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조사한 것은 고려의 3대 대첩으로 불리는 진포대첩과 그 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무기를 제조한 최무선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진포(鎭浦)라는 지명에 대해서 알아보면은 충청남도 서천군 남쪽에 있었던 해포(海浦)
로 금강 내륙수로의 하류지역에 해당되며, 어느 한 특정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은 아니었고, 임천 (林川)고다진(古多津)에서 서천포(舒川浦)에 이르는 지역을 통칭하는 것이다.따라서, 금강 하류지역에 위치하였던 나루는 모두 진포를 건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조선 시대에는 조운 제도가 발달하였을때 이 수로로 많은 세금을 운반하였다.하지만 조선말에 호남선의 개통과 육로 교통의 발달로 그 기능 또한 잃어버렸다. 진포는 어느 한 곳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넓게 금강의 하류을 지칭하므로 그때 당시의 전투 또한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 그 전투를 이길 수 있는 화약을 제조한 최무선에 대해 알아보면은
최무선(崔茂宣) 1325(충숙왕 12)~1395(태조4)까지 살았던 인물로 두 왕조를 거쳤다.그는 고려말의 무기 발명가이고 본관은 영주(지금의 영천)이다. 광흥창사 동순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제작하고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서 화약과 총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연구를 해본 결과 화약을 만드는 데는 3가지 재료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초석, 유황, 분탄이었다. 그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가 있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서 그때 당시 화약을 먼저 사용하고 있었던 중국으로 가서 배우기로 하구서 중국상인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인들 중에서 초석(염초)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던 중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나게 되었다. 후한 대접 등 그의 정성과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감동시켜 흙으로부터 추출하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간단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실험하여 성공을 하구 화통도감의 설치를 몇 번의 건의 끝에 허락을 받아서 우리나라에서의 화약과 화약무기의 본격적인 연구를 1377년 10월부터 시작하였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는 모두 18가지가 있다. 이 18가지 화기를 가지고서 1380년(우왕6)에 왜구가 50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 왔을 때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완전 무장한 군함을 가지고서 나아가 싸워서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고려에서는 지문하부사라는 벼슬까지 올랐으며 조선초에는 나이가 많아서 등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나라에서는 그의 공적을 생각해 의정부우정승, 영성부원군을 추증하였다. 아들 해산(海山)과 손자 공손(功孫)도 화약과 화기 연구에 참여 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화약수련법>을 남겼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이상으로 진포대첩과 최무선에 대해서 몇자 글을 써보았다. 진포 대첩을 구체적으로 모르지만은 왜구를 크게 무찌른 것은 확실하다. 그이유는그때 당시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으며 그 중에서도 이 진포라는 곳은 지금의 금강하류로 금강을 주변으로는 많은 곡창지대가 있다. 그럼으로 왜구는 500여척이라는 대 함대를 이끌고서 노략질을 하려고 하였으나 최무선이라는 인물 때문에 실패하구 돌아갔을 것이다.
참고: 우리나라는 최무선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화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그때 당시에는 중국과 우리나라만이 만들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유리하게 작용을 할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임진왜란이 일어 났을 때 우리는 어처구니 없이 일본군에게 깨졌다. 그 이유는 조선 시대에도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고 발전을 시켰다. 하지만 나중에 세조가 왕이 되면서 화약무기는 언제고 자신의 왕자리를 위험하게 한다구 해서 화약을 무기를 더이상 만들지를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로 우리는 화약을 먼저 만들고서도 발전을 시키지 못해서 일본에게 졌다. 또한 조선말에 외국의 함대가 쳐들어 왔을 때에도 우리는 어의가 없이 깨졌다. 그 때 당시의 외국 함대의 함장이 말하기를 조선의 병사들은 온갖무기를 우리의 배를 향해 쏘고 발포를 하지만 우리배 근처도 오지도 못하구 다 바다에 빠진다고 했다. 이처럼 어떠한 인물은 나라를 위해서 화약을 만들었고, 다른 인물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화약을 포기 했다. 과연 어떠한 것이 옳은 것이었는 지 우리가 판단해야하는 숙제다.
참고자료:한곡민족문화대백과사전,7차 교육과정의 국사 교과서,네이버등
첫댓글 진포는 웅포라고 합니다.
호남평야의 세곡들이 모인 창고가 성당창입니다.
성당창이 있던 곳이 웅포입니다.
이치로 미루어 보면 군산은 근대에 발전한 곳이고
고려나 조선은 배가 작았을 것이고
무거운 곡식을 멀리 나르려면 배가 필요로 했고
삼부자집이 있는 호남의 곡창 쌀이
웅포에 집결되어 실려 나갔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세곡을 지키기 위한 사람이 필요했고
웅포의 덕양정에서 군사들이 궁술을 훈련하였으며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왕사가 있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