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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비산 공동체의 총괄기획자 조희부 선생.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그리고 정보화사회로의 전환 등
한국사회의 압축성장은 작은 공동체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고 말한다.
1945년 식민지 압제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은 전쟁이란 미증유의 시련까지 맞이했다. 조금 남아 있던 산업시설은 파괴되고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특히 농촌의 고통은 심각했다. 가뭄, 홍수로 인한 만성 기근에 시달렸으며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공급은 절대부족이었다. 그런데다 농촌의 젊은층은 일자리가 없이 일용직 노동을 하거나 도시빈민으로 살아가야 했다.
먹고 살아야겠다는 본능, 나아가 잘 살아보겠다는 한국인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해방이후 체험하게된 미국으로 상징되는 서구의 풍요로움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단체이며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인 내륙지역 충청북도. 그곳에서도 가장 오지인 괴산군 소수면 눈비산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8년 미국 메리놀 선교회에서 파견한 신부들이 괴산가축조합과 시범목장을 조성했다. 1974년 한우 육우, 현물 대부, 송아지 계약 생산 등 농민지원사업을 벌이고, 농민교육원을 건립해 축산기술과 협동조합 교육을 했다. 유기농업과 유정란 생산을 시작했다. 마을 뒷산인 눈비산(雪雨山, 높이 546m) 아래 펼쳐진 25만평에는 임야와 초지, 밭, 양계장, 과자공장, 버섯재배장 등 다양한 시설들이 있다. 닭 사육장은 빼곡한 공간에서 공장직으로 닭을 생산하는 일반적인 양계장과 확연히 다르다. 널찍한 공간에 통풍을 원활하게 하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주어 늘 쾌적하다. 바닥엔 볏짚을 깔아 배설물과 함께 자연 발효가 되니까 냄새가 안 난다. 넓은 공간에서 암탉과 수탉이 조화를 이루어 지내며 낳은 유정란이 대부분. 날로 먹어도 비린내가 안 나고 고소한 맛이 나며, 노른자 색깔이 선명하고 탄력이 좋다. 1만여 마리의 산란계가 하루 8천~9천개의 달걀을 낳는다. 생산된 달걀은 친환경 유기농식품 매장으로 전량 팔려 나간다. 댤걀을 원료로 만든 과자 또한 만드는 족족 판매된다. 또한 이곳에서 농사를 배우려는 지원자들은 넘쳐나 엄격히 심사를 해야할 지경이다. 생활에는 활력과 의욕이 넘쳐난다. 이렇듯 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의 농촌은 빈곤과 저개발에서 풍요와 고효율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조희부(曺喜夫, 66) 선생은 눈비산공동체의 초창기에서 오늘날까지 현장에서 땀을 흘려왔다. 소위 부산지역의 명문고 경남고등학교, 한국 권력의 핵심들을 배출해온 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는 젊은날 이런저런 인생의 편력끝에 농촌을 선택했다. 올해는 20대에 뛰어든지 만 40년이 되는 해다. 그를 만나 질풍과 노도의 시기를 연상케 하는 농촌의 변화과정, 미래의 모습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작은 농촌마을의 오늘날은 과거 우리 사회가 겪은 빈곤, 잘 살기 위한 노력, 성취와 성장통이란 축소판을 담고 있기도 하다.
▲ 눈비산 공동체의 닭사육시설. 눈비산(맨 뒤에 있는 산) 아래 25만 평의 임야에 자리잡았다.
- 지난 4월 원불교 100주년 세미나에서 생명의 대전환이란 주제로 패널로 나섰다. 21세기에 어떤 전환을 맞이했다는 건가?
