로서 평화를 제공해 주는 나무가 되어 ‘생을 한 판 춤사위’로 살겠다 한다. ‘주변의 모든 것이 아이의 웃음이 아니더라도’ 양귀비 한 송이를 피우고 싶단다. 안으로 타는 촛불과 같은 이런 희생과 헌신의 삶 중심에 그는 문학을 두고 있다.
오차숙은 참으로 욕심이 많다. 아니 욕심이라기보다는 의무감이요 책임감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에겐 그 의무와 책임감까지 위협하는 ‘끼’가 있다. 마그마처럼 꿈틀대고 있는 불의 힘, 의무와 책임을 흔드는 욕망, 인간적 도덕적 구속을 넘어가는 예술적 자유함, 현실속의 나와 현실을 거부하고 싶어 하는 나 사이에서 무수히 갈등하면서 영원의 세계, 곧 자유함을 희구한다.
그가 굳이 ‘회색지대’란 표현을 쓴 것에도 깊은 의미가 있다. 회색은 밝음도 수용하고 어둠도 포용하는 색이다. 반대로 밝음도 거부하고 어둠도 거부하는 색이기도 하다. 그렇게 모두를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공간으로서의 회색지대는 ‘매직아워(MACIC HOUR)로서 곧 마법의 시간대다.
태양이 지평선을 넘어가 완전히 어두워지기까지의 20분, 밤이라고도 낮이라고도 할 수 없는 미묘한 빛이 지상을 떠도는 시간대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새로워 보인다. 밤도 낮도 아닌 시간대, 오차숙에게 회색지대는 바로 이런 구원의 시간대에 형성된 공간으로 비로소 오차숙에겐 아무도 그 무엇도 그를 통제하지 못하는 그만의 자유할 수 있는 순간일 수 있다.
그 순간을 위해 그는 혼바람이 된다. 말하자면 그렇게 오차숙의 삶과 오차숙 문학은 서로 안타까움을 보완하고 보조하며 긴장시킨다. 그러면서도 그의 생각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나의 삶은 빛인 것 같았으나 그림자의 화신이었고, 그 그림자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창공을 향해 소용돌이를 쳤으므로 고요한 분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나의 삶, 나의 문학 2> 중
그에게 고요한 분출구는 글쓰기였고, 그 글쓰기라는 등대를 찾아 그는 긴 여행을 떠난다. 그는 수많은 병을 가진 환자라 자칭하는데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종합병원은 ‘글쓰기’란다. 따라서 그에게 글쓰기는 존재성의 확보다. 하지만 그에겐 고요함도 소란스러움도 모두 두려움이다. 왜 그가 이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서두르는 것일까. 그 어떤 불안이 그를 이토록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그의 심연 깊은 곳에 무엇이 잠재해 있는가. 지금 그는 어떤 상태인가.
내가 노래하는 무대에는 조명등이 희미해 생명의 싹이 움트지 않소 꽹과리를 두드리고 장구를 내려쳐도 푸른 감흥이 일어나질 않소 영혼의 날개마저 거세당한 탓인지 관객의 그 깊은 수군거림과 무대의 퀭한 종소리도 오래도록 들리지 않소 버선발로 뛰쳐나가 뱅그르르르 뒹굴어 볼까 하얀 적삼 걸치고 나가 관객석을 배회해 볼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
<음음음음 음음음> 중
그의 삶은 어머니와 아내라는 인간적인 부분과, 글쓰기라는 욕구적 부분이 갈등 아닌 대립구조로 묘한 심리적 대치상태를 이룬다. 그것은 자유할 수 없다는 불안한 자유에의 희구로 극도의 생명에 대한 불안감으로까지 나타난다. 그가 바라는 밝음은 ‘회색지대’라는 거대한 시간의 구조체에 막혀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힘을 써 도 그가 원하는 만큼의 밝음은 확보될 수가 없다.
