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일기(山城日記)
▣ 작품 내용
십칠 일에 상감께서 남대문에서 殿座(전좌 : 임금이 옥좌에 나와
앉음)하시고 애통교(애통한 교서)를 나리오시니, 뜰에 가득한 제신(여러신하들)이 아니 울 니 업더라.(아니 우는 사람이 없더라)
▶ 17일 임금의 애통한 교서 하교
십팔 일의 북문 대쟝(북문대장) 원두표가 적군을 비로소 자못(자문받아로
해석하거나, 생각보다 매우) 바다 나가(맞아 나가, 밟아 나가) 싸워 도적 여섯을 죽이니라 . 성중 창고의 쌀과 피 잡곡 합하야
겨우 일만육천여 석이 이시니(있으니), 군병 만인의 일삭(한 달) 냥식(양식)은 되더라. 소곰, 장, 조, 면화, 병장기
집물(什物 : 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기구)가 다 이서(李曙 : 병자호란 때 장군)가 장만하여 둔 것을 쓰니 이서장군의 재주를
일�더라(칭송하더라) ▶ 18일 원두표와 이서의 활약(청군을 죽임)
십구 일의 남문 대쟝(남문대장) 구굉(具宏)이
발군하여(군사를 내어) 싸워 도적 이십 명을 죽이다. 대풍(大風)하고, 비 오려 하더니 김청음을 명하여 성황신께 제(祭)를
지내니, 바람이 즉시 그치고 비 아니 오더라. ▶ 19일 구굉의 활약(성황신에 제사)
이십 일의 마장(馬將 : 청나라 장수 마부대를 가리킴)이 통사(通使 : 통역관) 정명수를 보내어 화친하기를 언약하므로, 셩문(城門)을 여지 아니하고 성 위에서 말을 전하게 하다. ▶ 20일 적의 화친 언약
이십이 일의 어영 별장 이기축(병자호란 때 어영 별장을 지냄)이 군을 거느려 적을 여라믄(십여 명)을 죽이고, 동문 대장
신경진(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운 장수)이 또 발군하여(군사를 내어) 도적을 죽이다. ▶ 21일 이기축, 신경진의 발군
이십이 일의 또 마부대 통사 정수명(병자호란 때 용골대, 마부대의 통역으로 온갖 만행을 저지른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이제는
동궁(東宮 : 소현세자)을 청하지 않으니, 만일 왕자 대신을 보내면 정하여 화친하자 하므로 상감이 오히려 허락하지 아니하시도다.
북문 어영군이 도적 여라문(십여 명)을 죽이고, 신경진이 또 설흔아믄을 죽이다. 상감께서 내정(궁궐안)에서 호군(음식을 베풀어
군사를 위로함)하시다. ▶ 22일 마부대의 화친 요청, 왕이 허락하지 않음
이십삼 일의 동·서·남문의 영문(營門)에서 군사를 내고, 상감께서 북문에서 싸움을 독촉하시다. ▶ 23일 북문에서의 왕의 독전
이십삼 일의 대우(큰비)가 내리니, 성첩(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지킨 군사를 다 적시고 얼어 죽은 사람이 많으니, 상감께서 세자로 더불어 뜰 가운데 서서 하늘께 빌어 가로사되
"금일 이에 이르기에는 우리 부자가 득죄하미니, 일성 군민(一城軍民 : 온 성 안의 군사와 백성)이 무슨 죄있겠습니까. 천도(天道)가 우리 부자에게 화를 내리시고 원하옵건데 만민을 살려주옵소서."
군신들이 들어가시기를 청하되 허락치 아니하시더니, 미구(오래지 않음)에 비 그치고, 일기 차지 아니하니 성중인(城中人)이 감읍(感泣)하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 24일 성을 지키던 군사가 얼어 죽음, 임금의 기원
<본문 요지> 청군과 산성에서의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는 중 적의 화친 제의가 있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싸움을 계속하다가 큰 비에 의해 희생자가 많았다.
'산성일기' 전체의 구성
병자호란 당시의 전쟁 체험을 한글로 기록한 내간체인 일기인 '산성일기'는 도입부와 중심부 및 종결부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도입부에서는 청 태조 누루하치가 명나라로부터 용호 장군(용호장군)의 이름을 얻는데서 시작하여 47년간의 일을 짤막하게
설명하였다. 중심부는 병자년(병자년), 곧 1636년 12월 12일부터의 전쟁에서부터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 임금이
세자와 함께 청의(靑衣)를 입고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48일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종결부는 그 이후 3년간의 일을 짧게 요약한 것이다.
▣ 감상 길라잡이
<1>
'산성일기'의 작가는 문장에도 매우 능하여 상기한 역사적 사실을 발단에서 전개, 위기를 거쳐 대단원에 이르는 하나의 단편처럼
기술하고 있다. 처음에는 누르하치와 홍타시에 관한 풍자적이고 완만한 필법에서 시작하여, 점점 논조가 강해져서 양국을 오가는 감정이
상대적으로 시소를 이루다가, 30일의 출성이 고비를 이루면서 차츰 기울어진다. 이처럼 50여일의 긴 시간적 경과가 마치 한 숨을
몰아쉬는 듯한 긴박감으로 연결되어 있어 독자로 하여금 굴욕적 망국의 역사적 사실 앞에 울분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결국
'산성일기'는 역사적 사실의 날줄에 작가의 병자호란을 보는 심리적 의도의 씨줄을 먹여 자아 낸 한 폭의 피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역사적 가치보다는, 작품을 통한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시대적 상황 의식이 우려한 필체로 박진감 있게 표현되고 있어
문학적 가치를 더욱 높게 살만한 작품이다.
<2>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하여
산성을 지키는 비참했던 모습(難中之難 :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움)을 당시 수행했던 어느 궁인이 수기한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 부분은 인조 14년 음력 12월 17일에서 24일까지의 기록이다. 전란의 현장을 기록한 이 작품은, 당시의 여러
사정을 알려주는 사료적 가치와 함께 사건을 간결하면서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기록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이 부분은 풍전 등화와 같은 사직을 지키려는 임금의 결연한 의지가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소규모의 전투와 함께 적군이
화의를 청해 왔으나 응하지 않았음을 서술하고 있고, 치욕적인 외교의 일면이 생생하게 객관적으로 기록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일까지도 상세히 씌어 있어 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녔다. 궁체본(宮體本)과 해서체본(楷書體本)의 두 가지가 있으며,
강한영(姜漢永)의 교주(校註)가 《현대문학》(1958년 10월호, 59년 2·3·5·6월호)에 발표되었다.
▣ 핵심사항
▶ 작가 : 어느 궁녀
▶ 연대 : 병자호란 이후(인조15년(1637)로 추정)
▶ 갈래 : 한글 수필, 일기, 궁중 수필, 일기체 수필
▶ 문체 : 서사적 일기체. 산문체. 내간체
▶ 주제 : 산성에 포위된 병자호란의 치욕. 병자호란의 치욕과 남한 산성에서의 항쟁
▶ 출전 : 필사본 산성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