우선 여기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이, 기후변화가 심각해서 모든 생명체가 생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만 봐도 엄청나게 덥고 비는 안 오고, 장마도 거의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고... 이건 농사뿐만 아니라 생명계 전체가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큰 변화가 없으면 안 된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다가는 인류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위기를 맞는다는 것은 이미 1970년 로마클럽 보고서에도 이미 나온 얘기 아니겠나. 이론, 담론 차원을 넘어 크게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되는 데까지는 해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 지난 1989년 "인류가 자유, 평등, 진보의 깃발 아래 피와 땀을 흘리면서 이룩해온 오늘날의 문명 세계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준 반면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고 나아가서 인류의 생존 기반이 되는 지구의 생태적 질서를 훼손시키고 파괴하고 있다….”고 한살림선언이 이뤄졌다. 얻은 것과 앞으로의 현안들은?
1986년 한살림이 시작됐으니, 올해가 한살림 설립 30주년이다. 농민들 수는 계속 줄고 농민들 힘만으로는 우리나라 농업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으로 도시 소비자들과 연대해야겠다, 이것이 한살림의 시작이었다. 도시 분들에게는 또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을 공급하는 거고.
그래서 일본의 사례들을 조사하기도 하고, 이곳 괴산 지역의 농산물도 한살림에 보급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실패한 야마기시 양계 농법을 이곳에서 시도하기도 하고... 그렇게 한살림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그 동안의 성과라면 국내에서 안전한 농산물, 농약이나 비료를 덜 쓰는 농산물을 많이 생산하고 보급을 확대한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일반 국민이 농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한살림의 도시 조직은 협동조합이기 때문에, 한국에 소비자협동조합을 개척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참여조합에 실질적인 조합원의 참여도가 낮다. 조합원은 스스로 참여도 하고 돈도 대고 의사 결정도 해야 하지만, 대부분은 보통 구매자에 머물러 있어 이런 부분을 개선해야 할 것 같다. 경제가 어려워 한살림에도 영향이 조금 있고...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단계에 와 있다.
▲ 조희부 선생은 눈비산 공동체의 오늘날이 있기까지 농촌의 빈곤, 미국 선교회의 지원,
동서양의 공동체영농방식, 잘살려는 노력 등 수많은 여건들이 얽히고 설키며 대응을 하며 살아왔다고 털어놓았다.
- 눈비산 공동체는 어떻게 시작됐나?
눈비산 공동체는 미국 매리놀 선교회의 클라이드 데이비스 신부의 주도로 이뤄졌다. 가난하고 굶주린 농민들을 본 데이비스 신부는 '육우'를 도입하기로 했다. 일단 소를 키우면 청년들이 배우도록 해야 하는데 체계적, 조직적으로 그 과정이 이뤄지려면 마을에 협동조합을 만들고 소나 자금은 협동조합에서 지원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신용협동조합은 저리로 영농자금을 빌려줘 당시 고리대에 시달렸던 농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우리나라 소는 전부 '역우(役牛)', 즉 농사짓는 소라 잡아 먹는단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얼룩덜룩한 미국 소를 데려와서 육우로 키웠다. 한국 축산 발전에 나올텐데, 이 외국소를 또 한우와 품종 교배를 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육우는 당시 서울 시청 앞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시식회도 하고 그랬다. 판매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서양의 신부들이 와서 축산업을 보급한 곳은 이곳 말고도 임실(지정환 신부), 제주도(이시돌 목장) 등이 있다. 이 곳들은 훨씬 대규모다. 데이비스 신부는 큰 목장을 만들려 했다기 보다는 농가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범적으로 소는 이렇게 키운다, 하고 보여주는 개념이었다.
그 후 한일회담이 열리고 일본 자금을 받아 급격한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젊은 사람들은 공장으로 빠져나갔고 일손이 부족하니까 농기계가 들어왔고, 한우는 일소에서 고기소로 바뀌었고, 당시 소를 키우던 조직이나 지원조직은 한살림 육가공 공장이 됐고... 50년동안 압축성장이라고 엄청나게 바뀌었지.
▲ 눈비산 공동체의 닭 사육시설 내부. 널널한 공간에서 땅을 밟고 암수가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 양계방식은 일본의 야마기시 공동체의 영향을 받았는데 농장운영 방식은 전혀 다르다.