해서 그는 생명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는 대안으로 하얀 적삼을 걸치고 춤사위를 핑계 삼아 관객석으로 나가볼까 한다.
뭐여라 그으래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오 생은 한 판 그래픽 소설이라고 생은 한 판 춤사위라고 한 판의 춤사위는 천 개의 단어를 조립한 말장난 보다 느낌을 줄 때가 때로는 있다오 남사당패들의 외줄타기 외로움처럼 아슬아슬하게 마음의 행로를 걸어가더라도 호오 탕한 춤사위는 삶을 지탱시켜 주는 이유가 되거든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
<음음음음 음음음> 중
그의 아방가르드 수필 <음음음음 음음음>은 바로 그런 내면적 갈등과 욕망과 바람(願)이 함축된 대표적 작품이다. 문장부호까지 거부한 그의 호흡, ‘생은 한 판 춤사위로세’로 펼쳐내는 후렴구 같은 추임새, ‘음음음음 음음음’으로 표현되는 수많은 언어의 줄임, 그의 춤사위는 생명회복의 간절한 기원무(祈願舞)인 것이다.
그의 기억 깊은 곳에는 어린 날 어머니가 깊은 물속으로 잠수하여 내려가면 올라올 때까지 자신도 숨을 죽이고 어머니의 부상(浮上)을 기다리던 그 어떤 잠재적 불안감이 어머니의 숨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잠재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훠이 훠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쉬던 어머니의 살아남은 삶이, 멈췄던 오차숙의 심장까지 다시 뛰게 되며 환희로 느껴진 것이 아닐까.
잠시 눈길을 멈추면 시름시름 죽어가는 난(蘭) 이제 그 난이 커튼 속 무대에서 훌쩍인다 해도 한계가 꿈틀 거려 무대 저 만치 진땀의 물살 권태의 물살이 콸콸 밀려 오오 <중략>
오호라 맞소 난(蘭) 한 그루를 키우기 위해 한 판의 춤을 추어보세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구 오호라 웬 걸 미안하오 난 한 그루를 키우다 보니 권태로 인해 힘들어졌소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고 오호라 여전히 암 말 마소 난 한 그루 생(生)하기 위해 한 판의 춤을 추어보세 바람과 구름은 남사당패로세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구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
<음음음음 음음음> 중
시름시름 죽어가던 난, 난 한 송이 키우기가 힘들어진 상태, 다가온 꽃샘추위, 난 대신 신열이 끓는 작가는 마지막 수단으로 춤꾼이 되길 서원하고 난 한 그루를 키우기 위해 한 판의 춤을 춘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꽃샘추위를 넘겼기에 봄인가 했는데 너무나 빨리 봄이 가고 여름도 가고 가을까지 가고 다시 겨울이 된다. 그 사이 내내 그는 혼자였고 홀로 있는 그 사이에도 쉼 없이 움직이고 있던 그, 현실과 이상이 뒤범벅이 된 봄, 고독함이 두 어깨에 넘쳐흐르던 여름, 신성한 영혼이 없어 어디나 무덤 같던 가을, 그래서 ‘하나’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처절한 계절이 겨울이었는데도 오히려 그 겨울 속에서 ‘또렷이 살아있는 상쾌한 의식’으로 ‘끝자락까지도 보듬어 보려는 순수의 계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게 ‘홀로 있음이 춤이 된’ 그에게 또 하나의 유혹이 다가온다.
시간이란 밧줄이다.
그에게 밧줄은 무엇일까. 생의 강을 건너는 디딤돌이다. <밧줄 위에서 추는 춤>에서 그는 그 디딤돌을 뒤뚱뒤뚱 건너간다. 그러다가 ‘마당놀이 하듯 환상에 휩싸인 채 천상의 시간과 지상의 시간이 춤을 추게’ 한다. 그런 그에게서 목마름처럼 소망 하나가 열린다.
그래서 그런지
나를 충전 시킬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소이다.
