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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정치시민넷에서 9월 24일 익산 고대문화유산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단체의 “익산의 고대문화유산 답사 및 자원 활용방안”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익산 고대문화 유산 답사는 두 차례로 진행하는데 이번은 그 첫 번째 답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시민들이 잘 알고 있는 역사유적 보다 주변에 가까이에 있지만 무심코 지나쳤거나 잘 모르고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코스로 정했습니다. 지난번 부여문화유산 답사에 이에 이번에도 답사 진행과 역사유적에 대한 설명은 부여문화재연구소 전창기 연구위원이 해주었습니다. 전창기 위원의 해설과 함께한 답사는 유적에 숨어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흥미와 재미를 더해 주었습니다.
가을날 풍경은 답사의 운치를 더해 주었습니다. 누렇게 색깔이 변해가는 들판과 하천 제방에 하얗게 피어 억새꽃, 가는 곳마다 볼 수 있는 노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나무는 일정을 잠시 멈추고 쉬어 가게 합니다. 유적이 있는 야산에서 떨어진 밤을 줍는 재미는 일행들에게 앞으로 가야할 답사일정을 잊게도 합니다.
점심은 황등시장에 있는 비빔밥집에서 하였습니다. 백종원의 3대 천왕이라는 TV방송에 나온 맛 집이라 그런지 손님이 많아 한참동안 기다리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손님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는데 멀리서 오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육회비빔밥을 먹었는데 유명해서 그런지, 허기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만족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아쉬웠던 것은 유적을 찾기도 쉽지 않고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진입로도 없고 안내판도 없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리여고에 있는 5층 석탑, 모현동에 있는 혜봉원 부도, 삼기 석불사와 태봉사는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낭산 호암리 미륵사지 앞 괴무덤, 화엄동문 암각서, 낭산 호암리 암각, 용암, 금마 구룡마을 뜬바위, 황각동 유상곡수 등은 이정표도 없어 처음 가는 사람들은 찾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익산 남중동 오층석탑
남중동 오층석탑은 이리여고 본 건물 오른쪽 끝 화단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교정과 석탑이 서로 어울리지는 않지만 긴 세월을 견디며 조용히 서있는 모습은 편안함을 준다.
이 탑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2003년 11월 5일에 익산시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절터에 있던 것을 학교 화단으로 옮겨왔다.
전체 높이는 2.74m이다. 기단부는 2매의 지대석 위에 각각의 면석과 갑석으로 이루어졌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모두 한 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층의 면석에는 도드라지게 모서리 기둥을 모각하였다. 5층 옥개석 위의 상륜부 역시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반과 양화, 타원형 수연이 표현되어 있다.
혜봉원(慧峰院) 모현동부도(募懸洞浮屠), 목조석가여래삼존상
익산역 서부진입로와 모현 현대3차 아파트 중간 정도에 혜봉원 사찰이 있다. 혜봉원을 방문했을 때 도심에 규모가 있는 사찰이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석탑, 부도, 종탑, 대웅전 등 사찰의 기본은 다 갖추고 있었다.
혜봉원은 대한불교화엄종에 속한다. 조선 인조 때의 승려 연화당을 추모하기 위하여 1894년 제자들이 건립하였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삼곤사(三坤寺)였다. 이후 폐사 지경에 이른 절을 1955년 금산사의 승려 하규호가 인수하여 절을 중창하고 자신의 법호를 따서 혜봉정사라고 개칭하였고 1956년 11월 5일 혜봉원이라 이름 지었다.
혜봉원 경내에는 전북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된 모현동부도와 전북유형문화재 제190호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존상이 보존되어 있다. 부도는 조선 인조대에 군산시 서수면 무장리 보천사 연화당 스님의 후덕을 추모하기 위해 제자들이 건립한 것이다. 한때 군산시 서수면 장군리 민가와 익산시 갈산동 민가의 정원에 옮겨졌으며, 1960년에 현 혜봉원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천사부도’라고도 한다. 부도는 높직한 기단 위해 구형의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과 상륜을 갖추고 있다.
목조석사여래삼존상은 법당인 불이정사에 모셔져 있는데 석가여래좌상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자리 잡고 있다.
황등석재
익산의 역사유적을 설명을 할 때는 돌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미륵사지 석탑, 연등리 석불, 태봉사 삼존불, 왕궁리 오층탑, 금마고도리 입석 등 익산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석재유물들은 양질의 돌이 다량 매장되어 있는 석산이 있고, 채석된 돌을 가공하는 석공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려준다. 1300년 이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을 건립한 석공기술 명인 아사달이 백제인이다.
