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 寒暄堂 金宏弼)
글쓴이 朴洪植(대구한의대 문화과학대학 학장/동양철학박사)
한훤당선생서거 500주기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한훤당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문중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한훤당 김굉필선생 특집’, 이번 호에는 대구한의대(전 경산대) 문화과학대학 학장 박홍식(朴洪植) 박사(東洋哲學)의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 寒暄堂 金宏弼)’을 전재한다.
이 글은 사단법인 율곡사상 연구원에서 1999년 10월에 펴낸 ‘東國 十八賢 -生涯와 思想’ 중에 수록된 내용이다. 朴洪植 박사는 성균관대학교 유학(儒學) 학사를 거쳐 ‘조선조 후기 유학의 실학적 변용과 특성에 관한 연구’로 1994년 동대학원에서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취득했으며 현재는 대구한의대(전 경산대) 문화과학대학 학장으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東國 十八賢 外에 한국인의 유교읽기 등 韓國儒敎思想 硏究 및 東洋哲學 등 에 관한 9권의 저서와 그밖에 다수 논문 등을 발표했다
대종회는 寒暄堂 先生의 生涯와 小學精神을 널리 알리고자 寒暄堂先生관련 학술논문을 계속 수집하고 있숩니다. 寒暄堂先生 관련 글이나 학계에서 발표되는 논문 등을 소장하고 계신 분이나 그밖에 자료 등을 갖고 계신 분은 대종회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편집자주)|서흘김씨대종보 제45호(2007년5월1일)★★ |
제1절 생 애①- 출생과 수학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자는 대유(大猷)이며,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이다. 본관은 서홍(瑞興)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아버지는 유(紐)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그의 선대는 본래 황해도 서홍(瑞興) 사람인데 뒤에 증조인 참의공 중곤(中坤)이 경상도 현풍(玄風)으로 장가들어 옮겨 살았다. 곧 한훤당의 증조모는 현풍 곽씨(郭氏)이며 중조모의 친정이 현풍이기 때문에 뒤에 한훤당이 현풍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한훤당의 조부와 부친이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1454년 5월 한성부 정릉동(지금의 貞洞)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효동(孝童)이었다고 한다. 한훤당은 어린 나이인 6, 7세 때부터 결단력 있고 활달하며 영기(英氣)가 뛰어나 발양(發揚)하였는데, 어릴 때에 있었던 일화를 보면 그의 강직한 성품을 알 수 있다. 당시 그가 시가(市街)에 다니며 뛰어 놀기를 즐겼는데, 그 기상에 눌리어 다른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두려워하여 피하였으며, 장사하는 사람들 중 무례하게 조롱하고 거만스러운 자를 보면 대번에 채찍을 휘둘러 고기나 두부 등을 갈겼기 때문에 장사치까지 그가 온다는 말을 들으면 겁을 집어먹고 각기 그 물건을 감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한훤당의 기상을 사람들은 자못 특이하게 여기며 장래를 기대하였다.
한훤당은 19세 때인 1472년 경남 합천군 야료현 말곡 남교동에 사는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집에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사맹(司猛) 박부군(朴府君)의 딸이었다. 그가 장가들고 부인이 아직 시집오기 전에 조그만 서재를 박씨의 집 옆 개천 건너의 작은 바위{바위 이름은 지동(地東)이었다} 아래에 짓고 한훤당이란 당호를 붙였으니 이것이 뒤에 그의 호가 되었다. 그의 시에 “두서너 경의 연파요 몇 겹의 산이로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그는 여기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또 가야산을 왕래하며 글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무렵 한훤당은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의 집을 자주 왕래하며 학문을 익혔던 것 같다. 지지당은 점필재의 친구이자 사돈으로, 한훤당 보다 17세 위였으며 학행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한훤당은 21세 때 당시 함양 군수로 있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때 김종직은 한훤당과 같은 제자를 얻게 된 즐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로서 표현하였다.
궁백한 곳에서 무슨 다행으로 이 사람을 만났는고
주구(珠具)를 가져와서 찬란한 잔치 베풀도다
좋이 가서 다시 한이부를 찾게나
나는 쇠하고 썩어 생각하는 바를 다 가르칠 수 없다네
그대의 시 솜씨 보니 옥에서 연기를 뿜는 듯
손 맞이하는 걸상 지금 달아 맬 필요 없겠구나
은나라 반경편(盤庚篇) 가지고 어렵게 연구하지 말고
한치 맑은 천연(天淵)을 반드시 알아두게나.
그리고는 공부를 하려면 「소학(小學」공부부터 하라고 하고는,「소학」책을 손수 주며 앞날의 대성(大成)을 격려하였다. 이에 한훤당은 30세가 되도록 「소학」연구에 몰두하여,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소학」을 읽는 아이(소학동자)가 어찌 대의를 알겠느냐” 하고 한결같이 자기 몸을 닦고 다스리는데 전념하였다. 점필재의 문인이며 그의 동문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에 의하면, 그는 “독행(獨行)하기 겨룰 데 없어 평거(平居)에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고 가실(家室)외에는 일찍이 색(色)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훤당은 이렇게 「소학」에 몰두하다가 나이 30세가 된 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으며 후진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쇄소(灑掃)의 예절을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을 닦는 자가 앞뒤에 꽉 찼었다고 한다.
1480년(성종11) 27세 때 생원시에서 3등 제32위로 합격하였다. 이때에 원각사의 중이 몰래 불상을 돌려놓고 “불상이 저절로 돌아앉았다”고 선전하여 장안의 부인들이 물결처럼 몰려들었다. 대간들이 번갈아 글을 올려 죄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치 않으므로 선생이 소(疏)를 올려 그 간사한 정상을 철저히 추궁하여 시가에서 사형시킬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사회의 정화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34세 때 부친 호군공(護軍公)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죽을 먹고 슬퍼 울어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몸소 오설리(烏舌里) 보로동(甫老洞)의 언덕에 땅을 정하여 장사지내고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모든 것을 가례(家禮)의 예절대로 따랐다. 그의 이러한 지극한 효성은 향리를 감화시켰다.
36세 때 상복을 벗고는 어머님을 섬기는 데 날마다 닭이 울면 반드시 머리를 빗고 낯을 씻고 외관을 정제하여 먼저 가묘에 배례하고 다음에 어머님께 문안하고 나와 서재에 가서 흙으로 만든 소상처럼 가만히 끓어 앉아서 강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어머님게 문안하기를 예절대로 하고 밤이 깊도록 강론하다고 그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