<밧줄 위에서 추는 춤> 중
그에게 정신력이란 존재의 정체성이란 밧줄이다. 그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서 꿈과 양심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충전시킬 수가 없다. 그는 그런 불안함 속에서 놓쳐 버릴까봐 두려운 꿈이란 밧줄을 딛고 양심이란 밧줄을 붙잡은 채 미래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 초상화 속에 고향이 있고 어머니가 존재한다. 그 초상화 속에 수필의 삶이 있고 수필의 인연이 존재한다. 남편이 있고 네 명의 아이들이 존재하게 된다.
그의 초상화로 구체화 시키려는 것들, 그에게 초상화는 밧줄을 건너 그가 만나고자 하는 것이고,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고, 그를 존재케 하는 이유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초상화는 밧줄 위에서 춤을 추는 그 자신이 형상화된 모습이기도 하다.
오차숙은 자신이란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속에 더욱 자신을 알고자 한다. 그러면서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더욱 더 알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된다. 수없이 방황하고 포기하고 좌절을 겪으며 자신의 실체를 알고자 한다. 자기 안에 꿈틀대고 있는 수많은 자기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바람아!
그대야말로 내 무의식의 에너지를, 내 열정의 골수를, 내 중심의 사모를, 끝이 없는 기도를 바쳐야 할 대상이다. 나는 그대의 붉은 입술과 숨어 우는 비애와 광채 나는 위선과 함께 가야 할 대상이다.
바람아!
나는 땅위의 모든 것과 하늘 아래 모든 것을 향해 줄달음쳐 왔다.
붉은 인내와 푸른 열정으로‘모양새’를 이루었고, 그 비전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폭풍 같은 시간들을 헤엄쳐 왔다.
<안식을 모르는 영혼> 중
그의 이런 비탄이 결코 허풍이 아닌 것은 그가 긴 우울 속에서, 긴 고독 속에서 안식을 모르는 영혼으로 떠다녔던 것을 바람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이기에 그는 방안에서도조차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지워지지 않는 그 처절한 환상 - 아버지는 알몸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안에서 상념과의 싸움> 중
아버지가 응시한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9살 된 막내딸의 교통사고를 눈앞에서 지켜보고 흩어진 그 살점을 주워가며 오열 했었다. 그런 아버지가 넓은 들판에 있는 아파트로 ‘하얀 망토를 걸치고 어린 딸의 손목을 잡은 채 우리 집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동생 손목을 잡고 ‘쳐들어왔다’는 이 표현 속에 그가 느낀 공포감, 불안감, 그리고 결코 생각하고 싶지도 않는 기억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삼중 커튼을 닫고 실체를 가둔다. 그리고 아버지가 숨을 거둔 그 방에서 그는 침묵의 무덤을 가슴속에 만든다. 그러자 비로소 그의 마음에 평온이 꿈틀댄다. 그는 그제야 삼중커튼을 휘익 걷고 고독과 방종, 헛헛함을 땅 끝까지 내던져 버린다.
제주는 오차숙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단지 고향으로서만 아니라 그가 여자가 된 곳이다.
나는 늘 그곳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바다 냄새를 풍겨주는 향수만으로도 고향을 등진 것이 아플 때가 많다.
제주 특유의 돌담들이 지친 영혼을 위로해 준다.
<제주의 여인들> 중
13살 된 소녀가 두려움과 경이의 대상으로 초경을 맞게 된다. 그런데 그날 어머니는 셋째 동생을 낳게 된다. 그는 불안감과 흐뭇함을 안고 산모인 어머니에게 메밀수제비를 끓여드리고 바닷가로 나가 그 작은 손으로 붉은 선지덩어리 같은 빨래를 한다. 고기들이 핏덩이를 쪼아 먹으려고 몰려드는 걸 보면서 그는 묘한 희열을 느낀다.
그는 밭일을 하고 별빛과 달빛의 애무를 받으며 혼자 목욕도 한다. 어머니의 거울과 화장품에 옷가지까지 입어보며 그는 그렇게 자라다가 ‘향수병에 걸린 소녀처럼 뭍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는 어느 날 제주를 떠난다.