이러한 석재문화를 있게 한 현장을 보기위해 현재 채석을 하고 있는 황등산업이라는 석산을 방문하였다. 황등산업의 석산은 전국 최초로 1858년경 청국인들이 개발하여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채석장은 황등면 소재지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한참 채석을 하고 있어 먼지도 많고 다소 위험하기도 하지만 직접 보면 익산의 석재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석산 안으로 들어갔을 때 광활하게 펼쳐진 채석현장과 돌을 떼어난 흔적은 마치 돌을 층층이 쌓아놓은 것 같아 그 모습이 경이롭다. 수직으로 깎여 내려간 암벽의 높이가 60m가 넘고, 이러한 암벽이 몇 백 미터 펼쳐져 있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익산의 석재문화는 옛날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백제지방인 지금의 황등을 중심으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 포천석과 익산의 황등석이 유명한데 포천석은 철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붉은 빛을 띠고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면 철분의 부식으로 돌이 마모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황등석은 품질면에서 월등이 우수하다고 한다.
황등시장 비빔밥
답사 중 점심식사는 황등시장에 있는 비빔밥집에서 하였다. 이집은 '백종원의 3대천왕'이라는 TV 방송에 나온 집이다. 방송에 나온 맛집이라 그런지 줄을 서야 한다. 한참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린뒤 육회비빔밥을 먹었는데 다들 만족하는 분위기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손님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멀리서 오신 사람들도 많다.
석불사
석불사는 삼기에서 낭산으로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석불사거리 근처에 있다. 이 절은 본래 대한불교화엄종에 소속된 사찰이었으나 1994년 정운이 주지로 부임한 뒤 한국불교화엄종으로 소속을 바뀌었다. 현재 한국불교화엄종의 본산이다.
이 사찰에는 보물 제45호로 지정된 백제시대의 석불좌상과 광배가 있는데 삼국시대 환조불로서 국내 최대의 것이고, 광배 또한 최대 규모이다. 창건연대는 백제무왕 7세기 전반에 미륵사지 창건에 앞서서 건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석불좌상은 백제시대에 조성된 매우 귀중한 불상이다. 높이가 156cm나 되는 거구의 여래좌상은 당당한 자세로 얇게 표현된 통견의 법의를 결과부좌한 무릎 위로 흘러 덮었다. 그리고 거대한 주형광배는 7개의 화불과 불꽃 무늬를 조각하였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백제 무왕(재위 600~641)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폐사로 남아 있던 절터에서 석불이 발굴되어 이를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미륵전을 짓고 사찰 이름을 석불사로 했으며,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 때의 기와도 많이 발굴되었다.
석불좌상은 보면 목 부위가 파손되어 이후에 붙인 자리가 있다. 석불의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은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칼로 얼굴을 내려쳤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석불좌상은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전쟁, IMF외환위기, 노무현대통령서거 때도 구슬 같은 물방울이 맺혀 흘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태봉사
석불사를 지나 낭산 쪽으로 좀 더 가다보면 왼편 야산자락에 있는 태봉사를 만날 수 있다.
태봉사는 태봉산 아래에 있다. 태봉산은 마한의 기준이 이곳에서 기도를 올려 3명의 왕자를 얻은 뒤, 그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따라 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방문을 했을 때 젊은 스님께서 산위에 태를 묻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진입로가 없어 가보지는 못했다.
태봉사는 한국불교태고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백제 때 창건되었다고 하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4년 심묘련화(沈妙蓮華)가 3대 독자인 아들 박상래의 장수를 기원하는 산신 기도를 드리다가 삼존석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절을 중창하였다.
1947년 요사를 지었고, 1955년 묘련화의 아들 제공이 주지로 부임하여 절 이름을 태봉사로 정하였다. 1957년 대웅전을 건립하고, 1962년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87년 영산이 대대적인 불사를 시작하여 1992년에 삼성각을 지었고, 1996년에는 한국불교영산회연수원을 설립하였다.
태봉사 대웅전에는 삼존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지정되었다. 중앙이 석가모니불이며, 오른쪽은 문수보살, 왼쪽은 관세음보살상이다. 광배는 212cm 크기이며, 백제 때의 불상으로 예로부터 아들을 점지해 준다고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6~7세기의 중국의 청동거울이 발굴되어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삼존석불은 원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근래에 회분을 덧발라 석고상처럼 보이며, 그 위에 검은색으로 눈, 입 등을 그려놓아 원래의 모습을 알기 힘들다.
낭산 호암리 범산 범바위 암각
삼기 석불사거리에서 718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보면 왼쪽으로 우금마을이 나오는데 마을 안으로 계속가면 낭산초등학교가 나온다. 낭산초등학교가 있는 외돈마을을 지나 들판으로 나있는 농로를 따라 가다보면 들녘 한 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야산이 보인다. 이 야산이 낭산면 호암리 범산이다. 이 범산에는 여러 바위가 널려 있는데 바위마다 알 수 없는 이상한 글자나 기호가 암각 되어 있다.