일본 야마기시(山岸)농장은 공동체 형식으로 따지면 여러 가지 형식이 있는데, 키부츠식이라고 한다. 이건 개인 사유가 없다. 생산도 소비도 개인적인 게 전혀 없다. 몫을 나눈다는 것이 없다. 같이 나눠 쓰는 거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샤브식이라는 게 있는데 생산은 같이하고 소비는 개인적으로 한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야마기시는 키부츠식이다.
야마기시 미요조(山岸巳代藏·1901~61)선생은 양명학 계통이다. 지행합일주의다.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실천이 중요하다 이거지. 일본의 여러가지 이런 공동주의 사상, 농업도 중시하고 등등. 대단한 사상가다. 야마기시 어록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했는데, 대중화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세계적으로 공동체, 공동으로 사는 건 수도원이나.... 농업공동체같은 건 미국 아미쉬 공동체 등이 남아있고.... 그리고 아주 원시적으로 사는 공동체 몇 군데가 남아있고... 그렇지만 거의 없어졌다. 인간이 무엇인가, 생명체란 무엇인가 이런 여러가지... 진화의 과정을 보면... 연구를 많이 해야 하고... 국가가 혁명을 통해 시도한 경우도 많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게 실패한 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잘 맞지 않으면 지속이 어렵게 되는 것 같다. 일본 내에서 야마기시 공동체도 또 잘 되지 않았고. 개인의 자유 선택을 철저히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의 공유가 아닌 모든 것을 공유한다. 처음에는 동의할지 몰라도 나가는 사람에게는 그 동안의 기여분에 대한 지급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이비 집단으로 보이는 거고.
개인의 자유,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어떻게 공유하고 협동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참 어려운 문제다.. 석가모니든 예수든 누구든, 삶이란 것에 고민을 많이 해보고, 고민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이 내놓은 생각에 귀를 기울여 가면서, 열심히 하되 거기에 집착하거나 매달리거나 빠지지 않고, 항상 한 발짝 떠나 자기 자신을 잘 살펴보고, 남 따라 세상을 살 것은 없고... 자기가 자신감을 가지면 사람들의 눈초리라든가 이런 것은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 요즘으로 말하면 최상의 스펙인데 시험 공부해서 편하게 사는 삶도 있었을 텐데 굳이 낯설고 물선 이곳에서 머문 계기는?
직접 사회에 나와 공부한 것을 실천해보려고 하니 마땅치가 않았다. 일단 내가 있었던 학교 서클이 노동운동 쪽이라 노동조합에 가려고 하다, 그러나 한 선배를 통해 농민운동을 접하고 소개를 받아 1976년 이곳으로 오게 됐다. 당시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어떤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온 건 아니었다.
가족들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으니 다 된 것처럼 생각했다. 언제든 빨리 사법시험을 보고... 나도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고. 그런데 어쩌다 보니 선배들한테 이끌려서... 고시 공부를 하고 그럴 때가 아니더라. 가족한테 우리도 힘들지만 우리보다 힘든 사람들이 많다, 다 같이 나아져야 한다, 이렇게 설득을 했지. 다른 건 후회되는 게 없는데 돌아가신 부모님께 죄송한 게 많다.
- 친환경농업의 장점은 분명 있다. 질도 좋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텐데.
많은 사람들이 다 이용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고 농업과 자연환경, 인류의 삶과 자연과의 관계, 이런 차원에서 가격에 관계없이 이런 농사와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지금 기후변화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데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가격을 매기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 공급하고, 물품을 대 주고 또 필요한 만큼 돈을 내는 이런 실험도 해 보려고 한다. 자급자족의 취지에서.