그렇게 그는 제주의 아이에서 제주를 그리워하는 제주의 여인이 되었다. 그런 그이기에 그는 늘 그곳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바다 냄새만으로도 향수병을 앓으면서 고향을 등진 것을 가슴 아파하기도 한다.
오차숙의 삶의 행로 내내 자리한 이 상념은 그가 펼쳐내는 춤마당의 근원으로도 살아나곤 한다.
오차숙에겐 세상을 응시하는 관음증세가 있다.
어쩌면 자신은 현실을 긍정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늘 그의 마음 안에서 싸우는 두 가지 상념적 갈등 때문이다.
내려놓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신앙인임은 물론, 한 남자의 아내요 4남매의 어머니라는 사실 앞에서 대책 없이 엄습해오는 모든 상황에 소극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남’이란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먼저 만남의 경계선부터 응시한다. 만남의 경계선에서 그는 약속-진실-운명라는 개념에 대해 해부하기에 이른다 <만남이 주는 경계선 훔쳐보기>.
만남은 약속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가. 그 약속은 얼마나 진실 된 것인가. 그 약속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일 수도 있는가.
그는 명작들의 ‘만남’을 통해 그 철학을 확인-<명작에서 훔친 사랑의 논쟁>-코자 한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사랑은 운명으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던 캐츠비,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운명임을 깨닫고 낡은 연미복을 입은 모습으로 권총 자살을 한 베르테르, 그런가 하면 여자가 남자를 사랑할 때 ‘그 남자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었던 나는 결국 광기(狂氣)의 사랑을 택할 수밖에 없었어’라며 죽어서라도 함께하려 했던 에밀리, ‘내 사랑은 점점 더 정열적이고 이기적이 되어가는데 브론스키의 애정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어’라며 브론스키를 처음 만났던 기차역에서 달려오는 기차 앞으로 뛰어든 안나 카레리나, 그리고 로체스터와 제인에어 같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때의 사랑하는 모습들을 확인하면서 도데체 그건 어떤 만남인가, 그런 만남은 약속과 진실, 운명의 어느 경계선에 있는가를 탐구하면서 인간은 과연 어떤 만남을 원하고 있는가를 점검한다.
4. 나가며
오차숙 문학이 아방가르드 수필로 숨고르기를 하게 된 데는 바로 그가 나아가야할 정점이 ‘하나’가 아니라, 늘 새롭게 혁신적으로 도전하며 ‘바꾼다’는 데 있다.
한 곳에 안주할 수 없다기보다는 안주 자체가 정체된 것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고, 그의 성정 역시 좀처럼 잠재울 수 없는 열정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 곳에 앉아있을 수가 없다. 부단히 나아가고 도전하며 뛰어야 한다. 그게 오차숙이다. 그는 숙명처럼 걷고 나아가고 뛸 수밖에 없다. 그런 화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그는 보여주기 위해 질주를 한다
연극 ‘현대인의 슬픈 초상’에서 보았던 보이체크와 마리를 통해 그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초상들, 무제한의 속도로 어디론가 질주하던 초상들, 군중 속에 파묻혀 밀물처럼 달려가던 초상들, 뒤따라오던 그림자를 핸드백으로 걷어차며 뒤를 돌아볼 인간미도 상실해버린 초상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완전함 속에서,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던 초상들을 훔쳐’
보며 그 속에서 오가던 불투명한 언어들의 춤사위를 통해 그냥은 달릴 수 없어 가면을 쓰고 달리면서
‘가면은 인생에서 가장 멋진 파워, 세련미의 극치, 위선 그 자체는 가면을 쓰고 토해낼 수 있는 절정의 유희’라고 <해체, 포스트 모더니즘적 춤사위> 에서 말한다.