호랑이 얼굴과 닮았다고 해서 범바위라 부른다.
범바위 암각 글씨는 한자를 닮아 있는데 언제, 누가 새겼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암각화를 연구하고 있는 원광대 교수는 2005년에 “범바위 암각은 내가 10여 년 전에 발견한 것이며 당시에 촌로들로부터 근처에 살았다는 주민이 새긴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범산 맞은편의 폐가에서 생활한 창녕김씨 형제 중 동생이 50년 전에 새긴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범산에는 千, 金, 丁, 田 등과 비슷한 문자가 새겨져있는 바위, ㆍ,≡, ↓등의 부호가 새겨져 있는 바위, 上, 正, 明이 새겨져 있는 바위, 十, 世, 之, 井 등의 한자와 유사한 문자가 암각된 바위, 호랑이 얼굴과 닮은 바위들이 산 여기저기에 있다.
미륵사지 앞 괴무덤
미륵사지 주차장 왼쪽(삼기방향) 끝, 회단을 넘어 산속으로 들어가 보면 괴무덤이라는 무덤자리가 있다. 이 무덤에 대하여 그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옛 미륵사 자리의 지형이 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미륵사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절로써 중들의 수효도 놀랄 만큼 많았다. 그런지라 그 많은 미륵사 중들로 인한 행패도 심하여 그 절 앞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언제나 호된 봉변을 당했는가 하면 자연히 절 가까운 마을들은 그들에 의해 성가심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러하던 차에 중들의 행패가 큰 걸 걱정하던 사람이 이 절을 망하게만 할 수 있다면 그 피해는 없어지겠지 하고 생각한 끝에 미륵사를 에워싼 산의 어구에다 저주하기 위하여 큰 고양이 같이 생긴 물건을 만들어 파묻었다.
본시 쥐와 고양이는 상극이어서 뒤 모양의 미륵사지형에 맞서는 고양이의 형상을 묻은 것이다. 그런 뒤로 절이 차차 망해갔고 따라서 중들의 수효도 줄어들어 행패도 자연히 사라져갔다. 그리하여 얼마가지 않고 미륵사는 사라져버렸다. 고양이 같은 형상을 묻은 데가 괴무덤이다.’(익산시향토지에서 옮겨옴)
화엄동문 암각서
미륵사지 주차장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뒤편 대밭 속에 화엄서원이 있다. 화엄서원은 명종 7년(1552)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익산 최초의 서원이다. 화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게 되면서 이 서원에 속해 있던 토지와 노비들이 한 때 익산향교에 속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화엄서원은 관리하는 사람 없이 대밭과 풀숲에 갇혀있다.
미륵사지 뒤편 북동쪽 산 아래에 한자로 ‘화엄동문(華嚴洞門)’ 네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좌측 하단에는 ‘癸酉年’이라는 글씨도 쓰여 있다. 이 글씨는 ‘화엄서원에 이르는 길목’ 또는 ‘화암동 입구’를 뜻하는 내용으로 파악된다.(익산시향토지에서 옮겨옴)
미륵사지 동편 배수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화엄서원이 나오는데 입구에 이르러 화엄동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미륵사지 옆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길이 있었던 것 같다.
용암(龍巖) 암각바위
금마저수지 뒤 도천마을을 지나 미륵산과 용화산 사이에 있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중간에 계곡이 있는데 바닥은 넓은 바위로 되어 있다. 계곡의 물은 낭산저수지로 흘러가는데 상류에 콘크리트로 만든 사방댐이 있어 평상시 흐르는 물의 양은 매우 적다.
넓은 바위로 되어 있는 계곡을 보면 큰 바위 하나가 내려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바위에는 한자로 용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금은 계곡에 흐르는 물량도 적고, 관리도 안 되어 사람들이 찾지 않고 있지만 예전에는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피서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구룡마을 뜬바위, 대나무 숲 한강 이남 최대 대나무 군락지
금마에서 미륵사지 방향으로 가다가 공수부대를 지나 오른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미륵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구룡마을이 나온다.
구룡마을은 미륵산 등산로가 있고, 음식점과 찻집이 있어 많이들 찾는 곳이지만 요즘은 동네와 주변으로 이어진 둘레 길을 걷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들 온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보면 황토를 넣어 쌓아올린 돌담장과 대나무 심어 만든 담장을 볼 수 있는데, 정감 있고 편안함을 준다.
구룡마을은 대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구룡마을 대나무 숲은 한강이남 최대 대나무 군락지로 면적이 5만㎡가 된다고 한다. 구룡마을 대나무 숲은 드라마 ‘추노’와 영화 ‘최종병기활’ 촬영지이기도 하다.