- 선생의 자급자족 주장은 맹자의 항산(恒産), 항심(恒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맹자는 자급자족을 주장한 게 아니라 분업을 강조했다. 그 당시도 제자백가중 농가(農家)가 있다. 이들은 스스로 농사짓고 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가의 지도자 허행(許行, heohaeng)에 대해 맹자가 비판했다. 허행의 모자(冠)을 보고 직접 만들었냐고 반문했다. 곡식과 바꿔 구매한 거라고 하자 왜 자기손으로 짜지 않냐고 반문했다. 농사짓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孟子 縢文公上) 공자도 제자들을 정치하는 사람들로 가르쳤다. 제자 가운데 번지(樊遲)가 논농사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하자 자신은 잘 모른다고 했다. 밭농사에 대해서도 묻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는 소인배라고 개탄했던 일화도 있다. 우리는 농사를 해서 자급자족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두드러져 보인 거라고 생각한다.
▲ 달걀 선별시설 내부. 섭씨 16도를 유지하며 중량, 신선도, 파손여부 등을 엄격히 적용하여 골라낸다.
▲ 선별과정을 거쳐 상품화된 유정란.
▲ 과자공장에서 달걀을 원료로 과자를 만드는 모습.
▲ 유정란과 과자 등 생산된 제품들은 유기농업제품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 눈비산 공동체의 농업연수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눈비산 농장에서는 1968년 설립 당시부터 농업기술교육을 실시해왔다. 교육은 1년 단위로 진행되며 농사철의 경우 한 달에 한 번, 주말 1박2일 교육이 일반적이다. 정부에서는 연수생 1인당 60~80만원 가량을 지원하는데, 지원자가 많아 심사를 거쳐 가장 절실하고 농사지을 의사가 강한 사람, 그리고 젊은 사람을 우선 선발한다.
한국에 연수를 받으러 온 외국 공무원들이나 농업인들도 현장학습이나 실습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최근에는 영국출신 청년이 남미에서 한국여성을 알게 돼 그걸 계기로 이곳에 찾아오는 등 연수생들의 국적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교육생과 공동체 일원들의 식탁을 책임지기도 하는 텃밭에서 옥수수, 딸기, 고추, 가지, 상추 등의 재배 실습을 한다. 이 곳에서 교육생들은 기계나 비닐 등을 전혀 쓰지 않고 호미, 삽 등만을 이용해 농사짓는 법을 배운다. 교육과정에는 이 밖에도 집 짓기, 길쌈 견학 등이 포함돼 있다.
- 귀농현상도 늘어나지만 도시와 농촌의 문화차이로 인한 갈등도 적잖다. 문화격차를 줄이는 방법이 있다면.
이곳 괴산 지역만 해도 젊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농사지으러 온 사람들도 있고 은퇴해서 온 사람들도 있고, 요즘 귀촌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마을에는 심지어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 더 많기도 하고. 그 중에 여러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많다. 러시아 문학 박사, 물리학 박사 이런 분들도 있고... 문화적 소양이 있는 분들, 소위 지식인들이 공유를 한다. 괴산에서도 이런 저런 모임을 많이 하고 있다.
▲ 눈비산 공동체의 실습생들. 한달에 1회씩하는 일반연수에서 상주하며 농업의 전과정을 익히는 심화단계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오늘날 한국사회의 물질적인 풍요는 지난 개발연대와는 비교할 수 없으나 상대적 박탈감은 심하다. 젊은 세대의 좌절감은 깊어 보인다. 기성세대로서,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안타깝다. 일자리가 없는 젊은 사람들이 와서 참여할 수 있는 농사 캠프 같은 것을 만들 생각을 하고는 있다.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순 없겠지만... 사실 이미 어느 정도 하고 있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 상대적 박탈감은 신경 안 쓰는 것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삶을 자신있게 살면 그게 가장 좋은 거지. 남이 어떻게 사는지 비교할 것 없다. 옛날에야 일 못하면 굶어죽고 그랬지만 지금이야 웬만해선 굶어 죽진 않으니까... 헬조선이니 박탈감이니 이런 건 자기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한다. 남들하고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 자연 속에서 이렇게 사는 건 돈도 안 들고 이용하는 것 아닌가. 모든 걸 돈으로 평가해서 다 할 건 없다.
대담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
정리 장여정 코리아넷 기자
사진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 가나안농군학교 제공
whan23@korea.kr
출처 : 해외문화홍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