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진포 위치 및 배후
화진포는 행정구역상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草島里)와 죽정리(竹亭里) 그리고 거진읍 화포리(花浦里)와 원당리(源塘里) 4개의 마을에 걸쳐있다. 지리적으로 동경 128°25′30″에서 128°27′0″까지, 북위 38°27′에서 38°29′에 위치하고 있으며, 둘레는 약 16㎞, 총면적 약 1.697㎢에 달하는 넓은 호수로, 그 주위로는 울창한 송림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 있다. 1973년 7월 10일 개장된 화진포 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해수가 맑으며 새하얀 백사장이 수천 년 동안 조개껍질과 바위가 부서져 만들어진 명사(鳴沙)를 이루고 있다.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최대 규모의 석호이며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이곳은 고성군에서 자랑하는 산과 바다, 호수가 어우러진 관광명소 중에 하나이다.
고문서에 나타난 화진포 호수의 금구도(金龜島/우측)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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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화진포는 바닷물과 민물이 교류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이 일대에서 용출하는 자연수는 맛이 좋아 상수도시설이 필요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염담호수(鹽淡湖水)적 자연조건으로 인하여 숭어, 연어, 도미, 잉어, 붕어, 장어, 빙어 등의 갖가지 어족이 서식하고 있고 수면이 맑기 때문에 철새들의 서식처이자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이처럼 관광지로서 손색없는 소지와 여건을 풍부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이나 지리지(地理誌)에 빠짐없이 언급되어 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등 외국인의 별장지로, 해방 후 북한 치하에는 김일성(화진포의 성)이 쓰던 별장이 아직도 남아 있고, 자유당 때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이기붕(李起鵬)의 휴양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선사시대 유적·유물과 근대문화재 시설로 즐비한 화진포 일대에는 1970년대부터 가을과 겨울 철새들(고니, 청둥오리 등)이 떼 지어 날아와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그리하여 1971년 12월 16일에는 겨울철새인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 서식처로서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호수주변에 경치가 워낙 뛰어나 예로부터 풍림(楓林), 취연(炊煙), 정각(亭閣), 귀범(歸帆), 낙안(落雁), 해당(海棠), 치수(治水), 농파(弄波) 등의 화진 팔경이 유명하였다. 그리고 호수 일원에는 금강송(金剛松)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고성군의 군화(郡花)인 해당화(海棠花)가 집단 서식하고 있다. 화진포에서 바다 가운데 약 500m 해상에는 1,000여 평 면적의 금구도(金龜島)18)라는 마치 거북이가 남쪽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모습의 섬이 있다. 이곳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誌)〉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신라시대 수군 기지로 해안을 지키던 흔적인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그리고 대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는 섬의 중심부에서 와편과 주춧돌이 1997년 4월 문화재연구소 학술조사반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후 2008년 10월에는 고성군에서 금구도의 고고·역사와 전승설화 학술용역보고서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항간에 전해지는 광개토왕릉과의 상관성에 대한 역사적 실제 뿐 아니라 금구도 성지의 성격(축성 현황과 구조, 축성시기 및 배경, 축성목적 등)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학술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금구도와 관련된 문헌자료와 구전자료를 최대한 수집을 하였고, 본격적인 현장조사와 함께 2달간에 마무리가 되면서 새롭게 확인된 건물지 및 우물지, 고려시대 청자 유물 등의 다양한 고고자료와 조선시대 문헌자료, 수집된 구전자료들은 광개토왕릉과의 관련설에 대한 역사적 실체 및 금구도성지의 정확한 성격을 규명하고 이해하는데 소중한 기초자료를 마련하는 기틀이 되었다.
3. 화포리 지명유래
화포리는 동쪽에 거진1리와 동해를 접하고 있고 서쪽에는 송정리(松亭里)와 원당리(源塘里), 남쪽에는 봉평리(蓬坪里)가 각각 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간성군 오현면(梧縣面) 지역이다. 화진포(花津浦)가 있으므로 화포(花浦)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차동(次洞), 장평(長坪)을 병합하여 화포리라 하였다. 그 뒤 1942년 거진면(巨津面)에 편입되었다. 마을 지형은 작은 산들에 의해 둘러싸여져 있는데 동쪽에는 응봉산이 있고 서쪽에는 나무하는 것이 다 보인다는 순산(만포산)이 있다. 중앙에는 봄이 되면 뻐꾹새가 제일 처음 운다는 법국산이 있고, 돌이 많이 있다는 각담산이 있다. 옛날 예국(濊國)의 땅으로 그 시대 당시 화포리 동쪽의 높은 산이 마치 매가 앉아 있는 형상과 같다하여 응봉(鷹峰)이라고 불렀다. 응봉 앞에는 마을의 형상이 작은 새가 응봉을 향해 나는 형상과 같아 응추촌(鷹雛村)이라고 불렀다. 그 후 ‘매(鷹)’을 ‘학(鶴)’으로 바꾸어 학포(鶴浦)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려시대부터 다섯 고을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용이 앉았다하여-발용골 ㉡소가 등에 얹은 삼정을 벗어 놓았다하여-삼정골 ㉢모시나무가 많이 있다하여-모시골 ㉣곰이 끊어 앉은 것같다하여-능골 ㉤산이 꽃처럼 생겼다하여-화상골이라 하였다. 이 다섯 골이 합하여 오현(梧峴)이라 불리어 왔는데 한 도사가 이 마을 지나다가 “나비가 동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참 좋다”고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한 노인이 나비가 있으면 꽃이 있어야 되는데 무엇이 좋으냐고 물으니 “화진포 주변에는 갈꽃도 많다”고 이야기 하며 ‘화(花)’에 ‘포(浦)’를 써서 나비는 꽃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지금의 화포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화포 마을의 성씨로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는 노씨(盧氏)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약 600년 전 고려말엽에 울진(蔚珍)임씨가 정착하였고 그 후 파평(坡平)윤씨, 강릉(江陵)최씨, 평창(平昌)이씨, 동래(東萊)정씨, 봉화(奉化)정씨, 김해(金海)김씨, 정선(旌善)전씨, 안동(安東)장씨 등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현재는 윤씨(尹氏)가 가장 많다. 관찬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따르면 열산현(烈山縣)에 기록된 성씨를 엿볼 수 있는데 성씨로는 열산(烈山)이 본관인 최(崔)·마(麻)·황보(皇甫)가 있었으며 정선(旌善)이 본관인 김(金)·전(全)이 있었다. 그리고 평해(平海)가 본관인 손(孫)이 있고, 보성(甫城)이 본관인 박(朴)과 울진(蔚珍)임(林)씨가 있다. 몇 개의 자연마을이 합쳐져 한 개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화포리는 본 마을과 차골(次洞), 장평(長坪) 이외에 고진동, 반용동, 삼정동, 월평동, 묘시, 용동, 만포동, 방화고동, 화산동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