구룡마을 대나무 숲은 반딧불이 서식지이다. 초여름 밤 대나무 숲 전체에서 수많은 반딧불이가 펼치는 불꽃놀이는 장관이라고 한다.
한강이남 최대 대나무 군락지 구룡마을 대나무 숲
구룡마을 돌담장
구룡마을 보호수 느티나무, 수령이 300년이 넘었다.
구룡마을 왕소나무와 바위
미륵산에서 마을로 이어진 계곡 옆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면 마을 끝, 산자락에 뜬바위가 있다. 뜬바위는 마을 끝, 산자락에 형성된 대나무 숲에 있는데, 이정표 등이 없어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찾기 힘들 것 같다. 마을입구에 표지판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뜬바위는 두 개의 큰바위가 포개져 있는데 사진으로만 본 사람은 그 크기에 놀란다.
뜬바위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큰 바위 두 개가 얹혀 있으면서 기괴한 모양을 연출하고 있는 구룡마을의 뜬바위는 미륵산에 살던 힘센 장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근처에 있는 바위를 발견하고 그걸 집어다가 위에 올려놓아서 생겼다고 한다. 뜬바위는 위어 얹혀 있는 바위가 베를 짜는데 쓰는 북을 닮았다고 하여 ‘북바위’, 커다란 바위가 또 다른 바위에 얹혀 있다고 해서 ‘얹힌바위’, 윗돌과 밑돌이 떠 있다고 하여 ‘뜬바위”라고 불린다.“고 쓰여 있다.
이 바위는 섣달 그믐날 양쪽에서 명주실을 잡고 바위의 접촉 부분을 지나가도 명주실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또 달 밝은 밤이면 천사가 내려와 바위 옆에 옹달샘에서 목욕을 하고 이 바위에 와서 명주를 짰다는 설화도 있다.
또한, 선사시대 유민들이 만경강을 거슬러 올라와 미륵산 근처에 정착하여 살면서 천제단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짙다.(익산향토지 금마면편)
직접 올라가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익산향토지 금마면편에는 “윗돌 상층면 중앙에는 용의 모양이 새겨져 있고 옆에는 길이 70cm, 깊이 7cm 정도의 방형 웅덩이가 파여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종교적인 제사의 흔적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룡마을 정자. 뜬바위를 보고 마을 벗어나면 볼 수 있다. 여행중에 잠시 쉬어가면 좋다. 정자 기둥이 돌로 되어 있다.
황각동 하서대, 유상곡수
금마에서 아리랑고개 길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황각동 마을이 있다. 구룡 마을과 가까이에 있어 근방에 있는 문화유산을 코스로 정해 걸어보면 좋을 것 같다.
황각동 마을은 미륵산과 용화산 사이에 있는 마을 이다. 마을에서 보면 미륵산과 용화산이 양 옆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 진입로를 따라 가다보면 입구에 한자로 황각동(黃閣洞), 하서대(荷鋤臺), 유상곡수(流觴曲水) 글씨가 새겨진 바위와 암반을 볼 수 있다.
글씨가 있는 곳은 전에는 계곡이었는데 마을 진입로 개설과 축대를 쌓아 논을 만들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은 유상곡수가 새겨진 암반이 있는 곳만 계곡이 좁게 남아 있다.
지금의 황각동 계곡은 홍수를 대비한 직강공사를 하여 옛 경치를 찾아볼 수 없지만 ‘익산군지’에는 익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상곡수는 삼을 삼짇날 물에 술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를 짓는 놀이를 말한다. 하서대는 호미를 걸고 쉬는 평평한 곳이나 정자를 말한다. 양반들이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놀이를 하는 곳과 평민들이 농사일을 하다 잠시 쉬는 곳이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서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유상곡수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고 계시는 마을 주민. 유상곡수 암각서 있는 바위 옆으로 축대를 쌓고 논을 만들어 계곡의 원래 경치가 사라졌다.
마을을 찾았을 때 가는 길을 멈추고 황각동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 주민은 “ 지금은 논으로 되어 있지만 계곡 위에 연간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황각동, 하서대, 유상곡수 글씨는 조선 명종 때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으로 낙향한 양곡 소세양이 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 답사 일시 : 2016년 9월 24일(토) 오전 10시~오후 5시
○ 답사 코스 : 익산시청 출발, 남중동 5층석탑, 혜봉원 모현동부도, 황등산업, 삼기연동리 석불사, 태봉사, 미륵사지 괴무덤, 화염동문,
금마 구룡마을 대나무숲, 뜬바위, 낭산 용암 암각바위, 금마 황각동 하서대, 유상곡수
○ 답사 안내 및 해설 : 전창기
○ 사진 촬영 : 김왕중
○ 글 정리 : 손문선
○ 인용자료 : 익산향토사지(익산문화원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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