또 하나 보여주고자 한 것은 진실과 비정이다. 연극 속에서 군인 보이체크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몸까지도 인체실험용으로 내놓고자 하는데 아내는 다른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다. 그걸 알게 된 보이체크는 배신한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한다. 오차숙은 여기서 우린 모두 이런 시대, 이런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게 전부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체의 춤사위’를 시도하게 된다.
혼돈에 파묻힌 채 선택의 여지도 없던 초상들, 방향과 목적지가 분명치 않더라도 무지갯빛 그림을 그려야 했으므로, 비명소리가 들려와도 냉혹한 마음으로 질주할 수밖에 없던 초상, 배고픔이 몰려와도 질주해야 했던 초상들, 싸늘함이 허공을 찌르더라도 탕탕한 웃음을 지으며 군악대장의 유혹에 넘어가야 했던 마리, 그 여자! 그 여자!
<해체, 포스트 모더니즘적 춤사위> 중
오차숙이 특별히 변호하고 싶어 하는 세상의 상징 - ‘마리’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막막하고 답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삭히기의 명수다.
오차숙은 천년된 향나무로 서울의 도심에 선다. 그냥 서있는 것이 아니라 서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무릎과 관념, 내장(內臟)까지도 깊숙이 숨긴 채 그 흔적 그 형상 개미똥 만큼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삭히며 울고 있다 검붉은 입술을 앙 당문 채 해오라기 형상으로 웃고 있다.
<향나무 한 그루> 중
천년된 향나무만큼 삭히기의 명수가 어디 있을까. 오차숙은 그 나무를 보는 순간 ‘저거로구나’ 하고 쾌재를 부른다. 바람의 통증, 구름의 통증까지도 감내하며 세상을 응시하기도 하고, 천년나무가 되어 환상을 보기도 한다.
초록빛 들판에서 금지된 것과 뒹굴고 있는 들짐승도 보고, 군화 짝 같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붉은 정열도 보고, 문어발 같은 꼬리를 하늘과 땅 사이에 휘두르고 있는 모습도 본다.
공해로 뒤덮인 도심에 천년된 멍석을 깔고 앉아 보는 것은 그냥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도 어찌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냄새가 역겨워도 피할 수 없는 세상 앞에서 오직 감내하며 삭힐 수밖에 없다.
오차숙은 사는 것 자체가 이런 ‘삭히기’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느냐고, 보고도 모르겠느냐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풀어내려 한다.
오차숙은 두 갈래의 길을 보았다. 전혜린이나 루살로메 같은 여자가 되거나 이름 없는 수녀나 비구니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그는 택할 수가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갈등하고 그래서 목말라 하고 그래서 더욱 견딜 수 없어 했다. 차라리 구명조끼를 벗어버리고 싶다 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면‘세상의 현란함과는 인연을 끊고, 투명한 시냇물에 자신을 투영하며 맑고 또 맑게 흐르고 싶다’라는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영혼의 고향을 찾아 미친 듯이 줄행랑을 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더욱 애가 탄다. 그의 마음은 정훈희의 노래 ‘무인도’ 가사와 너무나 닮았다.
파도여슬퍼말아라
파도여춤을추어라
끝없는몸부림에파도여파도여서러워마라
솟아라태양아어둠을헤치고찬란한고독을노래하라
빛나라별들아캄캄한밤에도영원한침묵을비춰다오
불어라바람아
드높아라파도여파도여...
<무인도(無人島), 그 섬에는 파도가> 중
정말 그러고 싶다. 그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에서 사랑의 한 모습을 본다. 김우진과 윤심덕, 그들은 사랑을 이룬 것일까, 잃은 것일까. 그래서 오차숙은 여기에 ‘무인도’를 설정한다. 방황하던 영혼들이 떠다니다가 안식할 수 있는 무인도, 무인도 그 자체가 삶의 뿌리라고 생각하며 그 냄새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랑-빛과 사랑-죽음에의 찬미-무인도라는 오차숙이 숭배하는 삶과 죽음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그는 죽음의 숭배자나 예찬론자인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또 새로운 상상과 열망으로 바쁘다. 끊이지 않는 욕망에의 분출이요 표출이다. 그게 오차숙이다. 그는 심지어 후생(後生)까지도 욕심낸다.
나 죽어
후생(後生)에서 삶을 이루게 된다면
무엇보다
이름 모를 남자와 짝을 이루게 된다면
진흙 속을 헤집으면서도 연꽃으로 환생 하거나
뙤약볕 속에서라도
생수(生水)를 기다리는 양귀비가
되겠어
<이관규천(以管窺天)> 중
그는 77일간의 혼례여행도 하겠다는데 야생화 족두리의 새색시, 아이보리색 모시저고리, 감물 색 열두 폭 치마에 맨발로 바닷가를 돌며 감물 색 바지 적삼을 입은 이름 모를 남자가 자신의 유두에 입맞춤을 퍼붓도록 하겠단다. 그래서 막혔던 오감(五感)과 혈관이 펑 뚫어지게 하겠단다.
현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후생에서라도 자유롭고 싶어 할까. 하지만 그것은 결코 현실에 대한 원망이나 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는 그의 ‘끼’다. 오히려 그의 문학적 삶을 옹골지게 만들었던 시발점이기도 하다. 삶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수많은 생각들, 곧 범상하게 생각하고 넘겨버릴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뜨거움이 그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는 삶도 뜨겁게 문학도 뜨겁게 하고 싶어한다. 그걸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갈망한다. 그래서 전혜린이 부럽고 루살로메가 부러운 것이다. 김우진이 부럽고 윤심덕이 부러운 것이다. 그도 그럴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러지 못 하게 하는 그 무엇이 그를 더욱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한다.
오차숙은 성(性)에세이집을 상재한 바 있다. 그만큼 성에 대한 생각이 깊고 지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을 응시하는 감성이 예민하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그만큼 평범하지 않다. 보통사람들이 보는 것 이상의 특별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에겐 아방가르드 수필이 가능하다. 단순한 실험적 수필, 정형화된 경계를 넘는 수필만으로가 아니라 오차숙이란 인간 안에 잠재된 용암 같은 꿈틀거림들이 잠시도 그를 가만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그는 행복할 수도 있지만 불행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늘 편히 잠이 들 수 없다. 날카롭게,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라는 이중적 눈과 가슴으로 살아간다.
그의 수필들은 너무 독특하여 때론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수필엔 그만의 슬픔의 색깔과 냄새가 너무 짙게 풍겨난다.
차마 가만히 바라볼 수가 없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의 그런 가슴을 무엇으로 진정시켜 줄 수 있을까. 가만있지 못하는 그의 가슴은 너무 비어 있어 더 잘 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신기(神氣)를 품고 사는 작가, 그래서 그의 수필을 읽는 사람들은 새로움으로 생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작가 스스로는 진이 빠져 잠시도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도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의 수필들이, 새롭게 길을 여는 발자국 소리로는 너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가는 길에 함께 하는 발걸음이 너무 적어서일까.
그래서 더욱 오차숙이 나아가는 그 걸음이 장하고 아름답다.
외로워 보이지만 알게 모르게 그를 따르는 발걸음들이 많을 게다. 해서 그에겐 너무 힘들어 미안하지만 더욱 기대를 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열정, 그의 능력, 그의 수필적 삶을 알고 믿기에 2010년 출간한 아방가르드 에세이「음음음음 음음음」도 우리 수필문학 발전에 더욱 큰 의미로 새겨지길 바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최원현(崔元賢)
수필가 · 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사)한국수필가협회 연수원장, 한국수필문학진흥회·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강남문인협회 부회장,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수필분과회장,『수필세계』『좋은문학』『건강과 생명』편집위원.
허균문학상(1997)· 서울문예상(1998)· 한국수필문학상(2002)· 동포(東圃)문학상 대상(2005)· 현대수필문학상(2005) 수상.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외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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